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큰 물 만난 우리영화 대박을 쏘다

장코폴로 2009. 3. 24. 23:02


◆1999년


 큰 물 만난 우리영화 대박을 쏘다


『쉬리』의 대박으로 99년은 1월1일 『태양은 없다』부터 12월 24일 개봉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벌이 날다』까지 작년보다 5편이 적은 42 편이 개봉되었다.

 98년 영화 관람객 총수 5,017만 명중에서 한국 영화 관람객은 1258만 명으로 25.1%의 점유율을 보였는데,99년은 총 5,472만 명 관람객중 한국 영화 관람객이 2,172만 명으로 39.7%의 점유율을 보였다. 그러나 91년부터 98년까지 외국6개 직배사가 총 477편의 외화를 들여와 3600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본국으로 송환한 돈은 로열티 명목으로 1700억원에 이른다. 99년 외국영화는 60.6 %의 점유율을 보이며 1,734억의 수익을 올렸다.

 99년 세계 각국의 영화제작편수를 보면 인도 800여 편, 미국 570여 편, 일본 280여 편, 프랑스 160여 편, 한국이 50여 편(98년 극영화 43편) 전후이다.

 99년은 외부로부터 스크린쿼터 폐지 압박과 영화진흥위원회구성과 등급보류 판정시비와 같은 내부의 진통이 있었다. 프랑스가 27.4%,일본영화가 30.2%의 자국영화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한국영화는 시장 점유율은 40%를 바라보게 되었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액션 스릴러 『쉬리』를 빼면 결과는 어떨까?

 그런 가운데서도 『쉬리, 강제규, 2백 44만』,『 주유소 습격사건, 김상진 감독,95만』,『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명세,76만』, 『텔미 썸 딩, 장윤현,71만』은 서울 관객 70만 이상을 모았다.『태양은 없다, 김성수』, 『링, 김영빈』, 『유령, 민병천』, 『자귀모, 이광훈, 40만』, 『해피엔드, 정지우』도 30만 명을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이중 『쉬리』는 상영 119일째인 6월 11일 終映때 까지 15세 이상 서울 사람 중 30%가 관람했고, 전국 578만 명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타이타닉』의 470만 기록을 깬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국내 최고 흥행실적을 기록했던 『서편제,110만』의 기록도 깬 것이다.   관객극장 수입만 3백 56억이며 홍콩, 대만, 일본 등 해외 판매(1백 61만 달러, 약 20억)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쉬리』는 당해 10만 6천장의 비디오 판매 수익도 올렸다. 31억의 제작비가 든 이 영화는 한국 영화흥행기록을 연일 바꾸며 엄청난 화제를 만들어 냈다.

 98년 상위권에 올랐던 영화의 평균 관객 수는 42만 명이고 99년 65만 명에 가까이 되었다. 외국영화는 『미이라』가 1백 21만 명으로 1위, 2위 『매트릭스,91만 7천명』, 3위『식스 센스, 91만 7천명』을 동원했고,『스타워즈 에피소드1』,『타잔』,『러브레터』,『셰익스피어 인 러브』,『스크림』,『와일드 와일드 웨스트』가 그 뒤를 이었다.

 99년 우리영화는 15개국 이상에 60여 개의 필름이 6백만 불을 넘는 판매수익을 올렸다. 97년까지 우리영화수출은 20만 불에서 40만 불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98년에는 3백7만 불의 수입을 올렸다.『용가리』가 4백만 불에 사전 판매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거짓말』은 독일 배급사에 30만 불에 판매되고, 10여 개국 이상에 판매될 전망이었다.

 베니스영화제에는 장편 『거짓말, 장선우』, 단편 『냉장고, 안영석』과 『베이비, 임필성』이 초청되었고,23회 몬트리올영화제에 『만날 때까지, 조문진』이 출품되었고, 밴쿠버영화제에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비롯한 12개의 장․단편이 초청되었다.

 이제 한석규,심은하,전도연,이정재,박신양,최민식은 흥행스타로 부각되어 있고 이들에 대한 출연교섭도 당분간 증가할 추세였다.

 장진의 『간첩 리철진』은 남북관계를 코믹하게 관찰해본 작품이었고, 이영재 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은 산골소녀의 선생님 짝사랑 이야기를 향수위에 걸친 영화였다. 김유민의 『노랑머리』는 트리플 섹스 등의 용어를 낳으며 파격을 낳은 작품이다. 박종원의 『송어』,변영주의 『숨결』도 관심을 끈 작품이다. 배창호 감독의 『정』,장문일의 『행복한 장의사』도 독특한 형식으로 관심을 끈 작품이다. 

 영화 속에 용게리 밖에 안나오는 『용가리, 심형래 감독,40만』은 엄청난 홍보와 사전 띄우기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코미디로 끝나고 말았다.

 억대 개런티에다 100만 서울 관객 시대에 언론은 연일 한국영화의 미래에 해바라기 예찬론을 펼치기에 바빴다. 지금의 영화담당기자들이 당장 5년 후의 영화기자로 남아 있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의 거품예찬론을 마냥 수긍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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