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판탈롱 시대의 세 여우의 둥지 틀기와 고3

장코폴로 2009. 1. 30. 09:27

◆1972년


판탈롱 시대의 세 여우의 둥지 틀기와 고3


 이럭저럭 밀려온 고3의 광풍은 모든 것을 입시라는 하나의 테제에 귀결되도록 만들었다. 그런 틈새에서도 한양건아들은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명문학교의 열등반 정도 되는 아이들 집단처럼 보일 우리들은 여전히 특유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모티브가 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광화문의 국제, 을지로의 파라마운트, 시청 앞 경남극장들은 젊은이들의 영화 사냥터였다. 문화재로 지정되어야할 건축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짐에 허전함과 흐릿한 추억들이 동시에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특히 국제 극장은 57년에 개관되어 85년 4월14일 『사막의 라이온』의 감동을 남긴 채 사라졌다.

 국도극장 뒤편에서 만난 한양여고생 김미현, 한․동전이 끝나고 국도극장에서 영화 한편 때린 뒤 만난 그녀는 도시 내음이 물씬 풍기는 이지적이면서도 깔끔한 여학생이었다. 짧은 만남에서 서울에서 생존하는 법칙을 약간은 배운 것 같다.

 한양대 뒤편 살 곶이 다리 근처에 살았던 그녀는 선망과 그리움이란 단어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에 의해 만들어진 만남이었지만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탓에 감수성 강한 나이에 영화처럼 결별의 아픔을 맞아야 했다. 이 아픔은 성숙을 코팅하는 옻칠이 되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를 풍미하던 세 여우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 이었다. 그들이 각각 둥지를 틀고 결혼으로 스크린을 떠날 채비를 한 것도 이 시기였다. 누님들의 모습들을 가까이 에서 보면서 우리들의 고3도 영글어 가고 있었다. 학원에 다니는 것이 유일한 공부였고 과외란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줄기차게 신문 스크랩도 하고 있었는데, 요사이처럼 정보의 홍수시대가 아니라서 영화관계 중요 기사의 대부분은 정리가 되었다.

 문희 누님(71년 10월 결혼)은 65년에 『흑맥』으로 데뷔하였고, 정임 누님(71년 1월 결혼)은 66년에 김수용 감독의『유정』으로 손미자(정희,75년 결혼) 누님은 67년에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으로 데뷔하였다. 신성일의 『어느 사랑 이야기』는 사랑이야기로 끝났고, 이원세의 『기로』처럼 영화들은 중국산 농산물처럼 밀려드는 TV의 대량보급의 여파와 매너리즘에 빠져 방향키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천재 하길종의 『화분』과 『수절』은 귀국 후 국내감독들의 타성을 은근하게 질타한 소중한 작품이다. 최하원 감독의 『무녀도』는 서울 우석대 출신인 윤정희의 끼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9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변장호 감독의 『홍살문』은 황순원의 『과부』를 영화화한 문예영화였다.

 1972년 김기영 감독의 『충녀』는 155,352명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 1위를 차지했다. 누가 김기영 감독을 흥행감독대열에서 제외했던고…. 김기영 감독은 최무룡,김승호,김지미,안성기,선우용녀,임예진,윤여정을 데뷔시킨 스타제조기였다.

 72년 11회 대종상 수상 대표작들은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인 『안중근』을 비롯하여 신상옥 감독의 『평양폭격대』,『쥐띠부인』,『작은 꿈이 꽃필 때』『며느리』,『석화촌』등이다.     이 해의 영화의 특징을 나름대로 살펴보면 김기영 감독은 여전히 ‘녀’시리즈에 탐닉해 있고, 유학파인 하길종과 황혜미는 자기만의 개성적 연출을, 신상옥 감독은 특유의 전통사극『궁녀』,『효녀 청이』,임권택은 액션영화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삼국대협』, 연기자들의 영화감독 작품인 최은희의 『총각선생』, 박노식의 『지프』,『작크를 채워라』가 개봉된 것 등이다.

 72년 초 겨울 예비고사(지금의 수능)를 치던 날, 엄청 쏟아졌던 눈, 중앙고 교정…. 지독한 검열 같던 공포의 학습시대를 지나 낭만과 꿈만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시험은 100점으로 환산한다면 90점 정도, 이후 양도규 수학선생의 합격증 배부하던 즐거운 표정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며칠 후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 시험이 있었다. 서울대 김응서 교수의 질문들이 이어지고 자동차과 학생들은 거의 합격증을 받았다.

 이 당시 어(語)자 들어가는 과목과 암기는 백%, 영어는 무슨 문제이건 풀 수 있었고, 영자신문사 기자랑 회화가 되는 이상한 학생이었다. 기본 운동이라면 별 것 빠질 것 없다는 생각에 서울대 체육학과에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건국대 법대도 낙방했다. 자만이 부른 결과였다. 부모님들에게 말만 앞선다는 핀잔만 받고 겨울을 독서로 소일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 썸머셑 모엄의 단편집, 헤르만 헤세…. 그렇게 다니길 바라던 서울대는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 사회학과에서 한 학기 ‘문화인류학’을 배우는 것으로 족하게 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