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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상
빛이 암흑의 공포를 앗아가듯, 불안의 실체를 아는 순간 불안은 창조의 힘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불확실’의 실체를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아는 한 기업체의 CEO는 아침마다 ‘스릴’을 느낀다고 해서 우리를 웃음 반, 씁쓸함 반으로 만든 적이 있다. 집에서 신문 두 개를 보는데 아침 일찍 현관문 앞에 놓인 신문을 집으러 가는 그 짧은 시간이 스릴 만점이라는 것이다. 이 스릴은 언제나 대개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별 일 없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일이 신문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하고 있을까?‘ 별 일 없으면 안심이지만, 반으로 접혀 있는 신문 1면에 큰 글자라도 눈에 띄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행히 회사와 관련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제는 워낙 세계적인 변수가 많은 상황이라 그래도 안심이 안돼 죽 한 번 읽어야 마음이 놓인다. 그는 이 스릴 얘기를 너털웃음으로 마무리했고 우리도 웃음으로 화답했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신들도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날 우리가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은 그 CEO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 모두가 불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고 나면 여기저기서 뭔가가 터지고 각종 언론매체들은 그 큰 일을 리얼하게 중계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궁금해 보기는 하지만 보고 나면 이미 우리는 이전과 같지 않다. 그런 사건 사고가 주는 불안에 전염돼 혈압과 맥박부터 마음까지 괜히 흔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왜 불안한지 구체적으로 모른다. 아니, 우리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왜? 불안하다는 것은 강한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결격사유가 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노심초사’ 정도로만 우리 안의 불안을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정도만 다를 뿐 다들 살얼음판 같은 불안한 세상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불안 규명서 |
최근 출간된 ‘불확실한 세상’은 바로 이런 우리들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되고 있는지를 한국인의 시각에서, 그리고 한국인을 위해 규명한 책이다. 이제는 유명해진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의 저서인 ‘불안’에서 삶에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불안을 근본적으로 분석하고, 독일의 심리분석가인 프리츠 리만이 ‘불안의 심리’에서 말 그대로 심리적으로 불안을 분석했다면 이 책은 국내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10명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바라본 한국인을 위한, 그리고 한국인에 의한 불안 규명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정치, 경제, 문화, 지구,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라는 다섯 개 장(章)에 각각 국내와 국제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국내와 국외를 바라보도록 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정치와 경제 편만 읽어도 불안이 어디서 오고 있고, 증폭되고 있는지를 대략 알 수 있다. |
‘한국인은 행복한가?’, ‘그렇지 않을 것’ |
오랫동안 국내 정치분야에서 컨설팅을 해오고 있는 박성민(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대뜸 ‘한국인은 행복한가?’하고 묻는다. 그런 다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갖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기 방문을 누가 잠그느냐’는 정말이지 너무나 중요한 까닭이다. 내가 잠그면 나를 위한 게 되지만 남이 잠그면 대개 감금당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삶에 대한 결정권이 별로 없다. 결정권이 없다는 것은 자유 대신 타율과 구속 안에 있다는 의미다. 왜 이런 ‘불행’한 상황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가? 박성민 대표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에서 원인을 찾는다. 1945년 우리는 갑자기 해방이 됐다. 우리 힘이 아니었다. 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따로 수립됐고, 50년에는 전쟁이 터져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됐다. 이후 5.16과 유신, 그리고 12.12가 발생했고, 이런 정변에 버금가는 정권교체가 이어지고 있다. 한 원로 정치인의 표현대로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려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원점에서 모든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축적한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나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물론 다시 시작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문제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면 안 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래야 중간이나 간다. 또 6개월 뒤에, 1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삶에 대한 안전을 지금 확보해둬야 한다. 계획과 순서, 그리고 질서가 수시로, 틈만 나면 사라지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과연 법과 제도가 공정하고 예측 가능하게 적용되고 지속될 수 있을까? 신뢰가 없어지면 사회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결국에는 무너지게 된다. 다행히 우리는 붕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래알이 아니라고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종친회, 동창회, 향우회가 온 나라를 ‘접수’하는 건 믿을 수가 없으니 결국 혈연과 학연, 지연에 기대는 것이다. 정치란 불확실을 줄여서 국민과 시민이 확실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본분인데 되려 우리의 삶과 사회를 불확실성이라는 수렁으로 빠트리고 있는 주범이 된 것이다. 정부 수립 이래 우리나라에는 10년 이상 같은 이름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정당이 단 3개에 불과하다. 그러면 국제정치는 어떤가? 누구나 잘 통제되고 있다고 하지만 현재 공식, 비공식으로 핵무기를 소유한 9개 나라에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2만7000개의 핵폭탄이 있고 그 중 러시아는 1만5000개(5,700개 배치), 미국은 9,600개(5,700개 배치)를 갖고 있다. 몇 개만 터져도 지구가 46억년 전으로 돌아가는 핵폭탄 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핵폭탄만큼 위력적인 ‘또 다른 핵폭탄’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에 일어난 금융위기가 좋은 예이다. 이 금융위기는 핵폭탄도 아니면서 핵폭탄 이상의 ‘위력’을 발휘해 온 지구를 떨게 했다.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오래 전 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긍정적인 힘이자 원동력이라고 했던 ‘야성적 충동’이 상식을 넘어 탐욕이 된 결과다. 예전에는 한 나라에 그쳤을 경제 위기도 세계화라는 네트워크를 타고 순식간에 출렁거린다.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연결되는 것까지는 좋은데, 좋지 못한 것까지 순식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마치 전기가 들어오면 온 마을이 밝아져서 좋은데, 고장이 나면 온 마을이 순식간에 암흑 천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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