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연극

오늘의 서울연극 제6호

장코폴로 2011. 3. 20. 11:09

TTIS

2011.03.18

ISSN 2093-9140

오늘의 서울연극

Today's Theater In Seoul
제6 호
                       2011. 3.18

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기자: 심희령, 장시내, 이정현

목차

 

                                                - 편집인의 글 | 오세곤

1부

Review

                                              - 게르니카 | 최창근
                                              - 꿈꾸는 거북이 | 임수선
                                              - 도라지 | 김옥란
                                              - 메디아 | 목정원
                                              - 서울테러 | 이주영
                                              - 오후 네시 | 하형주
                                              - 조용한 식탁 | 성유경
                                              - 특급호텔 | 김민승
                                              - 특급호텔 | 이용은
                                              - 한중록 | 서은영
                                              - 해님지고 달님안고 | 장현주

2부

재수록

                                              - 극적인 하룻밤 | 박연숙
                                              - 루시드 드림 | 백승무
                                              - 민들레 바람 되어 | 박정기
                                              - 게르니카 | 박정기
                                              - 조용한 식탁 | 박정기
                                              - 유리알 눈 | 박정기



 

논단

                                              - 실기와 창의력 | 우상전    

 

정책기록실

                                              - 예술인 복지 법제화의 시급성과 당위성 | 오세곤
                                              -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편집 후기

                                   

편집인의 글

 

연극 동네가 뒤숭숭합니다. 무엇보다도 서울연극제 예산 삭감은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어떻게 수십 년 이어온 연극계의 대표 행사를 그렇게 취급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실 갑작스레 문예진흥기금을 지역으로 이관한다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설마 무슨 대책이 있겠지 했는데 정말 허망한 기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울의 예술을 전국 16개 시도 중 한 지역의 예술로 간주해도 정말 괜찮은 건지 고민도 없이, 우리나라 예술 지형에 있어 서울이 갖는 특별한 의미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에 맞추느라 부화뇌동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아무 사전 통고도 없이 전문가들의 심사 결과 그렇게 되었다면서 전체 예산이 줄었으니 그냥 받아들이라 합니다. 행사를 불과 1달여 앞두고, 참가단체와 작품까지 다 정해진 마당에 무려 30%를 삭감한 그 결과를 웃으며 수용하라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정말 연극만 하며, 연극만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정녕코 모든 연극인들의 가장 큰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 당장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아마 현재의 연극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해 꾸준히 노력했을 때 미래 우리 후배들이라도 그런 세상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볼 뿐입니다.

그런 희망 속에 ‘오늘의 서울연극’이 있습니다. 연극인들에게 항상 깨어 있기를 호소하기 위해 ‘오늘의 서울연극’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술 활동에 대하여, 우리 연극동네 환경에 대하여,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하고자 ‘오늘의 서울연극’이 있습니다.그 ‘오늘의 서울연극’이 벌써 6호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참 빠릅니다. 비록 아직은 초라하다는 평을 듣지만 그래도 한 호 한 호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늘 마음이 뿌듯합니다. 게다가 이번엔 편집위원회를 구성한 뒤 첫 번째 결실이라 그런지 더욱 그렇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이번엔 리뷰가 11꼭지나 됩니다. 역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여럿이 힘을 합하니 한결 수월해집니다. 재수록도 그간 지적을 받았던 편중의 냄새를 다소나마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지난 번 우상전 선생님의 글의 분류가 적당치 않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 ‘논단’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도 활성화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나 섭섭한 일이 있습니다. 그간 수석기자 역할을 하며 수고하던 심희령 기자가 해외 체류 계획에 따라 이 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언제고 귀국하면 다시 복귀하리라 믿지만 역시 마음이 허전합니다. 사실 아무 대가도 없이 오로지 보람 있는 일을 한다는 마음 하나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을 맡아 해왔는데 이렇게 떠나보내려니 영 미안합니다.

그러나 세상사 모두 만나면 헤어지고 또 그러다 만나고 하는 거려니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연극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조금 멀어졌다가는 이내 다시 가까워지곤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푸념이 길었습니다. 다소 느슨하고 다소 부정형이지만 ‘오늘의 서울연극’은 꾸준히 묵묵히 조금씩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오래 오래 결코 쉬지 않고 말입니다. 다들 조그만 목소리로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하라고. 힘을 내라고. 지치지 말라고.

감사합니다.


2011년 3월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Review

 어디로 갔는가? 내 사랑하는 아이는!

- [게르니카]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두, 세 가지 독법


                                                                            최창근(극작가) anima69@empal.com

구성, 연출: 유홍영
극단: 마임공작소 판
일시: 2011. 2. 8-27
장소: 명동 삼일로창고극장
관람일: 2011. 2. 19 저녁 8시


예술가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어야 한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큰 죄이다.
- 한나 아렌트(1906-1975)

예술가란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1941-1996)


내력 혹은 근거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읍이다.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월요일 저녁 독일은 여러 비행 편대를 파견해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감행했다. 폭격은 저녁 8시쯤 멈추었지만 들판으로 피신하던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기총소사를 한 결과 사망 1654명, 부상 889명의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좌파 인민전선을 소비에트 연방이, 우파였던 프랑코 정당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프랑코 파의 승리로 종전될 때까지 스페인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이 때 게르니카는 나치의 폭격실험에 희생되고 말았다. 입체파의 거장인 피카소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게르니카]는 현대사의 이 비극적인 사건을 증언하기 위해 제작된 흑백으로 그려진 대형벽화이다.  


탐색

이번 공연을 구성하고 연출한 유홍영은 유진규, 김성구 등과 더불어 한국의 1세대 마이미스트에 속한다. 그는 2000년 7월 피카소의 그림 전시회에서 [게르니카]를 만났고 그로부터 10년 후 명동의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이미지극 [게르니카]를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불타오르는 집, 아이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과 울부짖는 여자들, 쓰러진 병사, 얼이 빠진 황소와 미친 말의 머리, 램프를 들고 서성이는 여인들처럼 전쟁터에서 목격할 수 있는 광경들이 복잡한 퍼즐처럼 마구 엉켜있는 그림이 피카소의 [게르니카]이다. 그가 [게르니카]를 무대 위에 올린 이유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당시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권력이 정치적인 이유를 내세워 개인에게 가한 폭력이 2011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해서일 것이다. 연출가는 멀리는 용산 참사 현장과 쌍용 자동차, 기륭 전자에 가해진 공권력의 무력진압에서부터 가까이는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제 2의 용산인 두리반에 자행된 국가적인 차원의 인권유린에 대해서 발언하고 싶지 않았을까.


감각-흐름-인식
극단 사다리에서 유홍영과 호흡을 맞추며 오랫동안 마임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 온 채희준은 1980년대 말 첫 독집앨범을 발표하며 음유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싱어송라이터였다. 그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이다. 예술에 있어서 최소한의 기교를 의미하는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미국의 필립 글래스와 그리스의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을 떠올리게도 한다. 묘하게 겹치면서도 단순하게 되풀이되는 리듬과 멜로디는 요즘 클래식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서양의 고음악에도 닿아있다. 폴란드의 현대작곡가 헨릭 구레츠키의 교향곡 제 3번 [슬픔의 노래]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그렇게 거침없이 홀로 가는 단선율의 화성엔 비극성을 일깨우고 도드라지게 하는 영성의 힘이 깃들어 있다. 검은 구름의 움직임을 꽃으로 형상화한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던 허밍은 우아함의 극치였다.  


몸>호흡<놀이

이진의 무대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하다. 비행기가 마을을 폭격하는 영상과 극장 곳곳에 설치된 미술로 무대공간의 영역을 확장한 이번 공연은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의상을 걸친 배우들의 역동적이면서도 절제된 움직임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액자 프레임과 간단한 오브제를 이용하여 마치 춤을 추듯이 유연하게 흘러간 마임은 극 중에서 유일하게 희화화된 오락 장면에서 한층 더 재기발랄해졌다. 어쩌면 이 장면은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전후세대의 정치적인 무감각과 무관심을 에둘러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라크 전쟁 당시 CNN을 통해 생중계되던 실제 전쟁 상황을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처럼 오락을 즐기듯이 감상했던 경우를 돌이켜보라. 게르니카 학살 현장의 공포를 창의적으로 재현한 배우들의 연기 중에서도 특히 예기치 못한 재난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아이와 엄마의 관계를 통해서 민감하고 섬세하게 표출한 이해나의 몸짓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변화/실험

삼일로 창고극장은 1970년대부터 명동에 터를 잡고 있는 연극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이다. 이해랑, 김동원 같은 지금은 작고한 명배우들이 ‘배우예술원’을 통해 후학들을 가르쳤고 연극교육자였던 이원경 선생이 요즘 유행하는 PD시스템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으며 연극뿐만 아니라 판소리와 현대무용, 뮤지컬, 마임 등의 다양한 공연들이 소개됐던 소극장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공간이었다. 이 공간의 상주단체가 된 마임공작소 판은 한국의 차세대 마이미스트 중의 한 사람인 고재경이 이끌고 있는 젊은 극단이다. 그들에게 젊은 극단이 시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실험정신과 풍요로운 상상력을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하다.  


치유=정화

15세기 경 폴란드의 한 수도원에서 ‘성십자가 탄식’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온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나의 아들, 내 몸에서 난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상처를 나에게 나누어다오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너를 품고 있었던
진심으로 너를 보살폈던 어미에게
너의 목소리라도 들려주어 기쁘게 해 다오
이젠 비록 네가 멀리 떠나가 다시 볼 수 없어도

그런가하면 잔혹한 적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빼앗긴 어머니의 애통한 마음을 표현한 민요도 있다.

내가 울고 울어 내 늙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강을 만들어도
내 아들은 차디찬 무덤 속에서 다시는 살아오지 못하리니
아름답게 우는 신의 새여
그 아이를 위해 슬픔의 노래를 불러주오  


분석+통합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작년 상반기에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됐던 예술의 존재 가치를 묻는 리 홀의 [광부 화가들]에도 등장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민중들에 의한 혁명이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밤하늘의 폭죽처럼 터지고 있는 세계사의 도저한 흐름은 국가권력의 폭력이 개인의 희생을 무차별적으로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진정 예술은 무엇인가 그리고 연극은 무엇인가 하는 자문을 스스럼없이 불러일으킨다. 1930년대에 그 권력의 희생양이 됐던 스페인의 작은 마을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한 화가의 손을 통해 벽화로 그려졌고 백여 년의 시간 터울을 두고 동북아시아의 변방인 작은 나라에서도 연극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것이 2011년 2월 아주 오랜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 공연된 마임공작소 판의 [게르니카]가 존재해야 하는 극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슬픈 거북, 그 엉뚱한 꿈

                                                              임수선(어린이연극 연구가, 어린이희곡 작가)
                                                                                  marchen21@hanmail.net

공 연 명 : <꿈꾸는 거북이>
작 / 연출 : 손혜정
극    단 : 마실
공연기간 : 2011. 2. 8∼27.
공연장소 :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관람일시 : 2011년 2월 12일 토요일 오후 2시
         2011년 2월 19일 토요일 오후 4시


 오랜만에 어린이연극을 보기 위해 사다리아트센터(현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을 찾았다. 공연을 기다리면서 객석을 휘-둘러본다. 270여 객석에 관객은 30여 명 정도 앉아 있고(12일 2시 공연), 나머지 객석이 텅 비어 있다······. 잠시, 객석에 함께 앉아 있어야 할 아이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한다. 혹 영어몰입교육을 받으러 또 스펙을 쌓으려 아이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자리에 가 앉아 있지는 않은지, 괜한 걱정을 한다.
 
 꿈꾸는 거북이가 궁금하다
 조용히 고개 돌려, 어두운 무대를 바라본다. 동그란 카펫이 바닥에 깔렸고, 장독으로 만든 악기(북)와 신시사이저가 오른쪽에 놓여 있고, 가운데 빨랫줄이 걸쳐 있고, 그 뒤로 하얀 배경 막이 처져 있다. 네모극장 크기와 견주어 왠지 작아 보이는 무대다. 문득, 이 작고 소박한 무대 위에 극단 마실이 펼쳐 놓을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2006년 <달려라 달려 달달달1>을 창단공연으로 올린 극단 마실이 ‘2008년 두 번째 공연 <이히히 오호호 우하하>로 관객을 만나고, 많은 관객의 호응에 힘입어 2010년 12월 새로운 모습 <꿈꾸는 거북이>로 돌아왔다.’(리플렛)라고 하니, 더 궁금하고 또 기대가 된다.  
 막이 오르면, 초록 치마를 입은 엄마가 빨래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엄마는 빨래를 널다가 우연히 장독대 뒤에서 상자를 하나 발견하고, 조심스레 그 상자를 열어본다. 엄마는 상자에서 나온 결혼 장갑과 오르골은 보면서, 잠깐씩 추억에 잠긴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꺼낸 이야기책을 보고, 일상에 묻혀 사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연극을 만들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기억한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두 아이가 이야기책에 호기심을 보이면, 엄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근 조근, “옛날 숲 속에 거북이들이 살았어~”하고 이야기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 두 아이와 함께 관객들은 <꿈꾸는 거북이>의 시·공간 속으로 가만히 초대된다.  

 엉뚱한 꿈을 꾸는 거북, 그 이야기가 알쏭달쏭
 무대 위에 가로 놓여 있던 빨랫줄이 세로로 놓이면서 나무숲으로 변하고, 엄마의 치마가 큰 나무로 변하는 등, 다양한 오브제가 창의적으로 활용되면서 연출하는 극 중 극 형식은 관객, 특히 어린이들이 더 흥미를 느끼고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극에 몰입하기가 힘들어지는 까닭은 왜일까?
 이는 ‘거북이 세계에서 불가능한 꿈, 숲 속 제일의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엉뚱이의 이야기’를 귀가 아닌 눈으로 많이 들어야 하는 까닭일 게다.
 다시 말해, 악사가 해설을 겸하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드문드문 찾아주기는 하지만, 주인공 엉뚱이가 대사가 아닌 ‘무-무’라는 지브리쉬를, 또 다른 등장인물들도 ‘뚜뚜’(새), ‘슬랑스키’(베짱이), ‘뿌까뿌까’(시계), ‘까초까초’(토끼)라는 지브리쉬만을 사용함으로써 극에 몰입을 방해한다.
 말의 형태가 아닌 단순한 소리를 사용하는 지브리쉬는 자연스럽게 몸짓과 표정과 소리의 크기·고조·억양 등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하기에, 배우(무대)와 관객(객석)의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소극장 공연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런데 소극장이 아닌 중극장인 네모극장에서 <꿈꾸는 거북이>를 공연하기에, 극 속에서 지브리쉬로 표현하는 그 의미들이 알쏭달쏭해서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다. 만약, 주인공 엉뚱이는 지브리쉬로 표현을 하고, 다른 등장인물들은 대사를 친다면 어땠을까? 보다 지브리쉬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어린이 관객들이 극적 상황에 더 몰입하고, 주인공 엉뚱이 또는 다른 등장인물에게 더 동화(동일시)되지 않았을까?
 
 엉뚱이의 달리는 눈, 기어가는 귀
 새에게 숲 속 제일의 달리기 선수 토끼 이야기를 듣고, 토끼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엉뚱이가 엄마를 만나는 장면을 그림자극으로 표현한 부분과 엉뚱이 역할을 배우가 연기와 인형연기를 교차해서 표현한 부분 등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면들이 많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산만한 느낌이 드는 까닭은 왜일까? 이는 극의 부분 부분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극 중 극 형식에 1인 5역(새, 엄마, 베짱이, 시계, 토끼)을 하는 배우연기와 더불어 인형연기와 그림자극을 넘나드는 잦은 연기형식 변화, 또 대도구(빨랫줄)의 잦은 활용(빨fot줄-나무-숲 속-토끼 집) 등 장면전환이 다양하고 많은데, 여기다가 등장인물들이 지브리쉬를 사용하니 이야기를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이해해야 하는 부담까지 더해진다. 그 결과, 눈으로 보는 이야기·이미지는 달려가고(과잉되고), 귀로 듣는 이야기는 기어가는(축소되는) 상황이 연출되어, 극은 균형이 깨지고 만다. 극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중요하지만, 그 장면들이 따로따로 흩어지지 않고, 전체와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과잉된 부분은 생략(압축)과 비움이 필요하고, 축소된 부분은 확장과 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엉뚱한 꿈, 그 이룰 수 없는
 마침내 엉뚱이는 숲 속 제일의 달리기 선수를 만난 토끼와 경주하길 소망하고, 어렵게 경주를 하지만, 경주에서 지고 만다. 그제 서야 엉뚱이는 자신이 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슬피 운다. 눈물. 그 눈물은 비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엉뚱이의 아픔을 치유하고, 나아가 엉뚱이가 잊고 있던 자신의 참모습(거북이 본성)을 찾는 묘약이 된다.
 이는 무대를 뒤덮는 푸른 천으로 바닷물이 출렁거림을 표현하고, 그 속에서 헤엄치는 거북·토끼를 등에 태우고 헤엄치는 거북의 모습을 그림자극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엉뚱이가 이제 더는 슬픈, 엉뚱한 꿈을 꾸지 않으리란 믿음을 준다.
 다소 작위적이고, 갈등의 해소방식이 너무 급작스럽고 단순한 면이 있지만, 울림이 있다.
 이렇게, 한 때 숲 속 제일의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었던 엉뚱한 꿈을 가진 슬픈 거북은, 다행히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찾아, 새로운 꿈을 꾸게 되면서 극은 끝난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물음이 생길까?
 왜 엉뚱이가 ‘거북이 세계에서 불가능한 꿈’을 품게 되었는지? 누가, 무엇이, 왜 달릴 수 없는 거북이를 몰이해서 토끼와 경주를 붙였는지? 왜 엉뚱이가 잘못된 꿈을 향해 가면서 넘어지고 깨어지고 부서지도록 모두 수수방관을 하고 있었는지? 왜 처음부터 엉뚱이가 자신(거북)의 본성을 알고,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극 중 극이 끝나자, 엄마가 살며시 이야기책을 덮는다. 그런데 옆에 있던 두 아이가 다시 엄마를 졸라댄다. 오늘, 숲 속이 아닌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엉뚱이, 거북이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게다. 이제는 슬픈 거북의 엉뚱한 꿈이 아닌. 기쁜 거북이 행복한 꿈을 꾸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다. 그런 두 아이의 소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엄마가 구불구불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뿅뿅뿅 비밀을 가진 한 소녀가 살았어~”
 
 다시 객석을 둘러본다. 텅 비어 있던 객석에 아이들이 제법 많다.(19일 4시 공연) 공연이 끝난 후, 극단 마실의 배우들과 아이들은 함께 만드는 '비밀의 꿈 상자'가 궁금해진다. 아이들의 꿈 상자 속에는 어떤 꿈이 담겨 있을까?

 

오태석의 <도라지>와 김수진의 <도라지>

                                                                    김옥란(연극평론가) sooro09@gmail.com

극단 : 신주쿠양산박
작 : 오태석
연출 : 김수진
공연기간 : 2011.03.02-03.06.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관람일시 : 2011.03.04. (금) 20:00


한일문화교류 연극, 신주쿠양산박의 <도라지>

연극계에서 한일문화교류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번 봄에만 3편의 일본공연이 서울의 공연장에 올라간다. 그 중심에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 서있는 재일 한국인 연극인들이 있다. 연출가 김수진의 극단 신주쿠양산박의 <도라지>(오태석 작)와 <해바라기의 관>(유미리 작)이 각각 3월 2일, 3월 9일 일주일 간격을 두고 연달아 올라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재일 한국인 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의 2008년 화제작 <야끼니꾸 드래곤> 재공연이 3월 9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외에도 연출가 김수진의 두산아트센터 경계인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 6월에 예정되어 있다.
이들 공연작의 작가가 각각 오태석, 유미리, 정의신이라는 점은 현재 한일연극교류의 중심 흐름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오태석은 현재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이번 <도라지> 공연에서 연출가 김수진은 오태석을 “한국의 셰익스피어”(프로그램북에서)라고 명명하면서 오태석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유미리는 1990년대 중반 “일본 최고의 권위의 연극상과 문학상인 기시다 희곡상,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한 재일교포 작가”로 소개된 이후 독특한 유미주의적 연극으로 한국 관객들에게도 깊이 각인된 바 있다. 이에 이어 최근 한일연극교류를 대표하는 작가는 정의신이다. 2006년 <행인두부의 마음> 이후 일본 내 한국인의 삶과 역사를 다룬 야심작 <야끼니꾸 드래곤>(정의신 연출, 예술의전당, 2008, 한일공동제작연극),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B·C급 전범의 이야기를 다룬 <적도 아래의 맥베스>(손진책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0)는 한일간 역사의 중간에 낀 문제적인 존재인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두드러진다. 유미리는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한 작가로 그녀의 작품이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 수상의 후광을 입어 한국으로 역수입된 문화적 정황을 보여주는 경우라면, 정의신은 직접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일의 역사 자체를 문제 삼는 동시대적 발언을 하고 있다.
유미리와 정의신은 비록 1990년대와 2000년대라는 시간차를 보여주고 있지만, 모두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의 연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오태석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태석이 한일연극교류의 매개 역할의 대표성을 띠게 된 것은 왜 그럴까? 이번 <도라지>의 공연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오태석의 <도라지>와 김수진의 <도라지>

한일연극교류의 맥락에서, <도라지> 공연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작품이 김옥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국내에서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1994년 예술의전당 ‘오태석연극제’에서 초연된 <도라지> 공연은 많은 논란이 있었다. 갑신정변 개혁의 꿈을 간직한 김옥균의 몰락과 대비시키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와 앉아있는 무력하고 희화화된 왕의 모습으로 그려진 고종이나 마녀 화형식을 연상시키는 명성황후 시해장면은, 반대로 식민지 시기 내내 주로 친일론자들에 의해 ‘실패한 개혁의 민족 영웅’으로 낭만적으로 회고되었던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함께 아직까지도 쉽게 판단하기 힘든 역사의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국내 공연에서 김옥균에 대한 비상한 반응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자체로 문제적인 성격을 가진 중요한 공연이라 하겠다.
극단 신주쿠양산박의 연출가 김수진의 공연 또한 <도라지>의 공연사와 관련한 이러한 비상한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비록 5일간의 짧은 공연 기간 탓도 있겠지만, 이번 공연 또한 보조석을 깔 정도로 연일 매진행렬을 이어가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단 신주쿠양산박의 대표이자 연출가 김수진이 직접 등장하여 이 공연의 의의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현재 도쿄의 가장 비싼 땅 한복판에 위치한 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 김옥균의 묘가 있으며, 무대 위의 비석은 실제 아오야마 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비석을 실물 크기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는 “조선의 변혁을 이끌고자 했던 정치가 김옥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일인 1월 23일에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극단 신주쿠양산박 또한 김옥균의 연극 <도라지>를 그 시기에 맞춰 매년 공연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도라지>가 한국에선 초연 한번만의 공연으로 그친 반면, 일본에선 1992년(일본연출가협회 주최 축약 공연), 2007년·2010년(극단 신주쿠양산박)의 3번의 공연이 올라갔다고 하니, <도라지>가 국내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공연되고 있는 현상도 대조적이다.
김옥균에 대한 추모의 공연―이 공연의 방향은 분명하다. 한글자막이 제공되는 일본어 공연의 100분간. 이름으로 보아 재일 한국인 배우로 추정되는 김옥균 역의 히로시마 코, 홍종우 역의 신 다이키가 간혹 섞어 쓰는 한국어 대사, 코러스들이 외워서 부르는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의 노래 소리, 김옥균의 추종자 노부지로가 김옥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국말, 새로 삽입된 시의 한국어 후렴구인 “에이헤야 에이헤야 에이헤야”의 낯선 억양 등은 이 공연이 한국관객을 염두에 둔 명백한 일본공연임을 순간순간 인지시킨다. 동시에 일본의 맥락, 더욱 구체적으로는 재일 한국인의 입장에서 김옥균이 어떤 위치에서 분절되고 이접되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프로그램북에서 새로운 극중 시로 양석일의 <해가 떴지만>, <어둠 속에 있을 때>, 알렉산더 소크로프의 <소크로프와의 대화>가 삽입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공연은 오태석의 원작을 존중하며 거의 그대로 공연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 공연이며 새롭게 대체되거나 추가된 요소들로 인해 원작과는 다른 이질적인 의미 또한 파생시키고 있음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에 갈매기가 날고 모래사장에 게가 기어 다니는 식으로 매우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장면으로 연출되고 있는 오가사와라 유배지 장면에서 김옥균을 “아버지”라 부르는 어린 노부지로는 묻는다. “아버지, 도라지는 뭐야?” 김옥균은 대답한다. “조선 인삼도 아니고 무도 아닌, 어디든지 뿌리를 뻗는 조선의 뿌리다.” 아마도 한국관객이라면 너무 익숙하여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을 이러한 장면에서 ‘도라지’는 새롭게 그 뜻이 설명되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뿌리”라는 강한 민족주의적 상징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마지막, 사지절단의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해 사지가 여덟 토막으로 잘려 조선 8도로 흩어지고 머리만 남은 김옥균에게 싱싱한 조선 무를 마치 사지처럼 늘어놓아 접 붙이는 장면에서는 오태석 특유의 기지와 연민은 사라지고 숙연한 엄숙함만이 남는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제목인 ‘도라지’는 김옥균의 사지를 대신하여 짜 맞춰진 무와 환유적 연관관계를 맺으며 오태석 특유의 언어적 메타적 놀이의 특성을 보여준다. 오태석은 김옥균의 머리에 무로 된 팔다리를 맞춰 놓은 기괴한 신체 이미지를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뿐만 아니라 김옥균과 홍종우 모두를 포함하는 역사 자체에 대한 희화화와 조롱을 드러내고 있지만, 일본어 공연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도라지> 공연에서 그러한 이중적인 불안의 그림자는 지워져 있다.
대신 공연 중 반복해서 낭송되는 “살육의 자유, 죽음의 자유, 구속의 자유, 사랑의 자유, 증오의 자유, 고독의 자유, 절망의 자유, 권태의 자유, 일의 자유, 성별의 자유, 선택의 자유, 자유의 자유. 위대한 자유여! 너는 어찌하여 자유인가! 지금은 절망의 시대…”라는 새로 삽입된 시에서 이 공연의 의미를 새롭게 찾으려는 공연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일찍 핀 꽃” 김옥균과 홍종우를 ‘자유’의 코드로 읽는 관점은 아직까지 한국관객들에게는 낯설다. 일본 배우들에게 낯설었을 ‘도라지’의 뜻을 친절하게 풀어주었듯이, 이 자유의 노래 또한 한국관객들에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단서가 조금 더 제공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연극이라는 미디어에 대하여

<메디아 온 미디어 MEDIA on media>
극단 성북동비둘기(작: 에우리피데스, 재구성연출: 김현탁)

연출: 김현탁
극단: 성북동 비둘기
공연기간: 2.24~4.10
공연장소: 성북동 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관람일시: 3.6


                                                                                                                   목정원


이따금 고전 비극의 대사들을 되새겨 보노라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넘어 여전히 우리를 강렬하게 건드리는 그 말들의 힘 앞에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때 그 강렬함은 단순히 적나라한 말의 표면이 아닌, 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내면, 다시 말해 그들의 처절한 밑바닥과 연관한 강렬함이다. 그리하여 그와 동일한 밑바닥을 지닌 우리는 그들을 알아보고 이해하며 뿌리 깊게 공감한다. 그런 맥락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는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 그런데 김현탁의 연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메디아(MEDIA)의 이름 속에 도사리고 있는 미디어(media)의 함의를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메디아의 이야기는 오늘날 넘치는 미디어 속에 만연한 숱한 이야기들 자체이며, 메디아는 우리 속에 이미 스며들어 끝없이 삶을 침투하는 미디어라는 지긋지긋한 벗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무료하게 채널을 돌릴 때마다 어떤 형식의 프로그램 속에서든 우리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며, 요컨대 그 채널들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그녀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겪는 치정과 능욕과 분노와 부추김과 복수와 죽음, 해소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 또 그 모든 일들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드는 저 웃음들과 노래들 뿐. 그리고 결국 거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것이다.

지하 극장의 콘크리트 무대에는 흰 사각형 플로어가 깔려있고, 그 프레임을 가감 없이 노출시키는 대여섯 개의 형광등 불빛이 조명의 전부이다. 프레임 바깥에는 의상과 소품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한쪽에 설치된 작은 음향 데스크에서 실시간으로 효과음이 삽입된다. 마치 어떤 TV 채널의 보이지 않는 외부가 모종의 비현실성 속에서 한꺼번에 관망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열려진 채널(channel-통로)을 통해, 고전 메디아의 장면들은 각종 미디어 프로그램으로 변환된다. 가령 메디아가 코러스들 앞에 나와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장면은 어느 여배우의 기자회견으로, 추방을 명하는 크레온에게 그녀가 하루의 말미를 호소하는 장면은 옛날 무성영화의 이별 장면으로 나타나고, 또 이아손과 메디아의 다툼은 인신공격과 폭력으로 갈무리되는 리얼 토크쇼의 형식 속에 이루어진다. 나아가 장면들 사이에서는 옷을 갈아입거나 물을 마시는 실제 배우의 모습이 노출됨으로써 근본적으로 허상일 뿐인 미디어의 본모습이 지속적으로 폭로된다. 또한 때에 따라 신문기자, 촬영스텝, 게임 캐릭터 등으로 등장하는 코러스들 역시 고대 비극에서처럼 단지 극을 뒷받침하거나 의미를 생성시킬 뿐 아니라 그 흐름을 차단하고 미디어의 허구성과 작위성을 고발하는 역할들을 함께 담당한다. 따라서 각 인물들의 입지는 마치 오늘날의 미디어 속에서 끝없이 분사되는 파편들처럼 지극히 다층적이고 다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연극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배우에게 매우 큰 몫을 요구한다. 가령 무성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할 때 메디아는 그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말투와 몸짓 속에서 애틋한 이별의 아픔도 자아내야 하지만, 그와 같은 미디어의 형식적 특성에 함몰되지 않은 채 여전히 복수의 칼날을 숨기고 가련함을 가장하여 크레온에게 호소하는 메디아 자신이기도 해야 했으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매순간 거리를 취함으로써 껍데기뿐인 미디어 속 인물을 폭로하기도 해야 했다. 한편 망설임 끝에 아이들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메디아는 만화 캐릭터 가면을 쓰고 더빙을 하는 성우로서 등장하는데, 그토록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능청스러움은 이 연극 곳곳에 감추어져 있는 각종 거리두기 장치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디아 역의 배우는 매 장면마다 요구되는 긴장과 이완 사이의 이 같은 줄다리기를 제법 잘 완수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타의 배역들이나 코러스들에게서도 그와 같은 유연함이 보다 다채롭게 발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컨대 기자회견 장면에서 메디아를 부추기고 언론의 힘으로 스토리를 조장하려는 기자들의 쑥덕거림이나 무성영화 촬영장에서 빗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하면서 흥분하여 개입하는 스텝들의 외침은 보다 분명한 태도의 인식을 통해 훨씬 더 풍성한 함의를 지닌 것으로서 전달되어야 했다. 같은 맥락에서 크레온과 이아손의 연기 역시 너무도 단편적이었는데, 그처럼 단순한 겉치레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희석시킬 위험마저 지닌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바로 그 작품 전체의 주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미디어 속에서 메디아를 찾을 수 있다거나 혹은 그 반대가 가능하다는 어떤 기발한 발견 정도로 축소되어버릴 뿐인가? 물론 단지 그것뿐이라 해도 족할 정도로 매 장면의 형식적 완성도 및 원작과의 맞물림, 그 정합성은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와 같은 컨셉의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미디어의 다양한 양상 속에 숨어 있는 각종 폭력성을 고발하며, 이때 그 폭력성은 곧 메디아의 폭력성으로 귀결되는 동시에, 폭력을 당하는 메디아라는 또 다른 심급마저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그에 따라 관객 역시 자신의 다층적인 입지를 인식하여, 미디어가 무엇이고 메디아가 누구인지에 대해 끝없이 자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새로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누구인가, 코러스인가? 다시 말해 미디어의 관망자인 저 무서운 대중인가? 혹은 미디어인 메디아, 그녀 자신인가? 혹은 그녀가 부르는 노래이거나, 최후에 남은, 접근이 차단된 죽은 물신들인가? 실제로 미디어의 홍수 속에 흘러가고 잊혀지는 모든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한 노래를 끝으로 마지막 채널인 가요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무대 위에는 흩뿌려진 종이 가루들과 함께 목이 잘리고 피가 묻은 인형들, 메디아의 핸드백, 이아손의 모자, 총, 칼 등이 널리고, 그 전면에는 출입금지 테이프가 둘러쳐진다. 그처럼 황량한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공연 전체에 대해 박수를 보낼 겨를도 없이 자리를 뜨면서, 관객들은 그 잔해들의 잔영에 머물며, 미디어가 모두 꺼진 후에 과연 남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보다 근원적으로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매체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당혹감을 느낀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관객들이 지속적으로 그와 같은 비판적인 고찰을 이끌어가기에는 이 연극은 너무도 현란하고 또 재미있었던 듯하다. 물론 이따금 각 장면이 숨기고 있는 여러 함의들이 날카롭게 인식을 작동시키기도 했지만, 오늘날 미디어의 여러 폐단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심각하게 사유하기보다는 그저 매 장면에 흠뻑 빠져 웃거나 즐기기를 선택하기가 더 용이해 보인다. 요컨대 여기서 관객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중적이지만, 그 선택은 자유로운 몫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중적인 태도 및 선택의 문제는 이제 관객으로부터 연극 자체에게로 넘겨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이 스스로의 위치나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이 연극의 위치나 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 연극은 각종 비판의 요소들을 은폐하고 우리를 현혹하는 저 미디어 자체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현란하게 유혹하다가 여지없이 자신에게 빠져들고 마는 관객의 뒤통수를 침으로써, 요컨대 스스로 미디어가 됨으로써 미디어를 비판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연극이라는 또 다른 미디어’의 자리에 고유하게 남아있는가? 바로 이와 같은 두터운 의문들이 이 연극의 유쾌함 속에는 깊이 감춰져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다음의 물음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예견되었던 오늘날의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연극이라는 미디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연극이라는 미디어가 갖는 힘은, 다름 아닌 이 질문 자체를 발생시키는 그것의 가능성에 놓여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각종 의미의 비규정성과 태도의 불확실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끝없는 거리두기, 그 다채로움 속에 바로 연극의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현탁의 연출은 바로 그 다채로움을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단순한 해체나 실험 또는 하나의 컨셉에 머무르지 않고, 역설적으로 그 어떤 미디어 테크놀로지도 사용하지 않은 채 우리로 하여금 연극이라는 미디어 자체를, 그 찬연한 스펙트럼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그 실체를 뒤로한 채 극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메시지들을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순간 그 다채로움을 내비치거나 숨겨버릴 수 있는 저 연기의 유연함과 연관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연극이라는 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미디어는 바로 배우이기 때문이다.

 

어느 청년실업자의 절규, <서울테러>

                                                           이주영(고려대 박사과정), tolerance211@naver.com


극단 : 배우세상
작가 : 정범철
연출 : 이종훈
공연기간 : 2010.12.10~Open Run
공연장소 : 배우세상 소극장
관람일시 : 2011.1.16

 
 최근 모 광고가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한다. 안중근 의사가 31세에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요즘 31세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재테크에 목숨 거는, 경제적으로 발버둥 치는 나이라는 내용의 광고이다. 통계청에 의하면 청년실업률이 2010년 8%를 기록했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통계와 달리 체감 청년실업률은 27%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사회상을 반영하듯 신문기사에서 취업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캥거루족’, 일하지도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란 단어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부모 밑의 삼십대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소수의 집단이 아니다.  
 연극 <서울테러>의 포항출신 ‘황장복’(33세)은 적어도 캥거루족, 니트족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서울에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교 4년과 취업할 때에 불리하다는 석사과정 2년까지 마친 청년 인재이다. 황장복은 비록 월 20만원에 5분마다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옥탑방에 살고 있지만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성공할거라는 꿈을 갖고 살아가는 젊은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를 응원하는 여자친구 ‘차서연’과 친구 ‘노상태’가 있다. 취업 전선에서 5년을 버틴 황장복이 남긴 이력은 500여 통의 이력서와 100번 넘게 본 면접뿐이다. 황장복과 함께 5년 동안 그의 좌절을 지켜보고, 남자친구의 월세를 대신 내준 서연은 황장복의 실패와 태도, 발전 없는 미래에 진절머리를 치며 7년간의 장복과의 연애를 청산한다.
 일하다 두 손가락을 잃을 뻔한 노상태는 장복에게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자고 권한다. 장복은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이유로 단번에 거절한다. 결국 장복이 5년 동안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한 이유는 장복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으며, 자신의 이상을 높이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복의 대사에서처럼 장복은 대학원까지 나온, 소위 말하면 대한민국의 고급 인력이다. 자신이 취직하기 위해 지금까지 투자한 노력과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정은 어쩌면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본전을 뽑고 싶다는 얘기이다. 장복은 상태가 추천하는 공장, 두 손가락을 잃을 뻔하고도 보상금 60만원밖에 받지 못하는 그 불합리한 공간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싶지는 않다.  
 상태는 장복에게 귀향하자고 권한다. 고향인 포항에 내려가 직장 구하고 사람답게 살자고 한다. 하지만 장복은 이 또한 거절한다. 장복이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달려왔듯이 장복의 가족들 또한 장복과 함께 그 힘든 시간과 과정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에 장복은 자신의 고향에 떳떳하게 돌아갈 수조차 없다. 악에 바친 장복은 서울을 테러할 결심을 한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못하는 대한민국을 향해, 부조리한 대한민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장복은 테러를 계획한다. 장복에게 자신의 테러 행위는 윤봉길 의사의 장거와 이스라엘 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진 14세 팔레스타인 소년의 저항과 등가의 행위이다. 물론 황장복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장복의 테러 행위에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황복의 행위는 장거가 아닌 테러이다. 그러나 사회를 향한 장복의 울부짖음에 관객은 황장복에게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장복이 미래를 향해 달려도 항상 그 자리고, 눈을 낮춰 취직을 하려고 해도 이번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을 때에 장복은 사회에서 능력 없고 철지난, 그리고 나이 많은 무능력한 취업 준비생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장복 스스로가 자신을 사회의 패배자로 만들었던 것일까.
 극 후반부에 노상태는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인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황장복이 테러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장복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동원해 청계천과 인터넷 쇼핑물에서 재료를 사서 만든 ‘작품’이다. 노상태가 첫 번째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인다. 불량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인다. 장복이 만든 다이너마이트는 폭발하지 않는다. 장복이 대학교 4년과 대학원 2년 동안 공부한 지식으로 만든 다이너마이트는 불량품이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장복이 사회의 낙오자가 된 게 장복만의 잘못 때문인가. 꼭 장복만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작품은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한 시간 가량의 짧은 공연시간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잦은(?) 장면 전환, 배우들의 코믹한 연기와 대사, 그리고 극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음악과 지하철 소리까지 극은 많은 정보와 볼거리, 들을 거리를 제공해 관객들이 작품을 즐길 수 있게끔 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사용된 ‘모리슨 호텔’(남수한)의 곡은 장면과 장면을 비교적 매끄럽게 연결해 준다. 이 곡들은 <지하철 지날 때마다>(청년 실업자의 노래), <사랑이 떠나네>, <바람이 가는 길>, <나 때문에 울지는 마> 등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곡 소개의 글에서처럼 “힘겹게 하루를 살아내는 이 땅의 모든 ‘루저’들의 노래”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 위해, 그리고 극의 결말을 짓기 위해 재미는 있으나 다소 어수선하고 무리한 장면(특히 배달원이 단무지를 자르는 장면) 등이 연출된다. 또한 노상태가 친구의 죽음에 배달원을 칼로 찌르는 장면은 상태의 심리를 동감하고자 들자면 충분히 상태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으나 무대에서 맥 빠지는 게 연출되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극이 마무리가 될 즈음 장복의 옥탑방에서 들리는 지하철 소리가 소음이 아닌 장복과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젊은 청년들의 아우성으로 들린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지하철,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내일을 고민하는 대한민국 젊은 세대들의 덜커덩! 하는 외침이 짠하게 들린다.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 : <오후 네시>

                                                                                                          하 형주

연출 : 조최효정, 극단 여행자
극장 : 정보소극장  
일시 : 2011년 2월 19일~3월 6일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의 <오후 네시>는 라틴어 교수였던 에밀이 은퇴후 자신의 부인 쥴리엣과 조용한 작은 시골로 이사가면서 시작된다. 이사온 날 부부는 복잡한 도시생활을 잊고 자신들이 꿈꾸었던 전원생활을 즐기고자 하며 행복에 부푼다. 그런데 이사 온 날 그들은 이웃집 남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 심장병 전문의라는 이 이웃집 남자, 베르나르뎅은 실상 이들을 방문한 후 별 말을 하지 않고, 이 부부의 질문에도 거의 대답을 하지 않거나, 반복되는 질문에 그냥 “그렇소, 그렇지 않소”라는 간단한 말만 한 채 커피를 마시며 두 시간동안 있다 돌아간다. 첫 방문에서 이 부부를 좀 당혹스럽게 했던 이 이웃집 남자는  그런데 그날 이후 매일 오후 네 시에 와서 두 시간동안 말없이 커피 한잔을 마시고 돌아간다. 이런 그의 반복된 방문은 이들 부부에게 그들만의 한가로운 오후를 즐길 수 없게 하는 스트레스로 그리고 긴장으로 다가서면서 극은 절정으로 다가간다.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
이 불편한 이웃집 남자 베르나르뎅에 대해 부인 쥴리엣은 문을 열어주지 말자고 하고, 남편 에밀은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역시 이미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가치관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베르나르뎅의 반복된 방문과 그의 태도에 곤혹스러워진다. 그래서 매일 오후 네 시의 베르나르뎅의 방문은 이들 부부의 일상적 삶을 더 이상 자유로울수 없게 하며 혼란스럽게 한다. 말하자면, 에밀 자신이 그동안 생각한 교양이라는 상식이 베르나르뎅에 의해 부서지면서 자신의 본성을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 마침내, 남편 에밀은 폭발하고 베르나르뎅에게 더 이상 자신의 집을 방문하지 말라고 큰소리로 “꺼져”라고 소리쳐 내�는다.

며칠 후 베르나르뎅의 자살을 발견하게 된 에밀은 그를 구해 살려낸다. 하지만, 에밀은 베르나르뎅의 자살, 자동차 배기가스를 흡입하며 시도한 자살이 실제로는 시끄러운 자동차 시동소리로 자신에게 이 자살의 사실을 알리고 그의 정신박약인 부인을 돌보게 하는 의도라 생각하며 분통을 터트린다. 그리고 이 부부는 베르나르뎅의 정신박약인 아내를 돌보게 된다. 그런데, 이 정신박약인 아내는 모든 것에 감탄해하며 행복해하는 것에 반해, 베르나르뎅이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냉담하고 불행해했는지 알게 된다. 에밀은 베르나르뎅이 병원에서 돌아온 날 새벽 네 시에 그를 찾아가 자신이 베르나르뎅의 자살을 방해했다며 아이러니하게도 사과를 한다. 그리고 에밀은 베르나르뎅의 자살을 도와주겠다며 그가 내미는 베게로 그를 죽인다.

<연출적 문제>
극은 베르나르뎅의 불편한 방문과 함께 가지는 에밀과 쥴리엣의 심리적 변화가 그래서 그들 자신의 본성을 위선적 교양을 발견하게 하는 그리고 베르나르뎅의 자살을 돕는 에밀의 심리적 변화와 같은 중요한 인물 내면의 변화들이 사건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연출은 인물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중요한 시간의 흐름을 무대 위에서 전혀 제어해내지 못한다. 일례로 다시 날이 바뀌어 베르나르뎅의 재방문에도 불구하고 그 전날 먹은 커피잔들을 무대의 탁자위에 치우지 않은채 그대로 두는 서투름을 드러낸다. 게다가 조명은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내는 어떤 역할도 해내지 못한 채 다만 이들 배우들이 모이면 밝아지는 역할만을 하고 있어 조명의 기능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리고 세 명의 배우들 특히 오랜 침묵과 함께 드러나는 베르나르뎅의 침묵적인 대사는 (불행히도 필자가 공연을 본 날은) 그 침묵의 공간을 체화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어린아이가 속으로 시간을 세어 대답하는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연출은 조명, 그리고 시간적 흐름 그리고 연기 모든 면에서 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  
공연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며 다시 극단으로부터 받아 읽은 대본(수정)과 극에서의 대사는 너무나 달랐는데, 희곡텍스트를 통해 오히려 훨씬 더 이 작품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연출의 고민을 필요로 하는 지점인 것 같다.  

 

삼독(三毒)이라는 이름의 식탁

―――극단 뿌리의 <조용한 식탁>

                                                                 성유경(이화여대 박사과정) yuricia@paran.com

작: 한윤섭
연출: 김도훈
극단: 뿌리
공연기간: 2011. 2.15~2.27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3관

침묵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침묵으로 돌아간다
―――진은영 <고요한 저녁의 시>

 <조용한 식탁>은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갈등을 내면독백 중심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10년 전 상처하고 홀로 살아온 아버지(한기중 분)와 아들(민준호 분), 아버지의 재혼 상대이자 아들의 새 엄마가 될 여자(박리디아 분). 아들에게 여자를 소개하려는 아버지는 정작 교통체증 때문에 약속에 늦고, 아들과 여자가 먼저 만난다. 무대 위에는 커다란 식탁만이 놓여 있다. 어색하게 집에 들어선 여자와 역시나 어색하게 여자를 맞는 아들은 식탁에서 소소한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아들은 여자가 낯설지 않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지 기억해내려는 아들은 여자의 얼굴과 말투에서 10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의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를 미행하게 된 열여덟 살의 아들은 아버지가 “지하철과 기차가 서는 역” 홍등가에서 서성이는 걸 목격한다. 성욕에 취한 아버지는 “빨간 유리벽 안에 있던” 여자를 바라보고, 여자는 자신을 구경하는 아버지를 구경하고, 길 건너에서 아버지를 구경하던 아들은 이내 여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날, 여자의 자태에 정신이 혼미해진 아들은 사고를 친다. 여자를 바라보기만 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잠든 사이 신용카드를 꺼내들고 홍등가의 여자와 하룻밤을 지낸 것이다. 신용카드 내역이 의아한 아버지는 홍등가의 여자를 붙들고 자신이 이곳에 와서 카드를 사용했는지 묻는다. 여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여자는 직감적으로 부자의 관계를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여자를 다그친다. 여자와 관계를 가지면 기억날지 모른다며 고집을 부리고, 여자는 관계를 갖기 않겠다고 거부한다. 묘하게도 여자가 거부할수록 욕정이 치민다. 아버지는 여자를 몰아붙인다. 멀리서 둘의 설왕설래를 지켜보던 포주가 다가와 여자를 폭행하고, 여자가 병원에 실려 가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일은 후폭풍을 맞게 된다. 정확히 10년 뒤에. 회사 근처 커피전문점 사장이 과거 홍등가의 여자임을 알지 못한 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때의 남자임을 알지 못한 여자는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고, 결혼이라는 깜짝 소식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바로 여자와 하룻밤을 지새운 아들 앞에서.
 이들의 충격적인 과거는 모두 식탁 위의 내면독백에서 나온다.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 필사적으로 간추리고 미화한다 해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안길 ‘말’을 세 사람은 자기 안에서 내지른다. 하지만 그들의 속말은 독특하게 처리된다. 마치 개인 홈페이지에 A, B, C라는 이니셜로 험담을 적었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이 A, B, C를 단박에 알아채는 것처럼 그들의 속말은 비공개를 가장한 공개로 작용하고, 서로간의 교통은 이뤄진다. 그래서 <조용한 식탁>의 속말은 대화보다 더욱 강력하다. 하지만 이들이 겪는 ‘풍랑’이라면 속말은 떠듬떠듬 우물거리거나 서로의 시선을 회피하면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속말은 또렷하고 막힘이 없다. 배우들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듯이 서로의 눈을 보고 지난 일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하고 미세한 감정까지도 풀어낸다. 배우들의 동작은 나긋하고, 관객들은 거미줄처럼 얽힌 인물들의 은밀한 과거를 너무나도 친절하게 감청하게 된다. 그래서 궁금증은 증폭된다. 작가는 왜 침묵의 수다와 같은 속말의 활용으로 인물들의 목청을 트게 했을까. 왜 인물들의 속내 이야기는 그것이 발설되든 그렇지 않든 상처를 덧내면서 폭발하는 것일까.

고백하거니 내가 흘린 몸짓 발짓 손짓은
죄다 악업이었다. 난 그게 아프다
―――임동확 <내가 흘린 말들이>

 ‘나’라는 것은 탐욕(貪)과 분노(嗔), 어리석음(癡)의 총집합체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삼독(三毒)이라 칭하고, 모든 괴로움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설한다. 탐욕은 내가 갈망하는 것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때 발생한다. 내가 피하고 싶은 것, 내가 겪고 싶지 않을 것을 피하지 못하고 겪어야할 때 나는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강조하고 키울수록 괴로움에 허덕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나’를 지우고 ‘나’를 없애면(無我) 그만큼 고통의 양도 줄어드는데, ‘나’에 대한 집착은 내가 잊지 못하는 기억만큼 평생토록 수명을 연장한다.
 아버지와 아들, 여자는 빙 둘러앉은 식탁에서 괴로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삼독의 멍울을 풀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다시 괴로움에 빠진다. 그들이 끊임없이 마셔대는 물, 커피, 술처럼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욕망은 아들이 신용카드를 들고 홍등가에 달려간 것처럼, 여자가 관계를 거부할수록 욕정에 치밀었던 아버지의 상황처럼 갈애(渴愛)에 붙들려 있다. 당시 그 순간만큼은 욕망을 해소하는 일이 절박하고도 시원했을 것이다. 허나 태국의 승려 아짠 차(Phra Ajahn Chah)의 말처럼 즐거운 일에 집착하는 것은 뱀 꼬리를 움켜진 것과 같고, 불쾌한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뱀에게 물린 것과 같다. 때가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우리는 물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붓다 브레인) 인물들은 ‘나’의 관점에서 ‘나’의 말을 쏟아낸다. 나의 탐욕만큼 나의 분노는 상승하고, 내가 다치는 것은 무섭도록 두렵다. 서로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았을 때도 ‘나’는 달콤함을 놓지 못한다. 아버지는 자잘한 습관과 취향마저 변화시킨 ‘나의 연애’를 버릴 수 없다. 오랫동안의 고독과 적막감에 다시 빠지기 싫다. 아버지는 “그래도 결혼해야 한다.”고 단언하고, 여자 역시 아들에게 “네가 뭔데 나한테 헤어질 자격을 따지는 거야.”라며 새로운 인생에 대한 갈망을 지우지 않는다. 나의 내면독백이나 나의 대화는 모두 ‘나’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나의 말’은 중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은 윤리 교사이다. 윤리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교사라는 직함과 결합되어 자신이 도덕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잣대를 들이밀게 된다. 아들은 끝내 아버지와 여자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이들은 다시는 안 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이 날의 기억에서 평생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살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은 곧 업(業)이기 때문이다. 업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소행을 일컫는다. 과거의 업이 문제가 되어 새 인연을 방해하듯이, 어제 뿌린 씨앗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은 오늘도 미래도 흉흉한 날들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 기억할 수 없는 업(무의식)이 깊숙이 자리하여 관계를 비틀어놓는 데에 있다.

여기 오래 있다보니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7>

 <조용한 식탁>은 다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다. 연극은 총 3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작인 1막은 아들과 아버지만 등장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개해 줄 여자”가 있다고 말하고, 아들은 크게 기뻐한다. “적막했죠. 둘이라는 것이 어쩌면 혼자보다 더 적막한 것 같아요. 한쪽이 입을 다물면 혼자나 둘이나 마찬가지죠. 중요한 건 적막하게 살아가는 내가 아니라 상대를 계속 봐야 한다는 거지요.”라는 아들의 속말은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아들은 다음과 같은 얘기 또한 잊지 않고 들려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을까?” 아들의 어머니는 병환으로 죽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곁을 아버지가 제대로 지켜주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표출하고, 적막하게 살아간 상대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다는 뉘앙스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는 아버지를 파파라치처럼 미행한다. 또한, 2막에서 아들과 여자가 만나 과거를 짐작했을 때 급히 도망치려는 여자를 붙잡는 인물 역시 아들이다. 그는 여자에게 “왜 이렇게 상황파악을 못해요? 지금 돌아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요. 그 정도도 머리가 안 돌아가요?”라고 화를 내며 붙잡는다. 이때 여자가 돌아갔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따로 산다. 이들의 만남은 모두 아버지의 집에서 연출된다. 그간 아버지의 집에 여자가 들락거린 일에 분노하고, “난 한 번도 아버지 옆에 다른 사람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까 마음이 그렇지 않아요.” 이 말과 함께 날개가 달린 천사상(순결한 여신상)을 가리키며 여자에게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고 여자와 어머니를 대비시키며 몰아치는 장면은 아들의 심리를 대변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는 <조용한 식탁>은 커다란 침대가 놓인 한윤섭 작가의 2007년 작 <굿모닝 파파>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맹인 어머니를 이용해서 돈을 벌고 다른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이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게 된다. <조용한 식탁>에서는 아들의 반항욕구가 욕구의 반대로 가장되고 변형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아들에 의해 끊임없이 간섭받고 있다. 아들의 악의적 충동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반어적인 확장이자 반전으로 이루어진다. 아마 이 작품은 아들의 복수극이라 불려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극작술, 하지만 수없이 빼고 다듬었을 한윤섭 작가의 노고가 돋보인다. “아버지 문제가 제 문제에요.” “고추가 너무 매워서 울어요.” “(여자에게) 당신은 손님이야.” 등의 대사는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추리극의 긴장감과 속말의 묘미를 살리면서 너무나도 쉽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한 연출, 미니멀리즘의 무대와 잘 세팅된 차가운 식기들, 캐릭터를 보여주는 의상(특히 여자의 뱀피 가방과 구두), 영화 <그녀에게>에 삽입되었던 Cucurrucucu paloma 음악 역시 연극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욕망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 ‘괴로워하는 나’의 역할 모두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배우들의 연기 또한.  

 

특급호텔, 진정 망각에 대해 다루었는가?

                                                                                          김민승(연극평론가)

극단 : 초인
작 : 라본 뮐러
연출 : 박정의
공연기간 : 2011. 2. 25 ~ 3. 6
공연장소 : 남산예술센터
관람일시 : 2011. 2. 27


가끔 공연의 실제 내용과 어긋나거나 전혀 다른 홍보 프로그램 문구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제작과 홍보 사이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연출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본 뮐러 작, 박정의 연출의 <특급호텔>이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다.”라는 프로그램 표지의 문구는 이 공연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특급호텔>에서 진정 망각의 문제를 다루었는가? 우리에게 하나의 문제 의식을 심어주거나 다시 환기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과, ‘망각’이라는 현상 자체를 다루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특급호텔>의 현재는 내내 역사적 과거 그 당시에 머물러 있었다. 즉 당시의 개별화된 고통 안에만 머물러 있었을 뿐 정치  사회적 의미의 ‘망각’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프로그램의 문구는 우리의 망각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극에서 이 ‘망각’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홍보 문구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 문구가 극의 주제 의식을 반영했다기보다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화두로 던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바로 그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공연이 왜, 지금 이 시점에 유효하며, 우리는 왜, 지금 이 시점에 이 공연을 보았는가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사실을 다루는 작품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실제 진행되었던 극의 내용보다도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다”라는 문구의 내용이 지금 현재의 시점에 더욱 유효해 보인다. 여기,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잊게 된다. 진실에 맞서 거짓을 외치는 것 만큼 외면하거나 망각해 버리는 일 역시 하나의 폭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첨예하고 명백한 대립만이 존재하였던 이 공연 안에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또 하나의 폭력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어려워 보인다.
<특급호텔>에는 네 명의 여인과 다섯 명의 일본군이 등장한다. 일단 등장인물의 구성만 보아도 극의 갈등 구도가 어떤 식으로 형성될 지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명백한 대립 구도는 위안부 문제를 전체적인 시각으로 조망하기 어렵게 만들 소지가 있다. 네 여인은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 그들의 고통과 감정 등에 대해 관객들에게 직접 들려주기도 하고 그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일본군들은 그들의 내밀한 정서나 상황을 보여주기보다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표상적 존재로만 그려진다. 카미카제에 동원된 어린 조종사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펼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하나에 국한되어 있으며 주된 이야기의 흐름이기보다는 여인들의 이야기에 편입되는 부수적인 형태였다. 그 외의 일본군, 즉 극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은 어떠한 상황, 조건, 혹은 폭력성을 시각화하는 일종의 상징물처럼 등장한다.
아울러 극의 메인 플롯은 크게 두 가지 구조로 진행된다. 하나는, 여인들 각자의 이야기와 여인들 간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링 식의 대사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납치와 감금, 강간과 성적 학대, 등의 가장 끔찍한 내용들은 모두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되었다. 이것은 효율적인 전달과 거리감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설명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구조는 지금-현재에 진행되는 사건으로서 나타났다. 금순의 탈출 시도와 실패, 선희의 자살, 그리고 일본의 패전으로 빠르게 이어지는 일련의 현재적 사건들이 결말 부분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무대 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회전 설치물은 나선형으로 이어진 길의 모양이었다. 이 굴곡진 공간은 역사적 굴곡을 상징하는 동시에 쳇바퀴 돌 듯 이 안에서 맴돌 수 밖에 없는 위안부 여인들의 삶을 상징한다. 이 뛰어난 장치는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은 내내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네 명의 여인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 삶의 고단함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미적 표현 효과를 높이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이 설치물을 360도 회전시킴으로써 장면을 전환시키기도 하고, 사건을 진행시키기도 하였으며, 배우들의 동선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공간감을 확대시켜주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여러 번 이 설치물을 돌리는 과정에서 극의 중반 이후부터는 일종의 식상함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런 이유로, 극의 최고조에 이르러서 설치물이 빠르게 돌아가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에도 이미 그런 장면이 나타나리라는 사실이 쉽게 예측되었기 때문에 그 효과가 반감되었다.
즉 전체적으로 볼 때, <특급호텔>은 몇 가지 탁월한 연출 기법들이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의 흐름은 위안부 여인들과 일본군의 대립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러한 명백한 흑백 구도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를 “절제된 시적 언어”―이 역시 프로그램 상에 그렇게 설명되어 있었다―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물론 진정 그것을 절제된 시적 언어로 부를 수 있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심지어 지나친 흑백 구도는 위안부 문제를 그들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게까지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이들이 공연을 보여주고 있는 바로 이 곳, 서울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미국인 작가 라본 뮐러에게, 혹은 이 공연이 상연되었던 제3국 어딘가의 관객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제를 접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국임에도 이미 이 문제에 많이 익숙해져 버린―그렇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익숙해져 버렸다― 사람들에게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데만 머문다면, 과연 삼 년에 걸쳐 계속 공연이 이루어질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공연이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였던 것일까?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위안부 여인들에 대한 동정―동정과 공감은 다르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동정 속에는 우리가 저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위안이 포함되어 있다―을 느끼는 데 그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진실로 이 문제가 함의하고 있는 역사 정치적 문제들과, 이를 좌시하고만 있었던 망각 또는 외면의 문제를 직면할 수 있었던가?
누군가가 이 문제에 관한 한 진실로 자기 반성적인 의미로서의 ‘망각’을 다루고자 한다면―이 공연에서 적어도 프로그램의 주요 문구로 다루고 있으므로―, 결국 지금의 우리에게 이 문제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이 문제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특급호텔

 연출: 박정의
극단: 극단 초인
공연기간: 2.25-3.6
공연장소: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특급호텔>
                                                                                                이용은(성신여대)
 
박정의 연출의 <특급호텔>은 제목부터 매우 아이러니한 감정을 전달한다. 이 작품은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성적 대상물의 역할을 했던 한국인 정신대의 이야기를 라본느 뮐러가 쓴 글에 기초해 박정의가 연출한 공연이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특급호텔'이란 말인가? 인간으로서 최악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행위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특급호텔' 이라는 용어가 될 것이다.  
 무대는 경사면으로 구성되었고 배우는 꽤 높은 경사면에서 대사를 하는 무대였다. 정신대 여성들이 서 있는 경사면은 그들이 처한 궁경과 불안한 위치를 대변하는 상징적 장치로서 효과적이었다. 경사면 이외에 별로 강조해서 언급할 것이 없을 정도로 무대는 매우 간단했고 무대의 힘은 여배우들의 대사의 힘밖에 없었지만 공연은 단조롭지 않은 느낌을 전달했다. 바로 극을 이끌어가는 서사의 힘이 단단하며 단조롭지 않은 정신대 여성들의 내면사를 풀어놓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정신대를 무대로 했지만 그곳이 정신대라고 환기할만한 무대배경과 장치는 전무했다. 그러나 사실적 무대장치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경사면에 선 여배우 네명은 그곳에 끌려오게 된 스토리를 말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성적 경험에 대해 토로하고 그곳에서 도망갈 자신들의 생각을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 전달내용이다. 특히 이들의 이야기의 특별함은 정신대에 관한 공식적인 이야기, 거대서사가 아니라 미시적 서사, 정신대에 관련된 그들의 사적인경험들이 중심이 된다. 다른 데서는 들을 수 없는 정신대에 속한 이들의 내적이고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은 단지 정신대의 참혹함에 치를 떨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여성들, 어느 다른 여성들과 다를 것 없는 여성들의 내면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보다 더 그들의 아픔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서사 방식은 매우 효과적으로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미시적 서사를 풀어내는 한가지 방식은 시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정신대 여성 중 한명이 정신대에 끌려오게 되기까지의 시골집에서 겪은 일, 즉 일본 경찰이 집을 찾아오고 할아버지가 그녀를 데려가게 하지 못하게 하려고 경찰과 맞선 일과 그때 소가 음메하고 애절하고 슬프게 울던 기억에 대해 언급한다. 이때 그녀가 회상하는 과거는 시적 언어와 이미저리로 전달된다. 그녀의 과거를 환기하는 이 시적 언어는 그녀들의 현재적 궁경과 대비되어 그녀들이 처한 상황을 보다 비극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미시적 서사가 관객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또 한가지 이유는 놀랍게도 이들의 서사속에 정신대에서도 '사랑'의 필요, 혹은 '사랑'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정신대의 한 여성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군인이 있다면서 그가 전쟁에서 살아돌아오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여성은 어떤 군인의 성적 행동을 일종의 애무로 받아들인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정신대라는 집단으로 보면 거기에는 어떤 감정도 배제된 성행위만 있을 것 같지만 그들이 살아있고 몸과 감정을 가진 인간임으로 인해 그 비인간적인 상황속에서도 진솔한 감정의 일면이 꿈틀거릴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정신대와 사랑이라는 서로 연결될 수 없어 보이는 조합이 가능함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신대에 속한 사람들이 진정한 사람이었음을 역설한다.  
 이 여성들은 맥아더를 이야기하고 루즈벨트를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고대한다. 그리고 그 중 한 여성은 도망간다. 그리고 남은 한 여성은 절규한다. 자유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얻으려고 노력해야하는 무엇이라고. 이 작품의 결론이기도 한 이 지점에 극의 서사가 이르렀을 때 작품은 웅변이 되고 보편성을 확보한다. 자유란 단지 정신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정신대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추구해 얻어내야 할 삶의 과제라는 보편적 공감에 호소하는 극으로 거듭나며 이 극은 끝난다. 연출력이나 연기력, 혹은 무대의 여러 기법 나아가 무대효과 등이 도드라지는 작품이었다기 보다는 원작의 서사가 마음을 건드리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아직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래? - 연극 <한중록>

                                                   
                                                                                 서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연출: 이기도
극단: 인혁
공연기간: 2011.2.18~3.13
공연장소: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관람일시: 2011.3.3.


1.

 사건의 fact는 단 하나이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만에 죽었다”. 원전『한중록』과 연극 <한중록>의 극적 모티프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건은 하나인데, 진실은…
 원전『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눈에 비친 사도세자의 이야기이며, 그녀의 손으로 재구성되어 역사적 사실인양 소비되었다.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 맞다. 다만, 사실을 기록한 그 역사 속에도 사관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어, 기록자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뿐이다. 연극 <한중록>은 이 8일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혜경궁 홍씨의 목소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한중록』에 쓰인 빼곡한 문자들 틈새에서 미끄러져 놓쳐버렸던 행간의 의미들-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는 냉혹한 세계에서 펼쳐지는 음모와 배신 등. 연극 <한중록>은 원전의 행간 사이의 미세한 결들을 따라가며 8일 간의 역사적 사실을 혜경궁 홍씨의 시선으로부터 해체시켜 나가는 작업이다. 이것 역시 역사적 사실을 다른 시선으로 재구성한 것이자, 새로운 해석인 셈이다.
 연극 <한중록>의 작가가,『한중록』의 혜경궁 홍씨를 들여다보는 것은 이 극의 구성만큼이나 흥미롭다. 사도세자를 혜경궁 홍씨가 들여다보고,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연극 <한중록>의 작가가 들여다보고, 다시 그것을 관객들이 들여다본다. 역사적 사실은 하나이지만,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층적이고 중층적으로 겹쳐있어, 얼마든지 이야기는 새롭게 쓰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이야기와 해석 중에서 우리는 그 어느 것에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만 유의하면 된다.  


2.
 
 무대는 단출하다.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무대 위를 덮은 흰 종이, 그리고 이 극의 중요한 오브제 중에 하나인 뒤주이다. 무대 위에서 혜경궁 홍씨 역을 한 배우는 구슬픈 해금소리에 맞춰 슬픔을 몸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몸’이 아니라 ‘발’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발은 혜경궁 홍씨의 손을 연극적인 기호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녀의 발은 먹물을 묻힌 붓이 되어 흰 종이 위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다. 그녀가 쓰는 것은 물론 『한중록』일 터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러한 ‘쓰는 행위’는 지아비를 잃은 슬픔을 승화시키는 표현인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극 종반에 다시 그 의미가 드러난다.  
 뒤주는 공연이 시작되고부터 끝날 때까지, 무대 한가운데에 ‘중심을 잡고 있다’. 뒤주는 이 극의 중요한 소재이자, 과거의 세자와 현재의 세자의 처지를 유비해주는 도구로서, 관객들로부터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오브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또한 그것은 흡사 역사적 사실의 무게만큼이나 중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경호원을 대동한 남녀가 관객석에 착석하면, 조명은 꺼지고 무대 위의 공연은 시작된다. ‘살인’이라는 사건이 촉발되면, 무대 위의 공연은 과거의 사도세자의 이야기이며, 관객석의 남녀는 현재의 사도세자와 그의 빈인 혜경궁 홍씨라는 것이 드러난다. 살인을 저지른 현재의 세자는 극장 안에 갇히게 되는데, 이로써 무대 위에는 2개의 뒤주가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무대 중앙에서 현재의 사도 세자에게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주는 상징적 물적 존재로서의 뒤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온갖 배신과 추잡한 음모가 들끓지만 갇힌 존재이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극한의 외로움을 주는 극장이라는 뒤주이다. 이에 따라 무대 위에는 과거의 사도세자를 현재의 사도세자가 바라보는 시선과, 현재의 사도세자와 그의 빈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형성되어 이중의 프레임인 극중극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2일째부터 7일째까지의 무대는 현재의 세자가 갇힌 공간인 극장이다. 배우와 관객이 떠난 텅 빈 극장 공간은 한없이 쓸쓸하고 어둡다. 이때 세자에게 주어지는 텔레비전은 뒤주와 함께 이 극에서 중요한 오브제가 된다. 극이 중반을 넘어 긴장감이 고조됨에 따라 세자의 심리상태도 극도로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이는 텔레비전의 치지직 거리는 음향적 효과와도 맞물린다. 5일과 6일째의 장은 영상이 잡히지 않는 텔레비전의 치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암전되는데, 이는 언뜻 보기에 세자의 심리 상태와 정신 상태를 표현하는 듯하다. 그러나 극이 종반으로 치닿을수록, 텔레비전은 이 연극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온갖 배신과 권력 구도, 정치적 역학관계를 모두 쑤셔 넣은 판도라의 상자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자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 장례식 장면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한다든지(4일째), 혜경궁 홍씨와 그녀의 父의 음모였음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텔레비전의 음향과 동시에 암전이 된다든지(5일째), 배우를 통해 이 모든 것이 혜경궁 홍씨 부녀의 음모라는 것을 알게 된 세자가 추악한 진실을 밝히고자 결심하는 장면(6일째)에서, 수신이 되지 않는 텔레비전의 영상과 치지직 거리는 음향 효과는 이 모든 복잡한 관계를 한 번에 제시해 주는 듯하다. “배우가 거짓을 말하고 인간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거기에 대한 답은 ‘다시 1일째’에서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다.
 무대 만큼이나 의상도, 소품도, 무대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절제되어 있다. ‘최소한의 무대로 최대의 효과를’ 이라는 말이 맞아떨어질 만큼, 무대와 소품, 의상의 활용도는 높아 보인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특히 세자를 연기한 이동혁의 광기(?)는 극적 긴장감을 전달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무대 위의 절제가 너무 지나친 탓이었을까?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가끔씩 감정의 절제가 느껴진다. 감정의 휴지를 주지 않고 대사를 서둔 탓에, 몇 군데에서 인물의 감정을 놓쳐버린 부분이 아쉽다. 그것은 아마도 그날 배우들의 컨디션 난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자의 母의 등장으로 세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며 체념하는 장면은 이 연극에서 비극이 가장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母의 역할을 한 배우의 대사처리가 미흡한 탓에 인물의 비극적 상황과 감정에 동화될 수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3.

 원전 『한중록』은 8일 간의 기록이지만, 연극 <한중록>은 ‘7일 그리고, 다시 1일’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일은 현재의 세자가 뒤주의 공간인 극장에 갇히는 극적 긴장감으로부터 시작되며, 2일부터 7일 간의 구성은 그 동안의 사건이 모두 혜경궁 홍씨 부녀가 꾸민 짓이었다는 전모가 드러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1일째와 같은 극중극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무대 위에는 흰 종이가 깔려있고, 세자는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 과거의 혜경궁 홍씨는 세자의 죽음을 슬픈 듯 연기하며, 현재의 혜경궁 홍씨는 객석에 착석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 그러나 1일째에서 함께 관극했던 세자는 없다. 다만, 세자의 빈자리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날짜가 지난다는 것은 분명히 어제와 다른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똑같을 수도 없다. <한중록>의 '‘다시 1일’은 새로운 내일이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이며, 연극의 연출가 역시 혜경궁 홍씨이다. 이것은 혜경궁 홍씨의 기억이 주조해 낸 이야기이며, 역사이다.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도 않은 혜경궁 홍씨의 목소리, 그대로의 이야기이다. 불행히도 기억은 권력을 가진 자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을 공유하느냐, 아니면 거기에 의심을 품어 새로운 역사를 볼 것이냐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한중록>의 작가는 혜경궁 홍씨의 기억을 무조건 추종하지 말고 무심코 놓친 미세한 결들을 볼 것을 주문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세자가 혜경궁 홍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당신은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라는 말은 원전의 “당신은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 혼자 살기로 하였거니…”라는 말보다 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해금 소리와 함께 구슬프게 울던 ‘제 1일’과 ‘다시 1일 째’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신화 공간에서 현실 공간으로

원작: 동이향
연출: 성기웅
극단: 극단  신기루만화경, ㈜이다ENT
공연기간: 02.10-02.27
공연장소: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2관
관람일시: 2월24일 목요일 8시.


공연리뷰 『해님지고 달님안고』
-신화 공간에서 현실 공간으로

                                                                     장현주(컬처 디자이너) 2004flower@naver.com


한국 창작극의 지형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는 두 젊은 연출가와 극작가가 겨울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한다. '삼등병'과 '조선형사 홍윤식', 그리고 근작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서 구조적 세밀함을 가진 극작과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는 성기웅과 우리말의 운율과 깊이 있는 은유를 사용해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가는 동이향이 만난 연극 '해님지고 달님안고'는 몽환적인 신화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몇 해 전 국립극장 창작공모에 가작 당선된 희곡이기도 한 이 작품은 동이향이 대학시절 구상을 시작한 이후 애착을 가지고 다듬어 왔고 영화 속에서 더욱 친숙한 배우 오달수가 자신의 극단 ‘신기루만화경’과 함께 연극 복귀작으로 선택한 의미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이들의 만남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작은 오래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사실 “해님지고 달님안고”는 비교적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극 사이사이에 꿈과 현실을 섞어 놓아 과거와 현재,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공간을 만들고 있지만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은   세상과 고립된 채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가는 여자아이가 가부장적 구속과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성장의 몸부림이다. 여기에 도깨비들과 과부댁이 등장해 무거운 흐름에 리듬감을 실어주고 현실적 공간을 몽환적이고 신화적 공간으로 탈바꿈 시킨다. 아이가 겪는 가부장적 억압과 성장의 혼돈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도깨비와 과부댁 등의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은 외적으로는 관객에게 웃음을 주지만 내적으로는 시간을 공간으로 치환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환타지적인 요소인 도깨비의 등장은 현실공간을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신화적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해님지고 달님안고” 속에는 네 가지 공간이 존재한다. 아버지의 공간과 도깨비들의 공간 그리고 아이의 공간과 과부의 공간이다. 이 네 개의 공간들은 서로의 과거일수도 미래일수도 있는 모습으로 이정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면서 운명을 시험한다. 인간의 세계와 멀리 떨어진 곳, 오히려 도깨비의 세계와 더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린 딸이 있고 남편에게 버림받고 쫓겨나 도깨비와 어울려 살아가는 과부댁이 있다. 기억이 없어 슬픔도 없고 배움이 없어 꿈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아이는 본능적으로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고 아비는 그런 딸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 눈을 멀게 만든다. 결국 딸에게 죽임을 당한 아비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도깨비처럼 떠돌고 아이는 어미의 모습을 한 과부에게 잠시나마 의지하지만 과부댁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고 도망치고 과부는 도깨비에게 끌려가 죽은 아이의 아비와 혼례를 치른다.  
이처럼 신화적 공간에서 시간의 연속성은 공간의 연속성으로 대치되어진다 시간이 아닌 의미공간의 연속성 때문에 신화는 허구이자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오늘날에도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역사 또한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단절의 연속성과 상관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연출가 성기웅이 이 희곡이 가지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애쓴 노력이 보이는 것이다.

“해님지고 달님안고”를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였다. 개인의 성장통을 오이디푸스 신화에 빗대어 풀어낸 연극은 많이 있지만 동이향의 “해님지고 달님안고”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정황을 거울 속 풍경처럼 뒤바꿔 놓고 있다. 아들이 아닌 딸이 아버지를 죽이고, 두 눈을 버리고 세상을 등진 게 아니라 두 눈을 되찾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님지고 달님안고”는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오이디푸스 신화’라고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나왔지만 오늘날에는 철학적 의미를 가진 개념이 되어버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제 사랑이 아닌 존재를 위한 선택이다. 선(先)존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살부(殺父)’는 필수가 된 것이다. “해님지고 달님안고‘는 존속살해라는 끔찍한 상황을 꿈이란 도구를 통해 시적으로 처리함과 동시에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해님지고 달님안고‘는 시적 대사가 주는 은유와 섬세하면서 거친 몸짓이 만들어 내는 상징으로 가득 찬 숲 속을 거니는 듯한 연극이다. 하지만 작은 몸짓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 큰 흐름을 놓친 듯한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한 이유때문인지 극적 긴장감이 시종일관 동일한 강도로 유지되어 극의 몰입도와 완성도가 조금 미흡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화의 틀을 빌려 왔으나 결국 원형에는 다다르지 못한, 극 중에 나온 것처럼 보름달을 결국 다 삼키지 못하는 용과 같은 연극이라 할까? 신화 속의 용에게 처녀제물이 필요했다면 “해님지고 달님안고”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일견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아이가 얻은 육체적 성장 뒤에 가려진 정신적 성장의 불일치는 어쩌면 물질적 풍요를 따라잡지 못한 정신적 풍요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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