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요 반세기 | ||
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의 맹세’를 외우고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 데 초개로구나”의 곡조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했다. 오랑캐란 그저 나쁜 놈을 가리키는 말로만 알았지, 중국 사람이 주변 민족을 깔보는 뜻으로 쓰는 용어라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더구나 동쪽 오랑캐[東夷]인 우리가 중국 사람을 오랑캐라고 부르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따질 형편도 아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물레방아 도는 내력」에는 “낮에는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에는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라는 가사가 있는데, 길쌈은 김매기가 아니라 모시나 삼베, 무명 같은 옷감 짜기를 가리키므로, 이것은 농촌을 모르는 사람이 지은 농촌사랑노래였다. 서부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유행한「카보이 아리조나 카보이」의 ‘카보이’는 자동차의 조수가 아니라 당연히 소 모는 목동(카우보이)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고마우신 리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를 배우고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을 단체관람했다. 노래에서는 왜 ‘리승만’이라 부르고 영화에서는 왜 ‘이승만’이라고 썼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러다가 4·19와 5·16을 겪으며 ‘혁명공약’을 외우고 음악 시간에 흑인 노예의 노래인 「켄터키 옛집」을 배웠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찾아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과연 그 후 몇십 년을 나는 노예처럼 어려운 시절을 빡빡 기며 살아야 했다. 여학생들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와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를 즐겨 불렀는데, 제목인 「사우(思友)」가 「동무 생각」이고 「동심초(同心草)」는 당나라 기생 설도(?禱)의 싯귀 “부결동심인(不結同心人) 공결동심초(空結同心草) 그대와는 한마음 맺지 못하고 부질없이 풀잎만 맺고 있는고”에서 유래한 것임을 나는 알 턱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대통령 작사 작곡인 새마을 노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와 함께 “머나먼 섬의 나라 월남의 달밤” 같은 반(反)지리학적 엉터리 노래가 월남 파병 덕분에 크게 유행했다.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는 그보다 뒤인 1970년대의 노래다. 대학에 들어가니 서울 사는 동급생들이 이른바 음악감상실이란 데를 처음으로 데려갔는데, 여기서 팝송이란 걸 처음으로 귀에 익히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는 최희준의 「하숙생」같은 노래가 더 친숙했지만 말이다. 대학생들도 술자리에서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와 함께 “자가용 타고 가는 놈 너만 잘났냐 전차 타고 가는 놈 나도 잘났다” 같은 구전가요도 부르고, 농활에 열심인 친구들은 「진주 난봉가」나 「한오백년」같은 민요를 부르기도 했으나,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는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잔」이나 정훈희의 「안개」가 더 인기였다. 그러고보니 릴케에 심취해 술이 거나하면 「안개」를 즐겨 부르던 선배는 벌써 세상을 뜨고 없다. 슈베르트의 가곡「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홍수」를 독일어로 가르쳐 주신, 오드리 헵번 같은 선생님도 멀리 있어 만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대략 떠올려보니, 내가 모르는 것, 내가 잃어버린 것, 내가 잘못한 일들이 연결되어 떠오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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