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오늘의 지식인, 양심(良心)인가 양심(兩心)인가

장코폴로 2011. 7. 12. 13:04

오늘의 지식인, 양심(良心)인가 양심(兩心)인가

임현진(서울대학교 교수, 사회학)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책 중에 <우둥불>과 <돌베개>가 있다. 항일투쟁중 늑대를 좇기 위해 밤에 피웠다는 <우둥불>은 이범석장군, 그리고 일군으로 도피중 머리에 베고 잤다는 <돌베개>는 장준하선생의 자서전이다.

지난달 우리 '시대의 스승'이라 불리운 김준엽선생이 돌아가셨다. 광복군 출신인 그 분의 타계 소식을 들으면서 장준하선생을 떠올렸다. 두 분 모두 일본군에 징용되었다가 탈출하여 항일독립군으로 참여하면서 광복 조국의 미래를 고민했던 공통점을 지닌다. 먼저 항일중국군에 가담한 김준엽선생이 장준하선생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특히 두 살이 더 많은 김준엽선생의 결혼식에서 장준하선생이 주례를 섰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만치 두 분은 각별한 인연과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박정희독재에 맞섰다는 점에서 장준하선생과 김준엽선생의 고통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한 분은 정치참여도 주저하지 않았고, 다른 한 분은 대학강단을 지키면서 모두 현실개조를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 실천적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요즈음 참다운 지식인이 메말라 가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금 그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지식인은 공적이해를 대변해야

흔히 지식인이란 하나의 계급이 되기에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합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지식인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출신배경의 차이와 직업구성의 다양성에서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맑스(Karl Marx)에 따르면, 지식 생산과 적용이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모호한 성격에서 계급적 혼란이 발생한다. 이러한 계급적 위치의 모호성은 거꾸로 지식인으로 하여금 아비투스(habitus)를 통한 자유로운 인식과 독자적인 공론의 형성을 허용한다.

여기서 지식인은 다른 계급의 이해를 자신이 만들어 낸 사상을 통해 조망하거나 대변하는 특이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지식인에게서 전체총관(total perspective)의 가능성을 내다 본 만하임(Karl Mannheim)이 지식인에서 이 계급 혹은 저 계급을 위해 사상과 권력을 결합시켜주는 이데올로그로서의 일탈을 눈여겨보는 해석은 다소 역설적이지만 틀린 지적이 아니다. 현실초월적인 유토피아를 담아내지만 다시금 현실구속적인 이데올로기로 되돌아가는 지식인의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는 자기모순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사회에서 이익이 다중적으로 분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는 공적 이해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전통적 지식인’ 대신 지배권력의 정당화 기능을 수행해 주는 당파적인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s)이 나타나곤 한다.우리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기적 지식인’의 현장성과 기능성이 전통적 지식인의 비판성과 사상성을 침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 역할은 일찍이 일본강점기 때부터 중요시 되었다. 해방이후에는 ‘근대화 인텔리겐차’가 필요했다. 1950년대 지식인은 현실도피와 현실저항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러한 지식인은 1960년대 들어 정권참여와 정권비판 사이에서 분열과 긴장을 더해갔다. 국가주도적인 급속한 선진국 따라잡기식의 자본주의 산업화를 추진한 박정희정권은 실제로 많은 지식인을 동원했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기능적 지식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행정관료를 비롯한 전문기술분야의 기술관료(technocrat)이고, 다른 하나는 정권의 정당화 역할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그(ideologue)다. 이와 달리 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지식인은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리잡아갔다. 비판적 지식인 집단은 한일회담 반대투쟁, 월남전 파병 반대투쟁, 부정선거 무효화투쟁, 3선 개헌반대투쟁 등을 거치면서 서서히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었다. 박정희정권의 억압성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일이야말로 지식인의 본분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비판적 지식인이 사라지고 있다

현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괄목할만한 산업화와 민주화이다. 경제적인 규모에서 세계 10위권에 위치하고, 정치적으로 절차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삶의 양’은 물론 ‘삶의 질’을 중요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빈자들이 있는가 하면, 명품이나 웰빙의 가치를 추구하는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사람들이 공존한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지식인 전체가 멸종되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으로서 지식인은 아직 존재하면서도 집단으로서 지식인은 이제 부재하다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가 미흡하나마 이 정도의 건강성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는 전체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지식인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들은 개인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구조의 파행성을 지적하고 인간해방과 사회발전의 열쇠를 체제의 개혁 내지 변혁에서 찾으려 하여 왔다. 

그러나 지식인은 근래에 들어와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복잡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기성질서에 대한 도전과 비판 보다 방관 내지 협조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물론이고 정치참여 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발상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지식인에게서 과거와 같은 체제혁파의 주도 세력으로서 집합적 주체 형성을 기대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지식인의 프티화가 진행 중에 있다. 1950·1960년대의 지사형 지식인이나 1970·1980년대의 투사형 지식인이 사라지고 있는 주요한 배경이다.

오늘날 지식인 중 대다수는 체제타협적인 참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려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체제비판적인 도전을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수긍하지도 않는 다소 양가적(兩價的)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가적 이중성은 장년세대 보다 청년세대로 내려갈수록 보다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성의 중화(中化)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참다운 지식인이라 할 김준엽선생의 소천을 보면서 나부터 양심(兩心)에서 벗어나 양심(良心)을 가져야 하겠다는 자성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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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현진
· 서울대 사회학과교수
· 한국정치사회학회 회장
· 아시아연구소 소장
· 저서 : <다산시선> 
           <한국의 사회운동과 진보정당>  
           <북한의 체제전환과 사회정책의 과제> 
           <21세기 통일한국을 위한 모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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