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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다
장식의 수단에 불과하던 금이 화폐로 사용되기까지 금과 인류의 드라마틱한 문명사를 만나봅니다.
이 책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금으로 본 서양의 역사라고 할만하다. 그리스 신화부터 로마제국을 거쳐 중세와 근대를 지나 금본위제도를 넘어 1971년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될 때까지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기술하고 있다. 서양의 역사를 곁눈질만으로도 이해하게 되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난삽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한 동양의 관점은 별로 기술되지 않았다는 아쉬움도 있다. |
왜 금인가? |
금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자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금을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절대 왕권의 황제나 작은 마을의 촌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염원하는 재화가 바로 금이다. 금은 신비롭다. 금에는 불가사의한 모순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우선 금은 불멸의 존재다. 어떻게 변화시키려 해도 불변의 속성을 가진다. 또한 금은 너무나 유연해서 어떠한 모양으로도 다듬어진다. 가령, 금 1온스로 50마일이나 되는 금사(金絲)를 뽑을 수 있다. 금은 언제나 신성하면서 동시에 세속적이었으며 다른 화폐들과 달리 그 낭만적인 특징을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금속이다. 그러나 금이 소금처럼 풍부했다면 아마도 덜 흥미로운 물건이었을 것이다. |
통화체제의 기원 |
고대 그리스에서는 금은 주로 장식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금이 화폐로 변하는 과정이 금의 역사이다. 금이 화폐로 변신하면서 금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거에는 금의 소유가 왕의 특권이었으나 화폐로 통용되면서 금은 세금으로도 지불되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BC 700년 경 리디아인들이 금화와 은화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크로이소스 왕은 복본위제의 통화시스템을 확립하였다. 그 이후 화폐로서의 금의 역사는 금과 은의 투쟁의 역사다. 크로이소스에 의해서 역사상 세계 최초의 제국 통화가 생긴 것이다. 그의 업적은 오늘날 유럽에서 유로화가 통용된 것과 맞먹는다. 즉, 유로화는 크로이소스가 완성시켰던 업적을 재현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금과 은 그리고 스페인의 역설 |
저자 번스타인은 신대륙에서 엄청나게 유입된 금과 은이 스페인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했는가 하는 오랜 경제사적인 질문에 흥미로운 대답을 내어놓는다. 금은 스페인으로 대량 유입되었지만 신속하게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경제사회 구조는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경직적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생산보다 소비에 훨씬 익숙했으며 소비 심리는 부추겨졌고 동시에 생산 의욕은 떨어졌다. 또한 이때 전쟁 등으로 해외 채무는 급속히 늘어났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콜럼버스의 해인 1492년 스페인은 결정적인 경제적 실책을 범했다는 것이다. 유태인과 이슬람교도를 스페인에서 추방해버린 것이다. 유태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숙련된 행정관리들이고 사업가들이었다. 특히 이슬람교도들은 무역에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상인계급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즉 금과 은은 스페인 경제에 전혀 연결되지 않은 채 생산적인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
금과 인플레이션 |
16세기의 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가리켜 물가혁명이라고 저자는 부른다.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험도 그것을 설명해주는 이론도 관리를 위한 정책도 없었다.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대부분의 국가는 엄청난 재정적자에 허덕였고 정부의 재정충당 방법은 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해서 돈의 공급을 증가키는 것이었다. 즉, 통화의 타락(de-basement)이라는 것이다. 인플레이션 원인에 대한 해답은 돈의 공급량이 반드시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놀랍게도 당시 장 보댕(Jean Bodin)의 연구서에서 발견된다. 보댕은 지금의 통화주의(monetarism)의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
경제학자 아이작 뉴턴 |
뉴턴이 런던 조폐국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그에 관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다. 뉴턴은 연금술의 신봉자였다.(케인스는 뉴턴을 최후의 마술사였고 최후의 수메르인이었다고 묘사한 바 있다.) 그는 조폐국 감사를 거쳐 조폐국장이 된다. 뉴턴은 기니(1663년에 만들어진 금화)의 가치가 너무 높아 21실링으로 낮출 것을 재무부에 권고했고, 1717년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21실링과 상이한 가치로 금화를 거래하는 것은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뉴턴의 예측은 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저자는 뉴턴이 공공정책을 위한 경제예측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한 역사상 최초의 공무원이었다고 주장한다. 뉴턴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여전히 그러하듯 미래가 과거와 똑같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뉴턴은 금의 가격보다는 사과의 움직임을 예측하는데 훨씬 뛰어났다. 경제학은 뉴턴 같은 천재에게도 물리학보다는 훨씬 어려운 학문이었음이 분명하다! |
오즈의 마법사와 1873년의 화폐주조법 그리고 금본위제도 |
1870년대까지 미국은 금과 은의 복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폐주조법으로 복본위제는 완전히 끝장나버리게 되었다. 이 법에는 기준 은화가 포함되지 않았고 은은 화폐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저자 번스타인은 1900년에 출간된 ‘오즈의 마법사’는 금본위제를 반대하고 은본위제를 찬성하는 우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오즈는 온스의 악자이며, 서쪽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은 은화의 무한 제조를 찬성하는 운동이며, 주인공 도로시는 금융계에 맞서는 힘없는 사람들이고, 에메랄드시티는 워싱턴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당시 화폐제도가 쟁점이 되었던 미국 역사상 유일한 선거에서 은본위제도를 주장한 민주당의 윌리엄 브라이언은 그의 장려한 연설에도 불구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미국의 금본위주의자 존 셔먼(Sherman)은 금으로 교환될 수 없는 화폐는 국가적 불명예라고 선언했다. 2차 대전 후 확립된 브레튼우드 체제는 금 대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국제금융체제다. 그런데 미국의 지속적인 소비증가와 월남전 등의 전비 지출로 미국의 금 준비금은 고갈되어갔고 달러 자체가 누더기가 되었다. 닉슨은 1971년 신경제정책을 발표한다, 그것은 금태환 정지와 임금과 물가의 동결이라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드디어 ‘황금 족쇄’의 마지막 흔적은 이 때 폐기되었다. |
황금을 둘러싼 세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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