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영화일반론)

프랑스 영화사

장코폴로 2009. 6. 4. 00:28

프랑스 영화의 역사

������������������������������������������������������������������������������������������������������������������

 

프랑스영화 100년 (100 ans de Cinema francais)

1. 뤼미에르와 멜리에스(Les Lumiere et Georges Melies)

뤼미에르 형제(Les freres Lumiere)와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영화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먼저 영화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즉,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1891년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한 시기를 전후하여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 《리옹의 뤼미에르공장 출구》(Sortie des usines Lumiere) 《열차 도착》(Arrivee de congressistes a Neuville-sur-Saone)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멜리에스는 《로베르 우댕극장에서의 한 부인의 증발》(L'Escamotage d'une dame chez Robert Houdin)(1896) 《달나라 여행》(Le voyage dans la lune)(1902) 등 트릭을 사용한 공상적인 영화를 만들어 구경거리로서의 영화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사람은 프랑스 영화의 근본적인 두 축을 형성한다. 하나는 뤼미에르 형제의 리얼리즘(다큐멘터리, 르포르타쥬) 등 현실임직함(vraisemblance)을 추구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상상력(imagination)의 열매인 허구(fiction) 지향의 멜리에스 쪽이다.


2. 파테와 고몽 그리고 필름 다르(Pathe, Gaumont et Film d'art)

 이에 자극을 받아 영화의 기업성에 착안하여 파테(Pathe)와 고몽(Gaumont) 등의 여러 영화제작사가 설립되었다. 특히 파테사는 1910년경까지 멜리에스를 능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화사까지도 앞지르는 맹렬한 기세로 영화산업을 정착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필름 다르사(Film d'art)도 발족하여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caise)의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영화를 제작, 대중적인 흥행물로부터 영화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리면서 새로운 관객층을 확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제1회 작품은 1907년에 제작된 《기즈 후작의 암살》(L'Assassinat du duc de Guise)이었으며, 같은 해에 에밀 콜은 최초의 애니메이션영화를 만들었다. 1909년의 단편 란데의 《지고마》(Zigomaar), 1913년 발표된 루이 푀이야드(Louis Feuillade)의 《판토마》(Fantomas)는 활극영화의 효시로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파테사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영화계도 거대한 미국 영화 자본의 공세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3. 포토제니(photogenie)

1917년 루이 델뤼크는 포토제니(photogenie)이론을 제창하면서 '포토(사진)'와 '제니[정령]'의 통합을 주장, 영화는 빛과 그림자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 곧 시각에 호소하는 음악이 내적인 생명을 불러일으킨다는 포토제니파를 형성하였다. 아벨 강스(Abel Gance)는 대표작 《철로가의 백장미》(La Roue)(1923)에서 기관차가 질주하는 속도를 역동적으로 컷 백하는 등 시각적 표현기법을 구사하였고, 《나폴레옹》(Napoleon)(1925)에서는 3면 스크린을 사용하여 대형영화를 지향하는 대작도 완성시켰다. 루이 델뤼크(Louis Delluc)도 《침묵》(Silence)(1920) 《광열》(Fievre)(1922)을 통해 자신이 주창한 이론을 구체화시켰으며, 여류감독 제르멘 뒬라크(Germaine Dulac)는 《에스파냐의 축제》(La Fete espagnole)(1919)를 발표하여 완전영화 또는 순수영화를 지향하면서 영상의 순수성을 추구하였다.


4. 전위 영화운동(L'avant-garde francaise)

 1920년대의 시각주의는 문학이나 연극과도 또다른 영화의 독자적인 미학 추구였지만, 그와 동시에 회화나 문학에 있어서의 다다이슴(Dadaisme)이나 쉬르레알리슴(Surrealisme)의 영향을 받아 영화가 전위(avant-garde) 영화운동으로까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의식의 세계, 꿈이나 환상, 공포 등 내적인 비전을 표현하고 의식의 합리적인 측면을 대상화하는 쉬르레알리슴 영화는 르네 클레르의 《막간》(Entr'acte)(1924), 《이탈리아 맥고모자》(Un chapeau de paille d'Italie)(1928), 만 레이(Man Ray)의 《불가사리》(L'Etoile de mer)(1928), 루이스 부뉘엘(Luis Bunuel)과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1928) 등 많은 작품을 낳았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운동은 발성영화의 출현과 함께 쇠퇴하였으나, 그 전위적인 실험정신은 영화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5. 시적 리얼리즘과 유성영화의 황금기(Le realisme poetique et l'age d'or du cinema parlant)

 1930년대는 세계적인 경제 공황이 시작된 뒤, 독일에서는 나치스가 대두되어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시대에 해당되며, 이 시기를 통해 영화 또한 드라마 속에 자기 의식을 투입해 갔다. 르네 클레르(Rene Clair)는 유성영화의 첫 작품 《파리의 지붕 밑》(Sous les toits de Paris)(1930)을 감독하였고, 이어서 《자유를 우리에게》(A nous la liberte)(1931) 《파리축제》(Quatorze Juillet)(1933) 《최후의 억만장자》(Le Dernier Milliardaire)(1934) 등 사회풍자극과 서민영화로 변모해갔다. 또한 이 시기를 통한 연극인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이나 사샤 기트리(Sacha Guitry) 등의 영화계 진출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장 비고(Jean Vigo)는 시적 리얼리즘(Le realisme poetique)의 대표주자로서 《품행 영점》(Zero de conduite)(1933), 《아탈랑트》(L"Atalante)(1933)을 제작했다.

또한, 자크 페데르(Jacques Feyder)는 《외인부대》(1933) 《미모자관》(Pension Mimosas)(1934) 《여자만의 도시》(1935), 쥘리엥 뒤비비에는 《땅 끝까지 가다》(La Bandera)(1935) 《우리들의 친구》(La Belle Equipe)(1936)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1938), 장 르누아르(Jean Renoir)는 《밑바닥 인생》(Les Bas-Fonds)(1936)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1937) 《게임의 규칙》(La Regle du jeu)(1939) 등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이들 영화의 대부분의 시나리오를 샤를 스파크(Charles Spaak)가 썼다는 점도 30년대 프랑스 영화의 한 특징이다. 극적인 상황 설정 속에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이른바 <폐쇄된 시나리오>의 시대였으며, 그것은 카메라 이전의 시나리오 속에 현실을 옮겨 놓았다는 데에서 특색을 찾을 수 있다.


6. 이탈리아의 네오레알리스모(Neo-realisme italien)

30년대 말기에는 다시금 카메라에 의해 현실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르느와르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화면 깊숙이까지 초점을 맞추는 <팬 포커스>에 의한 세로 구도의 연출이었으며, 이로부터 이탈리아의 네오레알리스모(Neorealismo)를 실현시킨 현실 묘사의 기초가 이미 싹트고 있었다.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e)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치하의 파리에서 대작인 《인생유전》(Les enfants du Paradis)(1944)를 완성시켰다.


 7. 전후 프랑스 영화(Apres-guerre)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프랑스의 영화제작 편수는 극도로 줄어들었고, 그 타개책으로 영화원조법이 마련되어 영화의 부흥을 서두르게 되었다. 45년에서 50년대에 걸친 프랑스 영화는 그 밑바닥에 전쟁과 인류의 운명이라는 주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르네 클레망(Rene Clement)의 《철로의 싸움》(La Bataille du Rail)(1945), 《금지된 장난》(Les Jeux Interdits)(1951),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1959),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e)의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1946) 《탄식하는 테레즈》(Therese Raquin)(1953), 앙리 조르지 클루조(Henri-Georges Clouzot)의 《정부 마농》(Manon)(1948)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1953), 르네 클레르(Rene Claire)의 《침묵은 금》(Le silence est d'or)(1947) 《악마의 아름다움》(La beaute du diable)(1950), 쥘리엥 뒤비비에(Julien Duvivier)의 《내 젊음의 마리안느》(Marianne de ma jeunesse)(1955), 시인이며 극작가인 장 콕토(Jean Cocteau)의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ete)(1945) 등이 이 시기를 통하여 만들어진 주요 작품들이다.



8. 카메라 만년필(camera-stylo)

또한,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Alexandre Astruc)는 1948년 '카메라 만년필'(camera-stylo)론을 발표하고, 카메라는 만년필과 마찬가지로 영상이라는 문자를 사용하여 문장을 엮어나가는 도구이므로, 카메라와 렌즈의 기능으로 모든 현실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연애 참회》(Le Rideau cramoisi)(1952) 《여자의 일생》(Une vie)(1958) 등이 있다. 또한 《시골 사제의 일기》(Journal d'un cure de campagne)(1950) 《저항》(1956) 등을 감독한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도 '영화=문장(ecriture)'설을 표명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누벨 바그가 대두하는 실마리였다.


9. 누벨 바그(Nouvelle Vague)

1957~58년에 20대 또는 30대의 젊은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의 누벨 바그(Nouvelle Vague)가 밀어닥쳤다. 루이 말(Luois Malle)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echafaud)(1957) 《연인들》(Les Amants)(1958),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의 《종형제》(Les Cousins)(1958),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의 《어른은 알아주지 않는다》(Les 400 coups)(1959),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1960), 마르셀 카뮈(Marcel Camus)의 《흑인 오르페》(Orfeu Negro)(1959) 등이 누벨 바그파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현실의 문제의식 촉발, 전통적인 영화문법의 부정 등이 공통점을 이루었다.

 누벨 바그의 주류는 평론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주재하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ema)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은 비평가 그룹으로서, 이들은 시네마테크(cinematheque, 필름 라이브러리)에 드나들면서 고전적 작품을 통해 영화를 배웠다는 점부터가 이채로웠다.

 한편, 누벨 바그의 파문 밖으로부터 등장한 알렝 레네(Alain Resnais)는 《게르니카》(Guernica)(1951)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1955) 등의 기록영화를 만들었으나, 그 후 극영화 《24시간의 정사》(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1959)를 연출, 과거․현재를 의식의 시간으로서 전개시켜 의식의 일상성을 거부하였고, 계속하여 《지난 해, 마리엔바드에서》(L'Annee derniere a Marienbad)(1960)를 발표하였다.


10. 60-70년대(Les annees 60-70)

 누벨 바그의 폭발적인 유행은 수많은 젊은 감독들을 일거에 데뷔시켰지만, 60년대에 접어들자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점차 자연 도태되고, 기록영화 수법의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 영화진실]도 그 발전형태로서 파악되는 가운데 영화 전체의 새로운 경향으로 주목되었다. 누벨 바그를 계기로 영화 자체가 크게 변모한 오늘날의 프랑스 영화는 시네마 베리테나 레네, 고다르, 트뤼포, 클로르 를루슈 등의 작가 활동으로 요약된다. 당초, 누벨 바그가 문제를 제기한 전통적인 영화작법에서 벗어난 방법은 오늘날의 영화제작 형태를 통해서 보더라도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내용적으로도 줄거리의 흥미 같은 것보다는 직접 카메라에 의해 현실을 주체적으로 포착한다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 장 가뱅(Jean Gavin)이 간판처럼 되어 있던 영화로부터 '작가의 영화' 또는 '개인의 영화'라는 색채는 점차 더 짙어졌다. 이는 프랑스 영화의 전통인 독립 프로덕션 제도에 의한 제작 시스템과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영화제작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독자적인 기능이라는 견지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첨단에 위치해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다르는 《사랑과 경멸》(Le Mepris)(1963), 《알파빌》(Alphaville)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1965), 《메이드 인 USA》(Made in USA)(1966), 《중국 여자》(La Chinoise) 《위크엔드》(Week-end)(1967) 등을 계속 발표하고 영상에 관한 개념, 특히 몽타주에 의한 심리주의를 배격하면서 정치적인 제재를 즐겨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첨예화하여 상업영화와는 완전히 결별하였으며, 혁명적인 전투영화라는 작품들을 촬영하였다.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La Nuit americaine)(1973), 말의 《루시앙의 청춘》(Lacombe Lucien)(1974), 샤브롤의 일련의 스릴러 영화, 레네의 《장미의 스타비스키》(Stavisky) 등으로 각자가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이와 같은 부진 속에서도 영상파로 자처하는 젊은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e)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1966)가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하고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자 그 뒤로도 정열적인 영화제작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배우 알렝 들롱(Alain Delon)은 자신의 절대적인 인기를 배경으로 그의 프로덕션에서 정력적으로 영화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밖에도 장 폴 벨몽도(Jean-Paul Belmondo),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 등의 배우의 크나큰 인기가 프랑스의 상업영화를 활성화시켰다.


11. 80년대(Les annees 80)

 1980년대에도 개성과 예술이 중요시되는 누벨 바그의 정신이 살아있는 프랑스 영화는 구세대와 신세개 감독들이 섞여 활동하고 있다. 신세대 감독으로는 《불을 찾아서》(La Guerre du feu)(1981)을 만든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그랑 블루》(Le Grand Bleu)(1988)을 만든 뤽 베쏭(Luc Besson)이 있고, 《뽕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e Pont-Neuf), 《나쁜 피》(Mauvais sang)(1986) 등을 제작한 레오 카락스(Leos Carax)는 20대 때부터 영화를 제작한 젊은 감독이다.

 필립 가렐(Philippe Garrel)의 《비밀의 아이》(L'Enfant secret)(1982), 로멩 구필(Romain Goupil)의 《30세로 죽다》(Mourir a trente ans)(1982) 등 중견 감독 작품이 속출하였으며, 고다르도 《멋대로 도망쳐라》(Sauve qui peut)(1979)로 상업영화에 복귀하였다. 《막차》(Le Dernier Metro)(1980)로 국민의 지지를 얻은 트뤼포 역시 누벨 바그 세대로 그 이외에도 많은 거장을 낳았다. 루이 말은 《굿바이 칠드런》(Au revoir les enfants)(1987)을 제작했다. 이렇듯이 80년대의 프랑스 영화는 차분히 발전하였다.

12. 90년대(Les annees 90)

1990년대 영화 역시 신구세대 영화 감독이 뒤섞여 활동했다. 샤브롤의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1990), 고다르의 《새 물결》(Nouvelle Vague)(1990), 레네의 《흡연-비흡연》(Smoking-No smoking)(1993) 등 거장들이 꾸준히 활동했다. 장 피에르 쥬네(Jean-Pierre Jeunet)와 마르꼬 까로(Marco Caro)의 《델리카트슨》(Delicatessen)(1991)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La Cite des enfants perdus)(1995) 등은 관객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작품들이며, 레지 바르그니에(Regis Wargnier)의 《인도차이나》(Indochine)은 수준급 대작이며, 폴란드 출신 크리스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istoff Kieklowsk)의 세가지 색 《블루》(Bleu), 《화이트》(Blanc), 《레드》(Rouge)(1993)은 큰 인기를 끌었다. 마띠외 카소비츠의 《증오》(La Haine)(1995)는 파리 근교의 문제를 다루었다.

오늘날 활동 중인 대중적인 배우로는 《유 콜 잇 러브》(L'Etudiante)(1988)의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 du monde)(1991), 《시라노》(Cyrano de Bergerac)(1990) 등의 제라르 드빠르디외(Gerard Depardieu), 《레옹》(Leon)(1994), 《그랑 블루》, 《비지터》(Les Visiteurs)(1993) 등의 장 르노(Jean Reno), 《나쁜 피》 등의 드니 라방(Denis Lavant)과 쥘리에드 비노슈(Juliette Binoche) 등이 있다.


13. 오늘의 프랑스 영화(Cinema francais d'aujourd'hui)

현재 프랑스 영화의 상황은 낙관적이지는 않다. 재정적인 문제에 시달리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블록버스터급 할리우드 영화의 물량공세는 사실 쉽지만은 않다. 50-60년대에 비해 프랑스 영화는 오히려 후퇴했다고 볼 수 있다. 투자 비용은 계속 올라가고 관객수, 제작, 수입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을 찾는 횟수가 준 데에는 텔레비전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해 약 1500여 편의 영화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텔레비전 책임자들이 영화 제작자들에게 재정지원을 해주기도 한다. Canal Plus 등의 텔레비전 채널은 그러한 투자를 해주고 있다. 가장 큰 재정 지원은 정부가 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약 3억 프랑 이상을 영화산업에 지원하고 있다. 정부 주도하에 여러 은행들이 협조하여 '시청각 창작 재정 협회'(S.O.F.I.C.A. : Societe de Financement de la Creation Audiovisuelle)을 1985년 설립했다. 또한 정부는 '프랑스 국립 영화 센터'(Centre Nationale de la Cinematographie)를 두고 영화를 영상 산업의 뿌리로서의 기능, 문화 활동과 문화 유산 보존의 기능, 그리고 국제 교류와 렵력 증진의 매개체로서의 기능으로 인식하고 있다.


14. 내일의 프랑스 영화(Cinema francais de demain)


오늘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영화는 오락이며 예술적 표현인 동시에 산업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영화는 정부의 큰 관심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 영화계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화관을 현대화하고, 새롭게 조성된 현실에 적응하여 다양한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고 있다. 앞으로 프랑스 영화는 컴퓨터 공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제7 예술'(le septieme art)의 혁명적 진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2. 프랑스 영화의 기본 이론


1. 아방가르드(Avant-garde)

1920년대에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그 이상으로 기술적이고 양식적인 실험을 수행했던 것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이었다. 인상주의 영화의 제작은 사실상 1924년에 끝나고 1925년 경부터 1920년대 말까지 아방가르드 운동이 매우 힘차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여 때때로 제2의 아방가르드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과 더불어 시작된 영화 인상주의자들의 문학적 재료에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서, 직접적으로 비영화적인 역사적 노선으로부터 등장한 것이었다. 보통 짧고 무성 영화인 아방가르드 계열 영화들은 소설이나 연극, 장편 영화들보다는 현대시나 추상적, 초현실주의적인 회화에 아까운 영상 시, 익살이나 꿈 등과 유사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작품들이 정적인 시각 예술을 동적인 시각 예술로 확장시켰다는 사실이다.


아방가르드 영화 제작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프랑스에서 더욱 활발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적절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당시 비평가 리치오토 카뉘도가 제7의 예술이라 부른 영화를 가장 열정적으로 찬미했다. 프랑스의 많은 예술가들은 독일인들보다 하나 이상의 매체에 손을 대려는 열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희곡 작가, 화가, 영화 감독으로 만능 예술가인 장 콕토 (Jean Cocteau)는 그 극단적인 경우였다.


프랑스에서의 아방가르드 영화 운동은 매체의 사용과 재료에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쉽다는 것, 그리고 관객이 실험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이 시기의 프랑스 영화 산업은 다른 나라들에서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거의 아마추어 수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헐거운 조직과 미미한 재정 지원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몇 개의 거대한 스튜디오들의 독주보다는 군소 회사들과 개인적인 흥행주들이 더 많았다. 무성 영화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작 비용 덕택에 화가는 화랑 주인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빌고(원료와 사진 제판 비용을 위해서), 한 친구에게 그 또는 그녀가 일하는 스튜디오로부터 카메라를 빌리게 하고, 귀족적인 예술 애호가의 대저택의 사용을 결정하고 그 곳으로 친구들(다른 예술가들)을 초대하고, 그 다음에는 그들이 출연하는 짧고 즉흥적인 실험적인 영화를 촬영했다. 영화가 완성되면 센느 강의 좌안에 있는 소극장들 중 하나와, 독특한 프로그램들을 상영하는 델뤽과 카뉘도에 의해 설립된 시네 클럽에서 볼 수 있었다. 만약 그 화가가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영화를 포함한 예술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은 그에 알맞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다. 예를 들어 만 레이(Man Ray)의 <데 성의 신비 (Les Mysteres du chateau du De)>(1929)는 그런 방식으로 제작되고 상영되었다.

1920년대 당시 파리는 그러한 곳이었다. 그 때쯤 시대가 바뀐 직후 과학에서 시작된 지적인 진보가 예술로 침투하고 있었다. 자연 과학으로부터 나온 중요한 구조물 중 일부는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주었다. 막스 플랭크(Max Planck)의 양자역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수학과 철학 이론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세계를 보는 세계관이었다. 이 개념은 예술적 표현이라는 등가물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불러 일으키려는 방법을 통해 층계를 내려오는 나체를 제작했다. 브라크(Georges Braque)는 예를 들면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의 파이프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본 모습을 겹쳐지게 그렸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현재와, 다른 장소를 과거의 시간과 겹쳐 놓았다. <율리시즈>에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6월 어느 하루 더블린의 각각 다른 지역에서의 동시 발생적인 사건들의 상호 관계를 보여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는 움직임의 지속과 영상의 공간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관계들을 다루기 위한 완전한 매체로 보였다. 공간으로서의 시간이라는 사고를 통해 심오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크송(Henri Bergson)은 <창조의 진화>에서 "우리의 일반적인 지식의 메커니즘은 영화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라고 했다. 예술가인 엘리 포르(Elie Faure)는 초기의 논문 <영화 합성술>(1920)에서 레르비에와 델뤽에게 동의를 표했고 "영화는 공간 속에서 시간을 구체화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시간은 진정으로 공간적 차원의 것으로 된다"라고 썼다. 새로운 창조적인 추진력으로 젊은 시인들과 특히 화가들은 그들 자신을 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캔버스를 뛰어넘어 영화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특별한 지적이고 미학적인 힘은 몬드리안(Mondrian)의 그림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영화들인, 아방가르드의 추상적이고 비객관적인 경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1921년 경 바이킹 에겔링의 <대각선 교향곡>과 한스 리히터의 <리듬 21>의 영화들과 더불어 베를린에서 시작되어 신속하게 파리로 옮겨갔는데, 파리에서는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발레>와 마르셀 뒤샹의 <빈혈 영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아방가르드의 두 번째 중요한 경향은 지그문트 프로이드에 의해 주창된 새로운 심리학으로부터 나왔는데, 그의 이론에 대한 문학적 등가물은 다시 프루스트(어떤 시절의 강박 관념)와 조이스(의식의 흐름과 꿈 에피소드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회화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들의 캔버스에 프로이드의 상징과 내적 통찰을 표현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가 프로이드의 의미 심장한 꿈의 상태를 가장 잘 포착하고 드러낼 수 있는 예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꿈들로 이루어진 환상의 세계를 재현하는 영화의 능력은 실제적 세계의 객관적 현실을 기록하는 능력 만큼이나 위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와 제르맨 뒬락은 <조개와 성직자>(1928)를, 살바도르 달리(Savador Dali)와 루이 브뉘엘은 <안달루시아의 개>(1928)와 <황금 시대(L'Age d'or)>(1930)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초현실주의 운동 안에서 다른 많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아방가르드의 최종적인 양식은 인상주의였는데 그것을 그 이전의 루이 델뤽 주위에 모여들었던 인상주의자들의 장편 길이의 이야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방가르드의 다른 두 경향들과는 다른,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인상주의적인 충동은 초기 화가들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누군가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대해서 말했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객차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빛과 어둠, 형태와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강한 인상들로 대상들, 사람들 또는 풍경들의 외관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아방가르드 영화에서의 인상주의는 대개 이런 종류의 영화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922년 파리에서 출판된 <율리시즈>로부터 유래된 것이 분명한 <도시 교향악>의 형태를 취했다. 조이스의 소설에서처럼, 한 도시의 각각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한 동시 발생적인 행동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강조하면서 전체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했다. 그렇지만 그 영화들에서는 형식이 의미보다 우선되었다. 파리에 대한 알베르토 카발칸티의 <절박한 시간>(1926),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의 <베를린 :대도시 교향악>(1927), 암스테르담에 대한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의 <비>(1928) 등이 초기의 몇몇 훌륭한 작품의 예이다. 비록 이 영화들은 사회적인 내용보다는 시간적이고 율동적인 양식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에서 1930년대의 기록 영화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주로 발성 영화 제작이 돈이 많이 들고 사운드 장비와 기술이 접근하기 어렵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인해 그 종말을 고하였다. 새로운 기술 앞에서 의욕만 앞서는 아마추어를 위한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두 번째 요인은 1930년대의 변화하는 태도들이었다. 1920년대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예술가의 주의를 완전히 끌었지만, 1930년대에는 사회를 위한 예술의 시대가 되었다. 불황과 대두하는 파시즘은 새로운 예술적 개념의 등장을 유발시켰다. 아방가르드 영화는 1930년대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 매우 매혹적인 예술 형태였던 기록 영화로 대체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세 명의 '교향악적'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카발칸티, 루트만, 이벤스)이 1930년대에는 사회적으로 위임받은 기록 영화 영화 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이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아방가르드 영화는 약 15년 후까지는 하나의 운동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계속 이어지지 못했으며 게다가 프랑스보다는 미국에서 진행되었다. 아방가르드의 재개는 널리 보급된 16mm 비 극장용 장시(35mm 극장용 규격에 반대되는)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작 비용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것은 마야 데렌(Maya Deren)의 최초의 영화<오후의 그물망>(1943, 당시 그녀의 남편이었던 알렉산더 암미드(Alexander Hammid)와 공동 제작한)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것은 흑백 무성 영화(발성 영화가 일반적이었지만)였는 데 뒬락의 <조개와 성직자>, 브뉘엘-달리의 <안달루시아의 개>와 나란히 초기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잘 들어맞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데렌의 영화들과 개혁적인 활동의 결과로서 실험 영화, 지하 영화, 독립 영화라고 다양하게 불려졌던 새로운 아방가르드가 전개되었다. 그것들은 극영화, 기록 영화와 더불어, 특히 미국, 캐나다, 영국, 그리고 일본에서 창조적인 표현의 독특한 양식으로서 활발하게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920년대 말, 많은 주요한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이 비용이 덜 들고 접근이 용이한 전통적인 영화 작업으로 되돌아갔다. 페르낭 레제, 살바도르 달리, 마르셀 뒤샹, 그리고 만 레이-그는 1926년에는 <에막 바키아Emak Bakia>를, 1928년에는 <바다 별(L'Etoile de mer)>을 제작했다-는 회화와 스틸 사진으로 되돌아갔다. 그렇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장편 상업 영화에서 그들의 길을 찾았다. 예를 들면, 르네 클레르(1924년 아방가르드 영화인 <Entr'acte>와 <Paris qui dort>를 제작했다)와 브뉘엘, 장 르누아르(1924년에 <La fille de l'eau>, 1928년에 <The little match girl>을 제작했다), 그리고 장 비고(1930년에 <A porpos de Nice> 제작)도 어느 정도 아방가르드적인 전통에서 영화를 시작했었다. 장 콕토는 아방가르드 영화 양식을 발성 영화-<시인의 피>(1930), <미녀와 야수>(1946)-에 충분히 적용시킨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의 영향은 초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과 더불어 발성 영화와 1930년대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에 이르기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켜갔다.


2. 필름 느와르(Film noir)


필름 느와르는 거의 모든 영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보다 본격적으로 '필름 느와르' 목록에 들어가는 영화들은 대개 싸늘한 냉소와 어둠 속의 고독한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또한 그 속에는 현대 사회의 비인간적인 환경이 내포되어 있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가 바로 필름 느와르일 것이다.

필름 느와르는 비평가들에 의해 명명된 장르다. '검은'이라는 뜻의 '느와르(noir)'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용어는 1950년대 후반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ema)>의 젊은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에 소개된 미국 헐리우드 영화들 중에서 적은 예산으로 제작된 어두운 분위기의 범죄 영화를 '필름 느와르'라고 불렀다.

이 젊은 비평가들은 '작가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상업 시스템 안에서 독특한 스타일을 구가했던 헐리우드 감독을 발견하여 자신들의 좌표로 삼았다. 이 탁월한 비평가들은 헐리우드의 영화를 통해 현대 사회의 비정한 일면을 깊이있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필름 느와르는 폭력과 범죄, 허무주의와 절망이 가득 찬 세계를 주로 다룬다.

내용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화면 구성에서도 명암의 분명한 대비, 불안정한 구도, 중첩된 프레이밍, 극단적인 클로즈업 등을 자주 활용하여 음산하고 불균형적인 세계를 형상화했다.

필름 누 아르의 공간 역시 대도시의 뒷골목이나 범죄 집단 두목의 사무실, 비에 젖은 거리가 주로 다뤄졌다. 사건 또한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적나라한 폭력으로 표면화되지 않고 무엇인가 사건이 있을 법한 불길한 예감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러한 예감 때문에 영화는 더없이 싸늘한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며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유도된다. 일반적인 갱스터 영화와 달리 필름 느와르는 음모와 배신, 반전과 복선이 중첩되어 있어 복잡하고 다층적인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필름 느와르의 독특한 향취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은 필름 느와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비정한 면모를 자주 발견하였으며 감독 또한 현대 사회의 비인간성을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분위기를 선호하였다.

필름 느와르의 첫 출발은 1941년 거장 감독 존 휴스턴이 만든 <몰타의 매>를 꼽는다. 이 시기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헐리 우드의 사회파 감독들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의 사회적 공허감을 어두컴컴한 화면에 담아 냈다.

1960년대에는 프랑스의 지성파 감독들에게 필름 느와르의 전통이 넘어간다. 이른바 '누벨바그'의 대표자로 불리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등이 1950년대 헐리우드 감독들의 스타일을 창조적으로 재현했다.

1970년대에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필름 느와르적인 영화들이 대거 등장했다. 많은 감독들이 고독한 내용을 음산한 분위기에 담으려 했다. 문제작들이 하나같이 필름 느와르는 아니었으나 필름 느와르는 거의 문제작이 되었다.

필름 느와르는 1980년대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양식은 '잡종 스타일'(하나의 영화 안에 여러 장르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은 대개 필름 느와르적인 냉소가 깃들어 있다. 또한 '홍콩 느와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아시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누벨 바그 (Nouvelle Vague)

'누벨 바그(Nouvelle Vague :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프랑스어)"란 침체에 빠져 있는 기존의 프랑스 영화인들을 질타, 이전 세대 영화와의 단절을 외치고 자유 분방한 감수성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화면을 만들어 낼 것을 주장하며 59-60년 사이에 데뷔한 일련의 감독들(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의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파리의 영화 도서관에서 영화 수업기를 보냈고,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평론가로 활약했다는 공통된 배경을 지니고 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자신들이 평론가 시절에 주장하였던 '작가주의 영화론'을 스스로 감독이 되어 실천에 적용하려 하였다. '작가주의 영화론'은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영화 감독의 창조적 역할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며 한 작가의 일련의 작품은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주제와 스타일의 생성과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일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동세대인 알랭 레네, 아녜스 바르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앙드레 테쉬네 등과 함게 70년대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프랑스 영화를 주도하여왔다. 그러나 60년대의 열혈 영화 청년들이 50-60년대의 노장으로 바뀌어 가면서 그들의 영화 대부분은 매너리즘과 노쇠함의 조짐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 참고문헌

Rene PREDAL, 50 ans de cinema francais, Nathan, 1996

F. VANOYE, F. FREY et A. LETE, Le cinema, coll. Reperes pratiques, Nathan, 1998

Dominique AUZEL, Le cinema, coll. Les Essentiels Milan, Milan, 1995

조병옥, 프랑스 문화와 문화정책, 공주대학교 출판부, 1998

차림편집부, 열려라 비디오 10000, 차림, 1998

옥선희, 비디오 베스트 렌트 500, 범조사, 1993

프랑스 영화 사이트 http://www.france.com/fhc/index.html

Internet Movie DataBase http://www.imdb.com

All-Movie Guide http://www.allmovie.com

Movie Finder http://www.moviefinder.com

Movie Poster List http://musicman/com/mp/mp.html

Look http://www.movieline.co.kr/look/look.html

'영화노트(영화일반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용어와 주제  (0) 2009.06.16
한국 독립영화  (0) 2009.06.04
신성일 스케치(1)  (0) 2009.06.04
강수연론  (0) 2009.06.02
영화음악  (0) 200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