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ISSN 2093-9140 |
2011.06.18 | |
|
| |
|
오늘의 서울연극
Today's Theater In Seoul 제9호 2011. 6.18
| |
|
|
|
|
|
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
| |
|
|
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기자: 이정현 | | |
|
|
|
Review |
|
- 4중주 | 오주희 - 겨울선인장 | 김태희 - 나는야 섹스왕 | 조만수 - 디 오써 | 성유경 - 매기의 추억 | 박연숙 - 배우수업 | 서나영 - 현대극 페스티벌 부조리와 그 무대 | 이지용 | | |
|
|
|
재수록 |
|
- 이웃집 쌀통 | 박연숙 - 푸르른 날에 | 박연숙 - <고도를 기다리며>, <나는 아니야>,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 박정기 - 만선 | 박정기 - 사흘동안 | 박정기 | | |
|
|
|
정책기록실 |
|
-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9) - 예술인복지법 조속 통과를 촉구하는 예술인대회 성명서
| | |
|
|
|
|
|
안녕하십니까? 바야흐로 한 여름이 되었습니다. 뜨거운 태양만큼 연극계도 열기가 넘칩니다. 점점 많아지는 이 공연들을 어떻게 모두 기록할지 걱정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많아지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공연만큼 관객도 많아져서 그 모든 작품이 성황을 이루기를 바라고 노력해야겠죠. ‘오늘의 서울연극’은 바로 그런 꿈을 가지고 한 호 한 호 채워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일성록’을 생각합니다. 정조가 세손 시절 시작했다는 이 기록물은 ‘조선실록’과는 또 다른 우리 기록문화의 자랑입니다. 조선말 그 어려운 시절까지도 모든 것을 세세히 기록한 그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설령 형편이 여의치 않아 평가는 뒤로 미루더라도 일단 기록은 해놓아야 합니다. ‘오늘의 서울연극’은 무엇보다도 성실한 기록자의 자세를 지향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뜻에 동의하는 많은 분들의 참여와 협조를 희망합니다. 아직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미흡하지만 계속 한 호씩 이어가면서 많은 분들이 동참하게 되고, 그래서 공연을 비롯한 연극계 모든 역사를 기록하는 잡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또한 서두르지 않고 꾸준한 인내심으로 조금씩 이뤄나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연극에 대한 열정은 뜨겁지만 연극인의 삶은 녹녹치가 않습니다. 비록 ‘예술인 복지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겠지만, 이 사회가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증거라고 여기면서 그 법의 통과를 촉구합니다. 한 여름 더위에 굴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뜨거운 열정으로 도전하는 우리 연극인들입니다. 생활의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이 열정을 누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술인 복지법’에 예산 타령, 형평성 타령으로 초를 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해 다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그것이 우리 예술인 이전에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에 통과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연극 동지들의 굳센 의지와 예술혼에 박수를 보내며 이 여름 성공적인 창작활동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6월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 | |
|
|
|
지독한 사랑, 놀이 <4중주> |
|
오주희 (극작가) 연출: 채윤일 극단: 쎄실 공연기간: 2011.05.12 ~ 2011.06.05 공연장소: 게릴라극장 관람일시:
한 여인이 있다. 속이 비치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벌린채 고급안락의자에 반쯤 몸을 기대어 누워있다. 여인은 슬프고도 욕망에 찬 목소리로 독백한다. 발몽! 곧이어 노골적인 모습의 발몽이 등장한다. 그들의 서로에 대해 격정적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들끓는 모습은 무미건조한 쾌락의 삶속으로 들어온 듯 하다.
연극 <사중주>는 이인극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메르퉤이유 후작부인은 발몽자작을 지독히 사랑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조카딸인 쎄실 블랑쥬의 처녀성을 빼앗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발몽은 자신의 솜씨를 뽐내기 위해 정숙한 대통령 부인 투르벨부인을 유혹하고자 한다. 발몽에 대한 사랑과 지독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던 메르퉤이유 후작부인은 포도주에 독을 타 발몽을 독살한다. 발몽이 유혹하는 ‘쎄실’은 발몽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투르벨 부인’은 발몽의 거짓사랑에 배신감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여기서 ‘쎄실’과 ‘투르벨부인’은 극 속에 등장하고는 있지만 메르퉤이유 후작부인과 발몽자작의 역할놀이를 통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다. 두 명의 배우가 역할바꾸기, 성별바꾸기, 분장술 등을 통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네명의 인물을 극중극 놀이를 통해 보여주는데 이 연극의 묘미가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특별한 장치 없이 단지 옷을 바꿔입는 것만으로 배우들의 성전환놀이는 완벽하게 구현되고 관객 역시 그들의 역할놀이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는데 이 공연은 그 만큼 배우의 개성과 역량이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사중주>는 18세기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장편 편지소설 ‘위험한 관계’를 토대로 완성된 작품으로 영화 ‘위험한관계’ ‘발몽’ 한국영화 ‘스캔들’의 원작이기도 하다. 메르퉤이유와 발몽의 관계는 단순한 남녀관계를 넘어 성차별 문화와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반란이며 저항으로 해석된다. 서구문화에서 남성은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것을 이끌어 오고 여성은 단지 내조의 역할에만 머무는 것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사중주>는 그 틀에서 벗어나 있다. 남성역시 성적대상 오락적 대상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발몽을 조종하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까지 내몰게 되는 두 사람의 극중극 놀이속에서 메르퉤이유는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조종자이며 구경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공연을 보다보면 여자와 남자를 구분짓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소 무의미해 보인다. 메르퉤이유가 발몽으로 분하고, 발몽이 투르벨 부인으로 분하는 성별바꾸기 놀이에서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에 감은채 똑같이 추락하는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트루벨로 분했던 발몽이 “내 생각에, 난 내가 여자인 것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작 부인”라고 말할 때는 발몽 자신이 발몽이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보여진다. 이는 두 사람의 성별바꾸기가 극중극 놀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이 진행되면서 이미 현실속에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원작엔 장, 막, 지시문도 없이 대사만으로 일관한다고 한다. 이 공연 역시 쉼표없이 전개된다. 메르퉤이유와 그녀의 바람둥이 애인 발몽은 서로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 쎄실과 투르벨 부인을 유혹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제 메르퉤이유가 발몽이 되어 투브벨 부인을 유혹한다. 발몽은 투르벨부인으로 분해 그를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손길을 위태롭게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만큼 정숙하고 고귀한 트루벨부인이었지만 결국 발몽의 유혹에 넘어간다. 다시 메르퉤이유 부인은 세실로 분하고 투브벨 부인으로 분했던 발몽은 다시 발몽으로 돌아온다. 그는 수녀원에서 자란 순결한 쎄실의 처녀성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녀를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기기 위해 목졸라 죽인다. 메르퉤이유는 다시 본인으로 돌아오고 발몽에게 연극놀이를 가장해 독이 든 포도주잔을 내민다. 발몽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자신의 연극이 단 한명의 관객이었던 메르퉤이유를 지루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죽어간다. 두 사람의 연극놀이는 결국 발몽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무대 위에 홀로 남은 유일한 관객이자 배우인 메르퉤이유는 자신의 사랑이 육체의 깊은 곳 어디선가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숨을 쉴때마다 그것은 숨어 있다가 서서히 그녀를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서도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내 사랑, 암덩어리 같은.”
메르퉤이유와 발몽, 그들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들끓는 소용돌이에서 조화로운 사중주를 만들어낸다. 그들에게 성적인 행위는 하나의 언어이며 상상력이었다. 두 사람은 역할놀이에서 그 역할에 완전히 몰입되어 노골적으로 서로를 유혹하고 전속력으로 서로를 죽음으로, 혹은 고독으로 내몬다. 남성과 여성의 게임에서 <사중주>는 겉으로는 여성이 승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욕망하면 할수록 서로를 잃게 되는 샴쌍둥이의 지독한 사랑, 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연극이다. | | |
|
|
|
여름, 여름, 그리고 겨울. <겨울 선인장> |
|
김태희(고려대 석사과정) 연출: 홍영은 작 : 정의신 극단: 극단 조은 컴퍼니 공연기간: 2011.5.13~6.19 공연장소: 키작은 소나무 가변극장 관람일시: 2011.5.20
무대가 열리면, 건장한 네 남자의 야구경기가 펼쳐진다. 공을 던지는 남자의 모습은 역동적이고 숨 막히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건장한 남자들이 등장하기에 '진짜 남자이야기'가 펼쳐져야만 할 것 같은데, 그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유명한 재일교포 작가 정의신의 <겨울 선인장>은 조금은 특별한 네 남자의 성장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는 1975년 여름, 고교야구 결승전 진출을 위한 마지막 경기에서 류지는 역전 만루 홈런으로 가와키타 고교의 결승전 티켓을 따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류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나머지 친구들만 결승전에 참석하게 된다. 이들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순간과 류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야구 경기를 열기로 한다.
성장이 멈춰 버린 이들의 이야기
벌써 10년, 그들은 너무 지쳐있다. 연애 5년차에 접어든 두 남자 후지오와 가즈야는 서로 다른 연애관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만 내고 있고, 동성애자들의 거리인 2번가 술집에서 여장을 한 채 일을 하는 하나짱은 아직도 어딘가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또 대인공포증과 각종 콤플렉스 때문에 사람 만나기가 두려운 베양은 여전히 인간관계에 서툴다. 사실 후지오와 가즈야 커플의 사랑 이야기는 언제 어디에선가 한번쯤 만나본 이들의 이야기 같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부담은 언제나 뒤섞여서 큰 고민이 되고 만다.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엔 희생이 따르고 둘을 균형적으로 조절하기에는 현명함이 부족하다. 결국 이런 상황은 사랑을 위협하고 때로는 이별을, 때로는 상처를 불러온다. 동성커플이기에 이들의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하다.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가업을 이어야하는 가즈야, 지나치게 순수하게 사랑만을 바라보는 후지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가즈야가 끝내 현실에 못 이겨 여자와의 사랑 없는 결혼을 강행해도, 그게 설사 남의 눈을 가리기 위한 위장 결혼에 불과할지라도 그의 선택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 고민 끝에 현실을 선택하는 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둘의 사랑이야기가 조금 무겁게 진행이 된다면,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베양과 하나짱이다. 여장 호모인 하나짱은 등장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나짱이 여성보다 더 여성스러운 동작으로 속옷과 빨간 원피스를 갈아입고는 무대 한가운데서 화장을 하면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트린다. 이런 하나짱을 '누나'라고 부르며 챙겨주는 것은 베양이다. ‘키 작고 대인공포증에 가성포경’인 베양은 이들과 똑같은 호모지만 아직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없다. 후지오의 조언에 따라 펜팔란에 글을 써서 보낼 정도로 열심인 베양을 보면 그 순진함에 웃음이 나지만, 또 다시 대인공포증 때문에 숨어버릴 때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과……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이들의 계절은 언제까지나 여름이다. 8월에 기념일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모이는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며, 이것은 네 명의 인물이 류지가 죽던 그 여름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2년이 지나고 또 다시 3년이 지나는 동안 후지오와 가즈야 커플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하나짱은 여전히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 하며 베양도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가즈야는 평범한 여자와의 결혼을 선택하여 후지오에게 큰 상처를 주고, 후지오는 가즈야의 결혼을 최선을 다해 축하해준다. 지켜보는 이에게도 당하는 이에게도 아픔을 주는 이별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하나짱이 더 화를 내고 더 독한 소리로 가즈야를 몰아붙인다. 완고한 태도를 보이던 가즈야도 하나짱의 다그침에,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축복해주는 후지오에 의해 무너진다. 자신이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은 후지오 밖에 없다며 힘겹게 자신의 진심과 마주한다. 조금은 뻔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이지만 적절한 캐스팅과 비교적 몰입성 있는 배우들의 연기로 인해, 관객들은 가즈야의 복잡한 감정에 설득당하고 만다. 또 하나, 이 연극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실루엣 효과는 적절한 순간마다 매끄러운 감정의 전개에 많은 도움을 준다. 후지오가 안타깝게 가즈야를 바라볼 때, 가즈야가 홀로 눈물을 흘릴때,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화해할 때마다 무대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을빛의 조명이 만들어내는 실루엣.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은 조명이 만들어내는 아려한 분위기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관객들이 예측 가능한 결과에 더 너그러워지고(?) 인물들의 감정에 공감하게 만들어 준다. 이제 비로소 이들은 겨울로 나아갈 수 있다. 가즈야와 후지오 커플의 문제는 그대로이고 하나짱은 진정한 사랑과 이상을 찾지 못했고, 베양은 여전히 혼자이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서로가 있으며, 아픈 시간과 아쉬운 시간들을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젠가 함께 보았던 영화의 대사처럼, ‘용기와 희망과 약간의 돈과,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았다.
누구에게나 아픈 시간들이 있다. 세상에 나만 혼자인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가슴이 답답하고 나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연극은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이겨내라고. 묵묵히 아픔을 견디는 겨울 선인장처럼.
| | |
|
|
|
목적어가 없는 타동사, ‘욕망하다’ <나는야섹스왕> |
|
조만수(연극평론가) 연출 : 윤한솔 극단 : 그린피그 공연기간 : 5.19-5.29 공연장소 : 혜화동 일번지
윤한솔이 혜화동일번지에, 그리고 우리 연극에 불온한 에너지를 북돋우고 있다. 그가 불온한 것은 ‘섹스’라는 조금은 껄끄러운 단어를 전면에 내걸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관객이 <나는야섹스왕>이라는 이 도발적인 제목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전복시키기 때문도 아니다.
윤한솔이 불온한 것은 그가 담론 속에서 유희하기 때문이다. 그의 유희는 앞 세대의 실험처럼 담론을 부수는 전복과 조롱이 아니다. 그에게 담론은 전달되어야 할, 그리고 그것에 의해 생성되는 의미의 총체가 아니라, 놀이의 질료이다. 프로이드의 글, 그리고 프로이드와 라캉에 관한 글들, 바르트와 콜테스의 글들이 질료로 사용된다. 공연을 위해 그가 공부했던 여러 책들의 구문들이 무대 위에서 낭송되고, 받아써진다. 그렇지만 이 텍스트들은 관객들에게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이 텍스트들은 의미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의미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텍스트의 구문들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객석에서 해석하고, 하나의 구문이 다른 구문들과 만나 형성하는 새로운 의미의 전개를 파악할 수 있는 관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이 유희의 규칙은 의미의 해석과 조작이 아니다. 놀이의 규칙은 ‘부재의 조작’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로 가득찬 이 텍스트들은 무대의 시공간 속에서 그 의미가 부재하도록 조작되어 있다는 것이다. 있지만 없는 의미체,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기의는 없고 기표만 있는 담론들로 무대는 채워진다.
‘부재의 조작’을 위한 놀이로 관객은 초대 받는다. 이 놀이의 방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공간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객석과 분리된 무대의 공간은 진열장처럼 유리막이 쳐있다. 이 유리막은 기능적으로는 그 위에 글씨를 쓸수 있는 유용한 장치이다. 하지만 상품을 향한 욕망을 부추키는 진열장으로의 설정은 의미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적 설정이다. 윤한솔은 이처럼 유리막에 의해 단숨에 자본주의 내에서 주체와 그의 욕망의 관계로 관객을 인도한다. 쇼윈도우 안에서 윤한솔은 마네킹이 아니라 ‘나’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섹스를 소모하는 허구적 이야기 속에 위치하기 보다는 섹스를 욕망하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처럼 <나는야섹스왕>은 ‘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이야기이기에, 연출가 윤한솔은 무대에 ‘그’를 세우지 못하고 직접 올라간다. 두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전성현 또한 배우는 아니다. 그는 윤한솔의 최근작의 조연출이었으며, 이 작품을 공동으로 창조한 ‘나’로서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의 이 둘은 그런데 ‘나’와 ‘너’ 의 관계가 이닌 ‘나’와 또하나의 독립적인 ‘나’이다. ‘나’와 ‘너’를 이루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은 한 사람이 주어의 자리에 위치하고 다른 한 사람이 목적어의 위치에 서는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행위 즉 동사를 매개로 두 사람이 주체와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의 무대 위의 행위는 무엇인가? 그는 글을 읽거나 쓴다.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적인 것과 관련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간헐적으로 이해 가능한 낭송 구문을 통해 관객은 무대 위 인물들이 섹스를 하기 보다는 섹스에 대해 탐구하는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읽는 혹은 쓰는 행위가 섹스하는 행위를 대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섹스를 하는 것과 섹스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은 대립적인 행위가 아니라 환유적 관계에 있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나는야섹스왕>에서 ‘섹스하다’가 본질이고 ‘섹스에 대한 글을 읽다’가 시뮬라크르의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섹스’는 동사로서 타동사이다. 그리고 타동사로서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윤한솔의 ‘섹스왕’은 목적어로서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 대상을 지니지 않을 때, 그것은 욕망과 결부된다. 섹스하다는 욕망하다와 동의어가 된다. 타동사이기에 목적어가 있어야 하지만 목적어가 없는, 그러므로 ‘있으면서 없는’이 그 목적어 때문에 동사는 대상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를 강조하게 된다. ‘욕망’하는 행위는 윤한솔이 강조하듯 본질적으로 그 대상의 부재를 겪는 형식이다. 부재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 이것이 주제가 아니라, 놀이의 목적이자 규칙이다. 놀이는 원래 놀이 그 자체 이외의 목표를 지니지 않는다. 욕망하다라는 동사는 환유의 놀이 속에서 '읽다'로 '쓰다'로, 그리고 '연극하다'(play)로 옮겨간다. 무엇 때문에 이 놀이는 계속되는 것일까?
윤한솔 : 무슨 소용이죠, 쓴다는 것이? 전성현 : 그건 침묵인 동시에 말하는 것이지. 쓴다는 것, 그건 때로는 노래하는 걸 뜻하기도 해. 윤한솔 : 춤추는 것은요? 전성현 : 그것도 되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행위는 ‘지속성’을 전제로 한다. 계속해서 욕망을 추동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행위이다. 침묵이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은 부재이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부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계속되게 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존재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존재하고자 하는 행위가 바로 이 연극의, 이 놀이의 이유이다. 진열대로 향하는 욕망이 아닌 방식으로 욕망의 목적어를 한정하는 것이 힘들다. 그것은 한정되지 않고 자꾸 미끄러져간다. 쓰여진 글씨에서 낭송된 언어로 다시 덧쓰여진 글자로 이동하지만 항상 어긋난다. 이 어긋남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무대 위에 넘쳐나는 기호의 잉여와 그 불협화음이, 그리고 그 어긋남 때문에 불안해하는 주체가 드러난다. 하지만 욕망하다의 목적어로서의 타자가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 미끄러지지 않고 단 하나로 확고부동하게 고정될 때, 윤한솔은 이 연극이 교훈극이라는 재미없는 놀이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한다. 타자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단수의 주체들의 증식은 또 다른 공동체를 형성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타를 든 전성현과 템버린을 든 윤한솔은 노래한다. 그들의 노래는 처량하다. 나르시스트인 그들은 처량하며, 볼 품 없으며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 노래는 불협의 화음이 아닌 화음을 이룬다. 내가 너인 대상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완성된 의미의 생산자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끌어져가는 이 부재하는 대상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그 부재를 존재로 바꾸려하는 행위 속에서 이 복수의 ‘나’들은 보잘것없지만, 아름다움을 간직한 유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진열장 속 마네킹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는 종이왕관을 쓴 연극 속의 왕이 된다. 윤한솔은 나르시스트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에게도 나르시스트가 되기를 초대한다. 그는 타자의 자리에 관객을 놓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일한 자리, 주체의 자리로, 욕망하는 자리로 초대한다. 왕의 자리로.
이리로 와 내게로 우리는 쎅스왕 너희도 공부를 했으니 너희도 쎅스왕 이제 친구들 차례야 친구들을 데려와 다함께 노래해 나는야 쎅스왕
| | |
|
|
|
연극과 폭력 <디 오써 The Author> |
|
성유경(이화여대 박사과정) 작: 팀 크라우치 연출: 김동현 번역+드라마투르기: 손원정 출연: 서상원(작가)/ 김영필, 전미도(배우)/ 김주완(관객) 공연기간: 2011. 4.26~5.28 관람일시: 2011.5.20.8시 공연장소: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
<디 오써 The Author>는 전쟁, 학살, 강간 등의 ‘폭력’을 재현하는 이미지에 대해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디 오써>의 극중 인물인 작가(서상원 분)의 고민처럼 만약 우리가 현실 세계의 폭력을 이미지로 재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알지 못하고 결국 고통의 존재를 부정하는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이미지를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밖에서 벌어지는 잔혹행위를 멈출 수도 없고, 학대받는 이들을 보호할 수도 없다. <디 오써>의 알레고리는 이처럼 부정한 세계와 동행하고 폭력을 용인하는 ‘무심한 망막’을 건드린다. 전쟁의 상해를 입은 아버지가 딸을 가해하는 극중극 ‘파볼’처럼 세계의 폭력을 고발하는 작가와 배우는 폭력을 답습하거나, 저지하지 못한다. 관객으로 분한 김주완은 ‘파볼’의 아버지와 딸이 아닌 두 배우(김영필, 전미도 분)의 필모그래피나 연기력에 눈이 먼다. 김주완은 <디 오써>를 보러온 관객들에게 말한다. “정말 예뻐요.” “예쁘십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디 오써>의 폭력적 서사를 계속 진행하게 놔둔다. 관객은 아기처럼 예쁘고, 무지하고 무력하다. 컴컴한 좌석에 앉아 눈 뜨지 못하고 잠드는 존재다. ‘파볼’의 서사에서 ‘디 오써’의 서사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결국 관객은 부정한 세계와 동행하고 폭력을 용인하게 된다. 보는 것은 방관하는 것이다. <디 오써>의 서사적 전략은 결국 극장과 관객의 존재를 재고하게 만든다.
내가 누나와 근친상간을 범하자 아버지는 나를 골프채로 두들겨 팬다. 누나가 투신자살하고 나는 아버지를 살해한다. 일단은 선정적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이 시는 끝내 슬프다. 아버지가 누나를 꾸준히 성폭행해왔다는 사실이 시의 후반부에 폭로되면서 ‘나’의 패악이 어쩌면 더 근원적인 폭력의 반작용일 수 있음을 변호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가족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철저하게 이 비극의 구경꾼이 되고 만 “불쌍한 어머니”의 자리야말로 가장 끔찍하지 않았을까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형철, 함성호 <과자와 설탕을 실은 장난감 열차> 평
신형철의 시 비평을 그대로 인용하는 이유는 이 뛰어난 비평이 연극 <디 오써>를 가장 강렬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서상원은 본인 대사의 처음과 끝을 성적 가학증(부유탱크의 여직원과 아기를 대상으로 하는)으로 등치시킨다. 매우 선정적이지만 작가의 행위를 쭉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연극 ‘파볼’을 집필하면서 보게 된 수많은 폭력의 이미지, 더 근원적인 폭력이 버티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학살과 강간과 참수. 뭉개지는 몸과 뜯겨지는 자궁과 찢어지는 목에서 흘러나오는 핏빛의 잔혹성. ‘파볼’은 폭력의 징후이자 산물이며, 작가의 자살은 폭력을 답습하는 자기혐오와 자기변호의 마지막 비상구로 읽힌다. 아버지 ‘파볼’ 역을 맡은 김영필은 식당에서, 극장에서 난동을 부린다. 특히 “연기가 멋졌다”고 말하며 다가오는 관객 김주완에게 가하는 폭력은 <디 오써>의 점입가경이다. 김영필이 김주완을 폭행하는 상황에서 ‘파볼’을 관람했던 관객들은 마치 연극을 감상하듯이 주위에 빙 둘러서서 그저 보기만 하고 구경만 한다. 아무도 그 상황을 말리지 않는다. 폭력은 멈추지 않고 진행된다. 신형철의 비평에서 “가족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를 지우면 “불쌍한 어머니”는 바로 ‘관객’으로 대체될 수 있다. 관객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존재다. 무심한 망막의 구경꾼이다. <디 오써>의 극본은 치밀하다. 얼굴과 이름, 직업에 상관없이 너도나도 “예쁘고” “멋진” 관객들은 배우들이 폭력의 서사를 진행해도 괜찮은지 물을 때 아무도 멈추길 원하지 않는다. 극장에서 달콤한 초콜릿을 나누어 먹으며, 연극이 끝나면 박수를 치고 자리를 떠난다. 닳고 닳지 않아서 너무나도 예쁠 뿐이다. 아마 팀 크라우치는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구성했는지 모른다. 무대 없이 양 갈래로 갈라져 서로를 마주보게 만든 객석 배치와 오래 지속되지 않는 어두움. 그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수동적으로 관람해도, 졸거나 딴 짓을 해도 별 상관이 없는 관람 행위에 제동을 걸면서 이 연극을 숙고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따라서 관객에게 아기가 아닌 어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아닐는지. 극장 밖을 나가는 관객 설정과 김영필이 관객에게 팔을 등 뒤로 꼬는 불편한 자세를 시키는 것 역시 일종의 장치였을 것이다. 김영필의 욕설도, 배우들이 관객에게 박수를 치는 것도, 연극이 끝나고 연출가와 배우들이 관객을 배웅하는 것도 이 작품의 알레고리와 무관하지 않다. 관객은 폭력의 서사를 끊을 수 있다. 그런데 끊지 않는다. 극장을 나가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의 진행을 도우며 폭력의 서사와 동행한다. 맛있는 초콜릿을 먹으며 편안하게 객석에 앉아있다. 배우들의 박수와 배웅은 관객에 대한 조롱이자 비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관객을 갖고 노는 이 연극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작가와 배우 역시 관객들과 함께 객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번역은 빌둥과 같다. ―앙트완 베르만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
연극의 마지막 대사 “글이 작가를 떠나고 있습니다”를 “작가가 쓴 글이 여행을 하는 것”으로 해석한 김동현 연출가의 말에 이 작품을 다르게 해석할 힌트를 얻는다. 프랑스 번역학자 앙트완 베르만은 번역이 빌둥(Bildung)과 같다고 말했다. 성장, 생성과 같은 생명의 필연적인 과정이나 문화, 문명을 의미하는 독일어 빌둥은 번역과 매우 유사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빌둥과 번역은 모두 타자와 인연을 맺는 행위로, 타자에 대한 경험과 편력을 통해 완성된다. 그리고 경험과 편력은 여행이나 이주를 의미한다. 연극은 작가가 쓴 글이 작가를 떠나 여행을 하게 되면서, 타자와 만나 갈등과 조화를 겪으면서 완성된다. 작품은 연출가, 배우, 관객이라는 타자와 만나면서 완성된다. 연극은 작품을 넘어서서(ber) 위치시키는(Setzung) 것으로서의 번역(bersetzung)으로 해석된다. 연극이 번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유를 번역 방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해외작품의 경우 작품의 낯설음과 이질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이국화 번역을 하느냐, 아니면 국내의 상황에 맞게 자국화 번역을 하느냐의 관건은 연극의 평가를 저울질하고, 연극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이 번역을 통해 원본이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낸다고 말했듯이 작품은 연극이라는 번역을 통해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낸다. 연극을 거치면 작품의 은밀한 요소요소가 간파된다. 번역의 수행은 곧 연극의 시작이다. <디 오써>의 극중 인물인 작가는 만약 우리가 현실 세계의 폭력을 이미지로 재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알지 못하고 결국 고통의 존재를 부정하는 위험에 처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연극 ‘파볼’을 만든다. 작품은 작가를 떠나 배우에게로 가며 배우의 몸을 통해 관객에게로 간다. 그리고 서로 힘겹게 뒤엉키며 형성되는 형태(Bild)는 바로 ‘폭력’이다. 연극 ‘파볼’이 관객(김주완)에게 와서야 비로소 형성되는 것처럼 관객이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그토록 원했던 주제의식에 다다르게 된다. <디 오써> 역시 연출가의 계산대로 객석에 명암을 주고, 편안한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아기의 스냅사진과 초콜릿을 전달하고, 배우가 관객에게 다양한 질문을 하고, 관객이 함께 서사를 진행시킬 때 극장이란 안전하고 안온한 쉼터이며 관객은 폭력의 방관자일 뿐이라는 작품의 본래 의미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디 오써>는 연극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면 작품이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은 ‘폭력’을 재현하는 이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만 정작 이 작품은 ‘듣는’ 연극으로 연출된다. 이미지로 시각화되는 폭력과 재현의 연극에 대한 작가의 저항을 감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디 오써>의 번역 방식이다. 분명 윤색자는 이 작품을 우리 상황과 정서에 맞게 윤색해서 관객이 영국 냄새를 못 맡게 하고 싶었다고 언급한다. 극중 인물의 이름이나, 배우들의 필모그래피, 두산아트센터에 대한 상세한 설명 등 자국화 번역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궁금하다. 이 연극에서 테러리스트는 아랍인으로, 참수당하는 희생자는 미국인으로 설정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관객이 우리가 아는 아프간 피랍사건을 반영한 것이냐고 했을 때 연출가는 분명 아니라고 했다. 영국 작가의 관점을 그대로 옮긴 이국화 번역이냐, 윤색자의 관점을 거친 자국화 번역이냐를 따지는 사항은 매우 민감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평자가 <디 오써>에서 문화적 폭력을 감지했다면 너무 확장된 해석일까. 아무튼 이 연극의 키워드는 폭력이다.
| | |
|
|
|
대한민국 아줌마 루저들의 난장: <매기의 추억> |
|
박연숙(숭실대 교수. 철학박사(예술철학 전공) feelogo@naver.com) 극작: 장성희 연출: 최용훈 출연: 서이숙, 박남희, 송현서, 김정영, 최현숙 극단: 작은 신화 공연 일시: 2011.5. 26-6.19 공연 장소: 정보소극장 관람 일시: 2011.6.1 20:00
최근 대학로에는 네 명의 아줌마들이 눈에 띈다. 김란이 작, 선욱현 연출의 <이웃집 쌀통>이 네 명의 동네 아줌마들을 내세워 우리 사회의 양심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데 이어 장성희 작, 최용훈 연출의 <매기의 추억> 역시 사십대 네 명의 여고 동창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팍팍함을 들춰내고 있다. <이웃집 쌀통>이 마흔을 넘긴 김란이 작가의 등단 작품, <그녀들만 아는 공소시효>(2010, 한국 희곡작가협회 당선작)를 장막극으로 수정 보완한 것에 비하면 <매기의 추억>은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 장성희의 신작이라는 점과 극단 작은 신화 25주년 기념 무대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의 비교는 가능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공연을 보고 나서는 기대가 컸었다는 자책과 함께 명성과 작품의 수준이 비례하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여고 동창생들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
고교 동창 현선(김정역 분), 명자(박남희 분), 민자(송현서 분), 선민(서이숙 분)이 성자의 집에 들어서면서 극이 시작한다. 성자의 집이지만 성자는 골프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대신 가정부 연변 댁(최현숙 분)이 이들을 맞이한다. 이들은 모교를 돕는 바자회를 위해 성자의 찬조를 받으러 방문한 것이지만 귀가가 늦어지는 성자를 기다리며 성자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를 엿보고 훔치고 부러워하다 결국 연변 댁을 살해하는 어이없는 결말로 끝맺는다.
이 작품은 여고 동창생들이 모이면 의례히 그렇듯이 과거의 추억과 현재 살고 있는 형편에 대한 대화로 풀어 나간다. 전체적인 구조는 평범하다. 단편적인 수다로 시작하여 시간이 갈수록 감추려 했던 아픈 상처들이 들춰지고, 서로 간에 묵혔던 오래 전 앙금들이 튀어나오게 되어 불편한 긴장이 고조되다가 추억이 담긴 교내 합창곡 ‘매기의 추억’을 부르며 변함없는 우정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여고 동창생들인 만큼, 대학을 진학한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의 갈등이 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내 대학진학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들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과 경제적으로 모두가 아등바등 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는 점에서 이들은 여전히 동질적인 아픔 속에 서로를 위로하는 인물이 되어 간다.
가장 눈에 띄게 어긋난 인물은 명자이다. 명자는 나머지 인물과 긴장관계에 있는데, 성자의 집에 자주 와 본 듯이 가정부 연변 댁을 마음대로 부리며 부자로 행세하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열등감과 사업 실패의 수치감을 감추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한 것임이 들통 난다. 현선은 교회에 맹종하는 전형적인 여자로 간암에 걸린 남편과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틈에서 가장 힘겹게 살면서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인물이다. 아들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과부 민자는 암 수술 후 회복 중에 있으며 요가를 통해 심신의 건강에 애쓰는 인물이다.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는 민선은 초등학생 논술 학원을 운명하는 ‘원장님’이긴 하지만 대학 시절 학생운동하다 맡은 최루가스보다 분필가루가 더 독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현실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비관적인 인물이다.
여고 동창생들의 모임인 만큼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이 암묵적인 사실을 전해준다. 명자는 반짝 거리는 하얀색 니트 앙상블을 입고 있지만 어딘가 구식의 느낌이 난다. 한 때 잘 살았지만 현재에는 그렇지 못한 형편을 보여준다. 현선은 검은 바바리를 입고 있는데, 금욕적인 종교적 분위기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실내에 들어와서도 바바리를 벗지 않는 그녀가 세탁소에서 도착한 성자의 드레스를 입어보다 오줌을 흘리는 통에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 들통 난다. 구멍 뚫린 남자 속옷 차림에 녹즙 배달원을 하는 어려운 사정이 옷으로 알려진다. 민자는 인도산 튜닉을 입고, 민선은 등산복을 입고 있다.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출구가 각각 요가와 등산임을 알게 해 준다.
네 인물들의 개성과 처지가 다르다 할지라도, 이들의 대화로 이어지는 드라마는 진부할 수밖에 없다. 여고 동창생, 그들은 변함없다. 과거에는 어땠었다는 추억담과 함께, 지금은 이렇게 변해버렸다는 한탄이 연속된다. 이 예상되는 진부함을 깨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 연변 댁인데, 여느 가정부와 달리 강한 주장과 세련된 감각이 튀지만, 대한민국의 허상을 확인시켜주는 역할과 왜곡된 욕망의 출구가 된다는 점에서 변주는 되었으나 진부함을 깰 만큼 새롭지는 않았다.
25살의 극단, 한창 싱싱해야 할 때인데....
극단 작은 신화는 ‘지금, 여기, 변화하는 자유로움!’이라는 슬로건으로 처음 10년 버티기를 약속하고 창단했다고 한다. 그런 극단이 20년을 쌓았고, 또 다른 10년을 쌓기 위한 도정에 있다. 사람으로 치면 스물다섯 살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때이다. 극단의 규모로도 지금이 가장 탄탄하다. 90여명에 이르는 단원이 있고, 공동창작과 격년제 프로젝트 ‘우리연극만들기’, 워크샵 공연 등 극단 운영에 있어서도 새로운 모색을 감행하는 모범적인 연극 집단이다. 극단 작은 신화의 25주년 기념 무대로 총 네 작품이 기획되었는데, <매기의 추억>이 그 첫 작품이고, 이어서 <돐날>(김명화 작),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김숙종 작), 마지막으로 <황구도>(조광화 작)가 예정되어 있다. 이 네 작품 모두 극단 대표 최용훈이 연출을 맡았는데, 최용훈은 2010년 <왕은 왕이다>(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로 김상열 연극상을 수상한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연출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상과 경력에도 불구하고 최용훈 연출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난다. 최근 <돈주앙>(2011년, 명동 예술극장)에서도 그렇듯이 외관은 화려한데 내실이 빈약하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25주년 기념 무대로 <매기의 추억>을 선정한 데는 장성희 작가와 작은 신화의 깊은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측된다. 극단 작은 신화는 격년제 프로젝트 ‘우리연극만들기’를 통해 <길 위의 가족>(1999년, 최용훈 연출), <꿈속의 꿈>(2010년, 신동인 연출)을 장성희 작가와 함께 작업했었다. 뿐만 아니라 <매기의 추억>은 2010 창작팩토리 사업(문화체육관광부 주최)에서 우수작품 재공연 지원작으로 선정된 기대작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진부하고 지루하고 답답했다. 한 작품이 기대에 못 미칠 때는 극작과 연출 중 어느 부분의 책임이 더 큰가를 가늠하게 되지만 대부분이 공동의 책임일 경우가 많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거슬렸던 것은 드라마 전개의 비약이다. 무엇보다 네 아줌마들이 공모해 연변 댁을 살해하는데, 그 동기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연변 댁은 대한민국에 대한 환상을 품고 돈 벌어 잘 살기 위해 불법 체류한 인물이다. 극 초반에 명자가 연변 댁을 무시했던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대학도 못가고, 술집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명자이니 자격지심에 그런다고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극 후반에 갑작스런 전환으로 연변 댁을 쇼파 안쪽에 가두고 질식시킬 때는 명자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물 모두가 가세한다. 왜 갑작스런 살인 놀이가 시작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물론 연변 댁이 외출한 사이 네 인물이 성자의 물건을 쇼핑백에 담고, 성자의 옷을 입어보고 하였으나 적당히 둘러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연변 댁의 살해에는 동기도 부족하고 그 의미도 빈약하다.
이어지는 마지막 엔딩은 더 가관이다. 성자를 기다리는 중에 무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현관 출입문이 외부로부터 열리고 불빛이 쏟아지면서 그곳을 네 여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이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서서 ‘매기의 추억’ 1,2절을 모두 부르며 암전이 된다. 출구에 나타난 인물이 성자인지 아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왜 그토록 놀라는지, 왜 불빛이 쏟아지는지, 왜 갑자기 나란히 정렬하여 팔짱을 끼고 ‘매기의 추억’을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출구를 열고 들어 온 성자가 자본주의의 신처럼 받들어지는 존재라는 것인지, 매기의 추억을 부를 때 영상으로 보여 진 30년 전 사진에 위에 새겨진 글귀, “우정은 영원히”가 성자로부터 구원을 청하는 기도문인지 의문만을 남긴다. 이러한 결말을 두고 ‘열린 결말’이고,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극적 불완전성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 될 것이다.
네 인물들의 갈등이 증폭되고 해소되는 장면 역시 매끄럽지 못한 데가 많았다. 열등감에 쌓인 명자가 선민을 향해 칼을 휘두를 때 선민이 자신의 애환을 토로하고 차라리 쑤시라고, 그만 쉬고 싶다고 외치는 극적인 장면에 이르러서도, 현선이가 ‘곰 세 마리’ 노래를 변형해서 부르는 것으로 맥없이 풀어 버린다. 칼을 휘두르던 명자는 슬쩍 빠지고, 선민이가 다시 ‘곰 세 마리’를 따라 부르고, 민자까지 아들의 해외파병을 전하는 것으로 한탄이 이어진다. 결국 이 장면은 ‘매기의 추억’을 한 소절씩 나눠 부르는 것으로 맥없이 수습된다. 단편적인 한탄과 질시, 경계가 난무할 뿐 이들의 관계가 더 응집되고 발전적으로 전개되지 못하는 모습이다.
<매기의 추억>은 대한민국 아줌마 루저들의 한 단편이다. 선민이가 술을 마시며 그룹 아바(ABBA)의 ‘The Winner Takes it All’을 한 소절씩 해석하며 따라 부르는데, 이 노래가 ‘매기의 추억’보다 이 작품의 주제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기의 추억>은 아바의 노래에 미치지 못한다. 노래와 연극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The Winner Takes it All’은 서정적인 리듬 속에 루저임을 시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로 자조를 담아내고 있다. 이 노래는 최소한 실연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는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극은 루저들끼리 칼 휘두르는 난장판 속에 엉뚱한 외부인을 겨냥해 살인 놀이를 하고는 빛바랜 추억에 기대 아무런 의미도, 방향도, 위로도 주지 않은 채 서둘러 끝내고 있다.
스물다섯 살! 나이가 인생의 절정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꽃 같은 나이지만 나태와 게으름으로 보내는 사람도 있고, 시류를 따르다 지쳐 있는 사람도 있다. 극단 작은 신화의 스물다섯이 어떠한지 이 작품 하나로 평가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스물다섯이 지나 서른이 되었을 때 과거의 명성에 기대어 과거의 추억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아니기를 바란다.
1)“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할미곰, 아빠곰, 아기곰. 할미곰은 냄새나. 아빠곰은 드러누웠어. 아기곰은 싸가지 없어. 으쓱 으쓱 잘한다.” 2) 노래: I don't wanna talk 난 말하고 싶지 않아요 About the things we've gone through 우리가 겪어온 일에 대해서 Though it's hurting me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라도 Now it's history 이젠 과거니까요 I've played all my cards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고 And that's what you've done too 그리고 당신도 역시 할 만큼 했죠 Nothing more to say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No more ace to play 내 놓을 에이스도 없어요 The winner takes it all 승자가 모든 걸 갖게 마련이죠 The loser standing small 패자는 왜소하게 서 있을 뿐 Beside the victory 승리라기보다 That's her destiny 그녀의 운명이겠죠
The winner takes it all 승자가 모든 것을 얻고 The loser has to fall 패자는 떨어지게 마련인 것을, It's simple and it's plain 그거야말로 단순명료한 것을 Why should I complain. 난 왜 불평하는지
| | |
|
|
|
소통되지 않은 의미 있는 시도 <배우수업> |
|
서 나 영(평택대학교 방송연예학과) 극단 : 극단 행길 작 : 이강임 연출 : 이강임 공연기간 : 2011년 5월 12일~22일 공연장소 :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 극장 관람일시 : 2011년 5월 20일 금요일 8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고전 <배우수업>은 연극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음 직한 책이다. 아니, 읽지는 못했더라도 수차례 읽기를 시도했거나, 언젠가는 읽으려고 책꽂이에 꽂아두었거나, 그렇지도 못한 사람에게는 왠지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을 지우는 책이다. 이론가에게나, 연출가에게나, 배우에게나 소위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이라면 꼭 알고 있어야 할 상식 1호다. 그래서 이 연극, <배우수업>은 모든 연극 작업자와 관련 업종에 몸담고 있는 사람, 그리고 많은 연극예술가 지망 학생들에게는 단연 자극적인 소재로, 제목으로 궁금증과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이 기대만발의 연극 <배우수업> 속에는 공연예술가들이 한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여러 가지 고민들에 대한 화두가 숨겨져 있다. 배우가 연기를 함에 있어 가장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배역되기’의 문제로부터 감정과, 이성 혹은 육체와 심리의 이분법적 연기방법론이 이야기 되고 있으며, 또한 현대 공연예술학의 화두가 되고 있는 공연예술의 경계성의 문제까지도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과 예술로서의 연극이 그 정체성을 의심받고 있는 현실에서 예술과 인간, 연극과 연기에 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이러한 시도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멋진 시도는 공연이라는 형태로 관객과 소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먼저 너무 과도한 극적 소재의 혼재가 그러하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책 <배우수업>의 인물들과 줄거리도 다 소화해내지 못한 어정쩡한 인물들이 그 속에서 다시 자신들의 현실의 사랑과 가족, 만남과 사랑의 문제에 얽혀서 ‘뭔가를 상징하려고 하는 인물인 듯하지만 현실과 밀착되어 있지도 않은’ 소통불가의 인물들로 머물고 만다. 거기에 또 다른 철학적 상징이 부가되며 디오니소스적 인물과 뮤즈를 상징하는 듯한 인물이 덧붙여지고 그리스비극으로부터 안톤 체홉의 작품까지 뒤섞이며 인물의 정당성 있는 행동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알겠다. 관객으로 앉아있는 나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지 알겠다. 하지만 너무 많다. 다음은, 작품의 부제인 ‘배우가 고백하는 치열한 연기의 세계’와는 많이 동떨어져 보이는 연기가 그러했다. 극의 핵심이 되는 이곤, 유마리, 강소나 역의 세 명의 배우(이현배, 선우슬기, 장희정)는 단순하게 ‘나는 감정이 주된 광기의 남자’, ‘나는 이성적인 지식인’, ‘나는 못된 (왜 못된지도 모르는) 여자’를 공연 내내 보여주려고만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의 입체적이지 못한 단면적인 인물 만들기는 대본 자체에서 기인하는 빈약한 인물 설정 때문이기도 하다. 이억기, 하도평 역은 작품의 주된 인물이 되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반드시 필요한 주변 인물이 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작품에 들어와 있었고 배우 유준원과 박민관의 연기 역시 인물과 밀착되지 않은 과장된 연기와 단조로운 역할창조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연극 <배우수업>은 너무 많은 하고 싶은 말들과 생각이 체계적, 극적으로 하나의 작품에 녹아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관객에게 설명하고 설명하고, 설명한다. 마치 학생시절 도화지 위에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따위를 써서 목에 걸고 하던 역할극을 보는 듯하다. 뭔가로 대표되는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의도였다고 생각해도 무대 위에서 직접 충돌하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가 타당하지도, 진실하지도 않은 무대는 지극히 설명적일 수밖에 없다.
극단 행길의 <배우수업>은 연극인들의 열정과 고민이 실제로 무대 위에서의 어떻게 관객과소통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다. 앞으로의 무대도 기대한다. 작품 팜플렛에 적혀있는 많은 ‘선생님’들의 생각과 고민, 열정들이 좀 더 농익어 세련되게 무대 위에 펼쳐져 관객과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소망한다.
| | |
|
|
|
제3회 현대극 페스티벌: 부조리와 그 무대 |
|
이지용(세종대학교 일반대학원 영화예술학과 실기석사과정)
1. 현대극 페스티벌의 의의
현대극 페스티벌은 매회 한 작가를 선정하여 동시대적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보고 그 작가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보는 시간이 되는 것 같다. 벌써 1회 장 주네(2009년), 2회 외젠 이오네스코(2010년)를 거쳐 이번 3회 사뮤엘 베케트까지 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1회와 2회의 모든 공연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에는 작가의 작품을 본질에 훼손 되지 않게 약간은 조심스러웠던 느낌이 있었지만 이번 3회에 와서는 연출들의 다채롭고 다양한 실험적 성향이 강해졌다는 것을 공연을 통해 보여주었다. 예술의 역사를 보면 어떤 현상이나 운동에 반하여 새로운 사조가 형성되고 그 사조에 문제점을 반하여 또 다른 사조가 형성된다. ‘모든 것에 답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에서 출발하여 부조리는 혼돈과 모순과 공허함이 함께한다. 그 부조리의 작가 중 사뮤엘 베케트는 매우 시적이며 이성을 초월한다. 이번 페스티벌 참가된 공연들은 다양한 현상들을 관객들이 접하기 쉽게 바꿔놓았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너무나 상투적인 말일수도 있겠지만 연기예술을 행하며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너무나도 좋은 취지라는 것, 새로운 것을 알려면 과거에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2. 작품분석 (관극 순서) 1) 극단 노을 - <고도를 기다리며> : 노을 소극장 누구든 알겠지만 사뮤엘 베케트를 명실 공히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린 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이 작품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1950년대 전후 세대의 가장 주요한 작가로 손꼽히게 된다. 대학로에서 여러 극단의 공연과 연극영화과 대학교 워크샵으로 몇 차례 보았지만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 ‘참 애매모호하다.’ ‘어렵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극이 진행되다 결국 반복적인 대사가 중간에 끼면서 무기력해진다. 그로 인해 황폐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보고 나서 과연 ‘고도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만들어준다. 이번 극단 노을의 공연은 약 1시간으로 러닝타임을 줄여 짧지만 스토리텔링이 강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내가 보았던 <고도를 기다리며> 중 무대, 소품, 조명 모두 통틀어 가장 간결화 되었다. 극 중간 중간 현대무용을 섞어 세련미를 더하였고 무용동작마저 반복적인 동작으로 극이 내재하고 있는 반복적인 언어의 순환과 잘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소형 카메라를 이용한 동작들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강한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이해도가 높았으며 부조리극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아주 간결하게 나타내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부조리극은 어렵다는 발상을 철저히 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끝난 뒤에 이전과 마찬가지로 ‘과연, 고도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남았다는 작은 아쉬움이 남았다.
2) 극단 창파 - <나는 아니야> : 노을 소극장 이번 현대극 페스티벌에서 가장 실험적인 공연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두 여인의 15분짜리 대화를 약 4~50분 정도로 각색되어 실험성을 극대화 시켰다. 2명의 여배우 중심으로 진행이 되지만 나머지 남자배우들은 일종의 오브제 느낌으로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였다. 왼쪽 소파에 섹시 콘셉트의 여인의 마이크를 통한 교태가 느껴지는 대사와 무대 중앙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 그 여인을 둘러싼 남자배우들의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들은 어울리지만, 어울리지 않는다는 약간의 애매모호한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두 여인들을 보면서 나와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었고 결국 두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공연 마지막에 보여준다. 남자배우들의 움직일 때마다 물체와 신체가 접촉했을 때 고통을 나타내는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여자배우의 대사가 잘 안 들렸다. 남자 배우들과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지우는 행동을 반복했었는데 아마 인간이 실수 할 수 있는 부분 중에서 입을 통한 ‘말’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번 현대극 페스티벌 작품 중 관객의 반응이 ‘좋다/나쁘다’ 로 확연히 나뉘어졌던 공연이 바로 <나는 아니야> 엿을 것이다. 연극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던 관객은 조금 어려울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3) TNT 레퍼토리 -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 노을 소극장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는 작년에 로버트 윌슨의 공연으로 이전보다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과 다르게 해설자를 등장시켰다. 그로 인해 관객과의 유대감을 상승 시켰고 깔끔한 해설로 이전의 다른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와는 차이점을 두었다. 테이프에서는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비판하고, 과거 한 여인과의 정사를 기억해낸다. 중간 중간 바나나를 먹는데 이는 성행위에 대한 자아의 비판이라 생각된다. 크라프는 살아온 나날들 보다 죽어야 할 날이 훨씬 더 가까운 노인이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회상한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언젠가는 추억이 된다. 크라프의 녹음은 그런 기억이라는 테두리를 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에 시작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어떤 작품을 알라면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작가가 작품을 쓰게 된 이유까지 파악하게 된다. 이 공연에 나온 해설자는 관객으로 하여금 베케트의 생애, 작품을 쓰게 된 배경, 그의 작품관, 심지어 그의 사생활까지 밝힘으로써 팸플릿이 필요 없을 정도의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서 공연보기가 편했다. 개인적으로 현대극 페스티벌의 의의와 가장 잘 맞아떨어진 공연이 아니었나 싶었다.
4) 극단 완자무늬 - <엔드게임> : 청운 예술극장 어떤 알지 못할 세상으로 인해 집 바깥과 안은 무언가에 가로막혀있다. 주인 햄과 하인 클로브의 대화가 주가 되고 두 개의 통속에 네그와 넬은 과거를 회상한다. 공연을 보는 내내 두 가지 작품이 생각났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핀터의 <덤 웨이터>였다. 단절된 대사와 침묵으로 생겨나서 정식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인물들의 군상, 주인과 하인의 대립 관계는 일종의 권력싸움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는 기다림이란 단어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엔드게임>의 끝내기란 단어는 이 연극의 제목만큼이나 의문으로 남았다. 마치 이전에 끝나버렸어야 하는 일들인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계속 반복된다는 느낌, 어쩌면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일상생활을 마친 뒤 잠자는 것 같은 너무나 일상적인 반복이었다. <엔드게임>은 전형적인 베케트적 요소들로 가득찬 공연이었다. 이 공연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이 ‘부조리’는 어렵지 않다는 인상을 충분히 심어주었다.
5) 극단 전원 - <뭘 어디서> , <밤과 꿈>, <대단원> : 청운 예술극장 페스티벌을 떠나 극단 전원만의 팜플렛이 있었다. 3개의 단막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연출의도가 적혀 있어 공연을 보는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개인적으로 3개의 단막은 처음 접하는 공연이여서 나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주었다. 페스티벌 마지막 공연을 보아서 그런지 관객이 너무 많아 사이드쪽 객석에서 볼 수밖에 없어서 아쉬움이 큰 공연이었다. 3개의 단막을 공연했던 이번 공연은 3막 구조의 하나의 극처럼 느껴졌다. 각 단막이 시작할 때 프로젝트 빔으로 제목을 알려주었으며 페스티벌 참가작 5개중 가장 많은 조명 변화가 있었다. 우선 <뭘 어디서>는 스피커의 말을 통해서,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통해서 극이 진행이 되었는데 흘러가는 계절에 따라 각 인물의 특이한 반복적인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밤과 꿈>에서 는 두 남자의 행동보다 한 여자의 동작이 뇌리에 남았다. 슈베르트의 밤과 꿈이 흘러나오는 도중 앉은 상태에서 동작을 취했는데 슬퍼보였다. 가곡과 무용동작이 매치가 잘되었으며 연둣빛 조명을 통해서 날갯짓을 하는 나비의 모습이 느껴졌다. 마지막 <대단원>은 정치적인 색체가 강했다. 권력 있는 연출가의 모습이 느껴졌다. 주인공역은 처음에 분장으로 인해 동상인줄 알았는데 연출의도를 보고 예술창조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싶었단 말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주인공 역의 충격적인(?) 분장과 머리 스타일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을 정도 였다.
3. 마무리 대학로의 공연들이 고전 작품의 실험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슬랩스틱적 코미디가 주가 되는 것에 반해 다양한 방법의 고전 작품의 해체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관객들의 수준이 이에 활력소를 불어넣어주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아쉬웠다. 코미디적 요소에 맞춰 연극을 접했던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이것도 연극이냐?” 라고 이야기 하는 관객도 보였다. 코미디에 초점을 두는 연극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관객성향 때문에 주옥같은 고전 작품들이 외면 받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었다. 이번 공연의 가장 좋았던 점이 실험적인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고 가장 좋지 않았던 점은 그런 실험적인 성향에 뒷받침 되어줄 작품의 설명이나 연출의 의도 및 QnA의 부분이 팸플릿으로 충족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 삶에 뜻이 없다’를 바탕으로 하는 실존주의에 대한 부가 설명을 모른 상태에서 부조리극을 보았기 때문에 일련의 현상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3회 현대극 페스티벌을 접하고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뮤엘 베케트를 넘어서 부조리극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흥미가 가지 않고 머릿속에서 맴돌던 부조리극의 대본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번 페스티벌 공연을 본 관객들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더 이상 부조리극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현상 그대로를 무대에서 보여줄 뿐이라고... | | |
|
|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139 한양빌딩 4층 서울연극협회 E-mail : jh4017@hanmail.net Copyright 2008 Webstage Corp. All rights reserved.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