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팔공 공화국의 아침

장코폴로 2009. 2. 10. 08:10

◆1980년


 팔공 공화국의 아침


 1980년 제 5공화국이 닻을 올렸다. 영화법에서 출발한 새로운 변모는 해방신학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사실적인 영상미학의 세계를 보여준 유현목의 『사람의 아들』,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등으로 나타났다. 신과 인간의 구원문제, 탈출구 없는 현실 문제를 푸는 冒頭作(모두작)으로 적절한 작품이었다.

 당대의 문제작 두 편이 풀어 젖힌 80년대의 바람은 79년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딛고 80년 3龍角逐(3룡각축)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것이어서, 이어질 작품들이 태동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둥지와 물꼬를 터준 작품이었다.

 역시 유현목은 영화적 정신적 지주로 현장에서 같이 뛰는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싸울 수 있게 만들어준 후원자였고, 어려울 때 비빌 수 있는 언덕이었다.

 전국의 영화관 수는 79년 472관에서 80년 466관 81년 403관으로 점차 감소되고 있었다. 해마다 20~30개 감소하던 영화관들은 소극장들이 생기고 나서부터 80년 후반에 점차 증가하여 지금은 복합 상영관이 스크린 수를 보태면서 800여개에 달한다.

 1980년 우리영화는 75편이 제작되었고, 연간 입장총인원은 53,770,415명, 우리영화는 25,429,699명, 외화입장인원 28,340,000명으로 영화제작의 탐색기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어지는 흥행실패와 정책적 통제와 검열의 긴 그늘은 우리영화의 저급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과감한 에로티시즘 영화가 등장할 조짐과 ?어렵게 존재해 있는 것, 왜곡된 역사에 가려진 것은 알리겠다는 리얼리즘영화의 전조가 보였다. 개방지향은 결국 88올림픽 유치와 같은 대사와 이어지고, 그 잔치판에 공산권이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 가는 길목의 방향타, 태풍의 눈을 한 것이 80년이었다.

 국책영화였던 군사, 반공, 계몽 영화 등은 긴 역사의 그림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영화에 대한 향수인가,『쉬리』가 뛰어 노는 『공동경비구역』안의 『친구』는 모두 성공이라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았다.

 이데올로기 전쟁의 희생자로, 호구지책으로 영화계에  진입한  임권택 감독은 『짝코』로 여전히 반공과 이념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어쩔 수 없이 부역이나 인민군 또는 인공에 이롭게 한 방계 가족은 공무원은  물론 취업에도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유현목의 조감독을 거쳐 25세에 영화감독이 된 정진우 감독은 『심봤다,79』,『뻐꾸기도 밤에 우는가,80』,『앵무새 몸으로 울었다,81』등 에로티시즘 영화  연출에 몰두하였다.

 이두용은 젊은 무녀의 신통력을 빌어 아버지의 복수극을 그린 『피막』,『최후의 증인』으로 80년을 지켰다. 이장호는 지속적 히트작을 조련하는 당대의 흥행감독이었다. 이 감독의 소재는 현실 비판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억눌린 민중들은 그의 연출관에 박수를 보냈고, 10여 편 연속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도록 성원을 보냈다.

 정소영의 『너는 내 운명』,변장호의 『미워도 다시 한번, 80』등이 아줌마들의 눈물짜내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한국영화의 저 편, 세칭 80년대의 신인감독들은 자신이 펼칠 무대를 향해 충무로로 맹진을 하고 있었다.

 육사 연병장에서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펼쳐지고, 장교식당에서 칼라 TV가 영내에 배치되고 있었다. 군 생활과 연결된 나의 연극은 계속되었다. 오스카 와일더의 『꽃은 나비를 원한다,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가 심회만 선배의 연출로 세실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예술계에 종사하는 친구들과의 교류도 이어졌다. 나는 방위 특명1호로 육사에서 처음으로 해제의 기쁨을 맛보았다. 독서와 창작으로 이어진 뚝섬생활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