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생,춤 바람 나다

권명주 안무, 출연의 ‘남겨진 자’

장코폴로 2009. 4. 14. 12:22

공연/영화
존재와 산화의 경계. 그 내면의 깊이
권명주 안무, 출연의 ‘남겨진 자’
문화뉴스팀
 

 
M극장 기획공연 ‘우리시대 춤과 의식전’ 두 번째 마당인 권명주의 ‘남겨진 자’가 4월 4일,5일 M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언어적 영역에서 ‘사람’이라는 단어를 압축해보면 ‘삶’이라는 단어가, ‘삶’이라는 단어를 확장하다 보면 ‘살아가다’ 또는 ‘사라지다’의 움직씨가 덧붙여진다. 권명주의 ‘남겨진 자’는 바로 ‘살아가다’ 와 ‘사라지다’의 경계에 있는 者들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막이 오르기 전 무대 상수에는 붉은 빛 조명 안에 여러 송이의 흰 장미꽃이 널려져있고, 그 안에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외치는 물망초 꽃 하나가 마치 묘비처럼 서 있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정색 운동화 한 쌍. 작품이 시작돼서는 느닷없이 자살하려는 수인(囚人)과 살아가는 자와 사라진 자의 모습이 교차 된다.

영화의 점프 컷 기법처럼 작품은 과거시제로 들어가 폭력에 희생되는 한 여인과 폭력을 행하는 세 명의 남성무용수의 군무가 진행된다. 그러나 폭력이 자행되는 모습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인의 움직임도 또 그들의 관계도 모두 느닷없어 보인다.

남성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폭력을 행하는 대상자가 아닌 자기를 학대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 여인 또한 그 공포의 분위기에 놀라 어찌할 바 모르는, 남성 무용수들이 간간히 여인에게 한명씩 다가가는 모습만이 이 장면이 범죄자와 희생자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 시각적으로 구체화 되는 움직임이나 구성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 후 살아가는 자가 등장하여 독무를 추는 데 이 또한 산자를 위한 고통의 편린들을 담은 춤인지, 죽은 자를 달래기 위한 춤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슬픔이 그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음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자는 사라진 자가 남긴 신발을 들고 퇴장한다. 여기에서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검은색 운동화에 대한 내적 동기가 부여된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발자취를 마감한다는 의미이자 살아가는 자에게는 사라진 자에 대한 아픔이 오롯이 스며드는 오브제이다.

그런데 작품의 서사적 배경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는 오브제가 왜 그리 소홀히 다루어졌는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영국 비평가 콜린 윌슨이 앙리 바리뷔스 소설 ‘지옥’에 나오는 한 구절, “나는 너무 깊이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보는 것이다.”를 주목하여 아웃사이더(예술가)의 특징을 집어낸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아웃사이더란 “깨어나 질서의 이면에 감추어진 혼돈을 본 자이다.”

이들이 진실을 말하는 순간 애꾸눈의 나라에서 두 눈을 가진 사람처럼 비정상적인 고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권명주의 ‘남겨진 자’는 작품으로서 완전한 이해를 받은 건 아니지만 예술가로서의 책무를 지키려는 의지의 산물로 보인다.

모두가 보지 못한 아니 애써 외면하려하는 것을 작품이라는 공간에 들여 놓음으로써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가 바그너에게 보낸 비극의 탄생의 서문에서처럼 작품에 대한 구성의 아쉬움은 안무가 권명주가 춤 작가로서 걸어가는데 조금 더 집중해야할 부분인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느껴진다. 김동호(춤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