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금욕의 터널을 넘어 명랑 하이틴들의 준동

장코폴로 2009. 2. 5. 09:46

◆1976년


 금욕의 터널을 넘어 명랑 하이틴들의 준동


 무엇으로도 분출시킬 수 없었던 샌드위치 세대들인 우리들의 공간은 중대 봅스트 홀의 좁은 복도만큼이나 살벌한 듯 보였다. 놀이나 공부에도 동반자적 동지애가 발휘되던 때였다. 낭만이래야 통기타와 생맥주로 대별되던 시대의 우울은 지속되고 있었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도향, 양희은 등은 레코드 엘피판의 표지를 여전히 장식하고 있었다.  

 특히 대학 주변의 막걸리 집들도 맥주와 주종을 양분시키고 있었다. 특히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먹는 우리들이 즐기기에는 도수 낮은 술들이 안성맞춤이었다. 조금 끼 있는 학생들은 레코드를 취입하거나 연극공부, 영화출연 등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날리던 영화사들은 화천공사, 동아수출공사, 태창영화, 한진흥업, 합동영화, 동아흥행,우진필름, 우성사, 연방영화사 등이었다. 주로 계몽영화, 최루성 영화, 가벼운 코미디 물들이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대학생들은 오락성 외화나 원작이 잘 알려진 있는 아트필름들을 선호하였다. 외화 수입을 위해 함량미달의 영화를 다량으로 만들어 내어야하는 처참한 상황은 관객들을 점점 한국영화 혐오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봄이나 가을엔 학예회를 떠올리는 도식적인 행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서투르고 비릿한 어설픔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딸기 밭, 포도밭 낭만 즐기기, 동구릉을 비롯한 능이나 고궁 산책, 당구장 드나들기, 영화보기 등이 범생들의 기본 메뉴였다. 독일어도 제대로 못하고 독일문학들은 내게 막연한 공포와 자신감들을 점차 앗아갔다.

 정영숙, 신구 주연의 『간난이, 박태원 감독』을 선두로 이낙훈, 태현실의 『판문점 도끼살인, 이영우 감독』까지 개봉된 영화들은 작품 수에 비해 예술성은 빛이 바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갈가 먹은 나뭇잎 위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1976년 홍의봉 감독의 『캘리포니아 90006』(미국 불법 체류 한국인의 고뇌와 처절한 삶을 그린 작품), 김정현 감독의 『울면 바보야』, 박우상 감독의 『죽음의 승부』가 데뷔작으로 선보였다.

 1966년 『간첩작전』데뷔한 문여송(일본대학 영화과졸) 감독의 『진짜 진짜 잊지마』는 이덕화, 임예진을 청춘스타로 만들면서, 고답적인 캠퍼스를 변모시키며 하이틴영화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최훈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자 1971년 『미워도 안녕』으로 데뷔한 석래명 감독은 『고교얄개, 조흔파 원작』으로 258,978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돌파하였다. 이에 가세한 김응천 감독은 『소녀의 기도』,『푸른 교실』로 하이틴 영화 삼총사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들 세 감독은 청춘物 전성기를 지나 뚜렷한 작품을 못 보이고 있다. 

 하이틴영화의 단골배우들은 이덕화, 이승현, 김정훈, 진유영, 임예진, 김보연, 강주희 등이었다. 그러나 아역스타들의 요즈음 삶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 해 『성춘향전』으로 데뷔한 장미희는 이후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희곡작가 엄한일이 만든 ‘빛과 소금회’를 알게 된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하나 터득했다. 가난한 연극쟁이들이 펼쳐가는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짜증나고 절대 절명의 고독의 언저리에 놓여있었다.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대가 만들어 버린 설국은 눈이 멈출 줄 몰랐다. 언제 서울의 봄은 오는가? 언제 한국의 봄은 오는가? 사욕 없이 오로지 봄을 가리던 때였다. 정치도 돈도 그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고 순수와 열정, 의리와 협동의 끈끈한 정은 연극작업 만큼이나 훈훈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76년은 눈에 띄는 수작이 부족한 가운데 설태호 감독의 『원산공작』(남궁원, 황해 주연),임원식 감독의『어머니』(윤연경, 이순재 주연),이 버텨준 한 해였다. 전쟁의 후유증과 가족의  사랑을 경전처럼 외워야하는 시절의 추억은 투박하게 묘사되지만 진실의 깊이는 심도촬영이다. 핀 포커스는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