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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우리 땅의 건축물 답사 여행을 통해서 역사와 철학, 그리고 예술이 함께 담겨 있는 인문학 정신의 정수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자신을 경영한다. 자기 경영은 가장 좁은 범위의 경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경영이다.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까지도 경영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조직이나 기업을 경영하게 된다. 이쯤 되면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경영의 대상으로 추가된다. 대표적인 것이 ‘시간’이다. 시간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자 요소다. 그러면 시간과 함께 인간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차원인 ‘공간’은? |
‘공간의 경영’은 부동산을 관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자기 스스로 세운 지향점과 가치관으로 자기를 둘러싼 공간을 효율적이고 의미있게 디자인하는 정도가 되어야 공간을 경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분야가 쪼개지고 전문화한 현대사회에서, 자기 공간을 스스로 만들고 경영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은 건축가가 하지만, 건축가 자신도 자기가 만들어낸 공간에 살며 공간을 경영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미감과 남의 철학에 의지해 만들어진 공간을 소유, 또는 배급받아 그 안에서 살고 일하게 된다. 시간과 달리 공간은 직접 경영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현대인들은 ‘건축본능’을 거세당하고 살아가는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를 보자. 양반이든 평민이든 자기 집은 자기가 지었다. 양반은 자기 손으로 노동을 하지는 않았어도 자기가 집의 모습과 공간 배치를 구상해 직접 디자인했다. 현대 건축가와 똑같은 작업을 한 것이다.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을 직접 설계했고, 양산보는 담양에 소쇄원을 짓는데 평생을 바쳤다. 양반들만이 아니었다. 평민들은 자기 집 모양을 자기가 구상하는 것은 물론 자기가 직접 몸을 놀려 집을 지었다. 양반들처럼 너른 땅과 집을 꾸밀 재력이 없었을 뿐, 오히려 더욱 건축적인 삶을 살았다. |
이렇게 옛 건물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건물들과 달리 실제 집이란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갈 사람들의 철학과 관점이 집에 반영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대 한국의 집들은 집 주인이 아니라 누가 들어올지 알 필요도 없는 남이 지어서 돈만 주면 누구에게나 판다. 살림집이건 사무실이건 마찬가지다. 건물에 담겼던 ‘공간 경영의 정신’은 사라졌고, 건축가의 의도가 담긴 건축물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지은 ‘건물’들이 대부분이 되어버렸다. | |
우리 한옥은 다른 외국 전통건축물들보다도 집 주인이 공간 경영의 건축 정신을 직접 구현하는 경향이 강한 건축이다. 옛 사람들이 건축물에 추구했던 그 공간 경영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문학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평론가 이용재의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은 우리 건축에 배어있는 이런 인문학 정신세계와 공간 경영의 철학을 경쾌하게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리고 인문학이란 결코 고아하고 어려운 정신세계가 아니라 합리적이며 인간적인 보편의 감성이란 것을 가르쳐준다. 건축전문잡지 편집장을 지낸 지은이는 건축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뒤 독특하게도 택시 기사로 변신했던 인물이다. 자기 천직은 역시 건축 글쓰기란 것을 깨닫고 언제라도 건축 답사를 다닐 수 있는 직업으로 택시 기사를 골랐다. 이후 딸을 데리고 건축 답사를 다닌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 호평을 받았고, 덕분에 지금은 택시 기사를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 | |
이 책 역시 지은이가 딸과 인문학적 건축물들을 답사한 이야기다. 그가 10대 외동딸을 데리고 건축답사를 다니는 것은 신념에 가까운 소신 때문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탄탄하게 갖춘 사람은 뭘 하고 살아도 잘 살며, 특히 고난이 닥쳤을 때도 잘 극복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 이 중요한 인문학적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건축이라는 것이다. 딸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줘야 하므로 지은이는 결코 현학적으로 어려운 문자를 쓰는 법 없이 쉽게 설명하는데 모든 공력을 쏟아 붓는다. 인문학과 건축의 가치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런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만 짚어 설명하지 않고 직접 보여주고자 한다. 어떤 건물을 골라 찾아갔느냐에 이미 자신의 인문학적 철학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건물에 대해서는 가볍고 부담없이, 옛날 이야기하듯 풀어주는 것이다. 건축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건축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거의 나오지 않는 특이한 건축책이다. |
지은이는 인문학적 건물들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건물들은 하나도 꼽지 않았다. 실제 건축 전문가들이 높게 평가하는 건물들, 또는 건축에 관심이 전혀 없어도 가보면 좋은 건물들을 주로 고른 점이 이 책 최고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소쇄원과 식영정 같은 유명한 문화재 건물부터 이지당과 초간정, 거연정 같은 정자들, 건축전공자들이 반드시 답사하는 김동수 가옥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살림집들, 건축사적 의미를 떠난 건물들인 김남주 시인 생가와 허난설헌 생가 등이 우리 시대의 인문학 건축물로 꼽혔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일반인들이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는 강화성공회성당, 전주의 전동성당, 건축가 승효상의 돌마루 공소 같은 종교 건물들, 그리고 현대 한옥건축의 대표작인 한옥호텔 라궁 같은 건물들을 인문학적 건축물로 소개하는 부분이다.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소재들을 ‘구라’에 가까운 뒷이야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
그러나 소재보다 더 독특한 것이 있다면 지은이의 문체다. 이 책은 집어 드는 순간 다른 책과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극단적인 단문에 거의 매번 조크와 비유를 곁들여 농반진반 읽는 사람을 가지고 논다. 그래서 처음에는 낯설거나 또는 거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문체 덕분에 건축, 인문학, 역사 같은 딱딱하기 짝이 없는 추상적 주제들에 대한 거부감과 고정관념을 벗어나, 즐겁게 이야기 한 판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건축과 인문학이란 부담스런 단어들을 잠시 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볼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
글: 구본준 (<한겨레>기획취재팀장, http://blog.hani.co.kr/bonb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