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아끼바리에서 통일벼로 돌변한 2001년의 우리영화

장코폴로 2009. 3. 30. 08:57

                  ◆2001년


 아끼바리에서 통일벼로 돌변한 2001년의 우리영화

 

 헌법재판소는 8월 30일, "영화등급보류는 위헌" 임을 판결했다. 12월 27일 국회 본회의는 제한상영관 도입을 포괄하는 영화진흥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영상물등급위는 영화의 내용이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의 권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을 때는 관계기관에 통보할 수 있다"는 문제의 조항을 삭제하였다. 그런데 제한상영관 등급을 받으면 광고, 선전물 등을 배포, 게시, 홍보할 수 없으며 비디오 출시·판매도 금지된다.

 영화 진흥을 지원하는 영화진흥위원회는 정치권의 입김으로 좌지우지 되는 곳이다. 정권이 바뀌면 요직도 바뀌는 것이다. 위원회라는 구실로 자기인사들이 포진하면 모든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부위원장 자리를 놓고 싸운 사건은 치열한 육박전이었다. 조희문과 이용관 사이의 국지전에서 법은 조희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사태는 해방전후사를 보는 듯 하였고, 영화계의 세포분열, 즉 이원 조직의 본격 가속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2001년 개봉된 우리영화는 52편, 시장점유율 46.1%, 조폭 영화『친구』(곽경택 감독)를 선두로 서울 176만 명을 동원한『엽기적인 그녀』(곽재용 감독)가 히트하는 가운데 우리 영화는 감격적인 수확을 거두었다. 오죽했으면 ‘조폭영화’라는 책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조폭영화 이면에는 조폭 자금이 유입되어 있었다. 제작자의 입김에 따른 조폭의 미화는 당연한 결과였다. 임화수의 경우를 보더라도 건전한 영화 투자자금의 유입이 좋은 영화 풍토를 만든다.

 흥행 1위에서 5위까지가 한국영화가 휩쓴 '복고'와 엽기·과장, 조폭과 향수라는 분위기는 영화들을 휩쓸고 내려왔고, 이와 타이밍을 맞춘 영화들은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몇 집의 대박 소동과는 달리 저예산, 독립․ 실험성 짙은 영화, 예술영화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개봉 첫 주 스코어, 『나비 2,300명/『고양이를 부탁해』8,400명의 참담한 수치는 아직 관객들의 지적 성숙도가 낮고, 자기 취향이 확고하지 하지 못하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나비』는 5,800명, 『라이방』은 3,200명, 『꽃섬』은 6,400여명의 진성 관객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박흥식 감독)는 주연배우들의 지명도를 생각할 때 관객몰이에 실패했고, 『눈물』(임상수 감독),『클럽 버터플라이』( 김재수 감독), 『그녀에게 잠들다』(박성일 감독)과 『7인의 새벽』(김주만 감독),『광시곡』(장훈감독)과 『천사몽』(박희준 감독)등도 처참한 성적표로 한국영화위의 위기감을 부채질 했다.

『친구』는 조폭영화의  모델로서 공간과 성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 아류들인 『신라의 달밤』,『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두사부일체』등을 만들어 냈다. 이 모든 영화들이 조폭을 영웅시 하거나 심지어 동경하게끔 만든다. 실제 청소년들은 이들을 모방하는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가 78개관 87만의 관객을 동원해 무사안일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운데 많은 영화들이 흥행참패 카페에서 조우했다. 기대했던 『화산고』도 66개관에서 59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다. 김기덕의『나쁜 남자』는 전국 7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2001년 관객은 서울기준 총 3,526만 7천여 명으로 작년에 비해 28.4%나 증가했다. 한국영화 상영일수는 의무상영일수 105.67일을 초과한 145.16일로 나타났다.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의 양대 국내 투자·배급사의 치열한 '배급전쟁'과 복합 상영관의 증가는 우리 영화의 산업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수의 스크린 확보로 우리영화들은 단기간에 엄청난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보통 40여개를 넘는 스크린은 『선물』(오기환 감독,42개),『흑수선』(배창호 감독,50개)『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41개) 등에서 보다시피 기대되는 영화들은 스크린 40개를 넘겼고 프린트 비용도 상당히 늘어난 셈이다. 2000년엔 6억5천만 원이던 편당 제작비는2001년엔 10억 원으로 껑충 뛴다. 이제 한국영화들은 작은 나라에서 만족하지 않고 수출을 염두에 두는 기업의 핵으로 자리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