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연극

오늘의 서울연극(제5호)

장코폴로 2011. 2. 20. 18:05

ISSN 2093-9140 

 오늘의 서울연극

Today's Theater In Seoul

             제 5 호

            2011. 2. 18                     TTIS

 

 

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기자: 심희령, 장시내,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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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의 글 | 오세곤



1부

 

Review


- 스카펭의 간계 | 오세곤

- 오이디푸스 | 백승무

- 칼로막베스 | 이현우

 

- 페리클레스 | 이상욱


- 처음처럼 | 서지영

- 오이디푸스| 우상전

 

- 트루웨스트 & 프루프  | 강양은


2부

 

재수록


- 소설가 구보씨의 1일 | 박연숙

- 국물있사옵니다 | 박정기

- 서울테러박정기

 

- 칼로막베스  박정기

 




대학로 포럼 토론회

 

- 대학로 포럼 3회 토론에 대한 반론문

 

- 재반론문


- 대학로 포럼 연속토론 5회

 



기자스케치

 

 

 - 한중록

 

 

 

편집후기

 

 

 

 

 

    편집인의 글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또 한 달이 지나 이제 ‘오늘의 서울연극’ 제5호를 마무리하는 시점입니다.

지난 호에 비해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원고가 많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호에는 대학로포럼 토론문에 대한 반론문과 재반론문이 실리는 등 독자들의 관심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소식으로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세 분의 전문가를 모셔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지금까지와 같이 열린 구조를 유지하겠지만, 편집위원들이 그 달의 대상 작품들을 선택하여 공지하고, 필자를 위촉하는 방식 또한 병행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자연적인 흐름에만 맡겨 놓아서는 안정화를 위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겠다는 판단으로 내린 결정입니다.

현재 ‘오늘의 서울연극’은 주로 연극협회 회원들께 배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가능한 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전공 학생들은 반드시 포함시킬 예정입니다. 현재 연극계 흐름을 알면서 미래 비전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연극계를 짊어질 인력을 위해 꼭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언제고 그 젊은 인력들의 글들도 따로 또는 함께 실어 많은 분들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기성의 연극을 보는 젊은 시각도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조급한 확대보다는 현재 상태에서 내실을 기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말입니다.

정월 대보름입니다. 복스러운 둥근 달이 온 세상을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 힘주어 깨무는 부럼처럼 속속들이 꽉 찬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1년 2월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진정한 관객의 연극: 몰리에르 작, 김태용 연출 <스카펭의 간계>

 

 

 

 

 

 

 

오세곤(순천향대 교수, 극단 노을 예술감독) ohskon@hanmail.net

 

 

 

 

 

 

연출: 김태용

번역: 박영옥
작가: 몰리에르
공연기간: 2010.12.21-12.26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관람일시: 2010.12.25. 19:00

 

 

 

 




흔히들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와 같은 대가들에 대해 ‘관객을 아는 작가’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을 아는 작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연극의 필수 구성 요소로 무대, 배우와 함께, 관객이 포함되는 한, ‘연극을 안다는 것’과 ‘관객을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뜻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연극에 있어 관객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관객(觀客)을 그대로 풀이하면 ‘보는 손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연극 관객에 대해서는 그보다 훨씬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즉 말과 동작을 주요 전달 수단으로 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관객에게 우선 필요한 감각은 시각과 청각이다. 그러나 그저 시각과 청각으로 ‘보고 듣는’ 차원이 아니라 ‘보고 듣고 이해하는’ 상태를 필수 요건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가 없어야 한다. 그 이해의 책임은 관객보다는 공연자에게 있다. 적어도 관객들이 이해 못 한다고 관객의 수준을 탓하기에 앞서 전달이 안 되면 작품 자체가 형성 안 된다는 사실에 과연 얼마나 고민했는지 반성하는 것이 옳다. 또한 관객은 주위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신만 이해 못 한다는 착각에 빠져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자기가 모르면 남들도 모를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위 ‘어려운 연극’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예술이니까, 또 고급예술이니까 당연한 것일까? 천만에, 절대 아니다. 연극은 쉽고 재미있는 것이다. 운동경기를 보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한다. 규칙을 알아야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미식축구나 아이스하키나, 체조나, 규칙을 모르고 보면 재미가 없다. 하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다.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과 문화를 웬만큼만 알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연극이다.

사실 어렵다는 말과 연극은 서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어려운 게 심하면 난해한 거고 그렇다면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해가 없으면 진정한 관객이 될 수 없다. 결국 어려운 연극은 올바른 관객 형성을 가로막으니 어려운 연극이란 스스로 자신의 구성 요건을 파괴하는 셈이 된다.

연극은 유명한 작품일수록 어려운 경우가 거의 없다. 특별히 규칙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연극이 어려워서 전달이 잘 안 된다면 오랜 세월 많은 지역에서 각광받는 명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는 작가와 연출과 배우를 겸했던 현장 연극인들이다. 그런 이들이 관객들에게 호소하지 못 하는 연극을 만들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작품이 어렵고 재미없다면 그건 거의 틀림없이 번역이나 연출, 또는 연기의 문제일 것이다.

‘어려운 연극’과 마찬가지로 ‘재미없는 연극’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 한다. 연극은 현장예술이고 따라서 객석의 조그만 움직임도 무대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으레 공연 시작 전 이동을 삼가달라는 명령조의 멘트가 나온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재미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종종 연극은 재미없어도 참고 보는 것을 마치 미덕인양 강조한다. 그러나 이 또한 대단히 잘못된 태도임이 분명하다.

연극의 주된 기능은 무엇일까? 즉 왜 연극을 보는 것일까? 오락적 기능과 정화작용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연극은 허구이다. 사람들은 허구를 즐기기 위해 극장에 간다. 그렇다면 왜 허구를 즐기는 것일까? 그건 일상의 탈피로 이해하면 된다. 주말에 등산을 가는 것도 일상의 탈피이고 종교 생활도 일상의 탈피이고 오락을 즐기는 것도 일상의 탈피이다.

그렇게 일상을 탈피했다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정신 건강에 훨씬 유리하다. 바로 정화작용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화는 새로운 출발을 도와준다. 주말 내내 집에서 잠만 잔 사람보다 어떤 형태로든 일상을 탈피했던 사람이 더 힘차게 일주일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탈피와 정화작용이 이루어지려면 그 내용이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앞서 ‘어려운 연극’은 일단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쉽다고 무조건 성공할 수는 없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쉬우면서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것, 그게 바로 재미이다. 재미는 관심이다. 관심이란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수반한다. 그 점에서 재미는 말초적 흥미와는 전혀 다르다. 말초적 흥미는 그 순간일 뿐 지난 뒤에 남는 생각이나 감동은 없기 때문이다.

통상 웃음만을 재미와 결부시키지만 연극의 재미란 그렇지 않다. 공연을 보며 웃든 울든 화를 내든 거기 끌려들어 관심이 일고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건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 재미에 감동까지 더해지면 대개들 좋은 연극이라 한다. 사실 연극이란 게 세상을 확 뒤집어 놓는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잠시 재미와 감동에 빠져 세상에 대해 조금은 여유 있게 되는 걸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게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가 영국의 국보라면 몰리에르는 프랑스의 자랑이다. 물론 둘 다 이미 영국과 프랑스를 넘어 전 인류에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17세기 프랑스의 작가 몰리에르가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중요해진 데에는 1992년 창단 이후 줄곧 코미디에 집중해 온 극단 수레무대의 공이 크다.

스카펭은 서양 코미디에 자주 등장하는 머리 좋은 하인의 전형이다. 이탈리아 꼬메디아 델 라르떼의 아를레키노로부터, 셰익스피어 작 <리어왕>의 광대, 보마르셰 작 <셰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의 피가로까지 모두 같은 맥락의 인물들이다.

더욱이 내용 또한 여기저기서 짜깁기를 한 듯하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있고, 그것을 방해하는 늙은 부모가 있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젊은이들의 사랑을 성사시켜주는 머리 좋은 하인이 등장하고, 서로 엉켜 복잡한 듯하지만 우연의 반복으로 이내 술술 풀리면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은 서양 희극에 거의 공통적인 내용이다.

이렇게 인물이고 내용이고 독자성이 없으니 자칫 진부하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간다면 프랑스인들이 심히 섭섭해 할 정도의 작가이며 <스카펭의 간계>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여기서 하나 짚자면 연극에서 인물이나 내용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유사한 내용과 인물이라도 어떤 작가가 쓰면 명작이 되고 어떤 작가가 쓰면 한없이 지루한 졸작이 되는 그 신기한 과정이야말로 연극의 본질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라 하겠다.

그러나 <스카펭의 간계>라는 희곡만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아무리 좋은 희곡이라도 무대형상화 과정이 부실하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공연에 있어 극단 수레무대의 연출과 배우들은 작가 못지않게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다.

무대는 모든 사실적 장치를 배제하고 오직 끈이 달린 커다란 시소오만을 배치했다. 마치 우물물을 퍼 올리듯 배우를 등장시키는 이 기구는 무대 중앙에서 관객들의 상상에 따라 모든 배경을 대신한다. 참으로 과감한 생략이며 실로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연출 김태용은 이제 코미디에 관한 한 확실한 주관을 확립한 듯하다. 이번 공연을 보건대 우리 연극계 고질인 소위 번역투의 문장마저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그녀’ 등 분명 우리말에 없는 부자연스러운 인칭대명사를 그대로 두었건만 관객들은 불편해 하지 않는다. 희곡번역 전문가를 자처하며 이에 대해 늘 문제 제기를 해온 필자로서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객이 수용하는 상황에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이에 있어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수레무대 배우들의 대사는 고도로 숙련된 움직임과 더불어 이미 춤과 노래와 같은 경지에 도달했고, 그래서 일상어 차원의 문법적 차이로 느끼는 불편함과는 무관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수레무대는 엄청난 훈련을 소화하기 위해 단원들이 함께 생활하는 극단이다. 경우에 따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도 그대로 공동생활을 한다. 국내 어떤 극단보다도 고도의 숙련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 숙련도야말로 수레무대 연극이 관객들에게 자신 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핵심적인 재산일 것이다. 앞서 번역투의 문장조차 연극적으로 승화시키는 것과 같은 능력은 현재 우리나라 그 어떤 극단도 흉내낼 수 없는 것임이 확실하다.

결국 <스카펭의 간계>는 희곡을 쓴 이나 그것을 무대화한 이들이나 모두 관객을 알고 연극을 아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공연에서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공을 넘어 우리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몰리에르에게 감사하고, 또 그의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우리 연극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이처럼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 즉 ‘진정한 관객의 연극’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을 굳게 믿고 크게 기대하는 바이다.


 

 

 

 

 

 

 

 

나는 너다, 오이디푸스

 

 

 

 

 

 

 

 

백승무(연극평론가, 서울대 강사) cawa@snu.ac.kr

 

 

 


원작:소포클레스

연출: 한태숙
극단: 국립극단
공연기간: 2011.1.18-2011.2.13
공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람일시: 2011.1.28. 19:30

 


 

 

 

 



공연의, 공연에 의한 공연

인간은 항상성과 반복이 주는 안정감 못지않게 일탈과 모험이 주는 새로움에서도 쾌감을 느낀다. 예술이 담당하는 분야는 주로 후자인데, 고정관념에 회의의 칼날을 대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예술은 경험 너머에 있는 혼돈과 불안의 영역을 조화와 신비의 영역으로 포섭한다. 그래서 좋은 연극은 항상 우리의 의식을 깨어나게 하고, 육감을 예민하게 자극하며, 종국엔 오금이 저릴 정도의 큰 감동을 선사한다.

대저 연극은 낡고 닳은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며, 제 몸에 붙은 과거를 씻어내는 의식행위이다. 특히 너무나 오래 묵은 텍스트, 너무나 많이 공연된 작품을 대할 때면 이 갱신의 몸부림은 필사의 궁극이 된다. 「오이디푸스」, 2,500년 전에 제작된 이 유물 같은 텍스트를 보라. 이미 발생 맥락에서 한참이나 이탈한 이 구시대 희곡이 오늘날에도 절찬리 상연된다. 이런 유의 텍스트를 대할 때면 이토록 때 묻은 텍스트를 다시금 들추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공연이 이전에 공연된 수많은 「오이디푸스」에 비해 무엇이 다르고 왜 달라야 하는지 해명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한해에도 수차례씩 공연되는 이 「오이디푸스」는 그 자체로 이미 메타극이 되어버린다. 공연의 내용이 지난 공연들, 그 낡은 형식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 채워지는 것이다. 연출은 수많은 「오이디푸스」를 본 관객과, 그보다 더 많은 ‘오이디푸스’를 본 자기 자신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일단 달라야 하며, 그것이 내용 속에서 타당한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오이디푸스」가 창조보다 차이에 더 방점을 둘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연극에 대한 연극으로서 메타적 시선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다.

비극의 깊이, 두께

공연에 대한 입장이 공연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이 역설은 어쩌면 피의자 스스로 판사와 검사역을 맡아야 하는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시선이 대상 자체의 속성을 규정한다는 전제는 정체(성) 게임에 전념하고 있는 오이디푸스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의 정체와 그 내막이 지닌 파괴성 간의 상관관계에 천착하고 있는 한태숙 연출의 「오이디푸스」는 오늘날 이 공연이 맡은 시대적 사명에 충실하게 복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계기와 과정에 주목하고, 심오하면서도 난해하지 않는 상징 배열을 통해 다양하고 다층적인 의미의 중층을 절묘하게 엮어내고 있다. 가히 롤랑 바르트가 말한 기호의 두께가 비평적 가설에서 실제적 표상으로 현현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에 대한 비평은 연출이 겹겹이 포개놓은 이 기호의 두께를 뚫지 않고서는 결코 성사될 수 없다. 이 해석적 돌파의 궤적은 「오이디푸스」 비극의 숭고한 두께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그 ‘정신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드러나게 해줄 것이다.

저주의 삼각형

한태숙 연출의 「오이디푸스」는 일단 원작을 대대적으로 각색(김민정 각색)하여 가독성과 리듬감을 높이고, 더불어 오이디푸스(이상직 역)의 각성 단계를 좀 더 명확하게 도식화시키고 있다. 즉, 수수께끼를 부여받고 자기의 정체를 추적하다가 결국 자신의 운명과 조우한다는 오이디푸스 서사의 뼈대가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형성하는 이 ‘수수께끼-정체-운명’의 얼개는 결정적으로 저주의 숫자 3의 상징을 함유하고 있다. 이 삼각형 얼개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먼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오이디푸스가 범하는 중대한 범죄 두 가지는 친부살해죄와 근친상간죄이다. 친부를 죽이고 자연질서를 파괴하는 이 두 가지 죄는 공교롭게도 스핑크스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며, 또한 스핑크스와 공유하는 범행이다. 코린트의 왕자 오이디푸스에게 살해되는 생부 라이오스는 백성들을 교살하는 이 스핑크스에 대한 신탁을 들으러 델포이로 가던 중이었고,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되어 이오카스테(서이숙 역)와 결혼하도록 길을 터준 것도 바로 이 스핑크스였다.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서는 것이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도 인간의 일생을 축약한 비유가 아니라, 세대 간 질서를 파괴하고 3대(주1)를 뒤섞어버린 오이디푸스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안티고네에게 오이디푸스는 한 배에서 나온 오빠이자,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아버지인 오이디푸스의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남편으로서 할아버지에 해당한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고 그 자식들까지 낳음으로써 3대의 질서를 파괴했는데, 스핑크스의 질문은 바로 오빠, 아버지, 할아버지를 동시에 공유하는 인간, 바로 오이디푸스의 정체에 관한 일종의 예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와 관련된 모든 사건의 계기점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를 테베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 그는 어린 시절 피사왕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피사왕의 아들 크뤼시포스에게 무술과 기마술을 가르쳐주면서 동성애를 느낀다. 크뤼시포스 왕자가 자신의 동성애를 거부하자 라이오스는 그를 숲속으로 데려가 교살해버린다. 이 사건은 신성한 결혼의 수호신인 헤라를 노하게 했는데, 아들 오이디푸스의 파멸을 통해 동성애자 라이오스를 응징하고자 스핑크스를 보낸 것이 바로 헤라였다.

하나도 아닌, 둘도 아닌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가 범죄를 공유한다는 말은 교살자란 뜻을 지닌 스핑크스가 교살자 라이오스의 분신인 것처럼, 오이디푸스 또한 라이오스로부터 피를 받은 분신이기 때문이다. 3대가 섞인 오이디푸스처럼 스핑크스(인간의 얼굴과 사자 몸, 새의 날개)가 흉측한 혼종괴물로 등장하는 점도 이들의 상동성을 증명한다. 결국 이 둘은 한 몸에서 유래한 동종이상(同種二像;dimorphism)인 것이다. 한태숙 연출의 공연에서 티레시아스(박정자 역)가 오이디푸스에게 “저 물속에 있는 자가 범인”이라고 말한 속내에는 이 동종이상체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것, 물속에 비친 자신을 보듯 스핑크스 속에서 괴물이 될 자신을 봤어야한다는 티레시아스의 통찰이 담겨있다. 티레시아스가 나르시스를 본 순간 “자신의 모습만 보지 않으면 오래 살 아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오이디푸스에게서도 동일한 자기애의 한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동종 괴물 앞에서도 자기에게 운명 지어진 괴물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장님 같은 자기애! ‘나는 너다’라는 스핑크스의 존재이유도, ‘너는 코린트의 왕자가 아니라 테베의 왕자이다’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도, ‘네가 테베의 왕이 된 것은 수수께끼에 능통해서가 아니다’라는 스핑크스/티레시아스의 예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수께끼, 운명의 형식

한마디로 섞일 수 없는 것, 결합할 수 없는 것을 한 몸에 담게 되는 오이디푸스에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결국 ‘넌 누구냐’란 질문이며, ‘나한테서 너를 보라’는 다그침에 다름 아니다. 동종이상체에서 자신의 추악상을 보지 못하는 이 나르시시즘적인 착각은 극 후반부 “너는 나를 볼 수 있느냐?”(이오카스테)란 대사를 삽입한 극작가 김민정의 야무진 극적 마감과 극진한 울림을 갖는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결국 오이디푸스의 정체(혹은 출생의 비밀) 문제로 자연스레 이월하는 것이다. 극 밖에 있는 이 수수께끼를 티레시아스를 통해 다시 극 속으로 되살려낸 한태숙 연출의 의도는 짐작할만하다. 스핑크스 수수께끼의 변종인 “아침에는 아비를 먹고, 점심에는 어미를 먹고, 저녁에는 제 두 눈을 파먹고 헤매는 짐승은?”이란 질문은 (티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지는 두 번째 수수께끼이며, 자기각성을 위한 두 번째 기회이자 두 번째 ‘거울’이다. 티레시아스의 수수께끼가 두 번째 거울상이 되는 이유는 한태숙 연출이 공들여 만든 이 장면이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훌륭한 도상이 되기 때문이다. 눈 먼 장님인데다 신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괴물 같은 티레시아스의 이미지, 그리고 인간도, 새도, 네발짐승도 아닌 괴물(이기돈 역). 그렇다! 마지막 조명이 꺼질 때까지 무대 한편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이 괴물과 티레시아스는 동종이상인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를 모델링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 티레시아스에게 스핑크스의 염력을 덧댄 한태숙 연출의 구상은 색다른 볼거리를 창출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무지와 무력을 한층 도드라지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정체성 찾기라는 핵심 테마를 보다 강건하게 다듬어주고 있다.

비탈진 가시밭길

‘수수께끼-정체-운명’의 얼개에서 비롯된 숫자 3의 상징성은 무대 형식에서도 의미심장하게 드러난다. 텍스트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는 생후 3일째 되는 날 버림을 받는데, 친부살해가 벌어지는 공간도 포키스와 보이오티아 사이의 좁은 삼거리였으며, 라이오스의 호위병은 또한 3명이었다.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짝수인 2, 4는 여성을, 홀수 3은 남성을 의미하는데, 오이디푸스(3)는 어머니 이오카스테(2)와 딸 안티고네(4) 사이에 끼인 수이자, 두 수의 평균수이다. 특히 삼거리.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뼈를 준 아비를 죽이고, 살을 준 어미와 동침한다”는 신탁을 받고 괴로워하며 테베로 떠나던 길이었고, 라이오스는 괴물 스핑크스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델포이 신전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 삼거리를 백묵으로 그으면 사람 인(人)자가 나타난다. 물체극 연출가 이영란의 기막힌 연상력! 오이디푸스의 첫 범죄가 시작되는 삼거리, 그리고 두 번째 범죄의 서막을 여는 ‘인간’. 스핑크스 앞에서 당당히 ‘인간’을 외치는 오이디푸스의 착각과 무지가 무대를 채우는 것이다. “너는 나를 볼 수 있느냐?” 이오카스테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곳도 바로 人자가 그어진 이 ‘착각과 무지’ 위에서이다. 인간 행세도 못한 짐승 같은 놈, 오이디푸스를 타박하는 이 준엄한 아이러니! 지워지지도, 씻기지도 않는 오욕의 무지를 징계하는 이 무서운 상징!

비탈의 원근감을 살린 삼각형 무대(무대디자인 이태섭)도 이 수수께끼 운명의 역설을 잘 구현해내고 있다. 산이 많은 그리스 지형과 신전이 서 있는 언덕에서 따온 이 삼각형 무대는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한 불안감을 야기하면서 언제든지 불행의 굴레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의 유약함을 그려내고 있다. 주로 3명씩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 삼각형 무대를 정으로, 혹은 역으로 배반해서 서있는 그림도 삼각형 상징과 인물간의 긴장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준다. 물론 서 있기도 불편한 이 삼각형 무대 때문에 배우들의 움직임이 지루할 정도로 경직되고, 격정이 목청 위주로 표현된다는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반면 측면에 위치한 철판은 테베의 현실을 프리젠테이션하는 스크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날카롭게 튀어나온 철못은 죽은 자의 시신 위에 꽂힌 묘비석을 위시해 전체적으로 테베 시민들의 위태로운 삶을 상징하는 동시에, 오이디푸스의 눈을 찌르는 징벌용 못, 혹은 가시밭길 같은 주인공의 험난한 운명을 연상시킨다.

인간적 오이디푸스?!

이처럼 한태숙 연출은 「오이디푸스」 텍스트와도 다르고, 기존의 공연과도 차별성 있는 독특한 성취를 이룩해낸다. 시각적 기호를 재구성하고 개성 있는 상징을 창출해내는 그녀의 탁월한 상상력은 한태숙표 「오이디푸스」란 레테르를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질문. 과연 한태숙 연출이 단언한 ‘평범한 보통 남자 오이디푸스’라는 구호는 실현되었는가? ‘성공과 실패, 상승과 추락을 동시에 지닌 장님 같은’ 그녀의 오이디푸스가 과연 영웅의 면모를 버리고 소박한 범인의 지위에 내려앉았는가?

신의 족보에 포함된 오이디푸스를 ‘인간적’으로 수식하는 것은 일단은 모순형용이다. 인간적 오이디푸스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에서 비논리성과 무정함을 탈색시켜야 한다. 논리에 목숨 걸고 동정심에 매달리는 건 하늘을 날고 번개를 쏘는 신들의 모양새가 아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결함(hamartia)이 그의 무지라고 못 박을 수 있는 것도 다 신들의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신의 자식이 그 정도의 통찰력도 없고 천우신조도 받지 못한다면 무지하고 무능할 수밖에. 하지만 인간적 오이디푸스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이디푸스에게 무지는 그의 책임이 아니다. 라이오스의 동성애와 그의 교살행위가 1차적 책임이고 영아를 매몰차게 죽이지 못한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연약함에 2차적 책임이 있다. 모르고 저지른 범행은 정상참작 사항이다. 게다가 오이디푸스는 효성이 깊고 정의감이 넘치기론 둘도 없는 인물이다. 누가 돌을 던지랴! 그의 범죄를 스스로 응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이여, 이제 만족하십니까? 운명 앞에서는 누구나 장님일 뿐이로구나. 그러나 기억해라. 이 두 눈을 찌른 건 내 손이다.”

오히려 ‘평범한 보통 남자’ 오이디푸스가 가진 비극적 결함은 온갖 금지명령들(기억하지마, 찾지마, 알지마)을 뿌리치고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호기심, 그리고 라이오스 살인자를 응징하려는 지극한 정의감, 테베에 새로운 질서와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지배자로서의 책임감,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화하는 유마힐과 같은 휴머니즘에 있다. 이런 품성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지와 결별하고 무지를 극복하는 덕목이다. 그렇다면 범인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그토록 후덕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죄행과 타락으로 물들여버린 (신이 조작한) 운명의 ‘비논리성과 무정함’에 있다. 다시 신화의 비논리성과 무정함을 씻어내지 못하면 ‘인간’이 탄생하지 않는다는 순환논리. 작품을 완전히 개작하기 전에는 인간적 오이디푸스란 성립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운명이다.”

인간적 오이디푸스의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은 있다. 수수께끼를 풀고 자신의 정체 뒤에 숨은 무시무시한 운명을 목도한 오이디푸스가 감당해야할 자기응징은 단순히 전염병 퇴치라는 국가보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티레시아스는 테베의 재앙이 ‘자연질서를 파괴한 죄’라고 정의하는데, 이 말은 오이디푸스의 범죄가 사회의 법질서나 윤리를 파괴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우주의 법칙을 교란한 중차대한 위반이며, 이는 곧 우주를 지배하는 신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패륜에 대한 응징은 형법상이라기보다 신화적이고 상징적 방식으로 (즉, 과장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원작에선 코러스가 “장님보다 죽는 게 더 낫지 않은가”라고 묻는다. 오이디푸스는 “만일 내 눈이 멀쩡하다면 저승에 가서 아버지와 불쌍한 어머니를 무슨 낯으로 본다 말인가”라고 대답한다. 자살이나 처형보다 더 급하고 중한 것이 자기정화이고 자기속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보통 인간이 이 모욕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황야를 죽는 날까지 떠돌아다닐 수 있을까? 이에 한태숙 연출은 오이디푸스의 자살을 암시한다. 비탈진 바위 위에 그려진 오이디푸스의 사망지점 표시선은 인간이면, 고고하고 당당한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포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자가 되는 게 신이 주신 운명이라면, 명예와 진실을 수호하며 의연하게 죽는 것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운명이다. 아니,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다. 무대의 人자 백묵 자욱이 여전히 가슴 아리다.

   

 

 

 

 

 

 

 

 

한 바탕의 칼 놀음으로 재구성된 <맥베스>

 

    - 극단 마방진의 <칼로 막베스> -

 

 

 

 

 

 

  

                                              이현우(순천향대학교 영문과 교수) hyonu@sch.ac.kr


 

 

 

 

 


연출: 고선웅

극단: 극공작소 마방진

공연기간: 2011.1.20~2.6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관람일시: 2011.2.5. 16:00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가장 짧은 작품이다. 가장 긴 <햄릿>에 비해서는 그 길이가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말할 것도 없고,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들에 넘쳐나는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이 철저히 배제된 채, 극의 흐름이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의 욕망과 죄의식의 내면을 타고 흐르는 지극히 압축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길이는 가장 짧지만 자칫 가장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한 작품이다. 연출자 고선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놀이와 칼이라는 두 가지 효과적인 무기를 빼들었다.

고선웅은 작품의 배경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먼 미래의 세렝케티 베이라는 범죄자들의 수용소로 바꿔 놓았다. 여기서 각각의 장면들은 마치 배우들의, 아니 수용소 범죄자들의 맥베스 놀이처럼 전개된다. 처음부터 배우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에 작품상까지 받은 <맥베스> 공연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히고 출발한다. 극이 시작하면 진지하게 한 장면 한 장면을 연기하다가도 이내 극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상황을 객관화해버리는데, 이전 장면에 대해 코멘트를 하거나 다음 장면을 소개하며, 또한 진지한 장면 이 후엔 반드시 우스꽝스럽게 연출된 연기로 그 진지함을 여지없이 깨 버린다.

고선웅은 이 ‘놀이’라는 형식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거작을 한껏 가지고 논다. 극 속의 극을 보여주는 이러한 메타드라마적 기법은 관객들이 원작의 세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손쉽게 원작의 특징적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무대화 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이점에서 고선웅은 분명 성공하고 있다. 고선웅은 욕망 앞에서 주저하지만 결국엔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 치는 맥베스(호산 분)를, 그리고 그러한 맥베스 보다 더욱 욕망에 들떠서 맥베스를 부추기지만 맥베스 보다 먼저 무너져 내리는 부나비 같은 맥베스 부인의 존재를 붉은 드레스를 입은 남자 배우(이명행 분)를 등장시켜 선명하게 표현해 낸다. 그는 이들 등장인물들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과장되게 일그러뜨려 코믹하게 표현하며 원작 속 등장인물들의 숨겨진 예각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또한, 맥베스나 그의 부인 뿐 아니라, 덩컨을 비롯한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모두 우스꽝스런 범죄자의 덧칠을 가함으로써 원작에 담겨진 폭력과 욕망의 순환고리를 더욱 선명하게 표출시킨다.

고선웅이 개작한 <맥베스>의 제목은 <칼로 막베스>이다. 약육강식이 펼쳐지는 세렝게티 베이 수용소의 범죄자들에게는 모두 칼이 주어져 있다. <칼로 막베스>는 시종 칼을 휘두르는 무협활극 <맥베스>이다. 난무하는 칼은 이 극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도 폭력으로 점철된 <맥베스>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더욱이 이 칼은 맥베스 사후에 총으로 대체되면서 점점 더 악화되어져 가는 폭력의 역사를 표현하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공연을 볼 때 원작의 무게와 복잡함에 치여 대충 만들어진 듯한 공연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고선웅의 <칼로 막베스>는 작품의 내용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배우들의 에너지 넘치는 연기, 장면과 장면 사이에 불필요한 끊김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빠른 장면 전환 및 이를 효과적으로 실행시켜주는 이층 무대 구조의 사용(셰익스피어의 글로브 극장에서 처럼) 등 셰익스피어 극의 운영에 있어 필수적인 셰익스피어 공연방법론에 있어서도 철저했던 공연이다. 분명 <칼로 막베스>는 동아 연극상 작품상, 연출상이 아깝지 않은 수작이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칼로 막베스>는 말 그대로 칼로 막 베면서 원작 <맥베스>를 잘 가지고 놀았으나, 때로는 너무 잘게 노는 것은 아닌가 싶은 대목도 없지 않다. 즉, 놀이와 놀이 사이에 놓인 원작 속의 장면이 너무 짧게 유지될 뿐 아니라, 놀이는 눈에 확 띄는 반면, 그 원작 장면의 재현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다. 연출의 의욕이 과잉된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내면 속의 어두운 야욕을 상징하는 맹인술사(마녀)와 대비시켜 도덕과 양심을 상징하는 노승을 병치시켜 놓은 것은 지나친 친절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상황을 애매하게 만들기도 한다.



 

 

 

 

 

 

 

 

 

 

 

 

페리클레스, 엘리자베스 조의 블록버스터 옮기기.

 

 

 

 

 

 

이상욱(project t 대표)  imnactor@hanmail.net

 

 

 

 

연출: 김광림

극단: 화동연우회

공연기간: 2010.12.4~12.12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극장

관람일시: 2010.12.4

 

 


 


                                                              

 

셰익스피어를 우리말로 공연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다.

우선 번역된 대본만 보더라도 이것이 과연 한 호흡에 말할 수 있는 문장인지부터 의문이 생긴다. 원문의 의미를 최대한 잘 전하고 싶은 번역자의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나 이걸 과연 연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스펙 중심의 교육 풍토에서 인문학을 접한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작품 속에 스며있는 엘리자베스 조의 철학을 쉽게 향유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많은 연출자들이 셰익스피어를 공연할 때는 대본을 새로 쓰거나 각색을 하는데, 대본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에 한 획 조차 함부로 지우거나 수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가-연출조차 세익스피어 공연을 위해서는 대본을 새로 쓰는 경우가 많으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셰익스피어 희곡 중 거의 공연되지 않았던 작품, “페리클레스”를 화동 연우회는 20회 기념 공연으로 선택했다. 4대 비극과 비교해 본다면 “페리클레스”는 연극적 목표를 향해 행동과 사건의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또 다른 셰익스피어의 작품 “겨울 이야기”처럼 1막에서 출발한 드라마가 다음 세대로 넘어오며 5막에선 전혀 다른 드라마를 펼치게 되는 특이한 작품이다. 무심히 희곡을 읽으며 “겨울 이야기”의 황당한 엔딩에 놀라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페리클레스”를 읽으며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페리클레스는 직선적 플롯이 아닌 에피소딕 플롯으로 이해되어야 오히려 작품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 작품은 공주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수께끼에 도전한 페리클레스가 안티오쿠스 왕의 근친상간을 발견하고 그의 비열한 계략에 자신과 자신의 조국 타이어가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 도피 생활을 하는 여정 속에서 벌어지는 드라마이긴 하나 도피 과정을 긴장감 있게 그리기보다 도피 여행 중에 벌어지는 사건 자체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17세기 글로브 극장의 제작 여건에서 대단한 스펙터클을 그려냈을지 아니면 Iambic pentameter의 언어적 에너지를 통해 드라마의 정서를 제시적 연출로 그렸을지 단언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페리클레스”가 당시 런던 관객들에게 지중해 연안의 정취를 배경으로 낭만적 모험담을 전해주며 이국적 체험과 판타지를 그리려 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페리클레스”를 통해 현대 한국 관객에게 무엇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김광림 연출은 “페리클레스‘를 무대화함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전략을 선택했다. 우선, 셰익스피어 학자 이현우를 통해 원작을 새로 번역하게 한 후 한국적 정취가 물씬 나는 대사로 각색을 하였고, 연극 양식으로는 서사극을 선택했다. 대본을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한 각색 작업은 셰익스피어 verse accent에 대한 한국적 시도로 보이는데, 연출적으로는 소리꾼 서사를 삽입하여 연극의 분위기를 잡아 놓은 뒤 일인 다역 광대를 통해 흥을 한껏 돋구겠다는 계산이었다. 여기에 프로젝터를 통해 지중해 연안을 넘나드는 페리클레스의 여정을 컴퓨터 그래픽과 그림자 연극 애니메이션으로 시각화하며, 화려한 의상과 배우들의 다양한 움직임으로 엘리자베스 조의 블록버스터를 21세기 한국 연극으로 승화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이러한 연극적 시도에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를 말하긴 어렵다. 예고도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 동문들만으로 구성된 극단의 캐스팅이 이렇게 화려할까 싶을 만큼 눈부신 배우진을 자랑하긴 했지만 동문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헌신해주다 보니 연출의 의도가 온전히 무대에 구현될 만한 연습양이 보장되지 못했을 것이란 추측 때문에도 그렇고, 연출은 또 연출대로 캐스팅에 대해 아쉬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달리 생각해 보면 화동 연우회가 갖는 성격, 연극을 통해 옛 친구들을 만나고 이 만남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기본 취지에서 무엇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발기인들의 기회비용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왈리왈률(曰梨曰栗) 한다는 것이 언어도단(言語道斷)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무수한 극단들이 명멸(明滅)하는 대학로 현실에서 20년간 연극을 공연한 단체에 대한 경외심에, 또한 4대 비극만 공연되는 대학로에 엘리자베스 조의 블록버스터를 옮기려 했던 도전 정신을 가진 극단과 연출에 대한 기대감에 몇 자 적어 보았다.



 

 

 

 

 

 

 

일상을 포기한 일탈, 극단 골목길의 <처음처럼>

 

 

 

 

 

 

 

                                                       서지영(연극평론가) jyseo47@yahoo.co.kr

 

 

 

 

 

 

작.연출 : 박근형
극단 : 골목길
공연기간 : 2010.1.27~2.6

공연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3관
관람일시 : 2011.2.1. 20.00



 

 

 




변화와 실험의 지점

박근형 작, 연출, 극단 골목길의 <처음처럼>이 ‘제1회 대학로 코메디 페스티벌’의 마지막 작품으로 공연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과연 코메디로 분류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다. 격렬한 움직임과 강렬한 대사 펀치 속에 희극적인 요소가 있기는 했으나 유쾌한 코메디는 아니었고, 단순하고 거친 행동 연기는 슬랩스틱에 가까웠다. 블랙코메디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애초의 의도는 의도로만 드러났을 뿐이다. 이 작품을 코메디로 접근하기 보다는 박근형 연출의 전작과의 연관 선상에서 볼 때 다소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박근형 연극의 전반적인 특징이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탈행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일상이 아닌 비현실적인 상황으로부터 현실의 참상을 끌어내는 식으로 기존의 판을 뒤집는다. 그리고 <아침드라마>에서 보여준 반사회적 범죄와 패륜으로 얼룩진 막장드라마 같은 세상을 <처음처럼>에서는 과격한 몸싸움으로 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극형식의 변화는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에서 선취되었던 방식이다. <치킨 오페라>는 박근형 연출이 쓴 희곡은 아니지만 연출의 개성이 충분히 드러났던 공연이고 극단 골목길이 변화를 시도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의 몸연기는 대단히 실험적인 상태였는데 <처음처럼>에서도 발전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하나의 자궁에서 잉태된 두 개의 이데올로기

<처음처럼>은 형제의 갈등을 소재로 한 연극이지만 카인과 아벨의 갈등에 뿌리를 둔 여타 의 작품들과는 다른 궤도에 있다. 갈등의 표현 방식은 직접적이고 단순하며, 이들의 대립은 상징성을 갖는다. 하나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남과 북 또는 좌, 우의 대립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갈등의 전개 역시 <아침 드라마>에서처럼 거침없이 질주한다. 어린 시절 설빔을 가지고 싸우다가 앙숙이 되는 대단히 유아기적인 갈등에서 출발하여 거국적이고 역사적인 대립을 모의하는 지점까지 발전하는듯하지만 형의 거대담론은 아무런 뒷받침 없이 개인적인 졸렬함만 드러내고 동생은 살인행각으로 자신의 실존적 번민을 드러냄으로써 이야기의 방향은 개인 대 사회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신선한 화두를 제시하는 연극은 아니다. 그들의 싸움에서 희생당하는 베트남 여인, 그 밖의 반사회적, 패륜적 범죄들, 그리고 한국전쟁의 이야기가 잠시 나오지만 이는 시, 공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인류의 전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 밖에도 현실의 참담함이 비현실적인 극적상황을 비집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대칭과 반복, 그리고 순환의 구조

연극은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운데다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상황의 연속이지만 공연의 토대가 되는 희곡은 상당히 계산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외연은 액자 구조다. 형제의 이야기는 남, 녀가 등장하여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로 극중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대칭과 반복, 그리고 순환의 구도가 자리 잡고 있다. 형제의 대립을 중심으로 이루는 대칭 구도는 마치 반을 접었다 핀 데칼코마니와 같다. 형제들의 대립으로 연극은 두 동강이 난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인물이 바로 만화캐릭터처럼 등장하는 패스트푸드점의 매니저인데 이곳의 매니저는 형제 싸움의 증인이 되고 이를 중재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은 마지막 혈투의 증인노릇을 하다가 희생된다. 매니저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으르렁대는 형제는 너무나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똑같아 보이는 반영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주제의 반복과 변형을 체계적으로 진행한다.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지루하게 만든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연극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는 시작부분에 다 드러났는데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결국은 예상된 결말로 치닫고 만다. 다만 싸우다가 죽은 형제가 다시 살아나 싸우는 식으로 결말을 끝없는 이야기로 열어 놓음으로써 지금까지의 반복이 영원히 계속되는 반복임을, 눈앞의 문제가 아닌 좀 더 근원적인 문제임을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움직임과 공간의 효율성에 관하여

탄탄한 밑그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극적 완성도가 높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강약의 조절이 없는 말과 행동, 특히 배우들의 어색한 동작은 연극을 난삽하게 만들었다. 동작에 각이 있더라도 연결은 유연해야 하는데, 거칠고 투박하며 서툴기까지 한 움직임들을 극적인 설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극단<골목길>이 앞으로도 이렇게 상징적인 액션을 많이 쓸 생각이라면 동작에 대한 연구를 부단히 해야 할 것이다.

무대에 일상적인 오브제는 없다. 무대 배경을 색색의 사각형 문양으로 둘러놓았다. 사각형의 색채가 강하고 몇 개의 사각형이 빛을 내며 포인트를 주는데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으나 사실적인 무대보다는 나았다고 본다.

형제가 찾아가서 싸우는 패스트푸드 매장은 그들의 갈등을 전시하고 설명하려는 공간으로 상징적이면서 다소 환상적인 곳이기도 하다. 매니저는 현실과 비현실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인물로 이 연극에서 가장 돋보였다. 그가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내용을 통해 이 연극의 황당함과 잔혹함, 공허함을 확인시키려 하는데 너무 빈번하다보니 이야기의 흐름만 깨지고 의도했던 것만큼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의도와 결과사이의 간극을 느끼며

작가 겸 연출가가 만드는 연극은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박근형 연출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희곡과 연극이 따로따로여서 직접 쓰고 연출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설프게 던져놓은 서사는 자꾸만 사건의 인과관계를 의식하게 만들고 시간과 공간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게 한다. 상징으로 휘감아 놓은 현실참여적인 연극인데, 상징의 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직접적인 부분이 있는가 하면 상징의 기호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지점도 여러 곳 있어서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연극은 아니었다.

시종일관 강하기만 했던 무대의 에너지는 관객을 지치게 한다. 배우도 지치고 관객도 지친다. 그 많은 에너지를 방출한 만큼의 효과는 있었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1시간 남짓의 공연은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연극에 대해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 중에는 제목이 왜 ‘처음처럼’인가, 그리고 프로그램에 소개된 ‘교도소에서 출소한 나쁜 남자의 이야기’는 어디로 간 것인가, 관극에 혼란만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제작 후 두 달여 시간이 흘렀으니 그 사이 작품이나 캐스팅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러한 기획 공연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관객의 신뢰를 잃게 만든다. 공연을 할 때의 책임감은 무대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이 바로 박근형 연출의 작품을 본 후에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네임 밸류가 높을수록 짐은 무겁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은 기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노력보다 몇 배 더 뼈를 깎는 고통이어야 할 것이다.


 

 

 

 

 

 

 

                             

 

 

 

보이스 디렉터의 필요성

 

 

 

 

 

 

 

                                                      우상전(연극배우)wook915@naver.com

 

 

 

 

 

 

 

공연명: 오이디푸스

연출: 한태숙

극단: 국립극단

공연기간: 2011.1.18~2.13

공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람일시:

 

 

 

 

 

 

내가 보이스 디렉터의 기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손진책 국립극단 감독이 서울연극제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90년대 중반이었다.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극단의 디렉터인 시실리 베리 선생을 초청하여 일주일간 특강을 한 후였다. (다음해에 한 번 더 방문했다) 이 분으로 인해 이 방면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후 화술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이런 발언을 한번 해보는 것이다,

다음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출발한 국립극단의 ‘오이디푸스’를 관람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도 이제는 이에 관한 관심을 가져야 할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몇 자 적어 보기로 한다.

출연자 A의 경우

대사가 일정한 리듬으로 일관하고 있다. 단지 소리가 크고 작을 뿐,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없다. 억양이 일정해서 대사에 변화가 없다. 주인공일 경우에 이런 목소리에 음폭이 없는 무변화는 관객을 지루하게 하고 ‘말을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출연자 B의 경우

비교적 딕션도 좋고 미성의 목소리를 가졌는데도 목소리에 공명이 없다. 목소리 자체는 좋으나 공명에 의한 배음이 수반되지 않아서 아쉬웠다. 가슴에 울림이 없는 목소리를 낸다. 대극장의 경우에 연기의 깊이는 목소리의 공명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면 좋다.

출연자 C의 경우

참 안타까웠다. 어미가 아예 죽어버린다. 대사가 끝까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경력이 많은 배우가 감정표현을 하려다가 어미가 사라져 들리지 않는 단점을 노출하고 있다. 기본 발성을 목으로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을 내려면 자연히 목에 힘이 들어가 어미까지 발음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경직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출연자 D의 경우

역할에 무게를 준다는 게 결국 목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결과를 노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극장에서 발성이 약화되고 있다. 소리가 입 밖으로 시원하게 나오지 못해 듣는 사람이 갑갑함을 느끼고 있다. 공간에 알맞은 무대발성이 안 되어 연기에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엄청난 경력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공연이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연극의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결과를 노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연출자가 경사무대를 만들어 배우들의 전달에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는데도,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하나, 박근형 연극처럼 일상어가 주를 이루는 창작극이 아니라는데 있다. 즉 문어체가 주를 이루는 번역극이어서 그렇다.

둘, 소극장이 아니고 대극장 공연이어서 그렇다. 배우가 목소리를 객석에 전달하려는 강박감과 연기에 많은 에너지를 내품어야 하는 작품(인물)의 성질로 인해서 그렇다.

셋, 우리는 배우의 경력이 많거나 연기상을 받으면 연기의 달인이 됐다고 여기는 게 우리의 풍토다. 또 누가 지적이라도 하면 무척 자존심을 상해해서 그냥 서로 말없이 넘겨버리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력과 나이가 많더라도 장르나 배역에 따라 이에 적합한 목소리를 내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넷, 우리는 배우의 말이 들리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또 공연이 지루하거나 에너지가 없는 게 배우의 대사처리가 주된 원인인데도 작품이나 연출의 탓으로 돌리는 게 현실이다.

다섯, 연출자들마저도 자신의 ‘귀’에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는다. 작품해석이나 조명, 무대장치, 소품 등에는 관심을 가져도 배우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니 판단력이 없는 것 같다. 공연을 평가하는 평론가의 경우는 더욱 심한 듯하다.

여섯, 우리는 연기술에서 호흡과 발성을 자주 거론하면서도 그게 연기에서 무슨 기능을 하는지를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 더욱 공명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운 게 현실이다. 이는 우리가 소극장 공연에만 전념해온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곱, 우리 배우들은 보이스나 스피치 능력을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만 간주한다. 하지만 배우에게는 자기의 목소리를 자기가 판단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우선 소리를 듣는데 내이(內耳)와 외이(外耳)가 있어 타인과 달리 내이로만 듣는 배우는 당연히 객관성에서도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더욱 문어체인 대사를 일상처럼 잘 말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항상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배우다.

여덟, (더구나 대극장에서) 좋은 보이스와 스피치를 구사하는 걸 보지 못해 이에 대한 안목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따라서 보이스만이라도 외국 배우들의 좋은 점을 집중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홉, 우리는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오면 화술까지도 배워오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믿음을 갖거나 그런 배우가 대사를 못하면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나라 말을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한 스피치를 연마하기가 쉽지 않다. 또 설령 연마했다고 해도 우리말을 잘하기가 용이치 않다. 그래서 우리말은 궁극적으로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열, 독백이 아닌 이상, ‘말하기’는 항상 상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미가 쳐지거나 얼버무리는 잘못된 버릇에 빠지게 된다. 특히 문어체가 강화된 번역 고전(비극)공연에서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배우가 말을 못하고 대사를 읊조리며 폼만 잡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무대에서의 보이스나 스피치가 일상의 생활언어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캐릭터에 따라서 또 작가의 글쓰기 솜씨로, 감정처리, 비극이나 코미디, 사극 같은 장르의 특성으로 인해서 배우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달리 내야하고 일상과는 다른 말솜씨를 발휘해야 하는 게 배우의 스피치고 보이스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안식년을 보낸 배우이자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이현우교수의 경험담에 의하면 여전히 그곳에서는 어떤 배우라도 반드시 보이스디렉터의 조언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 단 그 현장을 절대로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데, 이는 배우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그들이 경력이나 실력이 일천해서 디렉터의 코치를 받고 있을까를 우리도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처럼 기초교육이나 훈련에 대한 체계마저도 부실한 현실에서 이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뮤지컬 배우들이 훈련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으면서 우리의 무관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충분히 예상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국립극단이 새롭게 창단 되면서 외국에서 예술감독을 초빙하자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때 주된 반대의견은 외국인은 한국말과 우리의 정서를 몰라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연출의 셰익스피어 공연에서 최고라고 칭송되는 배우가 처음으로(?) ‘읊지 않고 말하는’ 것을 목격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어와 정서를 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이 무슨 이유로 우리말을 하기가 이토록 힘든 것일까? 또 우리가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려다가 전달조차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대에서의 보이스와 스피치는 국적에 관계없이 연기적 기술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훈련과 교육, 줄기차게 토론을 필요로 하는 게 무대언어이라고 여겨진다. 번역극이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 우리는 이에 관한 많은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또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젊은 연극인들도 많아진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들 인력을 잘 활용해서라도 연기의 선진화를 도모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연극

“Proof (프루프)”와 “True West (트루웨스트)”

 

 

 

 

강양은 (연기전공 교수) yangeunie@hotmail.com

 

 

 

공연명: 트루웨스트                                            공연명: 프루프

연출: 유연수                                                     연출: 이유리

공연기간: 2010.11.26~2011.2.27                           공연기간: 2010.10.12~12.12

공연장소: 컬쳐 스페이스nu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마당3관

관람일시: 2011.1.28                                           관람일시: 2010.11.29

 

 

 

 

 

 

 

 

새롭게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무대가 좋다>는 악어컴퍼니, 나무엑터스, CJ엔터테인먼트가 모여 만든 Play Festival로, 토니상(Tony Award), 퓰리처상(Pulitzer) 수상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현대극(contemporary plays) 등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드라마와 영화로 친숙한 스타들, 숙련된 배우들과 스텝들로 구성되어, 뿌리가 있는 고전과 새로운 도전의 연극들이 펼쳐진 공연의 메카 대학로에서 멋진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선정된 작품은 <Fool for Love (풀포러브)>, <Closer (클로져)>, <Proof (프루프)>, <Art (아트)>, <True West (트루웨스트)>, <The Bald Soprano (대머리 가수)>, <That Face (댓 페이스)>, <Kiss of the Spider Woman (거미여인의 키스)>, <Three Days of Rain (3일간의 비)>으로 10개월간 공연되고, 그 중 <프루프>는 세 번째 작품으로 끝이 났고, <트루 웨스트>는 다른 3작품과 더불어 공연 중이다.

<프루프> 극작가 데이빗 어번 (David Auburn, 1969)은 줄리어드 스쿨에서 극작공부를 해서 첫 작품 <Skyscraper 고층빌딩>로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을 올렸고, 그는 우리나라 영화 <시월애>를 <The Lake House 레이크하우스, 2006> 영화로 리메이크 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한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프루프 Proof, 2000>로 유명해지기 시작, 그해 10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올렸고, 20년만의 브로드웨이 최장기 연극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이 작품으로 2001년 토니 어워즈, 풀리처상, 드라마 데스크 워어즈, 뉴욕 드라마 비평가 협회상 등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큰 사랑으로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프루프>는 우리나라에서 2003, 2005, 2008년 추상미, 김지호가 캐서린(Catherine) 역을 맡아 공연 되었고, 2010년 10월12일에서 12월12일 2달간 대학로예술마당3관에서 캐서린에 강혜정와 이윤지, 로버트에 남명렬와 정원중, 클레어에 김태인와 하다솜, 할에 김동현에 의해 작품이 완성되었다.

<트루웨스트 True West, 1980>의 극작자 샘 쉐퍼드(Sam Shepard, 1943)는 연출가, 감독, 배우,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유명한 아티스트이다. 그는 20세에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건너와 극단 배우로 시작, <Cowboys 카우보이들, 1964>이라는 단막극을 시작으로 60년대 중반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 작품들을 올려 실험극, 히피세대 극작가로 인정을 받았고, 현재까지 많은 극작을 하고 있다. 그는 <Days of Heaven 천국의 날들>에 영화배우로도 참여했고, <매장된 아이 Buried Child, 1978>라는 희곡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트루웨스트>는 처음부터 대작으로 관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샌프란시스코 Magic Theatre, 시카고 Steppenwolf Theatre, 뉴욕 브로드웨이 Joseph Papp's Public Theatre, Circle on the Square Theatre 등 미국 전역에서 공연되면서 대중적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연극 <프루프 (Proof)>는 미국의 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Forbes Nash, Jr, 1928)에게 그의 수학적 천재성의 유전을 지닌 딸이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한다. 존 내쉬의 이야기는 영화 <뷰티플 마인드 (Beautiful Mind)>에서 더 가깝게 만나볼 수 있다.

<프루프>는 특별한, 그러면서도 어떤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천재 수학자와 그의 노트에 남겨진 새로운 공식의 비밀, 그리고 그것의 발견이라는 특이한 사건을 다루며, 누구나 겪는 부녀간, 자매간, 남녀간 갈등 등 보통사람들의 일반적 삶의 모습을 동시에 진솔하게 다루고 있다.

수학적 천재성으로 새로운 공식들을 검증하며 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아버지 로버트는 나이가 들어 정신적 혼란과 불안 증세가 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수학적 촉망을 받는 그의 둘째 딸 캐서린은 그녀의 재능을 위한 시간보다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아버지의 새로운 수학적 연구를 도우며 지내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캐서린은 자신도 아버지의 정신적 분열 증상을 물려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한편 아버지의 제자 할은 캐서린을 찾아와서 그가 죽기 전에 새로운 수학적 증명을 남겼을 지도 모를 수학적 연구 노트를 검증하자는 제안에, 캐서린은 할의 진솔한 모습에 허락한다. 캐서린에게 첫눈에 반한 할의 순수하고 엉뚱한 사랑의 표현과, 둘의 공통된 관심은 둘을 청량한 사랑으로 이끈다. 그러나 할이 놀랍게 발견한 새로운 수학적 논증은 아버지가 쓴 것이 아니라 조력자 역할을 했던 캐서린의 것이라는 말에 의심과 재검증의 얘기가 나오며 둘의 관계가 깨어지게 된다. 그러나 결국은 할은 캐서린의 논증임을 믿고, 둘이 함께 그녀의 수학적 논증에 매진하기로 하며 행복한 끝을 맺는다.

또 하나의 갈등은 아버지 장례식 후 자아가 강한 캐서린과 책임감과 현실감이 높은 언니 클레어 두 자매간의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언니의 무관심에 대한 캐서린의 불만과 경제적 책임감에 떨어져 있어야 했던 언니를 이해 못하는 동생의 원망에 대한 클레어의 서운함 등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잘 되어지지 못하는 자매간의 갈등이다. 삶의 터전이나 관심이 다른 두 자매, 무엇보다 시카고의 집을 팔고 뉴욕에 가자는 언니의 제안에 절대 반대하는 동생, 이에 그 둘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결국 동생 캐서린은 고향에 남아 아버지 뒤를 잊는다.

연출 이유리는 연극 <프루프>의 네 사람은 인간 유형의 대표적인 상징들이고, 결국 작가는 이 연극을 통해 사람 간의 이해와 사랑이 모든 병적 징후의 치유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트루웨스트>는 상반된 그러나 서로의 반쪽이자 하나인 두 형제의 이야기이다. 깔끔한 차림에 모범생의 이미지를 지닌 할리우드 스크린작가, 동생 오스틴은 알래스카로 여행간, 남부 캘리포니아 어머니 집을 봐주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사막을 떠돌며 오랫동안 소식 없던 그의 형, 리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오스틴은 그의 협력자, 영화 프로듀서 사울과의 약속으로 물건들을 훔치고, 술에 가득취해 그를 방해하는 형을 외출시키기 위해 그의 차 열쇠를 형에게 준다. 형은 TV를 훔쳐 일찍 돌아와 프로듀서를 만나게 되고, 골프 얘기로 사울의 관심을 사며 리는 터무니없는 시나리오 아웃라인의 관심을 받게 된다. 리는 오스틴 도움으로 플랏을 완성하고, 필드내기에서의 승리로 사울에게 성공의 확신을 주며 그의 기획 하에 영화작업의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이제껏 작업해온 오스틴 프로젝트를 접겠다는 사울에 오스틴은 허무함과 어이없음에 당황하게 된다. 그날 밤 오스틴은 잔뜩 술에 취해 거칠고 투박한 형의 행동을 흉내 내며 형이 했던 것처럼 힘겹게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리를 방해한다. 둘은 서로를 향해 점차 모습이 뒤바뀌어 가는데, 이는 보는 이에게 재미를 준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사막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 얘기로 그들의 얘기의 변화는 크게 두드러진다.

일류대학을 나와 사회에서 존중과 인정을 받고 있는 오스틴은, 허구적인 사막에 매력을 느껴 형과 함께 사막에서 살 것을 애원하고, 형은 허락하는 대신 형의 시나리오를 돕게 한다. 그러나 둘을 만취가 되어, 리는 부엌을 정신없이 휘젓고 다니며 타자기를 사울의 골프채로 두드리고, 오스틴은 토스트기도 못 훔칠 거라는 형의 말에 이웃집에서 30개의 토스트기를 잔뜩 훔쳐와 윤을 내고, 식빵을 굽고 뿌리고, 치고 받는 등 혼동이 부엌에 가득하다. 처음의 깔끔함이란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난장판 그 자체이다.

어머니는 화분들이 잘 있는지, 피카소가 마을에 온다는 소식에 만나기 위해, 예고 없이 여행에서 돌아오고, 아들들로 죽은 화분들과 엉망이 된 집을 보게 된다. 오스틴은 형을 따라 사막으로 가겠다고 하나, 형은 갑자기 혼자 가겠다고 하며 집을 나서고, 이에 동생은 전화 줄로 형의 목을 조른다. 어머니는 그러한 속에서 태연히 모텔에서 머물겠다고 집을 나선다. 오스틴은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하는데, 리는 벌떡 일어나 그를 막는다. 둘은 얼굴을 마주하고 강한 눈빛을 주며 끝을 맺는다.

유연수 연출가는 이 작품은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다룬 연극으로, 거울같은 형제 리와 오스틴의 동일함과 상반됨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루프>는 공간의 변화 없이 같은 장소에서, 일루전적 사건과 과거에 일어난 이야기를 현재 시점과 함께 오고 가며 비사실주의적 시간적 변화를 보여준다. 이 공연의 무대는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장치되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포근하고 따스한 분위기, 브라운 빛이 맴도는 미국 서부 시카고의 목재 집의 발코니와 뒷마당이 무대에 펼쳐졌다. 담장에 넝쿨, 마당의 낙엽,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 오래된 화분들과 바구니들,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겨운 가옥의 모습을 잘 살려 내었다.

<트루웨스트>는 시공간의 변화 없이,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주의 아주 깔끔하고 가지런히 정리정돈된 집 실내로 무대가 구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임스 딘이 나온 영화에서 보이던 냉장고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또한 똑바로 나열된 작고 깜찍한 같은 크기의 책장의 화분들, 커다란 창문 가까이에 있는 정원의 울창한 나무들, 테이블 위에 촛불, 타자기 등 리얼리즘을 드러내는 무대다. 이는 집과 집 사이의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도시외곽의 주택지역을 상상되어지기 충분하다. 늑대, 귀뚜라미 소리들도 캘리포니아의 향기를 풍긴다. 그리고 분명한 이분법적 상이함을 나타내는 의상은 두 형제의 마찰음을 노래하는 듯하다.

<프루프>를 필자가 관람한 날은 배우 남명렬, 강혜정, 하다솜, 김동현이 공연했는데, 이들 모두는 자연스러운 연기와 서로 잘 녹아지는 관계를 이루며 한 호흡으로 극의 강약을 잘 이끌어가고 있었다. 함께 이루어진 연습의 모습을 로버트 역에 남명렬 분은 몰입된(obsessed) 수학자의 모습을 살아있게 드러내며 자신의 모든 것, 혼신의 힘을 바친 삶의 열정과 도전에 많은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할 역의 김동현 분은 대사를 자신의 것으로 섬세하게 소화해내며 맛깔스러움과 희학적 묘미로 관객에게 큰 웃음을 주며 그들을 사로 잡았다. 클레어 역의 하다솜 분은 도도하고 도시적인 인물을 잘 그렸다. 캐서린 역의 강혜정 분은 내외적 갈등과 인물을 잘 그려냈고, 할과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비롯, 정서들을 사랑스럽게 표현해냈다.

<트루웨스트>를 관람한 날 배우는 형 리역에 오만석, 동생 오스틴 역에 홍경인, 프로듀서 및 어머니 역에 임진순이었는데, 배우들은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을 잘 창조해내었다. 거칠고 투박하고 다혈질적인 형 리와 깔끔한 엘리트 동생 오스틴 둘의 상반된 모습은 볼거리다. 물과 불, 커피와 맥주, 시민화된 (civilizational) 모습과 야만적인 (barbarious) 모습 같은 대조적 모습을 두 배우는 잘 소화해 내었다. 배우들의 넘치는 에너지와 인물화는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 관객의 큰 호응과 반응을 가득 잡아내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조금은 과도한 변화와 인물화의 표현, 여장남인의 어머니의 극의 흐름과 어우러지지 않는 부조화는 조금의 아쉬움을 남겼다.

인물들이 술을 마실수록 정돈된 실내는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가나 속내가 진실되이 드러나고, 현실적 도피의 사막 동경, 미라지를 꿈꾸며, 서로의 반쪽인 형제 둘이 하나가 되어간다. 한 인간의 모습이 되어가는 이 둘에서 인간 스스로의 명예와 방임, 규율과 자유, 소외와 관심, 성공과 실패, 포기와 열망, 그리움과 소홀, 겉과 속, 포장과 비포장, 문명과 야만 등 두 상반된 모습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브라운관 배우들의 연극 출현은 또 다른 연극계의 흐름으로 이미 관객에게 익숙해져가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상업주의적 측면에서 관객의 표를 몰고 다니는 ‘스타 지상주의’라는 비판보다는 그들의 연기력을 대중에게 가깝게 선보임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더 많은 관객을 공연장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리라고 믿는다. 물론 스타 연예인 뿐만 아니라 무명의 연극배우들에게도 좋은 기회들이 열리고, 힘들게 꿈을 펼치고 있는 극단들에게도 꾸준한 지원과 후원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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