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세월이 흐를수록 야박해지기만 합니다. 아이들 기르기가 두려워 시집가지 않으려는 처녀들이 늘어나고, 시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남편과의 이혼도 사양하지 않는 세태로 변해가고만 있습니다. 이유야 없지 않겠지만 이혼율이 급증하는 것은 결코 행복하거나 화목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의 반증임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다산은 아들 여섯과 딸 셋을 낳았지만, 모두 잃고 아들 둘과 딸 하나만 장성해서 남혼여가를 시켰습니다. 둘째 며느리 청송 심(沈)씨는 대단한 명문집안의 후예로 1800년 봄에 15세의 다산 둘째 아들 학유(學游)에게 14세의 처녀로 시집을 왔더랍니다.
심씨는 신혼의 즐거움과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나라와 집안에 큰 일이 일어나 편할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시집오던 여름에 정조대왕이 갑자기 붕어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우면서 다산 집안에도 화색(禍色)이 완연한 실정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801년 연초부터 이른바 '신유옥사'라는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 다산 3형제가 감옥에 갇히고 국청이 열려 다산은 경상도 포항 곁의 장기로 귀양가자 심씨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사정을 다산은 「효부심씨묘지명」이라는 글에서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신유(1801)년 봄에 나는 영남으로 귀양갔다가 겨울에 강진으로 옮겨가고, 16년이 지난 병자(1816)년 8월 10일 효부는 죽었고, 죽은 지 3년째인 1818년 가을에야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그 며느리의 묘에는 이미 풀이 우거져 있었다.…”라는 내용이 그때의 정황이었습니다.
다산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시어머니 홍씨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며느리는 유순하고 침착하며 삼가하는 행동을 했는데, 친정어머니처럼 시어머니를 섬겼고 친정어머니 사랑하듯 시어머니를 사랑했다(事姑如母 愛姑如母)”라고 하더랍니다. 귀양가버린 남편 때문에 홀로 지내는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섬기고 사랑했다니 그런 효부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1년도 함께 지내지 못한 다산은 며느리를 알 수 없었지만 함께 자고 먹으며 17년을 지낸 시어머니의 말이니 믿지 않을 수 없다면서 효부인 며느리의 슬픈 사연을 다산은 글로 남겼습니다. 시집오면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소생도 없이, 시아버지의 귀향도 보지 못하고 떠나간 며느리를 슬퍼하던 다산의 심정이 드러나는 글입니다.
다산은 다른 글에서도 시어머니 섬기는 방법은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여겨주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만 여겨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며느리들이여, 집안의 화목과 평화를 위해서 제발, 다산의 주장에 귀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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