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일기 개정판>
- 제13회 서울변방연극제 공식초청작
김민승(연극평론가)
단체 : 창작집단 샐러드
작, 연출 : 박경주
공연기간 : 2011. 10. 1 ~ 10. 2
공연장소 : 혜화동 1번지, 대학로 동성고 앞 거리 및 웹 생중계
관람일시 : 2011. 10. 2
어떤 정치적 사안을 다룬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접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테면, 피해자와 가해자의 명백한 선악 구도보다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보여주는 방식 말이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 안에 다양한 세계들을 드러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란의 일기 개정판>이 내놓은 ‘균형’을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시각은 시종일관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 채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속한 세계 내에서만 유통된다. 상대 세계의 이야기가 배경처럼 깔리거나 그 세계의 일부에 침범해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섞이지 못한 채 평행선을 그리게 된다.
<란의 일기 개정판>은 두 장소에서 동시에 공연이 진행되었다. 국제결혼을 했다가 사망한 베트남 여성에 관한 퍼포먼스인 ‘란의 일기’는 야외의 오픈된 공간인 동성고 앞거리에서, 그리고 국제결혼 피해자 남성들의 생중계 토크쇼는 실내 소극장인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되었다. 양쪽의 공연은 스마트폰을 통해 생중계 되었으며, 토크쇼가 진행 중인 혜화동 1번지에서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거리에서 진행 중인 ‘란의 일기’ 장면이 실시간으로 상연되었다.
결국 앞서 말한 두 세계의 철저한 분리는 바로 연극이 상연되는 공간 자체의 배타적 분리에서 비롯된다. 여타의 연극 공연에서도 공간을 종종 분할하여 활용하기는 하지만, 그 분할이 허용되는 한계는 적어도 관객들이 현장에서 지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공간 분할은 배타적인 선택을 요구한다. 관객들은 ‘란의 일기’를 보여주는 야외 공간과 ‘토크쇼’를 보여주는 실내 소극장, 둘 중 한 장소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영상을 통해 제한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다.
결국 <란의 일기 개정판>이 이러한 배타적 선택으로부터 작품을 출발시켰다는 점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우선, 이 작품이 ‘이중의 현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때 이중(二重)의 의미는 종속이기보다는 교섭을, 교차이기보다는 평행에 가깝다. 공간의 배타적 분할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으며, 관객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 한 공간에서 동등하게 전개되고 있는 또 하나의 흐름을 내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토크쇼가 진행되는 혜화동 1번지 극장에는 관객석을 가운데 놓고 앞뒤로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여 야외의 ‘란의 일기’를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국제결혼 피해 남성들의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토크쇼 단상 바로 뒤의 스크린과 스피커를 통해 ‘란의 일기’를 함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외의 ‘란의 일기’에서도 컴퓨터와 웹 생중계를 통해 실내의 토크쇼를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 두 개의 공연은 극중극이나 극중에 상영되는 영상물과 같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는 구조가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진행되는 서로 다른 공연이며, 단지 상호교섭의 관계에 놓여있을 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두 세계의 이야기들이 각각의 현장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란의 일기 개정판>이 무엇을 보여주려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둘 때, 이러한 상연 공간의 배타적 분할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란의 일기’는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가 사망하기에 이른 한 베트남 여성의 이야기이다. 반면에 토크쇼에서는 국제결혼에 의해 피해를 본 남성들이 직접 출연하여 그들의 피해 상황과 입장을 호소한다. 결국 두 세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역전된다―1대 1의 관계로 역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관객은 물리적으로 어느 한 장소에만 속해 있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의 입장이 두드러지는 상황만 접하게 된다. 예컨대 토크쇼의 경우 대형 스크린에 또 다른 입장에 대한 이야기가 상영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관객의 시선은 현재 진행 중인 눈앞의 공연에 더욱 쏠리게 마련이다. 이것은 꽤 모순적인 상황이다. 전체 공연은 양쪽 입장을 모두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보는 관객은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 이야기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소통의 통로가 열린 듯 보이지만 실제 그 통로로 이르는 길은 매우 제한적이며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게 된다는.
다시 처음에 제기했던 ‘균형’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이 두 세계의 평행적인 진행은 어떤 방향으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가? 사실 관객들은 이 작품에서 두서없는 각종 이야기들의 노출을 보았을 뿐이다. 특히 토크쇼의 경우 서투른 진행과 때를 놓친 연출의 개입, 과도하게 보여주려 하는 데에만 치중한 상황극―이들의 서툰 연기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것 없으며 오히려 적절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들이 너무 많은 정보들을 하나의 상황극 안에 과도하게 담아내려 한 데 있다.― 등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묘한 균형은 바로 이러한 난장판과도 같은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현재의 상황 너머로 이끈다는 데 있다. 이 난장판은 뭘까? 저들은 왜 저렇게 있어야 하지? 사기 치는 결혼 중개업자, 매맞는 아내, 칼부림과 구타, 국적만 얻어서 도망간 아내, 처녀성에 대한 집착, 구시대적 결혼관……. 그러나 생각해보자. 지금 열거한 이 문제들이 비단 이주 여성과 한국인 남성 사이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모든 결혼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결국 가족 제도와 결혼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품이 관객의 시선을 이끌려 했던 저 너머, 가해자와 피해자의 혼재 속에서 드러내려 했던 저 너머는 바로 그러한 부질없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개인들이 스스로 어떤 식으로 무너져가는지, 그리고 타인의 삶을 얼마나 파괴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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