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테러와 살육을 그치려면

장코폴로 2011. 5. 15. 10:01

테러와 살육을 그치려면
금 장 태(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주경철교수의 『문명과 바다』(2002, 산처럼)에는 유럽의 주도로 바다에서 근대세계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모험과 폭력으로 엮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에스파니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해 가는 과정의 폭력은 참혹함의 극치를 이루었던가 보다.

쿠바의 어느 추장은 도망 다니다가 붙잡혀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말뚝에 묶인 그 추장에게 프란체스코회 수사가 다가가서 처형되기 전에 기독교 교리를 강론하였다 한다. 이 때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수사의 말을 듣고서, 추장은 “기독교도들은 모두 천국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한다. 수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추장은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으로 가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다가, 가슴에 충격이 와서 책을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멍하게 있었던 일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기독교도 없는 지옥으로 가겠다”

신의 이름을 내걸고 신의 축복과 의로움에 대한 확신 속에서 얼마나 혹독한 파괴와 잔혹한 살육이 이루어져 왔는지 가해자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는가 보다. 피해자로서 이 추장은 기독교도들의 공격을 받는 고통보다는 기독교도들이 없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지옥의 어떤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선언이다.

이런 갈등은 16세기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빈 라덴이 저지른 9.11 테러의 만행을 가슴 아프게 새겨두지만 그동안 이슬람인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던지는 전혀 기억조차 없다면, 어떻게 그 테러와 저항이 그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빈 라덴을 죽였다고 워싱턴 광장에 모여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면서, 예수의 사형판결을 듣고 환호하던 빌라도 법정의 유태인 군중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군중들 사이에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적 본능을 극복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인간다운 품격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易地思之)는 격언을 흔히 끌어다 쓴다. 자기 입장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생각해보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와 네가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킬 일이 거의 대부분 해소될 수 있게 될 터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은 상대방을 무시하고 해치는 악의 원천이다. 이러한 독선이 가장 심한 경우가 바로 종교일 것이다. 나는 진리고 정의고 선이라 확신하는 순간 상대방은 거짓이고 불의고 악이라 판단하여 증오하고 배척하기 십상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독선에 빠져 불교를 배척하였던 사실이나, 근래에 한국의 기독교도들이 독선에 빠져 다른 종교들을 배척하였던 태도는 모두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의 굳은 껍질에 갇혀, 서로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잃은 소아병적 행태일 뿐이다. 독선의 껍질에 갇히면 자기가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공격성만 키우게 되어, 남과 어울리고 화합하려는 포용성을 상실하고 만다. 그 결과는 대립과 갈등이 일으키는 온갖 폭력과 비극만 초래할 뿐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이야말로 불화와 악의 원천           

그런데 금년 봄에 불어오는 봄바람은 한결 따스하고 향기로운 바람인 것 같아 반갑다. 5월 10일(4월 초파일)을 앞두고 서울 성북동 성당과 대전 선화동 빈들감리교회 등 몇 곳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플랜카드를 내걸었다고 한다. 지난 4월 19일 조계종 총무원이 조계사 대웅전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영화 ‘바보야’를 상영하였고, 5월 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법정스님의 추모 다큐영화 ‘법정스님의 의자’ 시사회를 연다고 한다. 부디 바라노니 일회적 행사로 끝나지 말고 이렇게 열린 마음을 더욱 넓게 열어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마음을 닫고 서로 상대방을 미워하는 곳에서 지옥이 열리고, 마음을 열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곳에서 천국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온 국민을 복음화하고 온 세계를 복음화 하겠다는 팽창의 논리는 제국주의적 사고방법과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종교들 사이에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는 열린 세상이 실현된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복음의 세상이 아니랴.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충고했던 일이 있다. 다른 종교가 나의 신도들을 빼앗아가는 것은 원하지 않으면서 나는 다른 종교의 신도들을 빼앗아 와야 한다는 것으로 사명감을 갖는 것은 열린 마음에 상반되고 화합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종교도 교세확장의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 화합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시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봄이 왔으면 겨우내 추위를 막기 위해 입고 있었던 갑옷같은 두꺼운 외투를 벗어버리고 경쾌한 차림을 하며 얼굴도 환한 웃음으로 활짝 펴야 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마음을 한 번 열면 세상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문제도 끝 없는 의심과 대결을 넘어서 좀 더 넓게 열린 마음으로 대화와 화합의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역사적으로 가장 폐쇄적이고 독선적 사유 집단인 종교도 서로 문을 연다는데 세상에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집단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저서 :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이끌리오, 2005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다산 정약용』,살림, 2005  
         『다산 실학 탐구』, 소학사, 2001 등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값 등록금   (0) 2011.06.11
질병의 예방과 치료   (0) 2011.05.24
중국의 77학번을 아시나요  (0) 2011.04.30
나눔의 아름다움   (0) 2011.03.18
소오강호(笑傲江湖)에 빠지다  (0) 2011.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