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한국영화 해외나들이 본격 가동

장코폴로 2009. 2. 22. 10:30

◆1987년


 한국영화 해외나들이 본격 가동    

 

 백영호 작사, 작곡 이미자 노래의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186곡의 가요들이 족쇄에서 풀려난 87년은 판매금지 도서 431종도 판매금지 해제가 되었다. 7월부터 영화 수입이 전면 개방되고, 편수 제한도 풀렸다.

 1987년은 임선 감독의 『돌쇠의 바람』에서 김청기 감독의『슈퍼 홍길동』까지 89편이 제작되었다.34편이 멜로드라마로서 전체의 39%에 해당된다. 시대극이 17편, 청소년물 15편, 청춘물 8편 등이었다. 

 정지영 감독의 『거리의 악사』와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선두를 치고 나가는 가운데,『이브의 건넌방, 변장호 감독』, 『레테의 연가, 장길수 감독』.『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감독』,『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이규형 감독』,『성, 리수일뎐, 이석기 감독』,『연산일기, 임권택 감독』,『감자, 변장호 감독』,『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송영수 감독』이 영화진흥공사가 뽑은 좋은 영화에 뽑혔다.

 제23회 한국백상예술대상, 제7회 영평상,제 4회 금관상영화제, 제13회 한국청소년영화제, 제26회 대종상영화제등이 치러진 87년 최고의 스타는 강수연 이었다.

 한국영화 흥행 톱은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이었고, 외국영화 흥행 톱은 하명중영화제작소가 수입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이었다.『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제2회 동경영화제에서 Fipresci상(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다.

 특히 구수한 입담과 현학적 수사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던 장영일 감독은『지옥의 링』이란 이현세의 작품을 영화화했다. 장 감독은 언제나 앞서가는 사고방식과 깊은 이해심은 자기의 것을 악착같이 챙겨야하는 영화작업에 실이 되고 말았다.

 『물망초』의 이미례 감독은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유감독님 조수인 나를 잘 따라주었던 감독중의 하나이다. 내가 관여되는 세미나나 기타 행사에 시샘 내듯 따라다녔다. 영원히 소녀로 남아 있을 것 같던 이 감독에게서도 염문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박철수 감독의『안개기둥』과 김정옥 교수의『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는 당시 상황으로 파격적 실험성을 띈 작품으로 평가된다. 강수연의 베니스영화제 수상으로 탄력을 받은  한국영화는 점차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게 되었고, 이후 한국영화 감독들의 연출 스타일과 소재 선택 등도 바뀌어 나갔고, 영화 환경도 민주 리듬을 타고 있었다.

 정지영 감독은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장석용은 김호선 감독의 조감독으로 중앙일보 미주 특파원으로 있던 안병선과 같이 가볍게 조인트 미팅을 하고 있었다. 정 감독의 부인은 히 신일고 앞에 호프집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조감독들은 그곳을 가끔 들리기도 하였다.

 수입영화들은 대개 미국(63편)이나 홍콩영화(25편)였다. 이외 프랑스/6편, 이태리,영국,대만/각 2편, 호주/1편이었으니 영화적 다양성이 무시되고 미국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화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시나리오 사전 심의제도가 9월1일부터 폐지되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미션』,『내추럴』,『로보캅』등의 영화가 기억되는 한 해였다.  소극장 393개를 포함 673개의 극장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 또한 당시 최고의 수출가로 판매된 작품은 『씨받이』로 4만 달러였다.

  『씨받이』는 제44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에 이어 아․태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프랑스, 낭뜨에서 벌어진 제9회 제3대륙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상,최우수의상상,최우수셋트상을 수상했다.

 박종철을 비롯한 젊은 대학생들의 죽음은 민주화를 위한 디딤돌이 되었고 영화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부터의 본격적 영화운동이 이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영화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