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유난히 추운 올 겨울 중국 무협 드라마 ‘소오강호(笑傲江湖)’에 빠져 지냈다. 한 번 보기 시작하니 내처 40편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로 못 본 경우에는 주말에 몰아 재방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보기도 했다.
내친 김에 ‘태평가’와 ‘와신상담’ 같은 사극들도 보았는데,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감칠맛 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보다 더 열렬한 시청자가 된 아내는 “이제 우리나라 사극은 시시해서 못 보겠다”고 선언했다.
중국 드라마에 호감을 느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얼굴만 예쁜 배우가 아니라 개성 있는 배우들을 기용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곱상한 미남 배우가 왕건으로도 나오고 대조영으로도 나오니 식상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 사극에서는 미남 미녀 배우보다는 개성 있고 연기력이 있는 배우들을 기용한다. 특히 ‘소오강호’의 배역들은 각기 개성적인 용모와 연기로 극의 재미를 더해준다.
정파(正派) 대 사파(邪派)의 도식과 가식을 뛰어넘어
극의 내용도 황당무계한 무술이나 틀에 박힌 권선징악, 상투적인 애국주의의 도식에 갇히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과 안목을 추구한다. 남녀 주인공들은 강호의 정파와 사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강호의 규범을 뛰어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른바 지음(知音)의 관계를 맺는다. 최고의 무공은 결국 피리와 금(琴)의 합주로 연주되는 ‘강호를 비웃다’는 음악으로 완성된다.
극중에 삽입된 음악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중국음악에 문외한인 나는 서둘러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 배경지식을 배우고 중국 전통 악기의 연주곡을 CD로 들으며 공부를 했다. ‘소오강호’란 곡에 서진(西晉) 시대 죽림칠현의 하나인 혜강이 연주했다는 ‘광릉산(光陵散)’ 한 소절을 편곡하여 사용했다는 극중 대사에 자극되어 혜강의 광릉산에 얽힌 고사를 찾아보았더니, 혜강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증손녀의 남편인데, 촉나라를 정벌한 종회의 모함으로 처형되면서 형장에서 ‘광릉산’을 연주했다는 것이다.
드라마 ‘소오강호’에 대한 관심은 작가 김용과 그의 다른 무협소설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고, 그러다보니 ‘한국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를 다룬 전형준 교수(필명 성민엽)의 계몽적인 논문과 중국무협을 총정리한 양수중(梁守中)의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라는 책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시작된 2천년 중국 무협의 역사는 협객의 역사로 중국인들의 전통의 일부가 되었고, 무협소설은 단순한 대중적 오락물이 아니라 하나의 중국적 문화 코드라는 양의 주장에 공감을 느꼈다.
아울러 전 교수의 논문을 통해 문학평론가인 고 김현 선생이 1960년대에 와룡생의 무협소설 붐이 지닌 문화적 의미를 분석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무협소설이 단순한 오락소설로서 비개성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당시의 한국 중산층에게 대리만족을 주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소비되었다고 일견 상식적인 진단을 내린다. 그러나 무협소설의 구조는 서구의 성장소설의 구조와 비슷하다는 그의 지적은 날카로운 감각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란만장한 수업시대와 편력시대를 거쳐 원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온갖 시련을 겪으며 비급을 연마하여 무림의 절대지존으로 등극하는 서원평 같은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얼마나 비슷한가.
내게 힘을 준 <군협지>, 금서20에 오른 <무림파천황>
이 대목에서 나는 1980년에 이른바 남영동에서 읽었던 『군협지』라는 무협소설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제작거부운동을 펼치다 수배된 기자협회장 김태홍 선배와 엮이어 보름가량 조사를 받았는데 (현재 루 게릭 병으로 투병 중인 김태홍 선배에게 힘을 주소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대학생 출신의 전경이 옆방에서 무협지를 빌려다주는 바람에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은 물론 황당무계하고 흥미진진한 대중소설이지만 당시의 나에게 단순한 대리만족과 현실도피의 기제 이상의 어떤 정신적 위안과 함께 가혹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한편 1981년 9월, 『무림파천황』이라는 무협소설을 쓴 연세대생 박영창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 17가지의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소설 가운데 정파와 사파가 벌이는 대결구도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한 부분과, ‘강북무림’이 ‘강남무림’을 향해 ‘남진’을 주장한 부분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이유였다.
2006년 서울대는 개교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1946년 개교 이래 판금된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도서 20권을 선정, 도서관에서 전시했는데, 그중에는 『무림파천황』이 김지하 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황토』, 현기영의 『순이 삼촌』,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과 함께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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