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제5공화국 출범과 물꼬 튼 영화세상

장코폴로 2009. 2. 11. 07:54

◆1980년


제5공화국 출범과 물꼬 튼 영화세상


  1980년, 장석용의 2기 인생이 시작된다. 군 생활을 끝내고, 독서와 영화판을 기웃거리던 나는 주변인으로서 나의 삶을 시작한다. 유현목 감독님이 내게 주선한 자리는 테렌스 영 감독의 한국전을 다룬 대작 『오, 인천,82』 현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었다. 본격 영화 현장체험이 시작된 것이다. 『장군의 수염,1968,103분』을 만든 이성구 감독에게 유감독님이 나를 천거하게 되었고 나는 소품파트에서 가벼운 영어로 통역을 하게 되었다.

 상하이 태생 영국 감독 테렌스 영은 1930년대 중반부터 코미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당신과의 하룻밤,48년』이란 영화로 입봉한 사람이다. 댄스 영화 『검은 타이즈』로 수상을 하기도 했지만 곧 스릴러 영화 전문가로 변신했다.

 1962년 첫 007시리즈 『닥터 노』를 연출하면서 흥행 감독으로 급부상한다. 이언 플레밍 소설을 영화화한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와 함께 호흡을 맞춘 이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위기일발,1963』, 『선더볼,1965』를 연이어 연출했다. 영은 제임스 본드 특유의 어투와 제스처, 액션과 상황 등 007시리즈의 전형을 만들어낸 감독이다.

 영화 팀들은 하이야트 호텔에서 진을 쳤다. 『닥터 지바고』의 오마 샤리프, 재클린 비세트등 쟁쟁한 배우들이 한국에서 촬영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이슈가 되었으나 통일교 자본으로 제작되었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평론가들의 넘버 10을 기록해 당해연도 최악의 영화로 기록되었다. 평론가 한재수 씨도 통역관으로 이 팀에 합류했고, 결국 이 끝 발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한인방송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가끔 들었다.

 당시 『진학』사에서 근무하던 원로평론가 최백산 씨는 산 호세에 거주하는데 故 이영일 선생이 부탁해 94년 겨울 허름한 명동 여관에서 원고 관계로 만나, 한재수 씨의 근황을 물어볼 시간이 있었다.

 유감독의 『사람의 아들』과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이 80년대로 가는 버팀목이 된 가운데 80년은 466개의 극장들이 75편 제작된 우리영화와 외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연간 입장총인원은 53,770,415명 이중 우리영화 입장인원은 25,429,688명이었다.

 임권택의 『짝코』,정진우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이두용의 『최후의 증인』과 『피막』등이 주목받는 가운데 변장호의 『미워도 다시 한번 ?80』, 정소영의 『너는 내 운명』등이 여전히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었다.       

  연극을 하는 친구들인 고인배, 임언섭, 방송국에 입사한 최길규, 정을영, 박장순, 엄기백, 국방부 영화에 나가던 오중근, 이경배, 이영실 감독, 76극단의 기국서, 기주봉, 삼일로 창고 극장의 서영일, 장희용, 배태일, 분장사 장시성, 영원한 연극 매니아 안경숙, 인형극의 김형석, 연극배우 윤석, 엄경환, 조명의 조갑중, 이상한 연출가 이창기, 엄한얼(『그물에 걸린 배』,주로 검열에 걸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을 씀, ‘빛과 소금’대표, 극단 ‘앙띠’대표), 연극선배 여무영, 이문수, 윤석 등이 바다의 물고기들처럼 그들의 꿈을 안고 방황과 좌절, 성공과 입신, 흥망의 수렁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어쨌든 지긋지긋했던 70년대는 가고 80년대의 첫 바람은 우리 예술지향의 동지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바람불어 좋은 날』이 그 전령이 되었다. 이 영화는 우리의 숨통을 트게 해주는 영화였다. 이장호, 역경을 딛고 다시 재기한 것이다. 그는 한 시대의 전사였던 것이다.

 ‘빛과 소금’ 사무실이 있던 청계천이 복원되고, 그리운 친구와 아우, 벗들이 연어처럼 모여들 때쯤이면 그네들은 잊혀진 80년대의 추억과 낭만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 가을은 그래서 80년의 아침을 기억해 내기에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