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화산고』와 『야인시대』
73년 1월 20일은 나의 고교 졸업일 이다. 쓸만한 강당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학교는 작고 졸업생수는 많아서 부득이 같은 재단의 한양대 강당에서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재수생이 될 맹랑한 나를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 미숙(Mee Agnor), 숙부가 축하해준 자리였다.
당시 대개 그러했듯 중국집에서 간단히 자장면이나 짬뽕 먹는 것이 요즈음 피자나 스파게티 먹는 것과 동일시되던 때였다. 우리 집 앞 광주일고 출신의 재수생은 형의 인테리어를 돕고 있었고, 동네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르바이트로 학원에 다니는 애들이 많았다. 편하게 학원비 받아가며 다니는 애들은 우리 주변에 많지 않았다.
나의 재수는 상아탑 학원에서 이루어 졌다. 나는 기도라는 것을 했는데 아이들 수강증 검사나 청소, 학원 전단지 뿌리는 일들이 병행되었다. 수강은 공짜지만 상대학원 기도들과 패싸움도 불사해야 했다. 예사로 벌어지는 일에 우리는 능숙한 조교였다.
나는 지금도 물이 무섭다. 그 당시 패싸움으로 고막이 터져 귀가 물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상아탑 학원파와 대일학원파의 싸움판에서였다. 『화산고』와 『야인시대』를 완전 짬뽕한 상황이었다.
학원기도는 다른 학원생들이 교실에서 떠들면 학원생을 대신해 선생님으로부터 터지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약간 사팔 이면서 깡마르고 날카로운 생물의 강상환 선생이던가 수강생들이 떠든다고 나를 불러 세우더니 냅다 귀싸대기를 선사하지 않는가? 참 어이가 없었다. 매집 연습하기엔 내 체구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텐데…. 임순례의 『세 친구』를 연상하면 되리라.
김재군이라는 친구는 나를 위로해 주고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끝내 그 친구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후 남대문 시장에서 사시미 뜨는 일을 업으로 삼았고, 깡다구라는 친구는 나의 일이면 무조건 돌격대로 나서던 친구였다. 해병대에 들어간다는 소식만 있었지 아직도 소식이 없다. 학원 기도 삼총사였다. 잠자리도 같이 하고 술도 꽤나 많이 먹었다. 그 중 나만 대학으로 진학한 것 같았다.
유신이 선포된 73년은 이일수의 『동반자』의 개봉을 선두로 김효천의 『승부』로 마감했다. 임권택의 『증언』(신일룡, 김창숙 주연),『잡초』(박노식, 김지미 주연), 신상옥의 『이별』(신성일, 김지미 주연), 변장호의 『비련의 벙어리 삼룡』(김희라, 윤연경 주연),『눈물의 웨딩드레스』(신영일, 오유경 주연),시나리오 작가에서 변신한 홍파의 『몸 전체로 사랑을』(하명중, 우연정 주연),미국에서 72년 귀국한 하길종의 『수절』(하명중, 박지영 주연),이두용의 『홍의장군』(황해, 고은아 주연), 최인현의 『열 궁녀』(신영일, 윤희 주연), 최훈의 『수선화』(고은아, 장동휘 주연), 최현민의 『처녀사공』(남궁원, 윤미라 주연)등이 비교적 손꼽히는 작품이었다.
73년은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영화진흥공사가 설립된 해이다. 국책영화가 만들어지고 리얼리즘영화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여전히 우수반공영화상이 존재하고 학생들의 극장출입은 정학을 뫘던 때였다. 이유는 한 때 영화관이나 중국집이 점잖지 못하게 이용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 뉴스가 상영되던 아름다운시절(?) 이었다.
국책영화『증언』은 6․ 25를 다루었는데 이 영화로 김창숙은 제20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점점 늘어나는 TV수상기 때문에 영화는 안방으로 관객을 빼앗겼고, 멜로나 액션 불문하고 저급성을 면치 못하는 영화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임권택은 『잡초』이후 연출 스타일을 바꾸었다. 73년은 『즐거운 나의 집』의 박남수와 『산딸기』시리즈의 김수형이 데뷔한 해이기도 하다. 재수시절에도 영화감상은 꾸준히 이어졌으며 특히 김수용 감독은 『섬개구리 만세』를 만들어 아동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특히 생각나는 재수생 이상득은 구룡포 아이로서 삼청동에서 호화롭게 하숙을 하고 있었고, 모 대학 총장 딸 김인숙은 연대 앞에서 치과를 하는 오빠를 두고 있어서 유세를 떨던 기억이 난다. 문막 출신의 애자라는 아이도 인숙의 성실한 향단이 역할을 잘 해낸 것 같다. 이제 『TV는 사랑을 싣고』를 해야 찾을 수 있는 재수생들, 우울한 그대들의 초상이 있었기에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 오늘을 기록해내는 내가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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