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영화,
그들이 구축해 온 세계에 관한 생각
『모든 위대한 감독들은 모두 단편영화에서 시작하였다.
단편영화는 거짓말을 늘어놓기에는 너무 짧아서
언제나 영화란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
- 빔 벤더스(영화감독) -
Ⅰ. 序
영화가 탄생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건 메이저 영화, 즉 주류 영화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낯설어하고 영화광들만 이 알고 있는 독립 영화, 우리에겐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립 영화 또한 영화의 한 부분이며, 시대가 지날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처음으로 독립 영화가 탄생된 곳은 미국 영화였다. 프랑스의 아방 가르드 영화와 영국의 앵그리운동 후의 영화 경향, 이탈리아 영화, 독일 영화를 거쳐 오면서, 독립 영화의 싹은 계속 커 오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이 미국에서의 B급영화의 경향에 영향을 미쳐 오늘날의 인디영화문화가 싹트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제 3 세계의 영화 와 아시아 영화들이 더해져, 독립 영화란 이름을 얻게 된다. 사실 독 립 영화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 영향 이 확대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Ⅱ. 독립 영화의 태동
1. 독립 영화의 정의
독립 영화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위해선 우선 독립 영화가 과연 어디로부터 ‘독립’하였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자본'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영화는 특성상 제작 과정에서 많은 자본 이 필요하다. 그리고 투입한 자본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새로운 자본을 재생산 해야 하기 때문에 영화는 상업성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전제에서는 작가 나름의 사상이나, 개성을 발휘하 는데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물론 독립 영화라도 자본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본에 크게 예 속되지 않음으로서 보다 작가 나름의 개성과 메세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을 가지고 독립 영화 를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적은 예산으로 쏟아지는 비디오 영화가 다수이고, 꽤 많은 돈을 들인 영화라고 해도 개인의 자본이 쓰이는 경우 가 많다. 따라서 또 다른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독립 영화는 '사상의 억압'으로부터 독립한 영화이다. 한 때, 우리나라는 '공륜'이라는 검열제도(심의제라고 말은 하지만)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진보적이거나 체제비판적이어서는 안되었다. 따라서 많은 진보적 제작자들이 '사상의 억압', 구 체적으로는 '공륜'으로부터 독립하여 영화를 제작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식적 배급 망을 가질 수 없었고 따 라서 대중들에게 접근하기보다는 대학가나 극소수의 영화매니아들을 통해 음성적 으로 배급되었다.
독립 영화의 정의를 한마디로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굳이 그럴 필 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영화가 독립 영화다 아니다.”가 아니라, 왜 “영 화들이 '제도권'으로부터 독립하려 했는가"이기 때문 이다.
독립 영화라는 명칭은 미국의 인디필름(indi-pendent film)에서 유래한다. 미국의 독립 영화는 여러 종류의 영화를 지칭하는 동음이의어이다. 대자본과 대 규모시스템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소자본 작가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밖에 실험 영화, 전위영화, 언더그라운드 영화,페미 니즘 영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독립 영화라도 제작과 배급 모두가 반할리우드적인 영화가 있는가 하면, 제작은 할리우드 외곽에서 배급은 메이저 영화사의 라인을 타는 영화들이 있다. 하지만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그다지 현실 적이지 않다. 독립 영화의 대안적인 미학은 종종 식상해질대로 식상해진 할리우 드영화의 자양분으로 흡수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는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예술작 품들이 그 실험 정신은 퇴색한 채 박물관에 박제 화되어 걸려 있다는 사실, 에이 젠슈타인의 저 혁명적인 몽타쥬기법이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에서 밥먹듯 사용된 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독립 영화는 메이저 영화사에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아니되, 할리우드 영화와 공생하는 그런 영화들로 정리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독립 영화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의 경우 미국의 독립 영화 개념을 그대로 차용하기 어렵다. 첫째, 미국의 독립 영화는 할리우드 메이 저 영화와 대비되는 개념인데, 우리는 할리우드에 상응할 만한 메이저회사가 아 예 없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규정된 독점영화업자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제작보다 는 외화 수입에 더 의존하는 형편이며, 자본의 규모도 너무나 영세하다. 둘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80년대의 독립 영화들은 사실 미국의 얼터너티브영화(내용 과 미학에 있어 모두 대안적이며, 배급 역시 자체적으로 소화하는 영화 )에 비교 할 수는 있지만, 작가주의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셋째, 독립 영화가 제도권내에 서 존재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없었다. 지금은 사전심의제인 검열제가 사라지긴 했으나, 그와 비슷한 등급제가 존속함으로서 한국의 독립 영화는 미국과는 맥락 을 달리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독립 영화를 정의하는 입장들은 다음과 같다.
"독립 영화의 조건을 충족하는 독립 영화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서 80년대에나 찾을 수 있었을 뿐 90년대의 독립 영화들은 진정한 독립 영화가 아니다."
-강한섭.「내가 생각하는 독립 영화」 격월간 <영화 1993.9월호>
이밖에도 이 입장은 독립 영화 단체들과 영화써클이 제작한 작품들의 완성도 가 떨어진다는 점 과 제도권인 충무로 제작 환경의 열악함을 근거로 들며, 현재 는 독립 영화와 메이저 영화를 가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논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 밑에는 독립 영화를 미국의 작가 주의 영화나, 특수한 상황에서 의 운동권 영화로만 국한시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에 반해 독립 영화의 가능 성에 적극적으로 눈을 돌려 정의를 내리는 입장 이 있다. 94년 고려대 영화연구 회 <돌빛> 자료집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독립 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의미로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 독립 영화 작가 인 장기철 감독과 같이 그 무엇을 자본과 검열로 이해하는 경 우와 35밀리 장편 상업영화에 대한 16밀리 이하의 필름 또는 비디오 혹은 다른 영상 매체로 만든 단편영화에 광범위하게 독립 영화의 명칭을 부여하는 경우이다 ."
이들은 독립 영화를 제작하는 입장에 서 있는 터에, 보다 적극적이고 대안적 으로 독립 영화를 바라본다. 이들의 정리에 따르면, 단편영화는 독립 영화일 수 밖에 없고, 독립 영화이어야만 하며, 나아가 대안적 영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위의 두 가지 입장 이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견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의 견해는 독립 영화가 처한 현실을 언급한 것이고, 두 번 째 입장은 독립 영화는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독립 영화의 정의를 내리면, 반자본, 반검열, 반 지배이데올로기적 영화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같은 개념은 우리나라의 독립영화 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이후 전망을 모색하는 과정에 서 더욱 구체화 되리라 생각된다.
2. 독립 영화의 배경
일반적으로 독립 영화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상호모순적인 양면성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영화는 19세기말 과학기술의 발전의 결과물로서 발명되어 자본주의의 성장,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해 온 인류문화사의 가장 훌륭한 오락상품이 되어 왔다. 영화제작자들에게 영화는 황금알을 낳는 상 품이었으며 영화는 '산업'으로서 폭발적인 성장 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또 한편 영화는 '제 7의 예술'이라고 불리우며 기존의 예술장르의 한 계를 극복할 수 있 는 종합예술로 그 위치를 부여받았다. 모두들 영화는 감독의 예술로 규정했으며 카메라는 작가인 감독의 만년필로서 비유되기도 했다. 도식화시켜서 본다면 영화 는 영화제작자들에게는 하나의 상품이요, 영화감독들에게는 하나의 예술인 것이 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제작자와 영화감독의 관계가 '고용과 피고용‘ 의 관계임을 생각해 본다면 상품과 예술 사이에서 영화가 어느 쪽에 무게중심이 더 실려 왔는가에 대한 해답은 아주 명확하게 보여진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 이후 이러한 양자의 무게중심 사이를 비집고 나온 소위 'B급영화'는 지금까지 할리우드영화를 지배 해 온 메이저들의 자본의 논리에 따른 부산물이다. 대공황 이후 TV의 등장과 함 께 극장 관객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이에 메이저 영화사들은 같은 가격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동시 상영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한 편은 대규모 예산을 들여 만든 고급 영화로, 또 한 편은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만든 질 낮은 싸구려 영화로 책정하였다.
이러한 싸구려영화를 소위 'B급영화'라 불렀으며 저예산으로 무명의 배우와 무명의 감독을 기용하여 단기간내에 마구 제작되었다. 그 결과 형식미와 내용면 모두에서 질이 낮은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감독들의 입장에서는 제작자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감독의 창의성과 개성, 재능을 드러내주는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영화들은 프랑스 작가주의 영화의 옹호자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 작가주의 옹호자들은 헐리우드영화를 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그중 감독의 개인적인 주관과 창의성이 독특하게 반영된 특이한 영화들을 발견하였고 그 것에 열광하였다. 그들은 할리우드의 B급영화들로부터 영화가 영화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으며 그들이 주목한 영화적 독창성을 당대의 프랑스 영화 현 실에 투여하였고 그 결과 바쟁, 트뤼포, 고다르 등이 중심이 되어 오늘날 작가 이론의 요람이 된 ‘까이에 뒤 시네마’를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미국영 화사에 있어서의 1960년대말은 새로운 분기점이 된다. 20세기 미국사에 있어서 그 어느 시기보다 사회적으로 큰 변동과 변혁을 겪은 이 시기에 반문화운동, 히 피의 등장, 신좌익 운동, 반전 학생운동, 교육개혁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을 접하 게된다.
이러한 현대 미국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영화계의 경우도 새롭게 등장한 젊 은 감독과 가치관의 변화에 직면해 있는 관객의 요구를 수렴하기 위해 '새로운 영화(NEW CINEMA)'의 탄생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9년 데니스 호퍼 감 독의 작품은 이러한 ‘아메리카 뉴 시네마‘의 대표작이 되었다. 피터 폰다가 제 작했고 배급은 컬럼비아 영화사에 의해 되었지만 제작이 인디펜던트 자본이었다 는 점에서, 이 영화의 성공은 미국 인디영화의 흐름을 형성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독립 영화는 산업적 측면에서 할리우드 B급영화의 영향, 영화의 내용적 측면에서 정치적으로는 진보적, 소재의 제한을 거부하는 작가주의적 관점을 취하 고 있다. 결국 독립 영화는 영화의 상호 모순적인 2가지 기능(상품과 예술)속에 서 자본의 종속성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며 자생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독립 영화를 단순히 상업영화의 대립개념으로 정의 하기는 곤란하다. 그것은 독립 영화 역시 상업적 유통구조 속에서 유통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 영화는 자본의 예속성에서 벗어난 독립형태라고 규 정하기보다는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포괄적 환경을 고려하여 상대적인 '독립'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즉 "자본과 정치적 권력, 사회적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영화"정도로 의미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Ⅲ. 한국의 독립 영화의 흐름
1. 한국 독립 영화
(1) 한국 독립 영화에 대해서
한국독립영화의 정의 단편영화 (=대학영화), 독립 영화, 작은 영화, 열린 영화, 민중영화, 민족 영화, 비제도권 (충무로 외부) 영화... 지금 우리가 "독립 영화" 라 부르는 영화들을 한 때는 이렇게 불렀다. 그것은 시대적 흐름에 따른 "독립 영화 성격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한편, 지금의 독립 영화는 단편영화, 민 중영화, 민족영화 의 개념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 제작 규모면에서 단편영화가 독립 영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영화의 길이로 독립 영화 를 구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초기에 독립 영화들이 사회 참여적이었기 때 문에 민중, 민족영화라 불렸으나 지금은 독립 영화의 성격이 다양화된 만큼 독립 영화를 민중영화라 볼 수는 없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독립 영화"는 다른 나라의 독립 영화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미국의 독립 영화와는 제작 경비의 규모는 물론이고 그 배급 경로에서 큰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일본의 자주영화와도 다른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70년대 소수 영화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라틴 아메리카를 위시한 전투적인 영화들과도 다 른 것이다. 한국의 독립 영화는 한국적인 토양과 외부의 영화적 토양 위에서 생 성되었다. 한국적인 토양이란 "민중", "민주", "민족" 이라는 삼민정신을 바탕으 로 한 사회지향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외부의 영화적 토양이란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의 사회 비판적인 영화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들, 그리고 미국, 일본 등 지에서 진행되었던 독립적인 제작 방식과 상영 방식에 대한 관심을 말한다. 이렇 게 8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여러 독립 영화 제작자들의 지향점과 영화적 경향은 다양했다.
한국독립영화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우선 대략 80년대부터 현재까 지를 몇 시기로 나눠서 본다면, 각 시기마다 독립 영화를 규정하는 잣대가 조금 씩 달랐음을 알 수 있다. 80년대 초반에는 충무로 영화에 반대하면서 서구 실험 영화나 단편 영화들을 어느 정도 모델로 삼았고 이는 정치적 억압, 영화적 토양 의 미성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음으로 80년대후반, 대학 영화 집단이 조악한 형태이긴 했지만, 이른바 운동권 영화들을 양산했던 시기에서부터 90년대 초반, 즉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대중들이 폭넓은 문화적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에 독립 영화는 곧 반체제 저항 영화를 일컫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이후 비록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많은 한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문화적 영향은 이전의 획일적이거나 미숙한 독립 영화의 탈피를 요구했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영화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영화제용 영화와 극히 사적인 영화, 필름과 비디오 매체 예술 영화와 실험 영화, 장르 답습의 축소판 상업 영화와 변형된 운동권 영화의 혼재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사이에 공통의 약속이 있다면 서로의 앞길에 대해 서로 질문하지 않는 는 것이며, 공통의 목표가 있다면 외국 영화에 대항하는 한국 영화의 제작이라는 큰 목표와 새롭고 독자적인 제작과 유통 경로를 가지는 작은 목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독립 영화는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 이렇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우리 독립 영화의 의미도 달랐다. 그러나 공통적으 로 한국독립영화는 그 성격에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번째는 "거대 자본 으로부터의 독립" 이라는 것이다. 보통 충무로 영화들은 거대 자본을 끌여들여 영화를 만드는데 반해 이들 독립 영화는 감독 자신이 자본을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95년에 관객들로부터의 모금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낮은 목소리>도 독립 영화라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지배 이데올로기 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의 속성과도 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 는데, 자본이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독립 영화는 자신들의 독립된 목소리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거대자본이 투자된 영화들은 결국 흥행성을 담보해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 만큼 종속되어 버린다. 충무로 내에 있으면서도 독립 영화를 찍는 감독들이 있는데, 박광수, 박철수가 거기에 속한다. 그들은 충무로 내부에 위치하지만, 자본의 성격은 독립영화적이다.
(2)한국 독립 영화의 흐름
우리나라의 경우 독립 영화의 맥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 한 갈래는 대학영화학과나 '영화아카데미'등 에서 만드는 습작 영화를 들 수 있다. 그들은 기술 습득 차원의 영화 만들기를 시작하였으나 <호모비디오쿠스 >, <지리멸렬>, <2001이메진>등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주목을 끌기도 한다. 이러 한 습작영화는 감독의 개성을 극도로 강조할 수 있으며, 상업성을 전재로 하지 않기 때문에 기법이나 내용의 파격을 가져 올 수 있었다. 이후 이러한 경험이 현 재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야기하게끔 하고 있다.
우리나라 독립 영화의 또한 갈래는 전문적인 영화패들이 제작한 것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공륜'이라는 삭제의 도구를 피해 음성적으로 노동자나 대학가 를 대상으로 다큐멘터리, 극영화 작업을 한다. '장산 곷매'에서 제작한 <파업전 야>가 대학가를 타고 약 30만의 관객을 모은 대성공을 계기로 전국에서 많은 독 립 영화 단체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사회 운동의 영역에서 영화를 사고 한 채 우리나라 독립 영화의 굳은 기둥을 세우고 있다.
(3) 독립 영화의 출발과 그 성격
1984년에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라는 최초의 독립영화영화제가 개최되면서 상업적이며 퇴행적인 한국영화에 반하는 작지만 새로운 세력이 부상 하였다. 여기서 당시 그들이 추구하는 영화 운동의 순수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 독립 영화들의 공통점은 기존 한국 영화계와 구분되는 "한국 영화와의 결별 "과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들 독립 영화 주체 들에게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장호의 사회파 영화는 이들에게 비판받으면서도 어느 정도 존중을 받는 예 외적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독립 영화는 거의 다 8밀리 필름으로 제작 된 것이었고 조명, 촬영조건도 아마추어적이었다. 또 그들이 영화적 표현력을 제 대로 갖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야말로 최초로 기존 한국 영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점이다.
이들 독립 영화 주체세력은 대학 영화서클과 그 출신들이 세운 한국 최초의 독립 영화 집단인 서울영화집단이었다. 서울대 "얄라성" 출신으로 서울 영화 집 단의 구성원이었던 이들은 지금 현역 감독으로 활동하는 박광수, 김홍준, 홍기 선, 황덕규 등이다. 이들이 만든 영화는 당시에는 "작은 영화, 대학 영화"로 불 렸다. 이러한 작품들은 비록 실습 작품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열악한 독립 영화 상황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측면과 민중의 현실에 동참하려는 의지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만들어진 작품은 거의가 모든 작업과정이 공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만들어진 작품으로는 <그 여름>(1984년), <파랑새>(1986년) 등이 있다.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대학 영화 서클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나온 가 장 좋은 결과물은 <인재를 위하여>(한양대, 1987년), < 그날이 오면> (서울예전, 1987년)을 꼽을 수 있다. 서울영화집단의 논리와는 다른 맥락에서 진행된 작업 또한 초창기 독립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 문화원과 프랑스 문화원의 시네 클럽에서 모였던 사람들과 대학 고학년들이 만든 작품들이 다.
지정국, 김의석, 곽재용, 서명수, 박광우, 장기수 등이 그들인데, 이후 그들 은 상업 영화계에서 감독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4년에 창간된 「열린영화」라는 영화전문계간지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이후 대학영화서클의 활 발한 활동과 더불어 "영화마당 우리" 등 크고 작은 영화 단체들의 발족으로 이어 졌다. 이 시기에 쓰였던 여러 용어들 중 가장 자연스럽게 많이 쓰였던 것은 “작 은 영화"라는 말이었다. 작은 영화란 큰 영화(35밀리)와 규격 상으로 구별이 되 는 8밀리, 16밀리 영화로서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미래지향적인 대 안을 제시하는 "열린 영화"라고 규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의 운동성을 민 족, 민주 운동과 현실로부터 이끌어내기보다, 제도권 영화에 대한 낭만적 대항의 식과 서구의 대항문화에 의지한 것이라는 한계를 지적받기도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한다는 취지 아래 1988년부터는 독립 영화의 활동은 더 정치적이거나 현실 밀착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민족 영화 연구소'에서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 교육용 또는 선전 선동용으로 만든 비디오들과 독립 영화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받은 영화 제작소 장산곶 매의 16밀리 장편 노동 극영화 <파업전야>(1990년) 등이 그러한 배경에서 만들어 진 영화들이다. 이와는 달리 김동원이 독자적으로 홈 비디오 직접 카메라를 들고 강제 철거촌에 들어가서 수년에 걸쳐 만든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1988년) 은 한국 비디오 다큐멘터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2. 한국 영화 감독
(1) 김대현
성균관대 철학과 출신인 김대현 감독은 소설공부를 하다가 영화에 눈을 떴 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은 송길한 작가의 <짝코> 시나리오는 그에게 이런 방 식의 글쓰기도 있다는 걸 일깨웠다.
1992년 그는 <가방을 조심하세요>라는 첫 시나리오로 영진공 시나리오 공모 본선에 올랐다. 영화에 관해 아는 게 없던 그에게 유일한 교재는 비디오였다. 그는 비디오가게에 꽂힌 순서대로 비디오를 빌려 봤고 같은 영화를 반복해 보면 서 시나리오 작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처음 쓴 시나리오로 공모전 본선에 오르자 몇몇 영화사에서 접촉을 해왔다. <투캅스> 시나리오에도 부분적으로 참가했고 기 획이 무산된 <엘리베이터> 초고작업도 했다. 널리 알려졌듯 시나리오 작가란 고 달픈 만큼 보람과 성과를 얻기 힘든 직종이다. 그도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여러 번 무산되는 경험을 했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불안해하기도 했다.
직접 영화를 찍어 보겠다는 생각을 한 건 1997년. EBS <시네마천국>에 방영 된 단편영화들을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촬영은 김형구 촬 영감독의 퍼스트인 최형택씨가 맡아줬고 효과음을 맡은 강소영씨가 프로듀서를 겸했다. <영영>은 이번 칸영화제에 나가기 전까지 국내 영화제에 소개된 적이 없 다. 칸영화제 출품도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단편영화 해외배급을 전문으로 하는 영화사 미로비젼에서 클레르몽-페랑 견본시에 상영했고 칸영화제 관계자가 우연 히 <영영>을 보고 초청의사를 밝힌 것이다. 김대현 감독은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좌절할 수도 있었던 시나리오 작가가 이제 막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 선 것은 틀림없다. 영화평론가 김대현씨와도, 인디라인의 김대현씨와도 동명이인 이다.
(2) 김 성 숙
연세대 천문대기학과 81학번인 김성숙 감독은 84년 겨울에서 89년까지 노동 현장에서 젊음을 보냈다. <동시에>의 주인공으로 해고 노동자를 떠올린 건, 그래 서 자연스러워보인다. 이렇듯 그에게 ������영화와 삶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가 노동현장을 떠난 건 갑자기 찾아온 결핵 때문. 약을 먹으면서 ������학 교나 다니자������ 맘먹었고 병이 나았을 땐 다니던 회사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때 쯤해서 그는 자신이 제일 하고 싶어하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사물의 이미지를 표현하기를 좋아했다������는 걸 깨달으면서 영 화에 매료됐다. 뒤늦은 애정은 95년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에 참석했던 동료들과 독립영화집단 젊은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첫번째 단편인 <블랙홀 >은 출소하는 친구를 찾아가는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았으며, 제2회 서울단편영 화제 본선에도 올랐다. 하지만 ������뭘 모른 채로 만든 영화"라서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서울단편영화제 상영 이후 단 한번도 보지 않았다.
������남을 웃기는 재주가 없는 전형적인 범생이������인 그가 정말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블랙 코미디다. 그는 주류에 끼지 못하는 우리 사회 밑바닥 인생들에 관 한 이야기를 담고 싶어한다. ������다양한 코드를 담으면서 여백이 많고 유머러스한 영화������가 그가 생각하는 단편영화의 이데아. 거기에 닿을 때까지 쉬지 않고 가볼 참이다. ������끝을 봐야 직성을 풀리는 게������ 그의 성격이다.
- 1963년 부산 출생 연세대학교 천문대기학과 졸업
- 젊은 영화 독립 영화 협의회 워크샵 10기
- 1995년 <상항 혹은 상황들> 공동연출
- 1995년 <플랙홀>제 1회 서울단편영화제 본선진출
- 1998년 <동시에>
(3) 김 진 한
1962. - 대구출생.
1992. - 극영화<그대안의 불루>(이현승 감독) 조연출
1993. - 단편영화<비명도시>(기획 여균동, 연출 김성수) 공동기획 및 조감독
1994. - 단편<경멸>(16mm, 컬러, 18분 제작,연출)
제 1 회 서울단편영화제 우수작품상 수상
1995. - (주) 시공테크 특수영상사업부 PD
- <경멸>로 49회 몬테카티나국제 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
- 극영화<런어웨이>(연출 김성수) 미술감독
1996. - 단편영화<햇빛자르는 아이> (35mm, 컬러, 16분 후반작업 완성
1998. - 이스트만 코닥 주최 단편영화 사전제작 지원 프로그램<장롱> 으로 당선
- <경멸>로 클레르몽 - 페랑 국제영화제 단편영화 심사위원특별상수상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은상 수상
- 현재 단편작가 동인 '3호선'에서 활동중
- 현재 <장롱>35mm, 14분 촬영 완료
- 장편영화 <카바레>,<에밀레> 시나리오 기획중
김진한은 1968년 12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그만두 고 대구에서 문예운동에 가담했다. 그 후 서울에 올라와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 의 불루> 연출부를 시작으로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첫 단편<경멸>을 함께 제작했 던 미술팀을 중심으로 시작된 영화 제작방 '천지인'에서 계속 단편영화를 제작해 왔으며, 현재 단편<장롱>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단편영하 동인 '3호선' ( 김진한 , 송일곤 , 조은령)의 일원이다.
(4) 이 인 균
중학교 때 공업디자인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미술공부를 시작한 이인균 감독 은 93년 서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대기업 디자인부서에서 1년 넘게 일했던 그는 영상원 개원소식을 듣기 전까지 영화감독을 꿈꿔보지 못했다. 영상원 입학시험을 보던 날도 회사를 다니는 중이었고 위로 누나만 5명인 외아들 이 영화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부모님의 반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에겐 영 상원 4년이 영화를 공부한 유일한 시기.
요즘 유행하는 감각적 촬영이나 스타일을 구사할 법도 한데 그는 아주 진중 하다.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를 아직 스스로 찾지 못하겠다는 이인 균 감독은 앞으로 1~2편 장편영화 연출부를 한 뒤 데뷔할 생각. 그가 판단하는 좋은 영화의 기준은 어떤 주제든 감독이 얼마나 깊이 고민해서 만들었느냐는 것. 그런 치열함이 <집행>의 가장 큰 미덕이기도 하다.
(5) 전 수 일 감독
- 1959년 속초생.
- 경성대 연극영화과 졸업.
- 파리 영화학교(E.S.R.A)에소 수학.
- 파리 7대학과 8대학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
- 현재 경성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
- 현재 부산에서 독립영화창작
단편영화<소리빛깔>(1986,14분), <택시>(다큐멘터리, 미완성), 3부연작<말에게 물어보렴>(1995,10분), <내 안에 우는 바람>(1996,40분), <길 위에서의 휴식>(1997,63분) 등이 있다. <내 안에 우는 바람>으로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 '와이드 앵글'부문에서 운파상을 수상했고 제50회 깐느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부문에 선정되었다.
(6) 정 지 우 감독
정지우 감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제3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16mm영 화 <생강>으로 최우수작품상과 젊은비평가상, 예술공헌상을 석권하면서부터지만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 4분50초짜리 단편영화 <사로>를 내놓았을 때 이미 그를 주목한 사람들은 많았다. <사로>는 대사 한마디 없이 이미지와 소리만으로 분위 기를 몰고 가는 패기있는 연출력으로 인간의 본성과 사회․구조적 모순의 긴장감 을 그려냈다.
(7) 조 은 령
영화<스케이트>촬영장면
- 1972. 서울 출생
- 1989-1993. 월간영화잡지 <로드쇼> 뉴욕특파원 활동
- 1996. 미국 뉴욕대(NYU) 졸업
- 1996-1997. 뉴욕 인디영화에서 조명부로 일함.
- 1996. <가난한 사람들> 시나리오, 연출(16mm, 컬러, 13분)
- 1996. <추억> 촬영(김은경 감독, 16mm ,컬러)
- 1996. <뉴욕에서의 첫날> 촬영 (김선희 감독, 16mm, 컬러, 12분)
- 1996. <노래에서> 촬영(박유경 감독, 16mm,컬러, 15분)
- 1996. 제4회 서울단편영화제 본선
- 1998. <스케이트>시나리오, 연출(35mm,흑백, 10분)
*1998년 영화 <스케이트>*
제 4회 서울단편영화제 예술공헌상 수상
싱가포르국제영호제초청
깐느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공식초청
시드니 국제영화제초청
아시아 아메리칸 영화제 초청
드레스덴 영호제 초청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이태리 배급사 '빌리지'와 전 세계 배급계약
동숭씨네마텍에서 <간과 감자>, <햇빛 자르는 아이>와 함께 단편영화 최초 극장 개봉
현재 단편영화 <생> 제작중
3. 한국 독립 영화
(1) 『소풍』 directed by 송일곤 / 35mm / 14분 / color
- 나쁜 폭력과 순수한 희생양
해가 저물어가는 겨울날 오후. 한 가족이 바닷가 근처의 숲 속으로 소풍을 간다. 엄마는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 주고, 아빠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동반자살 을 하기 위한 ������사전 준비������에 혼자 부산하다. 엄마는 아이를 살리고 싶지만 이 미 아빠가 수면제를 먹인 상태. 가족은 다함께 잠들듯 세상을 등진다.
<소풍>은 ������소풍������이라는 단어에서 번져오는 밝고 유쾌한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영화는 아빠가 창문을 내린 뒤 배기관에서 연결한 호스를 자동차 안으로 집어넣고, 종이로 창문 틈을 막는 과정이 잔인하리만큼 자세하게 보여준 다. <간과 감자>(1998)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소풍>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소풍>은 <간과 감자>보다 훨씬 정적이고 사실주의적이다.
송일곤 감독은 이미지가 주는 힘이 너무 강하지 않도록 단순하고 거칠게 찍 으려고 했다. 관객이 인물의 심리에 집중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감독은 젊은 사 업가 가족이 동반자살한 신문기사에 기초해 시나리오를 썼다. 이미 <한 가족 이 야기>(1996)와 <간과 감자>에서 ������폭력과 희생������이라는 주제를 담았던 그는 동반 자살이 갖고 있는 폭력성과, 그 폭력이 전개되는 과정을 가능한 객관화시켜 보여 주려고 했다. ������
<간과 감자>가 역사와 삶을 규정하는 불가피한 상황의 폭력과 희생이라면 < 소풍>은 나쁜 폭력과 순수한 희생양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 모순을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최초의 시나리오에는 동반자살 의 이유가 설명되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당시 느꼈던 갈등과 아이가 보았던 숲 속의 나무와 바람과 파도소리와 자장가를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관객이 스스로 소름끼치는 살인에 관해 생각하길 바랐다.������ 영진공 지원금 300만원에 자비를 더해 제작비 2000만원 으로 완성했다.
(2) 『동 시 에』 김 성 숙 감독 / 1998/35mm/color/16분
- 인디포럼 `98개막작
- 제 3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상영
- 제 52회 깐느 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본선 진출
- `99 칸 단편경쟁부문 선정작
기계음 청계천, 두 얼굴의 거리. 묵직하고 듣기 싫은 기계음과 함께 화면이 열린다. 청계천노동자로 일하다 손을 다친 주인공은 ������욕망의 거리������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가 복권장사를 하며 살아간다. 그는 포르노테이프를 파는 10대 소년에게 연민을 느낀다. 어느날 소년의 좌판을 대신 지켜주던 주인공은 경찰의 단속에 걸 리지만 ������연인������이 된 소년은 주인공의 돈을 들고 총총히 청계천을 떠난다.
김성숙 감독의 두번째 단편 <동시에>(35mm, 16분)는 ������귀������를 불편하게 하는 영화다. 기계소리로 시작된 소음은 거리의 소음과 자동차 소리로 이어진다. ������청계천에서는 길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인지 ������우������하고 울려대는 소음이 몹시 귀에 거슬린다. 그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니까, 불편한 소리는 처음부터 김성숙 감독이 의도한 것이었다. 16mm대신 제작비가 훨씬 많이 들어가는 35mm로 영화를 찍은 것도 16mm로는 제대로 사운드를 담을 수 없었기 때문. 동성애에 빠진 두 남 자를 주인공으로 한 <동시에>는 인물만큼 영화의 공간도 두드러진다.
<연풍연가>의 촬영감독 김윤희가 잡아낸 청계천의 뒷골목은 왁자지껄하면서 도 쓸쓸하다. 오렌지와 푸른 톤의 조명 대비도 선명하다. 불그레하면서도 어둡고 차가운, 청계천의 이중적인 모습을 조명으로 그려내려는 의도였다. 사실, <동시 에>는 청계천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감독은 청계천이라는 공간을 영화로 담아 야겠다는 생각에서 영화를 가슴에 품었다. 불법적인 거래가 오가는 청계천은, 그 가 보기에 인간 욕망의 이중성이 적실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한국사회의 이중적 가치관이 존재하는 한 청계천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경계에 존재하는 사 람들의 얘기를 담고 싶었다.������
그는 드라마보다는 시적인 이미지로 영화를 끌고가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인물보다는 공간이 두드러진 영화가 됐다.
# 시놉시스
공장에서 사고를 입은 한 노동자는 세운 상가에서 복권을 판다. 그의 고객 이자 친구는 포르노 테잎을 판다. 복권을 파는 전직 노동자는 작은 부스 안에서 욕망하기를 멈추고 살아가지만, 매일 복권을 사가는 젊은 친구는 욕망이 실현되 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욕망을 착취하면서 공생하고 있는 셈이다. 복권장수는 거리에서 포르노 테잎을 팔던 친구 대신 실수로 경찰에 잡혀가고, 친구는 복권장수의 돈을 훔쳐 도망간다.
(3) 『영 영』 김대현 감독 /8분30초/35mm/1998
-'99 칸 단편경쟁부문 선정작
*작품설명
개구리 울음 우는 죽음과의 대화
어스름한 저녁공기가 감싸는 한여름 어느 농가의 부엌. 늙은 어머니가 슬픈 표정으로 가마솥에 물을 끓여 머리를 감는다. 정성스레 빗질을 하고 방 안에 들 어서면 한 젊은이의 나신이 보인다. 죽은 아들의 발톱을 깎고 몸을 닦아내면서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 환하게 웃는 아들의 환영을 본다.
아들을 염하던 어머니는 똑닥거리는 시계추를 잡아 시간을 멈춘다.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에게 시간을 정지시키게 만든다. 8분30초 분량의 짧은 단편 <영 영>(35mm)은 대사와 음악이 없다. 대신 개구리 울음소리, 소쩍새 지저귀는 소리, 매미 우는 소리 같은 효과음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효과음이 대사나 음악보다 깊은 감흥을 전달한다. 어머니는 울지 않지만 멀리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어머니의 울음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영영>의 감독 김대현(31)은 낯선 이름이다. <영영>이 첫 단편이니 그럴만도 하다. 그는 제작비 적게 드는 단편영화를 구상하다 어머니와 아들이 한방에 앉아 있는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다. 처음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를 담아볼 생각이었 으나 촬영장소를 찾으면서 시나리오가 바뀌었다. 막 태어난 아이를 닦아주듯 성 년이 된 아들을 닦아주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고 죽은 아들과 어머니에 관한 영 화를 만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 아들의 죽음이라는 상황은 시 간을 영원한 잠재우는 것이다.
(4) 『집 행』 이 인 균 감독 / 18분/ 16mm
당신이 믿는 것은 진실인가 젊은 신부는 이제 막 작은 성당을 맡았다. 이곳을 지키던 늙은 신부를 떠나보내고 돌아온 젊은 신부가 부임한다. 질식할 듯 답답한 사형장. 신부는 아버지를 죽인 사형수의 얼굴을 보고 놀란다. 22살이라고 믿기지 않는 앳된 얼굴. 신부는 집행관에게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하 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소년의 얼굴을 한 사형수는 집행 직전 불안감에 휩싸인 신부에게 속삭인다. ������믿음을 가지세요. 저들은 믿고 있잖아요 ������라고.
1954년에 있었던 실화가 실마리가 된 <집행>(18분, 16mm)은 신념이란 무엇인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건 집행관과 신부 모두에게 해당되는데, 명백하다고 믿 는 어떤 사실이 오류일 가능성을 이만큼 진지하게 다루기도 힘들 것이다. <집행 >은 올해 처음 졸업생을 낸 영상원 졸업작품으로 제1회 영상원 영상제에서 연출 상, 촬영상을 탔다.
감독 이인균(32)은 친구에게 들은 한 신부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 축했다. ������ 처음 들었던 얘기는 그냥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했다. 이 상황을 어떻 게 확장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모든 것이 확고한 신념 안에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 하게 됐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이미지는 폐쇄공포를 일으키는 사형장. 서대문형무소를 고증해 만든 사형장 세트는 제작비가 가장 많이 투자된 부분이기 도 하다. 학교에서 세트지원비를 받지 못했다면 불가능했던 작업.
조명은 소년과 신부를 천사의 계시를 듣는 성화처럼 그려낸다. 소년을 구원 해야 할 신부는 거꾸로 소년으로부터 구원의 의미를 찾는다. 사형집행이 끝난 뒤 성당으로 돌아가는 신부의 모습을 멀리서 잡은 장면은 난지도에서 찍었다. 하늘 이 대지를 잠식한 듯한 구도는 혼란스러운 신부의 발걸음을 휘청이게 만든다.
(5) 『햇빛 자르는 아이』 김 진 한 감독 / 17분/ 1996
김진한 감독은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경멸>로 우수작품상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98년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샌프란시스코 국 제영화제 은상을 받았다.
맞벌이하는 부모는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일을 나간다. 갓난 남동 생을 업고 방 안에 갇힌 여섯살짜리 소녀에게는 손바닥만한 창을 통해 비치는 햇 빛이 유일한 친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햇빛도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소녀는 사라지는 햇빛을 잡고 싶어 팔을 뻗어보지만 창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소녀는 다시 밥상 위에 올라 창을 향하지만 부실한 밥상다리가 부러지면서 방바닥에 나뒹굴고, 업혀 있던 동생은 방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만다. 소녀 는 자책과 함께 햇빛을 원망하고 증오하며 가위로 햇빛을 자른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방안에 갇혀있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모순과 소외의 문제를 진지 하게 다뤘다
4. 한국 독립 영화제
(1) 부천국제환타스틱영화제
부천국제환타스틱영화제는 경기도 부천시 일대에서 열리는 영화제이다. 여러 나라에서 참여하여 100편내외의 작품이 상영되며, 회가 거듭될수록 입지를 굳히 고 있는 영화제이다.
(2) 서울국제독립영화제
영상매체의 범람으로 새로운 영상 소프트웨어 필요, 우리의 독립영화들이 올바로 평가 받는 기회 제공, 독립영화들이 대중적으로 배급될 수 있는 기회 제 공, 국내 인디영화와 해외 인디영화 간의 교류 마련, 상업영화에 식상한 관객과 영화매니아에게 독특한 영상 체험 제공
(3) 십만원비디오영화제
제도권밖의 영화들, 소형독립영화제를 억압하고 상업적 유행 몰아가기에 급 급한 문화생산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의 대안적 매체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찾아 능동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에 맞는 다양한 문화를 요구 하는 일이다. 그러한 매체중의 하나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경제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Video를 제시하고 있다. 비디오는 백년의 역사를 가진 영화에 비 하면 아직 유아단계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개인적인 기록수단 혹은 필름을 접하 기 전의 습작용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Camcorder의 기술적 발달로 이러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경제 적 장점과 기동성이 보태어져 많은 표현 가능성 을 가진 매체로 성장중이기에 이 시점에서 비디오작품과 매체에 대한 대화가 존 재하는 공간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십만원 비디오 영화제의 기획동기이며 앞으로도 계속 매년 네 번씩 정기적으로 영화제를 열 계획이다. 십 만원 비디오영화제는 아마추어 비디오 작품들을 일반대중들과 함께 보고 토론 할 수 있는 대중과 가장 가까운,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즐거운 문화놀이터이기를 희망합니다.
(4) 부산 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에 관심을 둔 영화 전문가들이 반드시 들리는 장이며 또한 한국 영화와 한국 영화 산업계 인사들을 만나기 위한 최적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매년 그 참여하는 나라와 작품의 수가 늘고 있으며, 조금씩 그 입지 를 굳히고 있다. 이젠 한국만의 영화제가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아가서는 세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나아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5) 인디포럼 99
독립영화, 재장전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열리게 되었다.
주최 : 인디포럼 '99 작가회의
주관 : 인디포럼 '99 사무국, 문화학교 서울
후원 : 영화마을,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아트선재센터, 독립예술제, 훈울씨네, 한동대학교산업정보디자인학부, 한국씨네마떼크협의회, 맨인시네마
(6) 난장영화제
난장영화제는 97년 한해동안세계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는 젊은영화 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영화축제로서 올해 국내에 화제가 될 영화들을 미리보고 예견하는 자리로서 젊은이들의 문화의장으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화노트(영화일반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의 독립영화 (0) | 2009.06.24 |
---|---|
영화 용어와 주제 (0) | 2009.06.16 |
프랑스 영화사 (0) | 2009.06.04 |
신성일 스케치(1) (0) | 2009.06.04 |
강수연론 (0) | 2009.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