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완산벌 벚꽃에 새겨진 꼬방동민들의 바보선언

장코폴로 2009. 2. 19. 11:08

◆1982년


완산벌 벚꽃에 새겨진 꼬방동민들의 바보선언


 빛 고을의 처절한 아픔과 처연한 슬픔이 막걸리 잔 위로 허무를 투영시키는 가운데 봄꽃은 피었다. 장항 제련소의 긴 굴뚝을 바라보며 바닷가에는 아픔을 삭혀낸 어물전 상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풍 때는 피로 물든 진달래를 바라보며 시골학교 아이들은 맨손으로 독사도 잡고 술도 한잔씩 했다. 술 취한 아이들은 경운기에 실려 귀가를 했다.

 영어선생 조윤숙, 수학의 진현심, 생물의 김신자, 지리의 김빈희, 양호의 김경복은 내 인생에서 여성에 무지했고 여성의 심리와 마음을 읽게 해주었던 귀한 동지들이었다. 바닷가의 바람은 사납게 남성의 기개를 살려주는 전령들이었다.

 가끔 내초도의 바닷내음과 쌍치의 촌내음이 그리워 혼자 그곳으로 가다보면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오지 않는 새벽에 지친 감독들은 시대정신을 고양시키는 작품생산은 고사하고 저질이라 불리는 영화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삼베를 사랑하는 『애마부인』의 정인엽은 31만 5,738명을 동원 흥행 베스트를 차지했다. 별 볼 것 없는 영화들에 식상했던 식자들은 독서와 예술 창작으로 우울을 달랬다.

 80년 12월 1일부터 불기 시작한 칼라 TV 바람은 시골다방까지 불어왔고, 82년 프로야구의  탄생은 피를 여과시키는 필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82년의 히트작은 정광석 촬영,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꼬방동네 사람들』로 한국영화 베스트 50에 끼이는 작품이다. 이동철의 논픽션 소설로 달동네의 풍경과 서러움을 대변하는 영화는 한국 리얼리즘을 읽어내는 관통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김희라, 안성기, 김보연이 출연한 이 영화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벌이는 스토리가 가히 달동네의 애환이라 하기에 족하다.

 이영실은 화제의『반노』로 외설문제를 또 창출했다. 80년대 초는 리얼리즘 영화들이 탄생할 조짐을 보였고, 인간의 내면심리들을 파헤치는 소재의 영화들이 대거 등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박철수의 『들개』는 들깨처럼 고소하게 여성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다. 이보희, 김명곤이 주연한 이장호의 『바보선언』은 부조리한 현대 속에서 상실되어가는 인간성을 코믹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19회 시카고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임권택의 『안개마을』,정진우의 『백구야 훨훨 나지마라』,이원세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당시의 기존영화의 포맷이었다면 비 제도권의 영화들은 80년대를 일깨우며 개척했다. 안성기, 정윤희가 주연한『안개마을』은 이문열의 「익명의 섬」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집단에서의 소외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하재영, 나영희 주연의『백구야 훨훨 나지마라』는 뱃사람과 항구의 술집아가씨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염전이 공간적 무대이고, 외부 자본가와 가난한 현지인의 대립을 그린 영화이다. 

 제2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내지 못한 가운데 이장호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가 작품상,  『꼬방동네 사람들』의 김보연이 여우주연상, 『철인들, 배창호 감독』의 안성기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삐에로와 국화』,『아벤고 공수군단』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원작 소설의 인기에 편승해 체면치레한 작품들이 원작과 영화와의 차이를 부각시키지 못한 채 늦가을 지천으로 깔린 단풍과 낙엽은 침독(沈讀)으로 나를 몰아갔다.  

 59년생 완도처녀 이보희가 이장호 감독에게 픽업되어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데뷔한 해가 바로 82년이다. 김기영 감독은 『자유처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시나리오 작가 유동훈도 『야생마』로 메가폰을 잡았다. 겨울, 군산을 곁에 두고, 군산과의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외로움 증을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다.

 서울이라 해도 따스하게 나를 반겨줄 공간과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만들어온 모든 세계에서 비봉(飛鳳)을 꿈꾸어왔던 나는 바다와 여인, 술과 독서, 미래와 여건이라는 명제들로 군산 백작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