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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장코폴로 2009. 3. 28. 13:39

공연/영화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회고담
(장석용의 비디오산책)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장석용 주간
 

 
제5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피아니스트'는 생의 나침반이 될 만큼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릇된 역사를 반추하고 있고, 전쟁이 예술가들의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킬 수 있는가를 클래식한 품위로 차분하게 전개해 내고 있다.
 
게토 체험자이며, 그 안에서 어머니를 잃은 연로한 감독이 만든 영화를 놓고 광란과 죽음의 살인파티가 열리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참혹한 추억의 창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우울과 은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피아니스트'는 스필먼을 뻔한 스토리에다 영화 속에서 지겹도록 보아왔던 수용소 캠프, 아우슈비츠와 같은 유대인 학살사를 부각시키며 전 인류가 영원히 공분 해야하는 문제임을 일깨운다. 끈질긴 이스라엘 민족성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피아니스트'가 유대인 주권 옹호 영화가 아닌 개인체험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스필먼은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국립 라디오방송국에 취직되었다. 1939년 9월, Luftwaffe(airweapon) 비행기는 폭탄을 투하하여 쇼팽의 'Nocturne in D minor, 디 마이너 야상곡'을 연주하던 국립 라디오 방송국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이후 6년 동안 스필먼은 전쟁의 공포를 체험하고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펠트의 호의도 체험하게 된다.
 
1946년 스필먼은 '죽음의 도시'를 출간하고 학살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체험한 믿을 수 없는 전쟁의 폭거를 낱낱이 고발한다. 이 하나 밖에 없는 세상의 희생자와 고문자의 삶, 어떻게 그런 방법이 자행되어질 수 있었는가를 냉정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공산정권에 의해 폐기처분된다. 1945년 방송이 재기되었을 때 스필먼은 6년전 중단되었던 '야상곡'을 격렬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곧 방송국의 뮤지컬 단장이 되었고, 콘서트에서 연주와 유럽과 미국에서도 솔로로 활동하였다. 브로니슬라브 그림플과 피아노 듀엣으로 전 세계에서 2천5백회 이상의 콘서트를 연주한 정력가였다.
 
스필먼은 폴란드 문화에서 대중적 수준을 견지하는 수많은 노래와 음악 곡을 작고하였다. 50년대에는 동요를 작곡했는데 1955년에 폴란드 작곡가협회는 그에게 상을 주었다. 후에 그의 클래식 작곡 재능은 젊은 청중을 위한 발레 곡과 다른 클래식 곡을 작곡하게 만들었다.1961년에 그는 폴란드 대중 작곡가협회 주최로 소포에서 국제가요제를 창설했다. 1964년 그는 폴란드 작곡가 아카데미 멤버가 되었다.
 
1998년 그의 아들 안드레이 스필먼은 독일 출판사로 하여금 출간을 맡길 아버지의 회고담이 담긴 원고를 발견한다.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으로 이어졌고,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출간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피아니스트'로 번역되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스필먼은 88세의 나이로 200년 7월 6일 사망했다.
 
1962년 '물 속의 칼'로 데뷔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피아니스트,2002'에서 이전의 소품을 벗어나 엑스트라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물량공세를 취하고 있다. 그 동안 재기를 꿈꾸면서 절치부심 하던 그는 출생에서 유년시절 그리고 장년시절 모두를 불확실성과 불신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이 작품 한 편으로 삶을 뜻깊게 정리한 듯 싶다.             
 
영화는 독일인들이 특히 잊고 싶어하는 게토이야기를 사실감 있게 재현한다.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을 거부했던 그가 유대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화, 즉 섬세한 디테일과 심리묘사를 오히려 객관적으로 그린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스필먼 가족이 나치의 수탈을 피해 귀중품을 숨기기 위해 상의하는 장면, 히틀러 보다 더 훌륭한 나치가 되고자 하는 폴란드 이웃들에 대한 의구심, 형제의 피를 빠는 유태인 나치 앞잡이 경찰, 모든 유대인들이 생존을 위해 받았던 비인간적 모멸감과 수모, 귀중한 존엄에 대한 훼손과 모든 것을 희생당한 사실이 서서히 관객에게 각인된다.
 
누구도 트레블링카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스필먼과 50만의 유대인들이 게토로 보내졌고, 조개 껍질 수만큼 많은 유대인들의 생명은 나치의 피스톨에 맡겨지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바르샤바에 생존해 있는 유대인은 불과 20여명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영국 작가 로날드 하우드卿과 공동각본을 쓰고 파벨 에델만을 촬영감독, 보이체크 키랄의 음악으로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다듬었다. 시나리오는 점령지 사람들의 제한된 행동에 관한 정확한 관찰을 토대로 한 것이기에 사실성이 뒷받침되었다.
 
'쉰들러 리스트'후 대학살의 쓰린 기억을 더듬는 영화들이 드문 가운데 탄생한 이 영화는 인간들이 저지른 구악과 아직도 치르고 있는 전쟁의 참혹상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게토의 생존자 로만 폴란스키는 냉정하고도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이 시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유년의 기억부터  創再(창재)․재현하며 할리우드産 영화와 차별화를 시도한다.    연기파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씬 레드 라인', '샘의 여름', '빵과 장미'등에서 주제에 밀착되는 강한 인상과 디테일한 부분까지 성실하게 소화해낸 바 있다. 브로디는 바르샤바 게토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투쟁과 게토의 역사를 체험한 천재 피아니스트 스필먼 역을 훌륭히 해내었다. 폴란드계 유대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그런 이미지 메이커였다. 
 
감독은 전후 집필된 이 원전의 의미를 강화하여 영화적 이미지 업을 구상했다. 사실, 감독은 스필먼의 성격뿐만 아니라 감성 그 자체를 연기할 연기자를 찿고 있었다. 영국에서 스필먼 이미지의 연기자는 찿기 힘들었다. 유창한 영어에다 어느 정도 영화적 인지도를 가진 연기자는 우연히도 미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스필먼은 영국 배우 립맨과 프랭크 핀레이가 역할을 맡은 부모들이 게토에서 트레블링카 죽음의 수용소까지 끌려가는 것을 보지만 자신은 정 많은 폴란드인의 도움으로 폭격으로 웅덩이가 된 곳에 은신처를 만든다. 나중에 그의 음악성을 높이 산 독일군 장교(토마스 크레취만)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폐허 속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아끼며 생존을 해 오던 천재 피아니스트가 독일군 장교에게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체포 대신 몰래 그를 몇 주 동안 숨겨주는 선행을 베푼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로부터의 도움은 약간의 의외성을 띈다. 영화의 전반부에 스필먼의 생존을 위한 영웅적 행위는 역동성을 띄고있다.     
 
폴란스키 감독은 3편의 출연, 10편의 연출, 8편의 대본, 1편의 제작 경험이 말해주듯 2002년에 조련한 2시간 28분의 대 서사적 드라마 '피아니스트'는 우정있는 설복이다.
 
감독은 자신이 체험했던 나치의 바르샤바 점령 기를 다룬 작품을 만들 날을 손꼽아 오면서 살아왔다. 69세의 노감독은 '테스'이후 최우수 작품인 '피아니스트'를 만들면서 그 꿈을 성취했다. '피아니스트'는 현재의 종교적 긴장과 반 유대운동에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 
 
평론가들은 '물 속의 칼', '차이나타운'과 '로즈 마리의 베이비' 같은 초기의 그의 작품성에 비해 떨어진 그 간의 작업을 비교하면서, 홀로코스트의 교훈은 이해하지만 이 작품이 독창성 면에서는 떨어진다고 입을 모은 바 있다.
 
블라디슬라브 스필만의  1946년작 <죽음의 도시>를 토대로 만든 '피아니스트'는 나치 점령 기를 영화로 흔히 보아온 우리로서는 특별한 그 무엇이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답답한 감을 얻을 뿐이다. 그러나 폴란스키는 홀로코스트 스토리를 설명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이 홀로코스트 클래식이 타 감독과 남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감독 자신이 어린 나이에 2년 동안 게토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영화의 디테일은 그의 기억으로부터 살아나고 있다. 감독은 '피아니스트'를 통해 궁극적으로 민족 간의 대화해, 항구적인 평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고,1968년에 심사위원 이었으며, 칸에 선보인 다섯 번째 영화가 '피아니스트'이다. 폴란스키는 유대인의 인도적 문제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1977년 L. A의 잭 니콜슨 집에서 13세 소녀 강간 혐의를 받아온 적이 있다. 미국을 도망쳐서 유럽에서 활동해온 그가 受賞과 비슷한 시기에 모든 혐의가 벗어졌고, 이제 미국에 돌아갈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겹 경사가 난 것이다. 이 영화가 조국 폴란드를 대변하는 영화로 인정받기에 자랑스럽게 여기며,  몹 신을 실감나게 해준 수많은 폴란드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음악 담당은 보이체크 키랄 인데, 그는 전에는 폴란드, 지금은 우크라이나인 르오프에서 1932년 7월 17일에 태어났다. 최고 심포니 작곡자중의 한 명인 그는  블라디슬라바 마르키에비초노바와 더불어 피아노를, 카토비체에 있는 국립 고등음악학교에서 보레슬라바 사벨스키와 작곡을 공부했다. 졸업 후 프랑스 정부 장학금으로 지금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는 파리에서 나디아 보랑게와 공부했다.
 
키랄은 수 많은 국제작곡상을 수상했다. 1960년 보스턴 릴리 보랑게 기념후원상, 1983년 뉴욕 저지코프스키 재단 상,1980년 국립 1등급상, 1967년․75년 과 76년의 문화부장관상,75년 폴란드 작곡가협회상, 1992년 LA에서 코폴라의 '드라큘라'로 ASCAP음악상등을 수상한 천재적인 작곡가이다.
 
키랄은  5․60년대에 데뷔한 작곡가 세대에 속한다. 고레키,펜데레키,와 노장 쉐퍼 자로넥 편에서 키랄은 제1회 바르샤바 가을 페스티발에서 아방가르드 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품위와 현대성을 잃지는 않았다.
 
키랄의 작품들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을 포함한 많은 국제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어 지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크지스토프 자누시, 안제이 바이다, 크지스토프 키에슬롭스키, 폴 그리모어, 프란시스 포드 코포라, 로만 폴란스키와 음악 작업을 해온 것이다.
 
그의 작업은 품위와 정서를 지키면서, 씬의 전환에 따라 감정을 이끄는 작업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그의 풀 스코어의 근간은 스필만의 선호곡이 모델이 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나치 점령의 그 끔찍한 6년 간의 기록은 제3제국이 폴란드에 재 침공한 듯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실 폴란스키는 파리에서 태어난 유태계 폴란드인 이다.'피아니스트'는"내 기억을 인용한 개인적인 영화다"라고 한 감독의 말 그대로 자신이 투영된 자전적 영화이다.
 
과거 10여년 동안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유대인 자신들의 전형적인 장르가 되어왔다.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 '홀로 키치,holo kitsch(저급한 홀로코스트物) 라고 부르는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눈물을 짜내었다. 사실, 스필먼의 자서전은 두드러지게 감상적인 것은 아니다.  스필먼의 자서전에는 선한 사람들과 악인들, 영웅적인 사람들과 기회주의자들,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사람들, 폴란드인 들과 독일인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이제 '피아니스트'는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처럼 잔잔하게 우리 앞에 서 있다. 음악 선곡에 대한 답도 나와 있고, 쇼팽의 발라드가 반복되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자신의 연주를 녹음하고 싶다던 연주가 시작되고, 피혜한 거리를 헤메던 주인공들도 그 선율에 영혼을 구제 받을 것 같다. 이렇게 로만 폴란스키는 객관적 통찰력으로 『피아노』에서 영화와 음악과의 만남, 영화 속의 음악의 힘, 특히 피아노의 힘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