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영화일반론)

윤인자 스토리

장코폴로 2011. 3. 4. 20:08

<오랜만입니다>
“나는 ‘대한의 꽃’ 6·25때 美사령관 현지妻였다”
한국영화 ‘원조 섹시스타’ 윤인자씨
정충신기자 csjung@munhwa.com | 게재 일자 : 2011-03-04 11:45 요즘페이스북구글트위터미투데이
▲ 2일 방문한 서울 강북구 수유동 지하 사글셋방 거실에서 왕년의 섹시스타 윤인자씨가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책 표지는 1954년 31세 전성기 때 제1회 노라노패션쇼에서 찍은 사진. 거실에 전성기 시절 사진을 담은 액자들이 눈에 띈다. 김선규기자 ufokim@munhwa.com
한국영화 ‘원조 섹시스타’ 윤인자씨

해방후 연극계와 은막의 스타로 그 어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거친 노 여배우는 그동안 대중의 뇌리에 잊어져 지냈다. 일제 식민지 시절 만주벌판에서 연기력을 쌓았고, 해방 후 38선을 넘어와 서울에서 스타가 된 파란만장한 삶은 한국 근현대사 축소판이었다. 해방 후 뭇 남성들의 로망이자 당대 최고의 남성 스타들을 치마폭에 들었다 놨다 하며 한국 영화사 최초로 키스신과 누드신을 남긴 섹시스타. 한국전쟁 당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간청에 의해 ‘대한민국 최후의 관기(官妓)’가 돼 애국혼을 불사른 그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대한의 꽃’이란 칭호를 얻았다. 해방 직후 최고의 ‘섹스심벌’ 배우 윤인자(88)씨를 2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지하 사글셋방에서 만났다. 한국전쟁 직후 웬만한 재벌 부럽지 않은 벼락부자가 됐던 그는 지하 사글셋방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도우미의 손에 의지한 채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곱게 차려입은 왕년의 여배우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고 말씨도 또렷했다.

이날 동행한 방송작가 김광휘(MBC ‘웃으면 복이와요’ ‘제4공화국’ 작가)씨가 2년 동안 윤씨의 집을 들락날락하며 윤씨의 삶을 추적한 일대기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해맞이) 출간을 기념해 증정식을 치렀다.

김씨가 “선생님 한을 푸셨습니다. 선생님의 삶, 예술 그 절절한 사연들을 모두 담았습니다. 선생님 원도 한도 없으실 것”이라고 말을 건넸다. 윤씨가 책 표지에 돋보기를 들이대며 글씨를 읽어내려가다가 눈이 발개졌다. “이루 말로 표현 못하겠네요. 이제 편히 눈 감고 지구를 떠나도 아쉬움이 없게 됐습니다.” 그러곤 환한 웃음을 지었다.

최근까지 한번에 맥주 10병은 마시고, 위스키 1병도 혼자 거뜬히 해치운다고 한다. 담배도 하루 한갑 정도 피운다.

지하 거실 벽에는 그 옛날 영화를 말해주는 액자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신영균씨와 촬영한 ‘빨간마후라’를 가리키며 당시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윤씨는 당시 남자 동료들로부터 ‘독하게 예뻤다’는 소리를 듣던 섹스심벌 시절로 빨려들어갔다.

“1964년 ‘빨간마후라’ 찍을 때 신상옥 감독이 키스장면 때문에 굉장히 신경을 썼어요. 신 감독이 부인 최은희씨 키스신 촬영이 잘 안되니까 저더러 신영균씨하고 대본에도 없는 키스 연기를 하라고 했지요. 밤12시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기까지 제가 못하겠다고 두어 시간 동안 밀고당기기를 하다가, 조명은 켜놨지 더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해 화끈하게 해줬지요. 그랬더니 신 감독이 부인을 불러 ‘최여사 당신은 집에 가서 연탄이나 갈지 영화배우 하지 말고…’라며 면박을 줬지요.”

해방 직후 ‘38선을 넘어온 황진이’로 불리며 연극계에 파란을 일으킨 당대 최고의 ‘섹스심벌’ 윤씨의 기억력은 너무나 선명했다. “카메라 렌즈는 세밀해 가짜로 키스하면 드러나고 말지요. 레슬링을 했던 신영균씨는 기운이 어찌나 센지 촬영할 때도 거칠었는데 입 한번 맞춰줬더니 넋나간 사람처럼 되더니 그후로 촬영때 ‘레이디 퍼스트’를 외치며 나긋나긋해졌어요.”

영화평론가 변재란씨의 ‘여성영화인사전’에 따르면 신 감독은 “윤인자에게는 아무도 따르지 못할 독특한 매력이 있는데 다른 감독들이 그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녀를 육감적인 마담으로만 이용해왔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윤씨는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키스신과 누드신을 연기한 배우로 기록됐다. 1953년 한형모 감독이 16㎜에서 36㎜ 렌즈로 처음 촬영한 ‘운명의 손’은 윤씨의 은막데뷔작이었다. 여간첩역을 맡은 윤씨는 방첩장교역의 이향(본명 이근식)에게 마지막 사랑의 표시로 입술을 허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입술에 셀로판지를 붙인 채 7초간의 어쭙잖은 ‘접문(接吻)’이었다. 소문을 들은 남편 민구가 명동 영화사로 찾아가 일대 소란을 피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연예부 기자들이 ‘드디어 한국영화에도 키스신 등장하다!’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1957년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그 여자의 일생’에서 성악도 여주인공 금봉역을 맡은 윤씨는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 최무룡과 호흡을 맞춘다. 윤씨는 여기서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알몸 목욕신을 촬영한다. 당시 만34세의 여배우가 비록 유리창으로 가려진 모습이지만, 상체를 완전히 노출한 채 웬만큼 나신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나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또한번 남편이 촬영장으로 찾아와 감독과 촬영기사만 남겨놓은 채 모든 스태프를 쫓아내는 돌출행동으로 화제가 됐다. 이후 윤씨에게는 ‘육체파 여배우, 마담형 여배우’라는 족쇄가 채워진다.

“대본을 안보고 나간 것이 제 잘못이었어요. 의처증이 있는 남편을 달래느라 한바탕 홍역을 치렀죠. 한겨울 난방도 안되는 스튜디오에 만든 목욕탕 세트에 데운 물을 붓는 목욕신이었는데 추위로 엄청 고생했어요. 난로에 목욕물을 주전자로 데웠는데 스태프가 목욕물인 줄 모르고 마시기도 했어요.”

윤씨는 일제시절 만주와 평양, 사리원 권번과 바 여걸 생활을 하며 익힌 춤과 노래 솜씨로 해방 후 연극과 무용극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전쟁 끝무렵이던 1952년 윤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인 유치진의 음악무용극 ‘처용의 노래’에 당대 최고 연극스타 김동원의 상대역으로 열연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관객들은 ‘38선을 뚫고 내려온 미모의 여배우 윤인자 허리 보러 왔다가 내 다리 깔려 죽는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짜증은커녕 즐거워했지요.”

윤씨가 ‘대한민국 최후의 관기(官妓)’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애국충정의 상징인 대한의 꽃’으로 불린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전쟁의 비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 극단 예술극회의 대중연극 ‘황진이와 지족선사’는 북에서 내려온 신인 윤씨를 황진이역에 기용, 서울 변두리 극장에서 공연해 관객 10만 돌파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해 6월18일 부산 광복동 문화극장 개관기념공연작 공연때 배우 ‘황진이’를 보러온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연극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전쟁이 터졌습니다. 저는 부산에 남았고, 당시 맥아더 장군의 특사로 한국 해군사령관에 임명된 마이클 J 루시(한국전 참전시 중령에서 이후 대령으로 진급)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지요.”

‘한국 해군의 창설자’인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미군클럽에서 우연히 ‘캡틴 루시’를 만나 춤을 추게 된 윤씨에게 간청한다. “애국하는 마음으로 캡틴 루시를 달래달라고 했지요. 캡틴 루시는 당시 한국 해군의 ‘모든 지휘통솔권’을 가진 실력자였어요. 손 제독은 저에게 우리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 있으며, 하루에도 수십장의 결재서류를 그 사람한테 내밀어야 하는데, 언짢아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 해군은 탄약도, 배 기름도, 보급물자도 제때 받을 수 없다며, 저더러 곁에 있으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쓸쓸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윤씨는 캡틴 루시의 하야리아 부대로 가지만 하룻밤 상대 취급을 받고 치욕에 몸부림을 친다. 오기가 발동한 윤씨는 여배우의 자존심을 담은 내용의 편지를 써 새벽에 하야리아 부대 정문에서 캡틴 루시에게 건넨다.

이후 윤씨를 대하는 캡틴 루시의 태도는 달라졌고 공식 모임에 윤씨를 대동하게 된다. 캡틴 루시의 한국 해군에 대한 협조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8월6일 진해 대통령 별장에서 캡틴 루시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며 ‘맥아더 사령관을 도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한국 해군의 은인’이라며 치켜세웠지요.” 이 대통령은 캡틴 루시의 사실상의 현지처로 인정받고 동행한 윤씨에게 “따로 훈장은 못주지만, 윤인자씨는 애국자입네다. 암, 우리 대한의 꽃이지 대한의 꽃이야”라고 치하했다. 윤씨는 캡틴 루시가 한국을 떠나기 전 자신에게 털어놓은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캡틴 루시는 부대 정문 앞에서 편지를 전할 당시의 저를 회상하며 ‘참 대단한 여성이었고, 정말 당당한 한국의 여성이었으며 아름다운 배우였다’고 했지요. 그날 새벽 그는 모든 것을 각오했다고 고백했어요. 맥아더 원수의 참모로, 맥아더 원수를 대신해 한국 해군과 해병대를 움직이는 사람이 부대 안의 막사에서 한국 여인을 데리고 지낸다는 것은 자신이 제독이 될 것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고 했어요.”

윤씨는 1951년 12월 진해 대통령 별장에서 2주간 머물며 한국을 떠나는 캡틴 루시에게 갓과 장죽을 선물했다. 정보부대 출신의 캡틴 루시는 윤씨에게 당시 직접 뜨개질한 흰색 목도리를 마지막으로 선물할 정도로 자상했다고 기억했다.

윤씨는 캡틴 루시와 1년반 동안 살면서, 40달러를 밑천으로 미군 PX 물품을 팔아 거금을 모았다. 부동산을 제외한 현금만 2억8000만원이었다. 1951년 출발한 삼성물산의 출자금이 3억원이었으니 대기업 하나를 살 만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런 윤씨가 지금은 왜 이처럼 누추한 곳에 사는지 궁금했다.

“그 많은 돈, 글쎄 돈에 대해서 저는 백지였어요. 배우지 못해 무지해서 돈은 잘 벌었는데 지킬 줄은 몰랐지요. 통장을 맡은 남편이 기와공장을 친척에게 줘버리는 등 멋대로 써버렸지요. 캡틴 루시가 떠나기 전 저보고 ‘결혼하지 말고 연기에만 전념하시오. 그 많은 돈을 한국 남자에게 맡기는 순간 그 돈은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요’라고 했는데 제가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살아오면서 가장 아쉬운 일이라면.

“뒤돌아보면 너무도 어리석게 살았던 것 같아요. 늦게나마 제 삶을 정리한 책을 내놓게 돼서 더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다 털어놓고 가니까요. 제 운명이려니 생각하니 더 이상의 욕심은 없지요.” 노 여배우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후배 연기인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부탁했다.“우리 영화계 젊은이들에게 서운한 게 있어요. 젊은이들도 뒤를 돌아다보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뿌리가 없으면 금방 시듭니다. 한국 영화, 연극의 뿌리를 연결해준 사람들을 생각하며, 후배들이 한번쯤 뒤좀 돌아다보면 고맙겠습니다.”

인터뷰=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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