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무네미 동산과 풍납토성
나의 존재를 있게 해준 후암동 독일문화원에서 군산동고 학생지도를 마치고 서울의 독일어 교사 자리를 살펴보았다. 경희여고에서는 4월말까지 편의를 봐주겠다는 전갈이 왔다. 신일고에서는 안병택 교감님께서 전화를 해주셨고, 고교 은사이신 이종록 독일어 선생님은 저를 추천하셨다. 이틑 날 명동 신일빌딩에서 이사장 면담이 있었다.
故 이봉수 이사장님께서는 “자네 재주가 많겠네.”라는 말씀을 하시고 바로 임용 지시를 내리셨다. 삼년간의 군산생활을 추억으로 하고 서울 신일고 무네미 동산으로 전근을 하게 된 것이다. 아쉬움과 회한이 쌓이고 다시 서울에다 둥지를 튼 것이다. 이때부터 다시 연극연출과 영화와의 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84년의 서울 미아리는 지하철 4호선 공사로 도로는 험상궂은 몰골로 진흙탕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봉수 이사장님의 자제 분인 현 이세웅 이사장님께서는 국립발레단 이사장, 예술의 전당 이사장 등을 맡으시며 예술에 조예가 많으신 분이다.
정신없이 상경한 나는 신학기 준비에 분주하였고, 고교 2학년 영어선생으로 서울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강을 끼고 살아온 나는 뚝섬에서 풍납동으로 거주지가 바뀌게 되었고, 할머니가 해주시던 밥,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다시 처가 해주는 밥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군산에서 만난 나명희와의 결혼식이 1984년 4월 8일 천호동 천호예식장에서 있었다.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 장관 사회,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하객대표, 변인식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이 주례를 본 단출한 결혼식이었다. 이후 서울생활의 상당부분을 이분들과 친교하면서 보냈다.
KBS PD 최길규는 신혼여행지로 수안보 『전우』촬영장 근처에 숙소를 주선해 주었다. 차가 귀했던 시절 정봉일 형은 수안보까지 신혼부부를 태워주었다. 서울에 오자 국방부의 촬영팀, 『대장금』의 상원내시 신국 등 그리운 얼굴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1984년 전국영화관은 소극장 184관을 포함하여 534관이었고, 81편의 방화가 제작되었다. 42,917,379명의 총관람객중 방화관객은 16,886,914명을 동원했다. 외화편수는 24편에 불과했다. 임권택 감독의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 이두용 감독의 『뽕』등이 화제작으로 부상된 가운데, 이장호의 『무릎과 무릎사이』,배창호의 『깊고 푸른 밤』등의 멜로드라마는 여전히 영화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80년대의 멜로드라마 속 사극들은 성과 역사를 적절히 섞고 있으며, 이로써 향토 에로물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종교적 색채의 영화들로 유현목 감독은 『초대받은 성웅들』로 최양욱, 김대건의 포교활동을 그렸으며, 강대진 감독은 『화평의 길』로 기독교인의 삶을, 최인현 감독의 『소망』은 이승훈의 가톨릭 순교를 그렸고 순수의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특히 신인으로 하명중은 일제하의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땡볕』으로, 김현명은 한 수녀의 정신적 육체적 방황을 그린 『아가다』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부각시켰다.
글밭에 얼굴을 본격적인 계기는 탤런트 전영수씨의 권유로 <탤런트>지에 『설중매』등의 평과 방송평,『이벤트』지의 창간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8월말 들어 비가 본격적으로 내렸고, 드디어 피난길, 근처 토성국민학교로 대피하는 사태가가 벌어졌다. 9월1일부터 3일간은 꼼짝할 수 없었다. 뚝섬에서 물난리에 이어 세 번째 맞는 물난리였다. 귀중한 사진들이 못쓰게 되었고, 풍납토성을 지키던 모래주머니들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거의 지붕 끝까지 차온 물위로 고무보트들과 스티로폼이 배를 대신하고 있었다. 호된 신고식과 더불어 무장된 예술사랑은 본격적 기치를 올릴 준비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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