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동서영화동우회' 발족과 영화운동의 태동

장코폴로 2009. 2. 6. 10:29

ꡐ동서영화동우회ꡑ 발족과 영화운동의 태동


 77년 봄, 장남준 교수 방에는 파이프 담배 냄새가 구수하게 배어 있었다. 이미 예술계로 진출하리라고 진단받은 나와  독일어과 교수 라이너 베커씨 사이에 한국영화의 매너리즘과 여성학대, 질적저하 등을 토론하던 중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영화단체를 발족하기로 뜻을 모았다. 다양한 준비과정을 거쳐, 회장에 유현목 감독, 부회장에 변인식 평론가, 사무국장에 감독지망생 장석용으로 진영을 갖추었다.

 많은 청년 영화학도들이 모여들었다. 프랑스 문화원의 감상적 차원을 떠나 이론과 실천의 기치를 내세운 이 단체는 한국영화 운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상 전환을 모색케 해준 소중한 문화 메신저였다. ꡐ씨네 21ꡑ 과의 인터뷰에서 자기네들이 창립했다는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교수들을 보고 ꡐ세상 참 더럽다ꡑ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역사를 왜곡하고도 진실을 운운하는 후배들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할까?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프랑스의 앙리 랑글로와가 체계적으로 영화 시네마테크운동을 전개한 것과 달리 부족한 영화 텍스트와 참고자료․한글번역본의 태부족, 원서의 고갈, 재정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우리는 외국 문화원의 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보았다. 한국영화의 만개는 쉽지 않았고, 고군분투할 수 밖에 없었다. 참담한 사회적 현실에서 기성세대와의 영화 단절을 부르짖지 못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만든 ꡐ동서영화ꡑ회보는 나름대로 진가를 발휘하였다.

 편집장인 나는 독일영화의 부흥과 영화제 수상을 중심으로 책을 꾸몄다. 이 팜프렛은 이후 『프레임 ½4』로 체제가 바뀌었고 가치의 전복자 전양준 ,강한섭, 정성일 등이 주축이었다.    이상한 것은 독일문화원 출신 멤버들이 영화계․학계․현장에 남아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영화작업을 하는데 반해 프랑스 문화원 출신들은 영화계에 찿아 보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우리가 독일문화원에서 본 영화들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노스페라투』와 같은 초창기 표현주의 계열의 영화를 비롯하여,ꡐPapaꡑs Kino ist totꡑ(독일영화는 죽었다)를 주창하여 뉴 저먼 시네마를 주창하고 독일 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알렉산더 클루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초크, 빔 벤더스 등의 작품들 이었다.

 참으로 행복했던 영청(영화청년)시절이었다. 하길종 감독의 『병사의 제전』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평론가 한재수씨가 주도한 남산 외인아파트에서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아서팬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마이크 니콜스의 『졸업』, 죠지 로이힐의 『내일을 향해 쏴라』등을 비롯한 미국의 어메리칸 뉴시네마에 대한 작품해설과 감상도 있었다.

 사회비판적 작품들이 극영화에 본격 도입되던 미국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그래서 반 윤리적인 범죄자나 사회 도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8mm 포르노그래피도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영화들과 비교하며 마냥 그 표현의 자유가 부러울 뿐이었다.    당시로 엄청나게 진보한 영화수준을 보고 한국영화를 외곽에서 껴안고 있던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동시대 어학수재로 불리우던 나는 제롬 로빈스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3일만에 번역하여 유관순 기념관에 공연케 하는데 일조 하기도 하였다.

 임동진과 윤석화, 박일규가 주연으로 나오는 이 작품은 78년 4월 3일부터 8일까지 유관순 기념관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일화로는 필리핀에서 해외상영되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나의 섭외로 미국문화원에서 상영케하고 공연장의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관객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풀 스코어가 없어서 헤매이던 추억과 영락교회 합창단을 지휘하던 모 대학 졸업반 학생의 폭음이 기억난다.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친 세상의 파편들 위로 투영된 젊은 날의 초상들은 잔잔한 감동이 되고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세월 속의 이정표가 되어 있다. 그 어려운 시절의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열정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