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바람이여 안개를…

장코폴로 2009. 2. 8. 10:57

◆1979년


 바람이여 안개를…


 『겨울여자』가 50만을 돌파했다는 기사가 연예면의 톱을 장식하는 가운데, 요즈음과 달리 극장을 잡지 못한 영화가 90편이나 되었다. 『난중일기』가 꿈틀되고 신성일 씨가 9편 출연으로 최다기록에 오르던 1978년. 늦겨울, 최은희 씨 홍콩실종사건이 부각되고 영화사들은 여전히 자사의 이익을 챙기면서 신규허가를 반대하고 있었다.

 2월 18일. 나의 대학 졸업식에 모처럼 가족 친지들이 모여들었다. 으레 아버지는 오시질 않았고, 시간이 있는 친지들이 모였다. 고종 재임 누나와 일본 관광객들을 상대해야했던 작은 방에 세 들어 살던 누나들, 어머니…  차가운 흑석동 바람은 졸업식장을 훑어갔다. 희망도 꿈도 없이 거친 야생으로 모는 현실은 더욱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졸업을 해도 타의적 군 재수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비참하기만 했다. 호적상 나이가 미달된 까닭에 민방위, 그것을 넘어 실역 미필병으로 방위병에게 무참히 깨지는 고행을 겪어야 했다. 해병대와 해군 장교의 꿈은 본적에서 서류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다시 극장을 찾고, 스탕달의 『적과 흑』을 탐독하며 70년대 말의 우울을 달랬다.

 영화수출은 미미한 가운데 20대 이하가 영화관객의 80%를 웃돌고 있었다. 수입가 편당 10만 불짜리 외화는 여전히 강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방화관람료는 4년째 300원으로 고정되었다. 9월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심포지엄을 열어 우리영화의 질적 저하를 질타하고 나섰다.

  가끔 직장에 다니는 여동생에게서 용돈을 타 쓰는 생활을 하는 비참한 신세는 여전하였다. 그래도 용기를 주던 친구들도 직업 전선에서는 풍전등화일 수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힘을 주며 졸업식에도 참석했던 여자친구 윤호와의 교제도 활발할 리 없었다. 혜화여고 출신으로 연기지망생이던 그녀도 유신의 늪에 빠졌는지 면벽 독서에 빠져 있었다.

 제24회 아시아영화제는 행사에만 급급했다는  핀잔을 받았다. 개봉관의 인기프로 입장권의 40%~70%가 암표 상에 의해 40원~50원 웃돈에 팔렸는데, 동생 석구의 동성고 친구 무종의 삼촌이 암표상 한다는 얘기도 재미있게 들려왔다. 

 TV는 점차 증가하였고, 비례하여 영화관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영화 외에도 오락들이 늘어났지만 아직 통속의 벽을 깨지 못한 영화들이 즐비하였다. 117편의 영화제작편수에 488관의 극장,7천 398만 8천 36명의 관객은 동시상영을 했던 나도 포함된 숫자이다.

 문예물로서 김수용의 『웃음소리』,『화조』,『망명의 늪』,고영남의 『꽃신』,『소나기』,임권택의 『족보』등이 겨우 한국영화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변장호의 『O양의 아파트』나 박태호의 『나는 77번 아가씨』등은 아직도 여성의 치마에 호소하고 있었고, 최하원의 『황혼』,문여송의 『아스팔트위의 여자』, 이형표의 『배우수업』등은 방향타를 상실하고 겉돌고 있었다.

  국책영화들은 정진우 감독의 『율곡과 신사임당』, 장일호 감독의 『팔만대장경』, 최인현감독의 『세종대왕』등을 들 수 있고, 고영남의 『비목』, 김준호의 『슬픔은 이제 그만』,강대진의 『사랑의 뿌리』,이두용의 『경찰관, 대종상최우수작품상』등은 점잖은 영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면서도 관객의 폭발적 호응은 얻질 못했다.

 『속 별들의 고향』이 고전하는 가운데 외화가 연말연시 특수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관객의 약 70%가 외화를 선호하고 있지만 우리영화도 모처럼 관객이 증가하고, 신규영화사가 생기고 테크닉을 생각하게 되어서 관객 3만 명 넘는 영화가 49편이나 되었다. 몇 년 사이에 일어난 부흥의 메시지였다. 우리영화 흥행1위 작품은 『내가 버린 여자』,외화는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였다. 당시 상영되었던 외화들은 『죠스』,『25시』,『스타탄생』,『스타워즈』,『죠이』,『닥터 지바고』등이다. 대종상영화제가 17회 되던 해, 유현목 감독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