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연극

Today's Theater In Seoul

장코폴로 2010. 11. 16. 10:32

                    TTIS

 

 오늘의 서울연극

Today's Theater In Seoul

       제 1 호 (1부)

                      2010.10.18

 

발간사

 

인터넷 연극지『오늘의 서울연극(Today's Theater In Seoul)』발간을 함께하며

 

                                                                                                                             

 

 끊어진 시간의 가닥을 다시 이어 새롭게 매듭을 맨다. 한 매듭 매듭을 곱고 단단하게 매기위해 기록자들과 행위자들은 서로 얽히고 얽혀 돌아간다. 시간들이 쌓여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지며 빛을 내는 시간의 매듭들이 태어날 것이다. 모든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사람들의 이름도 쌓여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 후대에 또 다른 기록자들과 행위자들이 그 매듭을 조심히 풀어보고 그 매듭사이에 묶여있던 시간의 활자들이 펼치는 광경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라고~~~!!”

 서울연극협회 1대 집행부에서 만들었던 『서울의 연극(TIS) -2005년과 2006년 2년에 걸쳐 12권이 발간 』이 중지된 사실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오세곤 선생님의 제의로 3대집행부에서  온라인으로 회원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의 연극지를 재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많은 일과 수고는 오세곤 선생님과 3명의 기자(심희령, 장시내, 이정현)분들이 수고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서울연극협회의 220개 극단들과 3,000여명의 회원들의 목소리와  시간의 발자취인 공연을 담고자하는 일은 녹녹치는 않습니다. 특히 많은 필자의 확보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이번 『오늘의 서울연극(Today's Theater In Seoul)』은 평론가뿐만이 아니라 연극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글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는 연극을 활자에 묶어 기록하고, 그 기록들을 보관하고 분류하는 일은 참으로 귀중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요즈음 박정기 선생님의 짧은 기록들을 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그 글들을 통해 제가 보지 못한 연극들을 느끼게 되고 근황들을 알게 됩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이번 『오늘의 서울연극』을 통해 연극계의 좌우상하를 폭 �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서울연극협회 3대집행부와 연극기록실은 이 일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며 재 발간을 위해 애쓰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2010년 10월

                                                       『오늘의 서울연극』 발행인, 서울연극협회 회장 박장렬


 


 

발간사

작은 손길로 거대한 바다를...


2010년 10월 드디어 인터넷 연극지 『오늘의 서울연극(Today's Theater In Seoul)』이 그 첫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론 원고의 양이나 집필자 수에 있어, 특히 대상 작품 수에 있어 아직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물방울이 언제고 거대한 강으로 또 넓디넓은 바다로 퍼져나가리라 확신합니다.
현재의 작고 초라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서울연극』은 서울의 모든 연극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단 한 줄의 기록이라도 남기는 것이 이후 역사 정리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2009년 『한국 근현대연극 100년사』를 집필하며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의 서울연극』은 과거 서울연극협회가 2005년과 2006년 2년 동안 12권에 걸쳐 발행했던 『서울의 연극(Theater In Seoul)』의 역사와 정신을 잇고 있습니다. 물론 40여명의 필자를 확보하고 상당히 안정되어 가던 중 맥없이 중단되고 만 그 아픈 역사는 결코 본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인터넷 연극지를 표방하며 예산이 드는 종이책 발간을 피하고자 하는 것도 어떤 경우에도 중단되지 않는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과거 『서울의 연극(Theater In Seoul)』이 서울연극협회 단독 출판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 『오늘의 서울연극』 발간은 서울연극협회와, 연극 관련 기록을 정리 축적하는 연극기록실이 공동으로 주관하기로 하였습니다. 역시 서울연극협회 운영진 교체로 인한 중단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어쨌든 몇 년 동안 벼르던 『서울의 연극』 복간 실행을 인터넷 연극지『오늘의 서울연극』으로나마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에 흔쾌히 동의해 준 서울연극협회 박장렬 회장의 덕분입니다.
앞으로 『오늘의 서울연극』은 내용에 대해서는 연극기록실이 책임지고, 배포에 대해서는 서울연극협회가 주로 책임지는 방식으로 발간될 것입니다.
과거 『서울의 연극』은 가능한 한 많은 작품에 대하여 되도록 복수의 평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물론 격월간이라는 한계로 모든 작품을 다루지는 못 하였지만 그래도 월간 『한국연극』만 있는 것에 비해 훨씬 많은 작품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고, 따라서 『오늘의 서울연극』도 그런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물론 예산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참여하는 분들의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세련된 편집의 책자로 발간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공연되는 작품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80여분의 연극인들께서 필자로 등록을 하였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첫 호는 수록 작품 수가 적어 목표 운운하기가 어렵지만, 『오늘의 서울연극』은 우선 월 1회 발간을 기준으로 한 호당 최소한 50작품에 대한 100개의 평을 싣는 것을 1차 목표로 합니다. 물론 앞으로 발간 주기를 줄여 한 호 당 수록 작품의 수를 줄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점진적으로 할 일입니다.
말만 거창하고 실천은 없는 것보다는 작은 일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연극 정신과 맞는다는 생각입니다. 부디 이 작은 실천에 동참하는 연극인들이 더욱 많아져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자랄 날을 고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10월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연극기록실 대표 오세곤




목차

(1부)

 

Review

 

 

- 여성주의적 관점에 의거한 신화의 재해석 <이오카스테> | 이용복


- 제12회 변방연극제 초청공연작 [햄릿 머신 prototype]  | 서지영


- 샤우비네의 도발적 무대, <햄릿>  | 송민숙


- 오스터마이어<햄릿>: 몸, 감각, 이미지의 포스트모던적 미장센  | 심정순


- 김혜영 연출작 <사막에 눈이 내릴거야> 배우들의 땀으로 사막에 눈이 내리게 하기 | 임혜경


- 갈라파고스 생물노트 | 유원익
 

- 세상을 향한 우리네 소리의 아름다운 외침, 뮤지컬<서편제>| 강양은


- 미친 배우들의 <미친 거래> | 강재림


- [광주연극]박윤모의 모노드라마<아버지>  | 한옥근

 

(2부)

 

- 박정기 기록실

 

  ㆍ강부자의 오구

  ㆍ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ㆍ블랙 코메디

  ㆍ매우 중요한 인물

  ㆍ뮤지컬 <서편제>

  ㆍ왕은 왕이다

  ㆍ디오니소스

  ㆍ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ㆍ꽃을 받아줘

 

 

정책기록실

 

 

기자스케치

 

- 싱크로나이즈

 

 

편집후기

 

 

 

 

Review

 

 

여성주의적 관점에 의거한 신화의 재해석 <이오카스테>

                                                                 이용복(연극평론가) yblee@sookmyung.ac.kr

극단: 실험극장
연출: 박정희
공연기간: 2010.9.8~9.19
공연장소: 연우소극장
관람일시:

극단 실험극장 창단 50주년기념공연 세 번째 작품인 <이오카스테>는 우리에게 익숙한 오이디푸스 신화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극은 젊은 여성 작가인 이헌의 작품으로 2004년에 옥랑희곡상을 받은 작품이다. 관객은 우선 오랫동안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신화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었던 작가의 대담성에 놀라게 된다. 작가는 신화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부분들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를 누구보다 더 큰 희생자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신탁이 두려워 아들을 죽이고자 했던 라이오스나, 운명적이기는 하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했던 오이디푸스는 죄가 있지만, 이오카스테는 가장 무고한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성들에게 복종했던 죄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따라서 이 가련한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신화나 고대 그리스 비극이 말하지 않는 부분을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먼저 1막 서두에서 시작되는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의 만남은 콕토의 <지옥의 기계>를 상기시킨다. 콕토의 극에서와 같이 이 극에서도 반인반수 즉 아름다운 여인의 상반신과 짐승의 하반신을 갖고 있는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를 한 남자로서 사랑하고 그를 유혹한다. 오이디푸스도 이 괴물의 매력에 끌리지만 그것에 저항하고 그녀의 사랑을 거절한다. 사랑을 거절당한 스핑크스는 죽음을 선택하고 대신 오이디푸스에게 신부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오이디푸스와의 대면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게 된 테베 시민들에게 죽음을 맞게 되면서 다시 살아난다. 오이디푸스의 피에서 다시 부활한 스핑크스는 하얀 신부복을 입고 이오카스테와 함께 오이디푸스의 장례식을 치른다. 요컨대 작가는 스핑크스를 자연, 즉 인간의 본성인 욕망의 화신으로 보고 있으며, 그 욕망은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내면에 살아 있으나 관습에 의해 억제되어 있다고 본다.
이 극의 주인공인 이오카스테는 신화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처럼 진실을 안 뒤에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남아서 신들에게 저항한다. 게다가 남편 라이오스의 비보를 듣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갚았다는 듯이 통쾌해하기도 한다. 이 부분 역시 신화가 말하지 않는 부분으로서 우리는 라이오스의 죽음을 알았을 때 이오카스테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이오카스테가 남편의 죽음을 오히려 아들을 죽게 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 점은 클리템네스트라가 딸 이피게니아의 죽음에 대해 남편 아가멤논에게 복수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에서와 달리 이 극에서 죽는 사람은 오히려 오이디푸스로서 원작에서는 테이레시아스의 폭로로 진실을 알게 된 테베 시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공연에서는 테이레시아스의 보디 가드에 의해 사살당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 극에서 또 다른 새로운 요소는 라이오스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동일 인물로 설정한 것이다. 그에 대한 타당성은 논의해 볼 여지가 있는데 테이레시아스 역의 강진휘는 눈 먼 예언자의 역을 하다가 거울 앞에서 갑자기 옷을 벗어 던지며 육감적인 모습의 라이오스로 변신한다. 그리고 극은 라이오스가 살아있던 시절 즉 오이디푸스를 낳았을 때의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이 장면을 오이디푸스는 무대 한쪽 의자에 앉아서 마치 극중극처럼 바라본다.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에게 아이를 죽이지 말 것을 부탁하고 자신과 아이는 하나라고 하지만 라이오스는 그녀의 애원을 묵살하고, 비록 그가 살아남아서 다시 돌아온다 해도 아내와 결혼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하나 매우 새로운 점은 라이오스가 동성애를 했다는 신화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작가는 라이오스와 테이레시아스가 동성애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인물을,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인물을 동일인으로 설정한 것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동일인이라면 죽은 라이오스가 테이레시아스에게서 살아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테이레시아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없으며, 또한 오이디푸스도 그에게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지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의 출생의 비밀을 즉시 폭로하는 것은 라이오스의 복수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한편 이 극에서 크레온은 단지 영상으로만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남성적인 테마 즉 테베의 왕권에 대한 음모와 같은 권력 투쟁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 극은 스핑크스와 이오카스테, 라이오스와 테이레시아스 등을 동일인으로 설정한다는 것,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죽고 이오카스테가 살아남는다는 점에서 신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에게 초점을 맞추어 아들을 처치하고자 하는 라이오스 앞에서의 그녀의 행동, 남편인 라이오스가 죽었을 때의 심정, 오이디푸스의 진실을 알았을 때의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처럼 새롭게 재구성된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무대화 한 박정희 연출은 또한 신화에 현대성을 부여하고 있다. 즉 오늘날 오이디푸스 신화는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역의 배우(반상은)가 구겨진 청바지를 입고 있다든가 혹은 대관식 때 양복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은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겠다는 연출의 의지로 보인다. 무대 가운데의 커다란 문 위에 설치된 두 개의 비디오로 보여주는 여러 가지 영상들, 예를 들면 이오카스테의 얼굴 모습, 많은 군중들이 모인 대관식 장면, 일군의 경찰 혹은 군인들이 시위대를 폭행하는 장면 등은 오늘날의 현실을 신화 속의 폭력과 연계시키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상은 몇 개의 장면에 그쳐서 신화의 현재성이라는 것 외에는 공연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연출은 연우무대 소극장의 두 벽을 중심으로 사용하여 무대는 마치 부채꼴로 펼친 듯 한 형태를 띠고 있다. 두 벽에는 각각 4개의 문들이 설치되어 있고 두 벽이 마주치는 중앙에는 양문으로 된 커다란 문이 있다. 문은 여기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때로는 상징적으로, 때로는 뭔가를 감춰놓는 일차원적인 장소로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문들 중 어떤 문을 열면 벽돌로 만들어진 벽이 보이고, 어떤 문을 열면 어린 오이디푸스를 상징하는 하얗고 작은 인형이 있고, 어떤 문을 열면 거울이 있다.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가 만날 때 오이디푸스가 한 문을 열어젖히면 벽돌로 된 벽이 나타나고, 엔딩 장면에서 이오카스테가 중앙의 커다란 문을 열면 화려한 불빛이 나타난다. 연출의 설명에 의하면 벽은 테베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반짝이는 불빛은 테베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대사와 매치가 되지 않고 관객의 상상력에만 맡기는 것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테이레시아스가 라이오스로 변할 때 문들 중의 하나를 열고 그 안의 거울 앞에서 변신하는 것은 아이덴티티의 이중성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효과적인 장치로 보였다.

박윤정은 관능적이고 유혹적인 스핑크스의 모습을 유연한 동작으로 보여주었다. 오이디푸스가 죽은 뒤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스핑크스는 첫 장면과 대조를 이루면서 결국 가상의 존재인 스핑크스의 상징적 의미는 욕망, 특히 육체적 욕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작가가 스핑크스를 욕망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신화가 지니는 신비스러움을 지나치게 본능적인 데에 제한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는 과연 원초적인 욕망만이 있었을까? 어머니로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성애도 있지 않았을까? 오이디푸스의 인간적인 매력은 없었을까? 요컨대 스핑크스를 쾌락으로 대변되는 육체적 욕망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 신화의 의미를 제한하는 듯 하다.
오이디푸스 역의 반상윤은 젊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녀서 비극성은 덜한 편이다. 반면 그가 입고 있는 청바지와 긴 점퍼는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어서 테이레시아스와 대조를 이룬다. 테이레시아스 역의 강진휘는 길고 검은 외투를 입고 있어 사제와 같은 느낌을 주고 고전적인 느낌을 풍겼다. 하지만 라이오스로 변신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일단 변신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성적인 코드를 강조하다보니 상반신이 거의 노출된 관능적인 옷차림과 이오카스테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그의 잔인성은 신화 속 라이오스의 이미지를 변형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이오카스테 역의 이서림은 아기 오이디푸스에 대한 모성애와 라이오스에 대한 증오심을 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편으로서의 오이디푸스와의 사랑은 그에 비해 좀 약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공연은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주는 신선함과 배우들의 역동적인 연기로 인해 인상적이었으나 대사가 지나치게 문어체라는 것이 흠이었다. 특히 이오카스테의 대사는 매우 긴 편인데 이것들이 고전극에서처럼 문학적인 언어로 되어 있고 또 배우도 단조로운 톤으로 발성함으로써 대사가 관객들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은 것이 유감이었다. 의미있는 대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대사가 별로 없는 결과를 낳았다. 고전극의 언어를 모방하고 있지만 그러한 문학적 언어를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고저장단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고, 또 보다 감정을 넣어서 연기함으로써 인물의 진정성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 공연은 신화를 과감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하였다는데, 특히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신화가 얘기하지 않았던 부분을 추론해 보고자 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해 보기도 했지만 관습적인 해석에서 탈피하고자 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신선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전반적으로 세련되었지만 긴 대사를 처리할 때 발성이 단조로워서 인물이 지닌 감정의 깊이를 제대로 느끼게 하지 못한 점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무대와 역동적인 배우들의 연기는 좋은 앙상블을 이루었다.

 

 

 

 

 

제12회 변방연극제 초청공연작 [햄릿 머신 prototype]

                                                                서지영(연극평론가) jyseo47@ yahoo.co.kr

극단: 극연구소 마찰
연출: 김철승
공연기간: 2010.9.10~9.11
공연장소: 합정동, 카페 무연탄 (앤트러사이트)
관람일시: 2010.9.11(토) 20:00

 



김철승 연출, ‘극연구소 마찰’의 <햄릿머신prototype>이 제12회 변방연극제에 참가했다. 이 공연은 극연구소 마찰이 지향하는 신체 즉흥성과 장소 특정성이라는 실험을 하이너 뮐러의 <햄릿머신>을 재료로 시도한다. prototype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완성된 작품으로서가 아닌 만들어가는 과정, 다듬어지지 않은 과정을 거칠고 투박한 대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험 모델이다. 이는 “주류제작 방식을 벗어나 실험적으로 제작된 연극을 선보이고자 하는” 변방연극제의 취지와 잘 맞는 작업이었다. 또한 “정서와 사상의 신체적 재현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쓰고 연출한다”는 김철승 연출의 연출관을 실현함에 있어서 뮐러의 <햄릿머신>을 선택한 것은 적절했다.

하이너 뮐러의 <햄릿머신>은 동독의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버릴 수 없었던 한 지성인의 절망을 해체된 형식과 장르 혼합을 통해 감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작품이다.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등 타부시 되는 상황들을 잔혹극에 가깝게 강렬하게 표출함으로써 거의 발광 상태에 가까운 절망의 외침을 보여주어 하이너 뮐러의 표제라고 할 수 있는 ‘경악의 미학 sthetik des Schrecklichen’을 낳기도 했다.

김철승의 <햄릿머신prototype>은 자괴감에 시달리던 구동독 지식인의 자기비판을 현대 사회의 부조리 앞에 신음하는 정체된 인간의 모습으로 옮겨놓는다. 원작이 갖고 있는 역사성은 배제되었지만 상징적이고 미학적으로 표현한 김철승의 공연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자화상을 짧고 강렬한 터치로 그려놓는다.


장소 특정성

공연장소는 합정동에 있는 ‘앤트러사이트’라는 카페이다. 이 카페 건물은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파친코 기계를 만들던 곳에서 발전소 공장, 그리고 신발 공장이었다가 카페로 리모델링했는데 옛 공장과 창고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장소성과 역사성을 간직한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관객들은 1층의 창고에서 대기를 하다가 안내자의 설명을 들은 후 관람에 방해될만한 소지품들을 모두 1층에 두고 2층 공연장(카페)으로 올라가게 된다. 공연은 의자와 탁자를 치운 카페의 중심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공간의 중심에 반쯤 허물어진 벽을 세워 놓은 것이 특징적인데 벽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관객이 돌아다니면서 보아야 공연의 모든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관람했던 날은 공연장의 규모에 비해 관객이 너무 많아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볼 수 있는 장면만 보아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극이 끝난 뒤 가졌던 번개토론에서 연출가는 이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만 했는데, 관객을 배려한 극장공연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받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장소 특정적 연극을 지향해 온 김철중 연출은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공연에 맞는 장소를 고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장소에 적절한 공연을 하기도 한다. 공간과 공연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영향을 무척 중요시하는 게 이 같은 공연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햄릿머신prototype>과 카페 엔트러사이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카페라는 공간과 연극의 유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카페의 쇼파를 치우지 않고 무대 양쪽에 길게 놓았고 벽 뒤에는 찻잔이 놓여있는 콘솔형 탁자가 있어 오필리어역을 맡은 배우는 계속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카페 자체가 연극 공간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카페에 있는 무대에서 연극을 공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한 커피향과 어두운 카페에서의 부분 조명이 주는 매력은 카페 공간 특유의 아우라를 갖고 있기는 했다.

한 쪽에 길게 붙여 놓은 탁자 위에는 여러 종류의 신발들이 놓여 있었는데 나중에 퍼포밍의 도구로 활용된다. 세상의 많은 족적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과거에 신발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연상시키는 부분이기도 했다.


분단과 분열, 그리고 소리의 파편들

무대 가운데 있는 반쯤 허물어진 채 구멍이 뚫려있는 벽은 원작의 의미를 이어가자면 분단의 장벽이지만 이 시간 이곳에서 배우들이 마구 두드리는 벽은 소통의 장벽이다. 벽을 사이에 둔 두 세계는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겨우 소통할 뿐이다.

평상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절규하는 거트루드가 “넌 누구냐?”를 반복해 외치며 시작하는 연극은 이미 시작부터 햄릿의 분열과 번뇌를 암시하고 있다. 하이너 뮐러가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햄릿의 방황만을 추려내어 만든 것처럼 이 작품 역시 햄릿에 집중되어 그의 분열을 바라보게 한다. 햄릿은 갑자기 앞치마를 두르고 고기를 다진다. 그러면서 그는 다진 고기에 뿌리던 양념을 세상의 모든 고깃덩어리, 쓰러져 있는 인간들을 향해 뿌린다. 이 연극의 염세주의는 죽음과 부활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차례로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과거를 품고 다시 태어나는 현재의 시간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라는 거대담론으로 확장시켜 가지는 않았다. 햄릿이라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극은 시각적 이미지 보다는 청각이미지가 강하다. 전체 조명이 밝지 않고 어둡기 때문에 더더욱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고기다지는 소리, 발구르는 소리, 두드리는 소리, 한마디로 리드미컬한 연극이었다. 여기서 던지는 무의미한 언어들도 하나의 소리다. “입술위에는 눈”, “가스오븐에 머리를 쳐박고 있는 여자”와 같은 대사는 로트레아몽의 “수술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의 꼴라쥬 작업이다. 그 동안 너무 많이 써 먹은 초현실주의 연극의 상투적인 방식이어서 조금은 식상했다. 그 밖에도 뒤로 갈수록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도구를 부산하게 움직여 무대를 전환하는 방식이나 무의미한 대사의 연발은 초현실주의 꼴라쥬 작품의 대표작인 <리체르카레>를 연상시킨다. 퍼포밍을 위한 재료들은 다양한 수집경로를 통해 꼴라쥬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이너 뮐러의 자기비판적 햄릿의 모습은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 햄릿의 모습으로 자기의 역할을 벗어버리고 싶은 햄릿 “기계가 되고 싶은” 햄릿으로 나타난다. 벽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햄릿이 존재하는데 가로막힌 두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분열된 햄릿, 또 다른 햄릿은 희극적으로 묘사되었다. 오필리어의 여자가 되고 싶은 나약한 햄릿, 자신의 어머니를 대신해 오필리어에게 보복하고, 죽어가는 그녀를 다시 살려 강간하고, 그녀를 창녀라 부르며 그녀에게 남성으로서의 폭력을 가할 만큼 가하더니, 햄릿은 차라리 여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오필리어의 옷을 입고 창녀 같은 몸짓으로 호레이쇼와 동성연애자처럼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연극에서는 많이 희화화 되었다. 피 튀는 폭력의 현장 대신 쇼파의 쿠션이 던져지고, 신발들이 요동치면서, 스스로를 묶는 햄릿의 자학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연극은 한바탕의 소동으로 끝이 났다. 배우들의 에너지는 강했고 목청도 좋았다. 그러나 강약의 조절 없이 내내 질러대는 고음은 충격의 강도를 떨어뜨렸다.  


신체 즉흥극

이 작품에서도 역시 김철승 연출은 공연에 개입한다. 공연에 배우처럼 들어가서 배우들에게 뭔가를 지시한다. 이들이 주력하는 실험은 즉흥극이기 때문에 연출가는 이미 연습된 것 외에도 관객의 반응에 따라 그 자리에서 배우에게 디렉션을 준다. 공연분위기에 따라 연극이 달라지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연마다 시작과 끝이 모두 달랐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꼭 지켜야 할 부분 말고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연출의 지시 없이도 배우 스스로 그 때 상황에 따라 연기의 색깔을 바꿀 수도 있다. 배우들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그리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퍼포먼스 아트와는 달리 부분 부분만 즉흥적이기 때문에 신체극치고는 텍스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작품에 대한 분석과 원작에서 채취한 요소들을 어떻게 화학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배우의 몫이다.

극연구소 마찰의 작업은 움직임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관객이 신체즉흥극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전문가층도 마찬가지이다.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형이상학에 빠져있는 한 우리는 마찰 없는 땅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제 맨발로 거친 땅을 걷고 싶다. 땅의 마찰을 느끼고 싶다.” 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로 극연구소 마찰은 스스로를 소개한다. 움직임의 뿌리는 어차피 인문학이다. 그들의 모토가 의미하는 것은 지나친 형이상학, 공중부유를 경계하자는 것이리라. 텍스트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다보면 움직임을 보는 눈이 탁해 진다. 이는 주로 평론가들이 범하는 오류인데, 텍스트와 움직임의 조화는 신체연극의 지속적인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김철중의 공연은 텍스트를 육화시키는 다양한 경로에 대한 탐색과 실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도 좋았고 대사들도 깔끔했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허전함이 있었던 이유는 뭔가를 깊이 표현해 내기엔 공연시간이 좀 짧았다는 점이다. 빠른 속도와 강렬함은 아무런 여운도 남기지 않고 회오리처럼 사라져 버렸다. 시작부분에 기대했던 울림의 여지는 후반부로 갈수록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공연을 보고나니 극단의 이름을 왜 연구소라고 붙였는지 알 것 같다.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구하는 자세, 게다가 자기들만의 난해한 작업으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상상과 경험들을 열심히 만들어 가며 관객의 지원과 충고를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탐구 자세를 지닌 극단은 흔하지 않다. 그들의 실험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

 

 

 

 

샤우비네의 도발적 무대, <햄릿>

                                                                 송민숙(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

극단: 샤우뷔네
연출: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공연기간: 2010.9.29~10.1
공연장소: 남산예술센터
관람일시:



2010서울연극올림픽 공식참가작인 오스터마이어 연출의 <햄릿>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햄릿>과도 달랐다. 창의성이란 것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능력”이라면 이 공연은 거의 모든 장면에 있어서 기존 공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대를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오스터마이어는 1999년부터 사샤 발츠와 함께 베를린 샤우비네극단의 예술 감독 및 연출가로 활동했다. 여러 차례 아비뇽페스티벌에서 공연을 선보인 그는 2004년 아비뇽페스티벌의 객원예술가로 일하며 뷔히너의 <보이첵>을 연출한 바 있다. 이번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 샤우비네 극단의 <햄릿>은 2008년 아비뇽축제의 주요공연장소인 쿠르돈뇌르(교황청앞마당)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쿠르돈뇌르에 가설된 대형야외공연장 관객에게 마치 록 콘서트 장에서처럼 “‘예’라고 말하라”고 반응을 유도하는 당시 공연동영상을 검색해볼 수 있다. 아비뇽 초연 후 이 공연은 샤우비네 극장에서 재 공연되기도 했지만 남산예술센터의 실내무대로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지나치게 도발적이고 에너지가 과도하게 흘러넘치는 연출로 여겨졌다. 서울공연도 애초 연출가가 공연을 올렸던 아비뇽무대처럼 넓은 야외공연장을 선택했다면 공연과 무대 공간 사이의 비율이 적절했을까?

야외공연장에서의 연출을 실내로 가져온 바, 남산예술센터 무대바닥은 흙으로 채워졌다. 선이 굵고 도발적이며 현대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연출은 초연장소인 산만한 야외공연장에서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기 위한 고육지책의 흔적으로 보인다. 캠코더로 촬영한 실사이미지를 체인으로 된 스크린에 확대 투사하거나, 마이크를 사용하여 목소리를 키우거나, 배우들이 관객석 계단을 오르내리며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거나, 물을 뿌리거나 얼굴이나 몸을 액체로 붉게 물들이거나, 배우들 연기 면에서 일부러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등의 과장된 신체표현들 또한 그런 외적 여건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모든 야외공연이 무대에 흙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공연에서 바닥 재료로 선택된 검은 흙은 특히 선왕과 오필리어의 매장장면에서 그대로 사용되는 재료여서 작품과의 연결성을 갖는다. 한국관객이라면 연희단거리패의 <햄릿>에서 무대전면에 황토를 사용한 공간을 설정하고, 오필리어 매장장면에서 레어티즈의 대사(“자 이제 흙을 덮어라. 산자나 죽은 자에게나 똑같이.”)와 더불어 두 배우의 몸을 온통 흙으로 사정없이 뒤덮던 인상적인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오스터마이어 연출의 <햄릿>은 이보다 좀 더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흙을 사용한다. 흙이 갖는 원초적 물질성을 연극을 통해 극대화하는 동시에 어머니인 대지가 갖는 신화적 함의로서 세상의 기원이자 종말로서의 흙, 나아가서 불의가 자행됨으로써 모든 질서가 와해된 진창으로서의 세상이라는 상징성까지도 획득하기에 이른다. 극에서 햄릿을 비롯한 배우들이 온몸으로 진흙을 묻히며 뒹굴고 넘어지는 등의 액션을 보여주며 흙은 더욱 긴밀하게 공연의 일부로 통합된다.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가는 배우의 얼굴과 몸을 보노라면 인생의 덫에 걸려 결코 헤어나지 못하고,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진창에 빠져가는 비극인물들의 심적 상황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물의 영장 인간이 결국 하나의 먼지(dust)만도 못한 존재라는 햄릿의 비극적 인식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는 야외공연이라는 여건에 따라 흙을 선택한 연출의 시도가 결과적으로 새로운 의미망을 획득하게 되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그런 원초적인 재료인 흙 위에 극도로 현대적이고 퍼포먼스적인 시청각적 요소들의 도입이 보여주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충돌 또는 어긋남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이다. 배우들이 입은 현대적 의상, 비디오아트를 연상시키는 영상이미지의 폭넓은 사용, 파편적으로 도입된 기괴한 목소리와 몸짓들, 물을 뿌린 진흙 위를 반복해서 넘어지면서 뒹굴거나 비닐을 씌운 몸에 각종 액체를 끼얹는 등 행위예술에 가까운 액션들, 마이크를 사용하거나 샹송을 부르거나 디스크자키 액션을 흉내 내는 등 마치 버라이어티 쇼와도 같은 장면들, 이처럼 현대적 요소들을 무제한 도입한 연출의 새로운 시도들은 공연을 하나의 의미의 장으로 수렴시키려는 의도보다는 공연에너지를 극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속에는 관객 각자가 나름대로 해석해볼 수 있는, 연극읽기의 흥미를 제공하는 수많은 장면들이 들어있다. 그 방식이 구태의연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햄릿의 독백 등 원작의 주요부분들이 파편적으로 환기되고 있다. 극 전체를 통해 서로를 탐색의 대상으로 여기는 햄릿과 클로디어스 간의 날카로운 긴장관계는 그것을 가장 가시적인 것으로 환원시킨 무대장치인 금속성 체인커튼에서 보다시피 여전히 중요한 테마로 남아있다. 거트루드/오필리어, 클로디어스/선왕 햄릿, 호레이쇼/길덴스턴, 레어티즈/로젠크란츠, 햄릿/극중극배우 등  총 여섯 명의 배우로 모든 배역을 소화하는 일인다역의 연출방식을 포함하여 특히 마이크 사용으로 두드러지는 배우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두기, 긴 식탁이 놓인 무대를 후면에 배치하고 그 전체를 앞뒤로 이동시키면서 음식 먹는 행위를 통해 극 행동의 근원에 위치한 욕망의 가시화 등이 흥미롭다. 이미 많은 분석의 대상이 된 고전 <햄릿>의 주제적 핵심을 유지하면서도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무대화한 오스터마이어의 다음 연출작에 관심이 간다.


 

 

 

 

오스터마이어<햄릿>: 몸, 감각, 이미지의 포스트모던적 미장센

                                                      심정순(연극평론가, 숭실대 교수) jsshim@ssu.ac.kr

극단: 샤우뷔네
연출: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공연기간: 2010.09.29~10.1
공연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관람일시:  

 


실험적 연출로, 동시대 독일 연극계에서 ‘앙팡테리블’로 불리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그의 <햄릿>이 한국에 왔다. 과연 얼마나  탁월한가?  그가 연출한 <인형의 집>은 연전에LG 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바 있다. 그의 연출작 <햄릿>을 보고 난 소감을 아래와 같이 적어본다.
  우선 그의 연출의 전반적인 특징은, 글로벌 연극계의 많은 공연이 그러하듯, 매체성, 이미지, 감각이 탁월하게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융합 되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이모저모 살펴도 흠이 별로 보이지 않는, 콤팩트한 독일산 기계 제품을 볼 때 느끼는 감탄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 연출자의 끊임없는 피나는 노력의 소산임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즉, <햄릿> 원작의 심오한 철학성을 내포하면서도, 그것을 무대 위에서 시각화 하는 방식은 매우 감각적이고, 대중문화적 방식을 채용한다. 동시에 엄격한 조화감과 미적 통제를 통해, 작품의 예술적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오스터마이어의 독일적 예술적 자존심이고 탁월성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연출 스타일은 충격적인 표현, 거칠고 대담한 대사, 록 뮤직, 솝오페라, 폽아트적 이미지의 혼종성과 현상학적 신체성의 강조가 두드려 지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적 파스티쉬(pastische) 스타일이 그의 무대적 장면 만들기의 일반적 특징 임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복합적 퓨전들은, 모두 전통적 연극 만들기 방식을 해체하는 것으로, 그의 연출의 한 강점은, 단지 전통의 해체에만 있지 않고, 동시에 고전 작품의 동시대적 관련성을 부각하는데 있다. 또한 그의 연출 스타일이 감각성과 충격적인 이미지 창조에 호소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의 연출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한 스타일리스트로 머무르기 보다는, 예술과 사회적 현실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들을 심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이 공연은,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의 유명한 극작가인 마리우스 폰 마이엔부르그 (Marius von Mayenburg)가 각색을 맡았다. 그는 90년대 후반 이후 영국과 유럽 연극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면전(面前)연극’(in-yer-face) 기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면전 연극의 과격한 폭력적 표현 방식은, 오스터마이어 <햄릿> 연출에서 나타나는 그로테스크 공연 스타일의 기법적 배경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이엔부르그에 의하면, 이번 <햄릿> 공연에서 볼꺼리는, 햄릿 역을 맡은 배우 라스 아이딩거 (Lars Eidinger) 자체 라는 것이다. 즉, 이 공연의 특별한 의미는, 새로운 해석 이나 아이디어에서 보다는 “이 배우 자체가 이벤트다”라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햄릿은 악한 인간들에게 둘러쌓인 전통적인 햄릿 공연의 주인공, 지적이고 고귀한 왕자님이 아니라, 분노에 차서 고약하게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미성숙한 보통의 청년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현대인들의 억압된 분노를 무대 위에서 폭력적 과격한 행동으로 발산해 보여 줌으로서, 심리적 대리적 충족 효과와 함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 효과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이 공연은 극 시작 장면부터, ‘흙’이 무대 공간을 구성하는 시각적 지평의 주인공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햄릿 왕자는 흙의 인간으로 오로지 몸을 통해 연기하고 행동한다. 즉, 흙, 몸, 폭력 등 신체 지향적이고 감각적인 물질성의 체험이 공연의 기조가 된다. 무대 위에서 햄릿, 그의 가족 및 친구들은 오픈 형식의 사각형 무대 지면을(아비뇽 공연 시) 가득 채우고 있는 흙 더미 위를 걸어 다니거나, 미끄러지거나, 때로는 흙 자체를 먹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학적 물질성과 감각성 외에도, 이 공연에서 하일라이트 되는 여러가지 소주제들이 있다. 이 글의 후반부에 가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겠지만, 부왕의 유령과 접선을 한 후에 햄릿에게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현실감의 상실, 방향성의 상실, 복수를 위한 상황과 정체성의 조작 같은 문제들은, 그의 연기 스타일에서는 ‘가식과 위장’이라는 기본적 원칙으로 반영된다. 그가 뚱뚱보 의상을 입고 뚱뚱한 왕자로 나왔다가, 극 후반에서 뚱뚱이 의상을 벗어 던지는 것도, 가식과 위장의 세상적 현실을 조롱하는 하나의 오브제적 장치다.
이번 <햄릿> 공연은 세계 투어 공연을 미리 기획에 반영한 듯, 공연의 여러 차원에서 매우 컴팩트한 구성과 연출을 보여주는데, 6명의 배우들이 이 공연의 모든 배역을 소화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2. 마리우스 폰 마이엔부르그의 <햄릿> 각색의 문제.

먼저 영어로 된 가가색 대본을 보면, 장면 구성은 일반적으로 대중관객들에게 잘 알려있는 극적 사건과 대사를 중점적으로 살리고, 쉐익스피어 원작의 많은 대사를 과감하게 삭제했다. 이를 통해, 극 진행 속도가 탄력이 붙게 된다. 즉, 햄릿이 죽은 부왕의 억울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극중극을 벌이고, 확신을 한 다음, 복수하는 원작의 극 진행 방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향에서, 재구성 되었으나, 대사와 장면들은 주제 중심으로 짧은 에피소드적 장면 구성과 꼴라쥬적 구성의 복합적 특징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서 햄릿의 첫 대사는, 삶과 죽음 길에서 고민하는 저 유명한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으로 시작 된다. 그리고 이 대사는, 공연 중 각기 다른 맥락에서 3번이나 반복되어 말해 짐으로서, 햄릿의 삶과 세계관을 현상학적 차원에서 서술해주는 모티프로 부각된다.
마이엔부르그의 각색 드라마의 특징은, ‘쥐덫 게임’과 ‘복수극’의 플롯을 중심으로 과감한 삭제를 함으로서, 공연의 스피드 감, 긴장과 써스펜스를 강화 시킨다는 점이다. 햄릿은, 부왕의 유령이 폭로한 끔직한 이야기가 사실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미친 것을 가장 일종의 연극을 벌이기 시작하고, 나아가 부왕 독살을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극중극을 기획한다. 그리고 친구 호레이쇼에게, 특히 독살 장면에 이르러, 클로디우스 왕의 안색을 잘 살펴 달라는 지시를 내려, 클로디우스를 자신이 놓은 쥐덫 장치에 잡아 넣으려고 한다. 반면, 클로디우스 왕은 왕대로, 미친듯한 행동을 보이는 햄릿에게 불안을 느껴, 오필리아와 대면을 시키고, 뒤에서 지켜보는 등, 햄릿을 자기들이 설정한 쥐덫 장치에 잡아 보려 한다. 그리고 일찌감치, “지체 높은 사람의 미친 행동은 위험하다”며, 영국으로 빼돌릴 기획을 한다.
  이번 각색에서 두드려지는 또 다른 주제가 ‘복수극’이다.
이러한 복수의 동인(動因)은, 마이엔부르그 각색에서 동시대적충격적 언어 스타일로 간단, 명료한 문장으로 재번역 된다. 클로디어스 왕에게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You killed my father and you’re fucking my mother and that’s why you’re about to die.” 나아가 마이엔부르그는 앞서 언급한 면전 연극(in-yer-face) 스타일의 폭력적인 언어를 구사하는데, 햄릿은 자신의 어머니 거투르드에게 “hot slut”(더러운 갈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오필리아는 미쳐버린 상태에서 햄릿이 결혼 약속을 해놓고, 자기를 버렸다며 이렇게 말한다: “By cock, they (young men) are to blame”(젊은 남자들은 xx가 문제란 말이야). 햄릿 자신 역시 극중에서 “Fuck”라는 말을 여러 번 내뱉는다.
   동시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이엔부르그 각색은, 극중극 장면 시작 전에 “핸드폰을 끄세요”라는 대사를 집어넣기도 하고, 햄릿이 영국 런던으로 보내지게 �다는 소리를 듣고 하는 대사는, “런던에는 항상 가고 싶었어. 보이 프렌드랑 호텔에서 있으면 뉴욕이 최고야” 같은 대사를 삽입 함으로서, 햄릿의 동성애적 가능성도 내포 시킨다. 이와 같이, 각색 대본으로 본 <햄릿>은 원작의 의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동시대적 관련성을 중심으로, 원작 대사의 적극적인 삭제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기본 프레임은 크게 손상되지 않는다.

3. 오스터마이어 <햄릿>의 미장센.

 무대 미장센을 통해 제시되는 이미지들은, 오스터마이어의 그로테스크한 연출 스타일에 따른 연극적으로 충격적인 시각적 장면 만들기를 보여준다. 파펠바움의 무대 디자인은, 사각형의 무대 바닥과 벽이 없는 오픈 된 무대 공간을 설정한다. 이 공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무대 윗부분에는,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장방형의 식탁이 관객을 정면으로 보며 놓여져 있고, 아랫 무대에는, 흙더미로 가득 채운 무덤 공간이 마련되 있다. 마치도 삶과 죽음의 공간이 서로 대치하는 듯한 메타포로도 읽어낼 수 있다. 이 두 공간을 가로지르며 첨단 재질로 만든 발로 드리운 듯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이 커튼은 극중 인물들의 영상 이미지를 상영하는 스크린이 되기도 한다.
이 공연에서, 모든 물체들은 계속 움직이거나 변화한다. 계속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커튼의 발이 계속 흔들리거나, 기타 등등이다. 마치도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공연 되었던, 네크로슈스의 <햄릿> 공연의 생동감을 연상 시키기도 한다. 식탁은 커튼을 중심으로 윗 무대와 아래 무대로 장면에 따라 움직여지며, 클로디어스 왕의 결혼 축하연 테이블이 되기도 하고, 다른 장면에서는 토크쇼의 테이블로 변모하여, 배우들이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대사를 하기도 한다.
  시작 장면에서, 스크린에 햄릿의 얼굴이 큰 사이즈로 투영되면서, 햄릿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말한다. 그러면 곧바로 식탁에 앉아있던 배우들이 일어나, 식탁 앞에 드리워진 커튼 발을 제치고, 무덤 장면으로 나온다. 흙이 잔뜩 쌓여있는 무덤 주위에 배우들이 호스로 물을 뿌리면, 햄릿, 거투르드와 클로디어스 등은 우산을 펴들고 비 속에서, 돌아간 왕의 관을 땅 속에 묻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무덤지기는, 파놓은 구덩이 속에 관을 제대로 넣지 못하고, 자기가 빠지는 등 여러 번 실수를 하는가 하면, 또 다른 배우들도 흙 위를 걸어가다 미끌어져 넘어지고 하는 행위 등을 통하여, 이 덴막 왕국의 부조화와 비효율성을 풍자적으로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햄릿은, 비데오 카메라로 다른 인물들의 얼굴과 대사를 녹화하는데, 이 이미지들은 곧바로 커튼 영사막에 투사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또한 관객들의 얼굴도 이 거대한 영사막에 투사되어, 배우와 관개들 간의 매체를 통한 상호작용성이(interactivity) 강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에 대한 정서적 소격효과의 효과를 갖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공연에서 볼 만한 사건은 라스 아이딩거가 연기하는 햄릿이다. 이 햄릿은 관객들이 일반적으로 햄릿 왕자에 대해 가져왔던 이미지, 정서, 기대감을 전면적으로 해체하고, 거칠고, 폭력적이고, 물질적 신체성과 즉흥연기를 바탕으로 창조되는, 매우 비전통적인 햄릿의 이미지다. 이 햄릿은, 비대한 신체를 가진, 분노와 복수심에 차서 흙 속에서 딩굴고 비탄해 하는 그런 인물로, 저 고귀한 덴막 왕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는, 흙을 내던지고, 흙을 먹고, 심지어, 오필리아와 자신의 어머니 거투르드 마저 흙 속에 쳐박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든 행동은 흙이라는 물질성이 가지는 은유적 의미와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암시한다.
극이 진행되면서, 햄릿이 가지는 내면적 갈등은 점점 고조되고, 그 감성적, 신체적 표현 방식 역시 점점 과격해 진다. 그러다가, 햄릿은, 극중극에서는 자신이 입었던 뚱뚱보 의상을 벗어 던지고, 반(半)누드로 극중의 왕비 역할을 하는가 하면, 극중극의 배우와 왕의 암살 장면을 연기할 때는, 역시 반나체가 된 상대 배우의 몸에 비닐포장을 둘둘 감고,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물감을 뿌리는 등, 마치 퍼포먼스 아트 같은 한 장면을 연출해 보인다. 이러한 강렬한 이미지 전개가 암시하는 의미는, 햄릿이 처해있는 거짓된 현실 상황과 숨겨져 있는 진실, 혹은 가식/위장과 진실 이라는 현상학적 존재의 틀 속에서 햄릿의 목숨을 다한 투쟁이자 몸부림이라 볼 수 있다.  
실로, 오스터마이어의 미장센은 매우 다층적 의미를 가진 콤팩트한 구성을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화두는 인간의 욕망이다. 공연 시작 장면부터, 배우들은 식탁에 앉아서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틈만 나면 먹어댄다. 폴로니우스는, � 속에 떨어져 있는 왕관(그 의미가 심장하다)을 꺼내어 자신의 머리에 써보기도 하고, 햄릿은 햄릿 대로 뒤죽박죽이 된 덴마크의 정치 질서를 상징하는 듯, 역시 흙 속에 떨어져있는 왕관을 줏어서, 자신의 머리에 꺼꾸로 쓰기도 한다. 각각 삶에 대한 욕망과 힘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라 할까.
거투르드는 첫 장면에 검은 썬그라스와 긴 금발머리, 흰색 의상 등으로 얼핏 재클린 케네디의 모습을 연상케 함으로써 미국적 폽아트의 한 장면 속 이미지를 연상 시킨다. 그녀는 가발을 벗고, 꼬랑지 머리를 함으로써 어린 오필리아로 변신하기도 한다. 두 여성인물을, 한 여성의 몸에 집중 시킴으로서, 거투르드와 오필리아는 남성 응시의 대상인 물질적 몸으로 고착된다. 이는 햄릿이 두 여성인물들을 각기 다른 장면에서 흙 속에 쳐박고 비슷한 방식으로 거칠게 다루는 행위에서도 파악될 수 있다.
  이미지, 소리, 음악, 칼라, 흙, 물, 기관단총, 음식 등등 많은 오브제와 여러 매체의 사용을 통해 오스터마이어가 구성하는 장면 만들기는 매우 치밀하고 디테일하며, 다층적 혼종적 구성을 보인다. 이러한 많은 콘셉트를 바탕으로 한 오스터마이어적 장면 만들기는, 신체적 표현의 극대화를 통한 감성의 시각화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이 공연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원작의 감성구조 자체를 해체 함으로서 감성의 소격화를 흔히 동반한다는 점이다. 이는 정치적 메시지를 이미지 연극 세계 속에서 빠쳐 버리지 않으려는 오스터마이어의 연출 의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 이번 <햄릿>에는, 아비뇽의 거대한 야외무대가 갖는 스케일과 무한한 공간이 제공하는 한없이 열린 느낌은 당연히 없다. 그대신, 독일어 대사로 인한 소통의 한계를 커버하기 위함인지, 배우들이 여러 번 객석에 내려와 관객과 소통을 시도한다. 아비뇽 공연때 보다 훨씬 더 여러 번 시도한다. 또한 마이엔부르그 각색에서 거투르드에게 햄릿이 하는 막말은 삭제되었고, 흙 속에 오필리아와 거투르드를 두 번 같은 방식으로 처박고, 가랑이를 벌리던 노골적인 장면은, 오필리아에게만 그것도 강도가 많이 완화된 방식으로 무대 위에 체현된다. 그대신, 한국관객을 잘 알고있다는 배우 아이딩거를 비롯한 6명의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한판 놀아 제끼는 한국연극의 분위기를 파악한 듯, 아비뇽 공연에 비해서 한국적 놀이성을 강화한 듯 보였다, 그 결과, 관객들이 공연 곳곳에서(종종, 안 웃어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까지도)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도 목격되었다.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은, 이 공연의 문화상호적 관객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김혜영 연출작 <사막에 눈이 내릴거야>   배우들의 땀으로 사막에 눈이 내리게 하기

                             임혜경(숙명여대 불문과교수, 연극평론가) hyegyong@sookmyung.ac.kr

극단: 유정
작/연출: 김혜영
공연기간: 2010.9.2~9.12
공연장소: 혜화동1번지
관람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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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1번지 페스티벌--1번지 혈전" (2010년 8월 18일~9월 12일)의 마지막 주자로 혜화동 4기 동인들 중 유일한 여성연출가인 김혜영(극단 유정 상임연출)이 신작 <사막에 눈이 내릴거야>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이 작품은 김혜영의 지금까지의 어느 작품 보다도 대사의 질량을 덜고 사실적인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다섯 배우들의 몸의 움직임과 에너지로 무대를 채운 공연이었다.  


극작과 연출을 동시에 하는 김혜영은, 이 작품의 팜프렛에서, 갈수록 상업적 공간으로 변해가는 ‘대학로’를 오아시스 없는 건조한 사막으로 보고, 함께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듬직한 젊은 연극인들이 이 사막을 변화시킬 “사막의 연금술사”들이고, 그들 덕분에 힘을 합치면 사막에도 눈이 내리게 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전망을 보여주고자 한다.

혜화동 1번지 소극장에서의 공연은 완전히 빈 무대에다, 사방이 검은 무대로 시작한다. 이 소극장의 특성상 두 면으로 이어진 무대,  좌, 우 2개 정도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검은 색 천의 너울이 있을 뿐이다. 배우들의 첫 동작으로는, 배우 다섯이 하나, 둘씩 서서히 등장하면서 부지런히 걷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가 사막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장치라고는 하나도 없다. 사방이 검은 색과 그저 계속 걷고 있는 배우들을 비추는 단순한 조명만 있다. 여기가 사막인지 어딘지, 굳이 사막이 아니라도 좋을 것 같고, 각자의 상상에 맡기고 있는 텅 빈 공간에서 시작되고 있다.


5명의 배우들은 현재 지금 여기를 나타내는 듯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즉, 특이점은 없는 발랄한 젊은이들이 입는 의상이었는데, 주안점은 모두가 동작하기에 편리한 질감으로  입는 것에 맞춰있었다: 여 1(차미리, 긴 흰 부라우스, 래깅스 같은 바지), 여 2(이미라, 겹쳐입은 초록, 흰색 조각 티, 짧은 반바지, 검은 래깅스), 남 1(우종대, 두꺼운 체크무늬 천의 셔츠, 긴 바지),남 2(김영훈, 하늘색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긴 바지), 남 3(이정국)은 낙타, 뱀, 유목민, 점쟁이 아줌마, 물파는 여자, 할머니, 그림자까지, 즉 낙타, 뱀같은 동물에서부터 여러 인간유형으로 까지 변신하기 때문에 의상 역시 변화무쌍했지만 역에 맞게 사실적으로 맞춰 입은 의상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창의적인 의상도 아니었다. 첫 장면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사막의 낙타인데, 변신의 인물인 남 3이 검은 의상을 입고서 배우 중 가장 유연한 몸놀림으로 느리게 리듬감있게 낙타가 되어 황량한 사막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기댈 데가 전혀 없는 허허 벌판인 사막에서 다섯 명의 인간 유형이 우연히 마주친다. 여 1은 나침반을 가지고 걷는 성실하고 진실된 인물 유형이다. 그냥 가야하니까 걷는다는 식으로, 아직은 잘 모르지만 꾸준히 걸으면 어딘가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견디다 보면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겠는가하고 믿는 사람이다.  반대의 성격인 여 2는 자신감과 열정이 많고 주도적인 인물이지만 물이 있어도 숨기고 남과 나눌 줄을 모르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오아시스가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세 명있는 남자 중에서 남 1은 두려움과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도 많고, 자신없이 걷는 인물이다. 술에 취해 길을 잃고 자꾸 제자리만 맴돌고 헤매는 인물이다. 술병과 안주감으로 멸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언덕을 오르는 게 두렵고 언덕 뒤에 뭐가 있을지 두려운 사람이다. 여1이 가지고 있던 나침반을 빼앗았다가 결국 도로 돌려주는 그래도 선량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늪에 빠져 죽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남 2는 체력관리가 잘 되어 있어 완급을 잘 조절하며 처음부터 즐겁게 잘 걷는 사람이라 인물 중에서 제일 잘 걷는다. 힘들어도 성취감이 있으니까 또 걸을 수 있다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남을 쉽게 돕는 사람은 아니다. 고정된 역할을 하는 다른 인물과는 달리, 남 3만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나들고, 성별과 나이가 상관없이 변신한다. 그의 변신에 따라 같은 장소(사막)이지만 상항의 변화, 장면 전환이 일어난다.


이 인물 모두의 동작은 걷기이다. 걷는 동안 사람들을 만난다. 왜 걷는지, 왜 걸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면서 마냥 걷는다. 남 따라 걷기도 하면서 걷는다. 전혀 미리 정해진 것이 없고, 예상도 할 수 없고, 대사에 나오듯이 “움직이지 않으면 더 위험” 하니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아무도 모른 채 마냥 걷다보면 희망이 보일 거라는 기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 사막에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처음부터 같이 떠난 동행도 없다. 길에서 만나도 생존을 위한 잠시의 공존이지 연대의식이나 목적 의식도 없다. 그런 중에 가장 중요한 물이 없는 사막을 걷는다는 것이 처음부터 전제가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물을 준비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물이 없으니 당연히 목이 마르고 물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다. 여기서 작금의 대학로의 경제 논리로 물을 돈으로 대입해 본다면, 이 사막에 오는 사람은 전혀 물(돈)을 준비하지 않고 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걷다 걷다 그림자에 홀려 그리고 환청과 웃음소리가 들려 하나 둘씩 쓰러지고, 가장 회의가 많고 술 취해 헤매던 남 1은 결국 늪에 빠져 죽는다. 가장 자신만만하게 걷던 남2도 “여기 오지 않았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더 행복했을까?”하며 회의하는 모습 마저 보여준다. 여 1 외 다른 인물들은 오이시스를 찾는다는 말 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두가 힘들지만 꾸준히 걷다보면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막은 끝이 없고 고통과 절망 뿐이다. 긍정적인 성격이지만 길을 잃고 힘들어하는 여 1이 할머니를 만나는 장면에서 보면, 할머니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걷는 거야? 멍청하긴... 그러게 여긴 왜 와? 처음 여기 왔을 때를 떠올려봐“, ”어떻게 살긴 그냥 버티면 되는 거지. 모래 ,바람, 태양, 외로움 다 견디면 되는 거야.(...) 여긴 밖의 시간과 달라. 오아시스가 있잖아.(...) 이 근처 어디에 있어. 그러니 걱정 말아“ 하는 이야기가 이 작품이 주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결국 연극 세상 이야기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작가가 연극 배우들에게 주고 싶은 위로의 말 같아 보인다.


그래도 다섯 인물 중에서 우직하게 희망을 잃지 않고 걷는 여 1에게 가장 도움의 손길이 나타난다. 유목민이 그녀 모르게 물을 주고 간다거나, 할머니가 길을 암시한다든가 하면서 말이다. 여 1은 길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하며 자신도 힘들지만 남을 부축하며 걷는다. 물을 얻기 위해 비굴한 짓을 마다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과는 달리, 물이 없더라도 서로 돕고 같이 살자는 착한 여자, 여 1에 작품은 비중이 더 가 있다. 그래서 이 여1의 마지막 대사 ”나무가 있어요. 오아시스가 근처에 있을 거예요. 우리도 살 수 있어요. (사이) 계속 걸어요‘로 작품이 끝나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착한 여자의 입을 통해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이 공연에서는 걷기 동작이 주된 동작이지만, 이 걷기 동작에서 변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덕이나 산에 오르기와 내려오기, 건너기, 넘어지기, 굴러 떨어지기, 등. 맨 땅에 헤딩하듯이 배우들은 무대 장치 하나 없는 평평한 무대 바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씨름을 한다. 사막을 걸으면서 생기는 낮과 밤의 차이, 태양, 바람, 기후 온도 변화같은 변수 때문에 동작의 변화가 생긴다. 그래서 여러 차례 일어나는 모래 바람 때문에 쓰러지고, 길을 잃고 헤매고, 뱀 같은 야생동물의 위험에 그리고 추위에 떨게 되고, 무섭고 외로워서 누군가 말 없이 등이라도 기대고 있으면 따뜻할 것 같고, 낮은 낮대로 뜨거운 태양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들이 처한 문제 중에서 갈증이 가장 큰 생사의 문제가 된다. 신기루처럼 나타난 물장수 아줌마(변신 남3)의 온갖 굴욕적인 제안에도 물을 얻기 위해 춤도 추고, 개처럼 짖기도 하고(남 1), 물장수 아줌마 다리 사이로 기기도 하고(남2), 서로 싸우고 굴욕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대사 보다는 신체 훈련이 잘 된 배우들의 움직임이 더 중시되는 공연이다. 혼자서 따로 따로 또는 둘씩 두 팀으로 걷기(여 1-남 1/여 2-남 2)로 대조적인 동작을 보이기는 하지만, 둘이 있다고 해도 서로 공존하기 위한 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인간적인 행위만 있다. 지나치며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잠깐 나눈다든가, 추위에 잠깐 등을 기댄다든가, 술을 잠깐 나눠마신다든가, 미끌어지면 손을 내민다는 정도이다.


배우들은 제자리 걷기 연습, 달리기, 구르기, 넘어지기, 등 신체적으로 혹사(?)를 시킨 연출 김혜영은 아예 기댈 데 없는 빈 무대에 배우의 신체로만 치열하게 부딪치도록 만든 신작으로 상업화 되어 가는 연극 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듯 하다. 무대 평면 바닥으로 깊이나 높이가 있어야하는 늪이나 언덕이나 산을 표현해야하니 무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배우의 신체의 움직임으로 다 커버하려고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관객의 참여, 특히 상상력이 많이 요청되는  연극이었는데 이른바 작가/연출가가 원하는 대로 다 읽어줄 수 있도록 무대에서 제대로 다 표현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부분 부분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변신 남 3, 배우 이정국의 다양한 변신이 신기루같은 이미지, 마술적인 환영을 만들어내는 주역이었다. 조명실 마저 어둠 속에서 조정을 해야할 정도로 한 오라기 빛조차 없이, 희망없는 사막을 만들어내느라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다.


배우의 몸에서 진실되게 땀이 많이 흐르는 것을 오랜만에 본 느낌이다. 아무 것도 없이도 환상을 만들어 내는 연극이라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제목 <사막에 눈이 내릴거야>에서 부조리하면서도 희망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목에서 비보다는 눈이라는 단어가 더 시적으로 느껴지고 희망적으로 보인다. 어쨌든 희망을 품고 걷고 또 걷고 하다가 결국 절망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아시스라는 허상에 매달려 있지도 않고 그들은 계속 걷지 않으면 사막에서 죽기 때문에 계속 걸을 뿐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려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떨어지는 땀이 사막에 눈이 되어 내리게 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배우들의 결연한 의지, 희망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작품이 미리 암시가 강해서인지 쉽게 예상이 가능해서 보는 동안 발견하는 재미, 놀람이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너무 단편적인 서사에 단순한 알레고리로 풀고 있어서 공연보는 동안 배우 몸만 믿고 가는 너무 성실하고 진실한 단순미의 연출에 그 순간에는 감동스럽기는 하였으나 본 다음에 여운이 남지 않았다. 진솔하게 준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고와 노력은 많이 한 것은 보이는데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가 없는 그런 느낌이랄까... 연극인에게 오아시스는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는 느낌이다. 인물들이 너무 역할 속에 단순화, 도식화 되어 있는 점도 문제였다. 그리고 사막의 풍경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수많은 환상성이 너무 빠져있어 아무리 움직임이 많아도 뭔가 건조했다. 사막이 아무리 덥고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해도 그들을(배우들을) 그렇게 까지 붙들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 단순히 물(돈)만 있으면 되는 건지, 그들이 찾고자 하는 오아시스는 보통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돈과 영광이 모여있는 오아시스는 아닐, 그들만의 이데아 세계, 그들만의 판타지를 좀 더 보여주는 볼룸이 있는 작품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들었다.  

 

 

 

 

 

 

 

 

 

 

 

 

 

<갈라파고스 생물노트>

                유원익(극단 제3무대 단원, 아이올레 교육연극 연구소 상임연구원) ws1703@naver.com

극단: 다파
연출: 최해주
공연기간: 2010.9.13~9.19
공연장소: 소월아트홀 대극장
관람일시: 2010.9.17 14:00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82)’하면 먼저 “종의 기원”을 생각하게 된다. 또 “갈라파고스”하면 ‘다윈’이 떠오르게 된다. 연극과 교육이 얼마나 상관관계가 있느냐를 생각하면서 갈라파고스 생물노트를 얘기한다.

첫째는 제목의 선택이 잘못된 것인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것일까? 극의 끝 부분에서 큰 의문을 가지면서 극장을 나섰다.

먼저 “갈라파고스”라는 섬을 전면에 둔 연구자 다윈의 종교와 학자로서의 연구결과물의 발표에 대한 갈등을 그리려고 했다면 갈라파고스에서의 그의 활동과 변이를 발견했을 때의 다윈의 전율과 희열을 먼저 무대화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후문에 한 시간 삼십 오 분의 작품을 줄이면서 작품의 전개에 고뇌했다고 들었다. 물론 갈등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극을 다룰 때 탈고에서 표현까지의 고통이 다른 일반적인 창작물보다 몇 배는 힘들다. 그렇다고 연극의 고유영역인 표현의 사실적 묘사를 외면하고 설명의 수준에 그친다면 연극의 재미와 행위의 극한 아름다운과 숭고미를 떨어뜨리는 소극적 예술발현이 라고 볼 수밖에 없다.

둘째는 교육연극에 주목한다. 우리는 교육연극과 또 다른 연극을 얘기한다. 그러나 연극이 곧 교육이라는 이해가 필요하다. 연극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가치 중에 “교육적 가치”에 주목해 보자 정서와 인성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교육적 의미는 어느 장르의 예술보다도 피교육자에게 예술 창조의 실천적 목표를 향한 협동과 이해 그리고 관찰의 능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극 ‘갈라파고스 생물노트’서는 교육적 목표 즉 무엇인가 피교육자에게 다윈의 이야기를 꼭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윈의 갈등이 그렇게 극심했는가의 설명이 없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다윈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강력한 반대가 이십년동안 다윈의 갈라파고스에서의 연구가 서재 책상서랍에 잠들어 있게 만들었던 가장 큰 이유라는 설득력(?)있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다. 과연 그랬을까? 그렇다면 이번 작품에서 종교적 신념이 강했던 아내를 등장시켰다면 그리고 그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던 다윈을 그렸다면 극에서 검은 머리의 다윈이 어느 날 갑자기 흰 머리의 다윈을 보며 왜지? 라는 의구심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던 연구논문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를 유추하고 그것으로 하나의 새로운 허구적 이야기를 만들어 연극적인 창작의 맛을 느껴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통한 과학자의 과학적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결론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는 논리적 사고와 창의적 행위, 그리고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교육이 관람자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어져야 한다.

셋째는 관객의 대상이다. 등장인물들 중에 조교역이 등장한다. 쉽게 조교라는 직책의 수행자는 대학에 존재한다. 그 조교와 함께 등장하는 두 명의 학생들이 있고 그 두 명의 학생들은 대학생의 역할인 듯한데 초등학생 정도의 대화를 하고 있다. 앞으로의 순회 공연일정을 보니 동남, 가평, 조양중학교 등으로 세 군데의 중학교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역할의 구성과 역할의 명명에 문제는 없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라리 어느 중학교의 과학 선생님과 학생의 대화라면 이해의 폭이 넓었을지 모른다. 또 관람자들에게 접근하기도 편했을 것이다.

또 연기자와 관람자와의 대화의 형식이다. 질문 뒤의 정답을 요구하듯 서있는 연기자는 연기자와 관람객으로 서 있었다. 최소한 연극에서의 제4의 벽을 헐어낸다는 것은 관객과 연기자의 동질성이 바탕에 깔려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알고 너는 모를 것’이라는 연기자의 사고의식이 깔려있는 모양새는 보기 거북하다. ‘갈라파고스 생물노트’ 에서의 각기 다른 시대에 대한 거리를 두고자 앞의 형식을 취했다면 좀 더 연출 적 신중함이 있어야 했다.

관람을 위해서 찾아간 날 공연을 마친 연기자들의 연기에 대한 연출의 주문이 있는 듯 했다. 그 열정은 높이 살만하다. 또 연기자들의 적은 관객의 수 에도 연기에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이 당연한 일이지만 박수를 보낸다. 연출자를 비롯한 모든 연기자들은 앞으로 연극계의 연극인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사람들로 믿는다. 극단 다파와 극단 청맥의 활동을 기대한다.

또 이런 교육연극 창작활동의 시도는 계속되어져야 하고, 찾아가는 예술무대와 아주 편하게 극장을 찾는 문화와 함께 발전되어지기를 기원한다. 작가 윤영우교수(대진대)의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세상을 향한 우리네 소리의 아름다운 외침, 뮤지컬<서편제>

                                                          강양은(연기전공 교수) yangeunie@hotmail.com


연출: 이지나
공연기간: 2010.8.14~11.7
공연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관람일시: 2010.9.26

 

 



 8월14일에서 11월7일까지 약 3달간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되는 한국 뮤지컬 <서편제>는 고(故) 이청준의 연작 소설집 <남도 사람>(1978)의 단편소설 ‘서편제’가 동기가 되어,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나온 것처럼, 2010년 조광화 극본/작사, 이지나 연출, 윤일상 작곡에 의해 우리의 소리와 삶을 다룬 뮤지컬 공연이 나오게 된다. 또한 대중의 사랑이 미비한 우리의 예술인 판소리가, 영화 서편제를 통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던 것처럼, 뮤지컬을 통해 다시금 가까운 이웃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뮤지컬 서편제 시놉시스를 간단히 요약하면, 나이가 지긋이 든 동호(한때 최고 인기를 누렸던 가수)는 아들 해금과 함께 사랑한 의붓누이 송화를 찾아다니다 그녀를 만나게 되며 과거 속 이야기로 극이 시작된다. 동호는 의붓아버지 유봉의 소리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 생각하며 원망과 증오로 소리꾼 유봉에 저항하고, 결국 동호는 판소리가 아닌 자신의 소리를 찾아 떠난다. 유봉은 동호를 잊지 못하는 송화를 이끌고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해 그녀의 눈을 멀게 하고 또다시 유랑 길에 오른다. 유봉은 죽고, 시간이 흘러 송화와 동호는 재회를 한다. 이야기의 주체인 유봉과 동호, 송화 삶이 이 뮤지컬에서 가득 노래된다.

   인물들의 갈등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구세대와 신세대, 구문화와 신문화, 보수와 개혁, 국악과 양악, 한국적 전통과 서구적 양식, 인고의 기다림과 일회성, 배타와 포용, 꿈과 사랑, 용서와 한(恨) 등 우리네 삶을 담고 있다. 곳곳의 매 장면마다 무대 위의 배우, 조명, 음향, 무대장치, 의상, 소품, 연출 등은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인물들의 심리와 메시지를 자유롭게 표현하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날 배우들은 송화역의 차지연, 유봉역의 서범석, 동호역 임태경 등이었는데 배우들은 인물 속에 녹아져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진실한 연기력을 훌륭히 보여준다. 항해하는 서편제 배를 멋지고 섬세하게 이끌어간 선장들의 역할도 컸으리라.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엔, 은은한 청푸른색의 배경 속에 빛을 내는 ‘서편제’ 제목, 영화에서 쓰인 듯한 익숙한 글씨체는 영화를 연상케 하나 무대 위에서의 그 제목은 영화보다 왠지 생생하게 살아 움직여 보인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듯 관객석이 어두워지며 새소리, 바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여인의 노랫소리, 스며드는 조명과 음향은 관객들을 서편제의 열린 공간 속으로 보듬어 간다. 무대위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의 오프닝은 때 묻지 않은 맑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불러일으킨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으나, 아이들의 음성과 모습만으로도 관객들 얼굴에 미소를 번지게 한다.

    나이 든 동호는 송화를 처음 만난 어릴 때를 기억하는 그의 과거 회상 장면이 이어지는데 시공간을 초월한 무대 위엔 늙은 동호와 어린 동호가 함께 한다. 어릴 적 동호 자신을 바라보는 늙은 동호, 그 회상 속에 동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동호를 통해 무대위에서 교차되는 다른 두 시간의 삶의 조화와 공존의 미가 창조된다.

    유봉이 데려온 송화와 동호는 서로를 채워주는 따스한 의붓누이로 유봉을 따라 소리를 찾아 유랑을 하게 된다. 이때 사용되는 원형 회전 무대는 시간의 경과, 거리감, 공간의 구분과 이동 등의 동적인 역할을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처럼 충분히 해낸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 유랑의 여정 동안 무대전체에 투영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나라 4계절의 영상은 대한민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단아하고 깔끔하게 보여준다. 또한 세월의 흐름도 분명하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투영하여, 관객들도 인물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매력이 있다.

    유봉이는 송화, 동호와 ‘소리공부’를 시작한다, “판소리란 것은 말이여. 세상 조화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여 (...) 사람 사는 이야기 모두 소리에 담겨 있는 거여 소리꾼은 말여 세상 온갖 소리를 죄다 자기 소리에 담는거여 알것냐” 동호, 송화는 “예!”라고 화답한다.  “음머 음머”, “개굴개굴”, “까아까아”,  “뻐뻐국 뻐국”, “이히 이히 이 히 이히이이 이” 등의 그들의 생동감과 에너지 넘치는 소리는 듣는 이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소리를 담자. 소리를 담자. 소리를 담자” 배우들의 리듬감 있는 맛깔스런 노래는 유쾌함과 코믹성을 더한다. 더불어 큰 리액션이 돋보이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흥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익숙해져있는 필자는 한국 뮤지컬하면 80-90년대 정형화된 노래와 그 부르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편견이 있었으나, 서편제는 브로드웨이 세기의 흐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내포한 동서의 만남을 융화시킨다. 노래에 뮤지컬 ‘시카고’ 분위기가 나면서 고전과 현대의 결합의 묘미를 보인다.

    극작가의 노련미와 센스를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인물과 극 전체를 조화롭게 하나를 이루어 가는 것뿐만 아니라 톡톡 쏟아져 나오는 코믹성을 둘 수 있다. 여기에서 유봉은 득음을 위해 송화가 똥물을 마셔야 한다고 놀리고, 송화는 유봉에게 “똥물도 위아래 있는 법”이라며 유봉에게 똥물을 권하고, 또한 관객에게 마시게 함으로 관객을 동참케 하는 모습 등은 친근감과 웃음을 자아내게 이끈다.  

    송화와 소리공부를 하던 동호는 우연히 본 유랑극단의 서양식 밴드에 흥미를 느끼고 서양음악에 빠진다. 이에 유봉은 동호에게 ‘한’을 노래하는 소리꾼에 대해 강조하며 설명한다, “철없는 혈기 갈 길을 몰라 손쉬운 박수에 중독된다 (...) 견뎌내 그 길 끝엔 소리의 경지 (...) 그래 네 안에 한이 있어 큰 소리꾼 만들어줄 한!” 동호는 답한다, “세상 바뀐 줄을 모르나요. 혼자 평생 길에서만 살아가긴 싫어” 갈등이 고조되며 유봉은 동호에서 소리대신 북을 잡게 한다. 그 속에서 동호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를 부를 때, 소리 속에 묻힌 생명과 에너지로 그의 눈가에, 보는 이들의 눈에 눈물을 맺히게 한다.  어린 송화의 귀여움과 순진함은 자란 후에도 배우를 통해 송화의 맑은 영혼을 드러낸다. 송화의 순수함과 밝은 성격은 갈등과 슬픔을 노래하는 동호의 슬픔을 더 깊게 전달한다.  

   송화와 동호가 사랑가를 연습하는 장면은 그 둘의 사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심금을 울리는 맛깔스러운 노래에 관객들은 그들과 함께 사랑에 빠져본다. 음악을 통해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영혼이 아름답다. 이때 무대 뒤 배경으로 비추는 분홍빛의 꽃잎들이 흩날리는 모습은 그들의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한껏 더해준다. 또한 극 분위기와 인물 심리, 시간의 변화 등에 사용된 조명 또한 극의 흐름을 이끄는 한 요소로서 소리 없는 역할을 잘 해낸다.    

    동호와 송화는 유봉과 함께 했던 명창에 의해 과거를 알게 되고, 송화는 유봉이 이루지 못한 소리를 자신이 이루겠다고 마음먹는다. 반면 동호는 소리판에서 쫓겨난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어머니의 죽음, 자신의 꿈, 아버지를 향한 반감 등을 표출하며, 그가 원하는 음악, 그가 하고 싶은 소리, 그의 꿈을 노래한다. 그러나 송화는 심봉사를 지키는 심청이처럼 의붓아버지도 아버지이기에 그를 지키고 서편제의 소리를 지키기로 한다. 고유의 전통 문화와 피할 수 없는 새로운 문화의 도전에서 생기는 마찰음이 그들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어찌 보면 둘 다 우리네 소리의 외침이요 고함인 것이다.

    송화는 그녀에게 함께 떠나자고 하는 동호를 거절하고 그들은 서로의 소리를 찾아 헤어진다. 송화가 이별 노래를 부를 때 동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구구절절 가슴 깊이 흘러나오며 모두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득음하면 그가 그녀의 사랑이 돌아온다는 유봉의 말에 송화는 끊임없이 연습하고 훈련한다. 아버지 유봉은 딸의 득음을 위해 그녀를 혹독하게 몰아대는 모습은 장인의 정신이 보이나, 소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어쩌면 유봉 자신의 꿈을 위한 자녀의 희생이 아닐지 생각을 해본다. 유봉의 노래에서 앞만을 향해 달려가고 전진하는 그의 바램과 열정이 드러난다. 유봉의 소리와 함께 사용되는 드럼의 연주는 인물 심리를 부각시키며 잘 어우러져 표현된다. 이때 동호를 그리워하는 송화와 유봉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아버지는 그녀에게 한을 심어주고 진정한 소리꾼으로 키우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다. 송화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유봉을 원망한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것은 이 부분이 정서적 전이가 약하고, 조금은 길게 생각되며 긴장감보다는 느러지면서 잠시였으나 지루한 느낌이 있다.

    여기서 잠깐 무대디자인을 살펴보면, 천장 레일에 달린 여러개의 드랍을 통해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대장치는 공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을 보여준다. 배우들이 등퇴장을 위해 고정된 무대 양끝으로 일부러 이동할 필요가 없이 드랍의 움직임으로 이뤄진다. 또한 극 전환, 장면전환이 암전이 없이도 빠르게 이뤄진다. 그리고 드랍 전체에 붙어있는 한지는 움직일 때마다 옆으로 살짝 흩날리는 모습은 또다른 한국적 정서를 표현해낸다. 무대전환은 인물의 심리적 변화의 또다른 표현이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고 관객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극 진행이 빠르게 잘 흘러간다. 동호가 떠난 후 유봉과 송화가 소리의 유랑길을 떠난다. 창극단에서 유봉의 북 장단에 맞춰 눈 먼 송화가 소리를 하나 더 이상 소리는 환영받지 못한다. 송화의 눈 먼 사실을 안 동호는 괴로워하고, 송화는 라디오에서 동호의 노래를 들으며 그가 자신의 소리를 찾았다며 좋아한다.

    이별 후 첫 재회 장면에서 “나의 소리”를 노래하는 송화의 눈가에 가득고인 눈물과 절제된 연기는 더 깊은 슬픔을 전하는 세련미가 있고, 동호 또한 관객을 그의 자아로 젖어들게 한다. 이 때 하얀 눈발이 날리는 배경과 하얀 의상은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유봉은 동호모와의 시간을 추억하며 송화와 함께 소리를 하다 죽어간다. 꿈, 환영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회, 하얀 의상을 입은 동호모의 등장과 함께 상복을 입은 코러스들이 관을 이끌어가며 곡하는 장면에서 유봉의 죽음이 암시되고 또한 자연스럽게 장례로 연결된다. 여기서 리얼리즘과 일루전의 조화를 이룬 연출력을 본다. 여기서 코러스의 노래가 아버지 유봉과 어머니 동호모 심리를 잘 대변해 주나 코러스의 환영 속의 움직임은 약간 산만하다.

    또한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코러스 캐스팅에 있어 대학생의 이미지가 있는 젊은 배우들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특히 마을 장면을 보여주는데서 아버지 유봉과 코러스들이 나오는데 유봉을 제외하고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20대 초중반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들이다. 주민들이라면 30대 이상 등 다양한 연령층이 있을 것이고 특히 우리의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이 든 어른신도 있을법한데 그렇지 않아서 그 장면에서 대학생 워크샵 뮤지컬을 보는 듯하다. 에너지 넘치는 훈련된 배우들이나 사실주의 극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에 비해 비현실적이고 조금은 맞지 않는 어색함과 비성숙함, 왠지 채워지지 않은 부족함이 느껴진다. 공연을 보는 관객이 20-30대가 많긴 하나 40-50대 뿐만 아니라 60-70대 어른들도 뮤지컬을 즐기는 경우가 많기에 사실성을 조금 더 고려해서 상황에 따라 젊은 배우뿐만이 아니라 성숙미 있는 코러스 캐스팅으로 폭 넓힐 필요가 있는 듯 하다.

    아버지를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딸, 송화의 한이 더욱 가슴 깊이 새겨진다.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끝까지 지켜주기 못할 거면서 왜라는 질문을 문득 하게 된다. 송화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동호 곁엔 클럽 여가수 바니가 있으나,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홀로된 송화처럼 똑같이 동호도 혼자인 것이다.  

    동호는 그의 아들 해금의 도움으로 송화를 찾으나 동호의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송화는 다시 유랑을 위해 떠날 준비를 한다. 클럽 공간에 요란한 음악과 춤이 어우러질 때 무대 한쪽에서 작게 퍼지는 송화의 판소리엔 클럽의 화려함과 도시적인 모던에 대립해서 그녀가 굳게 지켜온 삶, 우리네 소리, 아버지의 꿈, 그리운 사랑이 담겨져 있다. 그 후 동호가 클럽에서 이뤄지지 않는 사랑에 대해 부르던 노래에서 90년대 김광석의 노래가 떠어르며 진실함과 애잔함이 전해진다. 또한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의 소리를 죽이고 싶었다” 라는 그의 말 속엔 원망과 함께 가족과 고향과 소리의 대한 그리움이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오랜 세월 후 둘의 재회, 나이가 들어 송화를 만나게 된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한다. 동호의 북 장단에 맞추어 송화는 심청전의 한 대목을 눈빛으로, 웃음으로, 눈물로, 소리하며, 그 둘은 가슴 저미는 한스런 삶을, 흘러가버린 세월을, 사랑을 노래한다. 송화의 소리 속에 우리네 삶의 한이 가슴 저리게 구구절절이 흐른다. 심청이를 위해 동냥하는 심봉사의 얘기는 아버지 유봉과 송화 자신의 거울이 되어 그들을 투영한다. 송화는 심청이로 동양미 삼백석에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팔아 인당수에 몸을 바치듯, 아버지 유봉의 소망대로 그녀 삶과 사랑을 버리고 아버지에 의해 장님이 되어 아버지의 꿈대로 한이 가득담긴 가슴 저미는 소리를 이뤄낸 것이다. 심청이와 심봉사와의 재회를 노래하는 송화, “눈을 희그득거리며 (...) 어디 내 딸 좀 보자” 여전히 눈 못 뜬 아버지와 눈 뜨기를 바라는 심청이의 맘이 송화의 원망과 그리움과 사랑으로 한이 서려 노래되어진다. 눈 뜨게 하고자 하는, 눈 뜨고자 하는 송화의 소망은 오랜 동호의 그리움에서 더욱 절실히 노래되어진다. 결국 많이 늦고 돌아서 왔지만 동호와 송화는 하나가 되어 북 장단에 소리하고, 서편제라는 그들의 소리를 통해 가슴 깊이 묻혔던 한을 맘껏 토로해낸다. 그들의 소리와 잔잔히 흐르는 배경음악은 관객을 송화와 동호의 마음으로 깊이 끌어당긴다. 

    배우들 깊은 뱃속에서 나오는 커다란 슬픔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도 통제되고 녹아져 표현되어지는 주연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 깊이 새겨진 송화의 한이 배우의 심장을 빌어 판소리로 흘러나올 때, 많은 관객이 눈물을 짓는다. 공연 후 우렁찬 기립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면 관객들은 카타르시스 이상의 감동을 받은 듯하다. 진실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과 아름다운 창작을 이룬 연출가, 작사가, 작곡가, 기획자, 안무가, 테크니컬 디자이너들 등 모두가 한 호흡으로 하나를 향해 함께 달려가며 완성되어진 공연이다.

    뮤지컬 <서편제>는 세계를 향한 우리네 소리의 아름다운 외침이고, 무대 위 모든 것이 다채로움 속에서 한 흐름을 향하며 하모니를 내는 공연이기에, 또한 우리나라 ‘한’이 담긴 서편제의 고유한 동양의 소리와 브로드웨이의 서구적 감각이 잘 어우러져 동서양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공연이기에 국외 공연을 격려하는 바이다.   

 

 

 

 

 

 

미친 배우들의 <미친 거래>

                                                 강재림(극단 노을 상임연출, 작가/연출가) jaerim1278@naver

극단: 극단 주변인들
연출: 서충식
공연기간: 2010.9.9~10.3
공연장소: 아리랑아트홀
관람일시:  

 

 



연극 「미친 거래」는 런던 스퀘어 마일에서 두 번째로 큰 투자은행인 맥솔리스의 증권층에서 벌어지는 증권 거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제목과 어울리게 무대에 조명이 비춰지면 두 명의 남녀가 미친 거래를 시작한다. 입으로는 어려운 증권 거래의 과정을 나열하면서도 몸으로는 성적인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는 돈과 성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하루에 수백 파운드의 액수가 왔다 갔다 하는 거래의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한다.

이 사무실에 캠브리지 출신의 엘리트인 스푼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는데, 사내 최고의 실력자인 도니는 그를 보란 듯이 골탕 먹이며 ‘동지가 곧 적’임을 보여주고 냉혹한 현실세계를 알린다. 또한 도니가 패스트푸드의 식당에서 아들에게 1회용 케첩을 통해 인생을 가르치는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무엇이든 돈의 가치를 마련하기 위해 속임수를 써야 한다는 거래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거래소에서 가장 오랜 경력을 가진 피제이는 이 삶에 철저하게 회의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지만 그의 부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기를 권유한다. 이미 부인에게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줄거리를 이 공연은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공연시간 내내 배우들은 빠른 속도로 대사와 행동을 소화하고,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 모를 약육강식의 현장을 전달한다. 시종일관 긴장감은 유지된다. 영원한 승자는 없듯이 도니 역시 동료에게 배신당하며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된다. 서충식 연출은 이미 전 작품인 「최종면접」과 「죽음 혹은 아님」을 통해 보여준 삶의 치열한 각축장을 또 다시 펼쳐 놓았다. 그것도 사실적인 톤과  함께 빠른 속도의 갈등과 긴장, 유머러스한 터치를 빼놓지 않는다. 다만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적인 용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관객이 이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를 저버릴 수는 없다. 제작의도도 이런 면을 고려한 듯 하나, ‘다 못 알아듣는 것도 작품의 의도이다’라는 것을 의식하고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연극 「미친 거래」는 성공만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특히나 성공과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한 한국 사회의 현실과 너무 닮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연극은 인간의 삶을 압축시켜 놓는 장(場)인 만큼 이 작품도, 승자가 되고픈 우리의 욕구를 한번쯤은 멈추고 돌아보게 만드는 굵직한 메시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배우들은 미친 역할에 몰두하고, 관객들은 그것을 보며 정신을 차린다. 그것이 바로 연극이 아닐까? 

 

 

 

 

 

 

[광주연극]

 

박윤모의 모노드라마<아버지>

                                                한옥근(극작가, 조선대 사대 교수) oghan46@hanmail.net

극단: 포커스씨어터
연출: 박윤모
공연기간: 2010.9.9~11.13
공연장소: 광주궁동예술극장
관람일시:  

 



박윤모의 모노드라마 <아버지> 공연이 9월 9일부터 11월 13일까지 광주 예술의 거리에 있는 궁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영민이 기획하고, 극단[포커스씨어터]가 제작했다.

박윤모가 모노드라마에 도전한 것은 지난 98년 11월 광주 서동에 개설된 [드맹아트홀]에서 공연한 <여보 국기 달어>란 작품이다. 소설가 한승원이 쓴 희곡 <아버지의 자리>를 개명한 이 작품으로 그는 서울 대학로 극장에서, 거창 국제연극제에서, 중국 북경에서 그리고 미국 LA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여 100여 회를 기록하였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오늘도 그는 200회 기록 갱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로 개명하여 다시 무대에 섰다.

<아버지>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 ‘김오현’이 격은 파란만장한 삶을 자기의 회갑연에서 하객에게 이야기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황주 김씨 종손 ‘김오현’이 친일파였던 순천 최씨 집안과의 다툼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혼란의 격동기를 거쳐 살아남은 집안 내력과 자식 11남매를 키운 과정을 순차적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들이 겪은 일제시대와 동족상쟁의 과거사이다. 그래서 과거에 우리들의 부모는 자식을 키워 검사나 판사, 경찰서장 또는 의사가 되기를 열망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김오현’은 큰아들 ‘일남’이 검,판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만 ‘일남’이는 화가의 길을 택한다. 이로 인해서 부모와 자식들의 갈등은 시작된다. 11남매를 차례로 얘기하면서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의자 두 개와 높낮이를 둔 계단 설치로 꾸민 단순한 무대에서 극을 시작하면서 환갑잔치의 흥과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낙안읍성 보존회를 초청하여 “심봉사 방아타령”과 “옹헤야”를 창하며, 가야금과 장구로 효과를 살려냈다. 극진행 중간부에서 휴식을 겸한 떡과 과일 잔치를 곁들인 ‘칠남’이의 노래자랑 또한 모노드라마의 단순함을 극복하였고, 관객을 흡입시키는 장치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칠순노인으로서의 분장 미흡과 ‘삼남’의 시 <아부지의 자리>가 자막으로 처리되지 못함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15인의 다역을 혼자서 연출해 낸 박윤모의 연기력은 뛰어났다. 환갑나이를 목전에 두고도 그는 연극마당에서 아직 청춘이었다. 그가 60년대 후반 고교시절부터 <도적들의 무도회>로 연극에 입문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교단과 무대를 지키면서 가르치는 일과 연극하는 일로 40년을 보냈다. 또, 하는 일마다 열성적이어서 희곡(연극)을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까지 획득한 그야말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동량재가 분명하다. 그래서 故 차범석 선생은 “박윤모는 광주연극의 대들보”라고 하였고, 유민영 선생은 박윤모를 “광주연극을 대표하는 거물”이라고 격찬하였다. 故 소설가 주동후 선생은 박윤모에 대해서 “그의 끊임없는 열정, 그의 끼, 그의 연극사랑 자세에 감탄하고 경이롭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 그가 ‘2007년 자랑스러운 연극인상’까지 받았다.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 박윤모가 내공의 굵직한 힘을 싣고 훈훈한 입담으로 부모와 자식들과의 갈등을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연극적 열정과 끼를 혼합한 ‘연극의 혼’으로 걸쭉하게 200회까지도 무난하게 토해 낼 것으로 기대한다. 그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연기력을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1회 전국연극제에서 <소작지>를 통하여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획득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또 하나 꿈이었던 모노드라마 <아버지>가 1000회 공연 달성을 기대해 본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그는 한국연극사에 추송웅, 윤석화, 박정자, 손숙 등에 이어서 모노드라마의 달인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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