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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커스
은행업 100년 역사를 통해 밝혀지는 은행의 진실. 금융 저널리스트인 마틴 메이어의 말을 통해 공익와 탐욕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은행을 만나봅니다.
모든 일엔 원리원칙이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자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잘한 일엔 칭찬을, 잘못한 것엔 책임을 지는 게 옳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질서,기본규범이 깨진다. 결국엔 상관없는 사람들에게조차 피해와 혼란을 준다. 경제(투자)학의 기초철학도 똑같다. 시장대접은 공평하다. 한만큼 받는다. 경영실패라면 회사든 CEO든 둘 중 하나는 청산,퇴진하는 게 맞다. 투자라면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잖아 문제다. 게임의 룰을 깬 반칙이다. 80년대 이후 집권한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현재시점에선 그 장본인으로 은행을 뺄 수 없다. 메릴린치,리먼브라더스,베어스턴스 등이 경영실패로 간판을 내렸지만, 이는 사실상 세발의 피다. 이들을 포함한 다른 투자은행엔 천문학적인 국민혈세가 투입돼서다. 국민경제의 피해최소라는 대의명문(?)을 내세워 죽이기보단 살리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다. |
은행의 모럴해저드는 상식을 비켜선지 오래다. 잘못한 것 치고 얼굴이 너무 두꺼워 탈이다. 지탄을 받아도 ‘쓱’ 웃고는 끝이다. 일단 경영책임부터 보자. 주지하듯 이번 금융쇼크의 후폭풍은 한국을 비켜서지 않았다. 미국형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한 결과 충격도 컸다(일본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장 은행이 위험해졌다. 월가 실패자들처럼 주도면밀한 상황분석 없이 과도한 외형경쟁과 부족한 위험관리가 횡행했던 결과다. 그나마 참여정부 때의 엄격한 대출규제 탓에 부동산발 금융위기는 방어했으니 다행이면 다행이다. 어쨌든 온 나라에 패닉이 몰려왔다. 정부도 나섰다. 외신칭찬처럼 대규모의 선제적 저지선을 연거푸 발표했다. 무엇보다 은행을 살려 실물경제로의 충격을 차단하는 게 우선순서였다. 은행에 실탄(자금공급)과 함께 방패(지급보증)까지 마련해줬다. 덕분에 큰 고비는 넘겼다. 문제는 그 후다. 부실은행의 경영책임은 생략됐다. 거금의 혈세가 들어갔는데도 은행장은 고개는 뻣뻣했다. 뒷돈을 대준 국민들로선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
이 책 『뱅커스』의 부제는 ‘탐욕과 공익의 두 얼굴’이다. 작금의 은행행태를 보면 무릎을 칠만큼 잘 지어진 타이틀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은행권 모럴해저드의 핵심뿌리도 바로 공존하는 은행특유의 공익성과 탐욕성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를 ‘야누스의 두 얼굴’로 표현한다. 상황이 좋을 땐 자본주의 선두주자답게 탐욕을 극대화하는 대신 위기상황 땐 공익성을 은근슬쩍 강조, “우리를 죽일 순 없다”며 세금을 구걸하는 이율배반적 행위 때문이다. 은행의 모럴해저드 역사는 오래됐다. 원래 은행은 철저히 공익성을 추구했다. 은행본업은 대부(貸付)기능이다. 원하는 즉시 맡긴 돈을 찾을 수 있다(화폐공급원인 정부의 보증신뢰)는 예금자의 믿음은 은행업을 영위하는 근간이었다. 또 그 돈은 철저히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함직한 사람들에게 한정돼 대출됐다. 은행은 그때 이자를 받는 게 수익모델의 전부였다. 은행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창업을 하면 지역사회는 환영했고, 은행은 기꺼이 대출해줬다. 맡기는 이나 빌리는 이나 모두 은행의 고객들이기 때문이다. 양자모두 궁극적으로 사회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모아들인 돈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적절히 공급하는 은행가는 존경을 받는 게 마땅했다. 경제발전을 위한 선순환 메커니즘의 첫 단추를 이들이 끼웠기 때문이다. |
하지만 탐욕이 문제였다. 19~20세기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은행입지는 급성장했다. 기업가정신의 상인들이 증가하면서 시장엔 늘 자본이 모자랐다. 필요한 돈은 은행에 있었고, 은행가는 또 대출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레닌주의적 사고로 보면 은행은 경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정과 반칙의 싹은 틜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은행가는 고리대금에 예금자 돈을 써놓고도 자기한테 고마워하라 한다”며 “돈벌이 술수는 그렇다 쳐도 그 허세가 싫다”는 한 사상가 말을 빌려 도덕적해이의 근원을 질타한다. 하다못해 이발사도 자격증이 필요한데 누구나 될 수 있는 은행가는 속물근성이 다분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속물근성을 자극한 또 다른 원인은 정부보증에 있다. 앞서 설명한 위기상황의 종국에 국민혈세를 대줄 수밖에 없는 구조의 역사적 탄생이다. 정부가 화폐출처인 까닭에 실질적으로 은행은 정부 돈을 빌려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직간접적인 승인도 개입됐다. 따라서 20세기 초반 은행은 특별하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은행도 상거래의 생명은 모험일지언정 최소한 은행업의 생명은 소심한 조심성으로 표현할 만큼 고객과의 신뢰고수를 중시했다. 때문에 정부보증을 포함해 보통기업과는 다른 잣대로 상당한 특별대우를 해줬다. 비금융사가 은행을 소유하거나, 은행이 이종기업을 갖는 걸 금지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힘을 얻었다. 금산분리 원칙이다. |
인간의 무한한 속물근성과 퇴출불사의 제도적 안전망은 은행가를 점차 버려놓았다. 은행경영진은 도시에서 제일 높은 마천루의 넓은 사무실에 앉아 주위사람들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은행가의 이미지는 허풍스럽고 탐욕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남의 돈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마치 자기가 수혜를 베푸는 것처럼 허세를 떨어서다. 짧은 근무시간도 비난받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없었던 과거의 오전 10시~오후 3시 근무시간을 그대로 고수하는 걸 보고 저자는 “은행가들이 바쁘다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또 안전한 대기업에만 대출이 진행됐고, 중소기업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초심이 사라진 자리엔 욕심이 들어섰다. 욕심은 또 외부환경의 변화흐름에 기꺼이 올라탔다. 사실 올라탔다란 능동적 표현보단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 차원의 절실함에 가까울 수도 있다. 구체적으론 1960년대 이후부터다.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에 대한 피로가 쌓이면서 새로운 작동모델을 요구 받던 시대다. 요컨대 자유,개방화 등 신자유주의적 국가운용 철학의 도래다. 당장 금융서비스의 자유화가 일기 시작했다. 원래 은행업은 1830~40년대를 빼면 신규진출이 사실상 봉쇄됐었다. 개업을 위해선 정부허가가 필요했다. 경제에 미치는 여파가 큰 까닭에 실패해도 은행업에서 발을 빼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은행업에 파산이란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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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추구의 최대헛발은 은행의 파생상품 도전에서 찾을 수 있다. 무위험 수익거래를 이론적으로 증명해낸 블랙숄즈 모형이 개발된 70년대 이후 선물,옵션매매는 급성장했다. 은행이 군침을 삼킨 건 물론이다. 경쟁격화로 수익확보에 민감해진 결과다. 압권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신(新)금융기법에 대한 열광이다. 예전엔 금고에 쌓아둔 현금만으로 대출했다면 이젠 신용이란 보이지 않는 자산을 내세워 근거조차 희박한 신종증권을 수익원으로 삼고 있다. 돈만 되면 뭐든 탐욕스럽게 개입해 수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은행특유의 안정성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여수신수익에서 수수료수익으로 경영전략은 수정됐다. 그 결과가 컴퓨터가 만들어낸 파생상품의 나쁜 본보기다. 저자는 가장 방대한 분량의 2장을 통해 은행 100년의 발자취를 살피며 이 과정을 세밀하게 설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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