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살풍경

장코폴로 2009. 10. 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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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풍경(殺風景)

                                                           송 재 소(성균관대 명예교수)

살풍경이란 말은 ‘풍경을 죽이다’ 또는 ‘풍경을 감소시키다’는 뜻으로, 분위기에 걸맞지 않는 행동이나 풍류를 모르는 사람의 엉뚱한 말과 행동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썰렁하다’는 말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용어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잡찬(雜纂)」이란 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제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휴대폰 소리

●유춘중재(游春重載): 봄놀이 가면서 (먹을 것을) 잔뜩 싣고 간다는 뜻인데, 봄 경치를 즐기려 가는 것인지 먹고 마시기 위하여 가는 것인지 모를 이런 나들이를 살풍경하다고 규정했다. ●태상포석(苔上鋪席): 이끼 위에 방석을 깐다는 뜻으로, 바위에 나있는 아름다운 이끼 위에 방석을 깔고 앉는 사람의 멋대가리 없는 행동을 살풍경하다고 했다. ●월하파화(月下把火): 달 아래에서 불을 밝힌다는 것인데, 환한 달빛 아래에서 등불 또는 횃불을 밝힌다는 것은 풍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의 행동임에 틀림없다. ●기연설속사(妓筵說俗事): 기생 잔치에서 세속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기생이 있는 흥겨운 잔치 자리에서 분위기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해서 좌중을 썰렁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살풍경한 장면이다. ●자학소금(煮鶴燒琴): 거문고를 불태워 학을 구워먹는 것으로 살풍경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천년을 산다는 학은 고고한 선비의 상징이고 거문고는 이러한 선비의 둘도 없는 짝이다. 그런데 거문고를 태워 학을 구워 먹다니…

이상은의 ‘살풍경’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후대에 이 살풍경의 목록이 추가되었다. 황윤교(黃允交)는 ‘속살풍경(續殺風景)’이라 할 수 있는 글에서, 북치고 나팔 불면서 즉 풍악을 잡히며 산을 유람한다는 고취유산(鼓吹遊山), 소나무 숲에 측간을 만든다는 송림작측(松林作厠) 등을 살풍경 목록에 추가했다. 또 이런 항목도 있다. 명산벽상제시(名山壁上題詩)로, 이름난 산의 절벽에 시를 써놓는 행위를 살풍경하다고 했다. 자기가 왔다 갔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아니면 자기의 시재(詩才)를 과시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경치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강산 만폭동 자라바위 위에 새겨진 ‘조선의 영광 민족의 자랑 김정일’이란 붉은 글자에 비하면 훨씬 덜 살풍경하다.

살풍경한 장면은 오늘날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중국 사천성 미산현(眉山縣)에는 소동파(蘇東坡) 삼부자를 모신 삼소사(三蘇祠)가 있는 탓에 ‘삼소주(三蘇酒)’란 술이 있고 ‘동파독서실(東坡讀書室)’이란 간판도 눈에 띤다. 하지만 ‘동파사료(東坡飼料)’란 상표는 분명 살풍경하다. 다산(茶山)이 유배되었던 전라남도 강진 읍내에 있었던 ‘다산 다방’도 말할 수 없이 살풍경하다.

풍경을 살리는 풍류와 낭만을

어디 그 뿐이랴. 맞선 보는 자리에서 부동산 얘기만 늘어놓는 철없는 예비신랑, 음식점에서 매운탕을 시켜놓고 ‘맵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점잖은 양반, 데이트 중에 군대 얘기에만 열을 올리는 씩씩한 젊은이의 행동 또한 현대판 살풍경의 한 예로 기록될 만하다. 뭐니 뭐니 해도 오늘날 가장 살풍경한 것은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휴대폰 소리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엄숙한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멜로디의 휴대폰 신호음은 이 시대 최악의 살풍경이라 할 만하다.

팍팍한 도시생활 속에서 우리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 수는 없을까? 풍경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살리는 풍류와 낭만이 다시금 아쉬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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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재소
· 성균관대 명예교수
· 전통문화연구회 이사장
· 저 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