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샘 옆 미술관

클래식 리듬으로 조형예술을 어우르는 신동헌(申東憲)화백

장코폴로 2009. 2. 3. 10:43

        클래식 리듬으로 조형예술을 어우르는 신동헌(申東憲)화백


 기축년 09년을 기준으로 한국 최초의 만화영화 『홍길동』의 감독 신동헌(83) 화백은 한국 나이로 여든 넷 이다. 백발에 베레모, 주로 편안한 평상복과 편한 구두를 즐겨 착용하고, 故 신동우(1936~94) 화백의 친형인 이 분은 한국이 낳은 보석 같은 존재이다. ‘모나지 않고 서로 어울려 거리낌 없이 살아야 평생 젊게 살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들끓는다.

  물리학자가 되기를 꿈꾸기도하면서 서울대 예과 갑류(이공계)에 입학, 건축과로 진학했지만 예술과는 거리가 먼 공과적인 스타일의 학교인지라, 6·25전쟁 이후 복학을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행히도 그의 음악을 즐기고 그림을 감상하고 그의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를 기분 좋게 해주는 와이당은 연령에 관계없이 듣고 싶어 하는 교양강좌이다. 여유와 풍자로 험난한 인생을 헤쳐 온 신화백은 아직도 뎃생에 여념이 없다. 스케치북만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그림을 그리기를 즐긴다. 어느 때는 세미나에서 신발만 그려서 그 사람의 특징을 파악해내는 코믹함을 보여주었다. 애연가에다 맥주를 즐기는 그는 고급양주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내놓는다. 그래서 모임에서 양주를 접대하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대한민국 최고, 최다의 뎃생 전문가는 군산, 안동, 예천, 영월 등 어디를 가나 스케치북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넉살스런 입담, 300회에 가까운 일산의 ‘돌체 토요음악회’ 등과 같은 음악회나 콘트라베이스와 같은 악기의 동호회에는 반드시 참석하는 부지런함을 지니신 분이다. 그는 일산의 <돌체>,분당의 갤러리 카페 <필하모니>를 통해 아마츄어 음악 동호회를 활성화 시켰다. 

로 옮아갔다. 때마침 ‘필하모니’에서 ‘신동헌 스케치전’을  

 고전파 음악 중에서도 신화백은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등을 즐긴다. 이 중에서도 악성 베토벤을 으뜸으로 꼽는다. 클래식 음반 6000여장의 LP와 CD,클래식 관련 소장 서적 1천여권은 그가 해박한 전문가적 아마츄어가 되도록 해주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닫힌 공간에서 자유를 만끽해온 분이다. 어느 날, 얼큰하게 약주를 들고 골덴 상의를 바꿔 입고 옷을 찿아 달라고 전화를 해서 다행히 국립극장의 이승옥 씨가 옷을 챙겨서 전달하도록 한 적이 있다.   신동우 화백의 소년조선일보 연재물 ‘풍운아 홍길동’은 그의 영화 창작물의 기초가 되었다. 일상의 인물들은 그의 창작의 모티브가 되었다. 만화에서 영화로, 광고에서 회화로 까지 그의 리듬예술은 그가 활동하던 당대 1960년대 초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호피와 차돌바위’ 등 만화영화와 기업의 홍보물들은 전국을 강타했다. 신화백의 장점은 끝없는 친화력,젊은이 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성실함, 끝없는 창작력이다. 

 신화백은 벤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가 하고 싶으면 과감하게 과제를 수행한다. 그래서 그는 만화 작가, 만화영화 감독, 순수하고 열정적인 자세의 음악 애호가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왔다. 마포구 상수동에서 삶의 터전을 일군 그는 실향민으로서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켜오고 있다. 그는 『클래식 길라잡이』,『음악가를 알면 클래식이 들린다』 등 클래식 저술도 5권이나 된다.

 신화백은 한국 최초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67』으로 대종상, 리메이크 작 『돌아온 영웅 홍길동』을 총감독, 제1회 좋은 영상물(95년)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겸손하다. 그는 국내 최초란 타이틀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만화 단행본 작가, 국내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CF(진로소주) 연출자이다.

 “음악가들이 화가를 무척 좋아하는 바람에 아마추어 애호가이면서도 아이작 스턴을 비롯한 세계적인 음악가와 교유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가들에게서 연주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을 가끔 선물한다. 신화백은 내게 스케치 작품을 자발적으로 주곤 한다.

 그의 건강비결은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다.  그는 건강을 바탕으로 세상을 환상적인 세계로 만들어 버렸고, 실향의 아픔은 그를 고향을 동경하는 정감어린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생각 저 편에는 언제나 휴머니즘이 깔려있고, 인간을 깊게 사귀는 성찰적 자세가 들어가 있다.

 언제나 우월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없다. 그는 보통사람으로 언제나 살아 있다. 심오하고 은근히 향을 내는 침향은 우리에게 전염적 그리움으로 그에게 연관지어져 있다. 세월은 가고 신화백과 같은 보석이 우리에게 사라지면 우리는 더욱 그를 그리워 할 것이다.

 그는 가벼운 가변성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오늘도 바람처럼 가볍게 흔들리면서 우주라는 작은 공안에 갇힌 인간들의 애환을 따스하게 그려내고 있다. 베토벤의 ‘운명’같은 것을 한반도라는 ‘전원’에 담아내고 싶어 한다. 아직 내 뇌리에는 ‘뉴요커’에 실린 작은 카툰의 우스갯소리를 소개하는 작은 지휘자 신동헌 님의 인간적인 체취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