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5년 겨울 북경에 간 홍대용은 이듬해 1월 8일 일관(日官) 이덕성(李德星)과 통역관 홍명복(洪命福)을 대동해 천주교당(동당ㆍ서당ㆍ남당ㆍ북당 중 남당)을 방문하여 독일인 선교사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포우관(鮑友官, Anton Gogeisl)을 처음 만난다. 이 날 그는 파이프오르간을 보고 그 원리를 깨달아 시험 삼아 연주를 해 보고, 자명종과 기타 천문관측 기구도 구경한다.
1월 19일 다시 찾아간 홍대용은 유․포 두 사람과 서양의 윤리와 학문에 대해 필담을 나눈 뒤 천체망원경을 보자고 하여 그 형태와 작동원리를 꼼꼼히 기록한다. 그는 일식을 볼 수 있는 색유리를 끼운 작은 망원경을 천체망원경의 접안렌즈에 대고는 흑점의 수가 바뀐 이유까지 유․포 두 사람에게 물어본다. 아마도 홍대용은 천주당을 가장 학구적인 태도로 방문한 사람일 것이다.
서양 사람들을 만나 더 넓은 세계를 보는 창 |
홍대용은 돌아와 박지원을 비롯한 동무들에게 자신이 천주당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이야기했고, 감탄해 마지않던 동무들 역시 북경행을 열망한다. 1778년 북경에 간 이덕무는 6월 14일 오후 순성문(順城門) 동쪽에 있는 천주당(동당ㆍ서당ㆍ남당ㆍ북당 중 어느 곳인지 모르겠다)을 찾아가지만 서양인 신부 두 사람은 원명원(圓明園)에 입직(入直) 중이었다. 구경을 하자 했지만, 그곳을 지키는 한인(漢人)들의 거부로 할 수가 없었다.
박지원 역시 1780년 북경에 갔을 때 선무문(宣武門) 안에 있는 서당을 방문한다. 하지만 그는 홍대용이 연주했던 파이프오르간을 볼 수 없었다. 1769년에 헐릴 때 같이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박지원은 홍대용이 망원경을 조작하고 기타 천문관측 기구도 가까이서 보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자신은 시간이 워낙 없어 그럴 수가 없노라고 한탄한다. 열하(熱河)로 간 박지원은 그곳에서 사귄 중국 지식인 왕민호(王民皥)에게 천주당을 구경하지 못해 유감이라면서 어떻게 서양사람을 한 번 만나볼 수 없겠느냐고 간곡히 청했지만, 왕민호는 들어주지 않았다.
홍대용과 이덕무, 박지원이 천주당을 방문한 사례를 들었지만, 천주당을 찾았던 사람은 물론 이들만이 아니었다. 북경에 가는 사람이라면 으레 천주당을 찾았다. 홍대용처럼 서양 신부를 직접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천문관측 기기를 직접 다루어보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말이다. |
신유사옥 이후 스스로 창을 닫아버리다 |
그런데 1803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서장관 이해응(李海應)은 『계산기정(薊山紀程)』(1804년 1월 26일)에서 천주교가 사학(邪學)으로 금지된 이후 천주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유사옥이 일어난지 2년 뒤의 일이다. 1798년 겨울 서유문(徐有聞)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파견되었을 때 따라갔던 치형(致馨, 姓은 미상)은 1799년 1월 19일 천주당을 보고 왔으니(『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적어도 정조의 치세 시기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있기는 했지만, 천주당에 드나드는 것을 막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유사옥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1828년 의관(醫官)으로 북경에 갔던 김노상(金老商)은 『부연일기(赴燕日記)』에서(1828년 6월 25일) “신유사옥 이후 조선 사람들이 천주당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고 한다.”라고 증언하고 있으니, 신유사옥이 조선 사람들을 단단히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이 확실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8세기 말까지 북경 천주당 방문을 통해 조선 사람은 서양이란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천주당은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지할 수 있는 작은 창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작은 창문은 1801년 신유사옥 이후 갑자기 닫히고 만다. 그것은 성리학을 국가이데올로기로 삼은 지배체제로서는 필연적 선택이었겠지만, 조선 사람 전체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답답한 결과를 낳고 만다.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신유사옥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이내 정조의 문체반정을 만나게 된다. 정조는 과연 개혁군주인 것인가. 우리는 정조에게서 너무나도 과도한 개혁과 진보의 이미지를 끌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홍대용의 『담헌서』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