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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093-9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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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서울연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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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Theater In Seoul 제7 호 2011.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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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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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기자: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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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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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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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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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당 폰팅사건 | 서은영 - 그냥청춘 | 이주영 - 꽃피는 포장마차 | 문선영 - 디너 | 장현주 - 라이겐 | 강양은 - 메디아 온 미디어 | 김민승 - 모두 안녕하십니까 | 이용복 - 상사몽 | 신아영 - 아마시 프로젝트 | 정명문 - 야끼니꾸 드래곤 | 백승무 - 장석조네 사람들 | 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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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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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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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배우 황금봉 | 최윤영 - 아시테지 겨울축제 | 김유미 - 요람을 흔들다 | 배선애 - 완득이 | 박정기 - 타이터스 | 박정기 - 신춘문예 단막극 제 | 박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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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록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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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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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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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어느덧 또 한 달이 지나 ‘오늘의 서울연극’ 제7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비록 원고가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가는 느낌입니다. 일단 이렇게 하면서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점진적 발전과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연극계에는 공연도 많고 일도 많습니다. 그것만 보면 연극 동네 이야기를 담을 공간이 턱없이 모자라야 하건만 우리 실정은 거의 그렇지 않습니다. 별로 많지도 않은 지면조차 채울 필자가 없어 전전긍긍 울상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연극 관련 지면들이 원고료를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꽤 괜찮은 원고료가 있고 청탁서가 있는 잡지가 권위도 있고 필자들도 더욱 의무감을 느끼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서울연극’은 일종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극에 대해서, 연극 작품에 대해서, 연극계 일에 대해서, 우리 연극 동네 식구들끼리, 전문가로서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서로 아픈 소리까지도 가감 없이 토해낼 때 진정한 연극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 그런 공간입니다. 부디 이 운동에 기꺼이 동참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조차 우리 이야기를 안 하는 소극적 풍토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뭐든 보고 느끼면 바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권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발전을 보장해줄 확실한 방법일 것입니다. 지진이다 방사능이다 불안한 마음도 있지만, 바야흐로 봄꽃이 만발한 계절입니다. 복잡한 마음 훌훌 털어버리고, 저 만개한 꽃송이들처럼 연극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1년 4월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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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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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감동’, 두 마리 토끼를 한 연극 안으로 : <경로당 폰팅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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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연출: 주진홍 극단: 극단 드림 공연기간: 2011.3.12~5.29 공연장소: 소극장 모시는 사람들 관람일시: 2011.4.3
<경로당 폰팅사건>의 시작은 도발적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위의 스크린에는 빨간 불빛 아래 관능적인 춤을 추는 섹시한 여인의 그림자가 보이고, 스피커에서는 폰팅 CM이 흘러나온다. 수 분 후, 무대와 객석은 모두 암전되고 관객들은 캄캄한 관객석에서 어느 한 여인의 요염하고 애교 섞인 콧소리를 듣게 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꼼짝달싹할 수 없는 관객석에 있는 관객들에게 유일하게 부여된 것은 청각의 상상력이다. 즉, 연극 제목의 “폰팅”이라는 자극적 소재, 오프닝에서의 섹시한 여인의 관능적인 움직임, 붉은 불빛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관객의 에로틱한 상상력은, 어두운 공간에서 유일하게 작동 가능한 애교 섞인 여인의 콧소리에서 드디어 정점을 이루게 되어 불이 켜지면 관객들은 이 연극에 대해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연극의 중심무대는 한 아파트의 경로당이다. 극 초반부는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경로당의 소소한 일상으로 꾸며진다. 치매 예방을 위해 고스톱을 쳐야한다는 할머니부터, 담배 한 개비를 두고 겨루는 할아버지들의 내기장기, 그리고 내기장기가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판을 엎어버리며 진상을 부리는 어디에나 있음직한 할아버지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생산을 도모할 수 없는 또 다른 형태의 잉여인간들은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죽여가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 많이 봄직하고,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그런 군상들의 삶의 이야기가 경로당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극 초반부의 전개는 다소 산만하다. 이 초반부는 사건 촉발 이후의 전개 구성에 단초를 제공한다. ‘폰팅’이라는 사건이 촉발되기 전까지의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다보니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 “조전례”라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여러 번 반복하여 부름으로써 “조졌네”로 들리도록 하는 언어유희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지만, 객석의 호응을 얻기는 힘든 듯 보였다. 웃음은 타이밍이다. 적재적소에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놓치면 맥이 빠져 버려 결국엔 웃음을 놓치게 된다. 전반부는 산만하고 지루한 전개로 인해 웃음의 타이밍을 예측하게 만드는 아쉬운 무대였다.
<경로당 폰팅사건>은 수 백 만원에 달하는 폰팅 요금 사건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아파트 부녀회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경로당이기에 공용 전화 요금이 수 백 만원이 나왔다는 사실과, 알고 보니 그 요금이 폰팅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연극의 핵심 사건이다. 이로 인해 경로당 노인들은 서로 의심하게 되고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가는 과정이 새삼 새로운 극적 재미를 부여해준다. 후반부는 범인 찾기로 극이 전개되면서 극작가는 노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목한다. 그러나 범인 지목 행위는 노인 한명 한명의 사연을 들려주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극 초반부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노인들의 사연과 외로움을 노출시키며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감동으로 스며들게 한다. 처음에 범인은 당연히 첫 장면에서부터 폰팅을 하며 에로틱한 목소리를 들려준 할머니한테 화살이 쏠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단지 돈을 벌기위해 폰팅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제 노인 한 사람씩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알지 못했던 그들의 슬픔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작가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데, 작가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것은 전직 교장선생 박봉팔이다. 작가는 전반부에서부터 전직 교장선생님에게 의심을 살 만한 극적 장치들을 설치해두었다. 경로당에서 남몰래 전화를 받는다든지, 경로당 전화벨이 울리면 박봉팔이 가장 먼저 뛰어가 전화를 받는 행위가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배우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 자체가 아닐까 싶다. 교장이라는 사회적 체면과 점잖은 그의 행동들과 달리, 풍채가 산 만한 배우가 속삭이듯 내뱉은 ‘보고 싶다’는 말은 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것은 충분히 의도된 것이리라. 작가의 의도와 배우의 연기가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진 캐스팅이었다. 노인들은 경로당에 있음직한 사람들이고, 흔히 봄직한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어디선가 들었음직하고 심지어 본 적도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1000명의 사람이 모인 장소에는 최소한 1000개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그럴 거야’라는 말로 개인들의 사연을 지나쳐버리는 것이야말로 겉으로는 소통하는 듯 보여도 정작 뒤섞이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게다. 아마도 이 연극의 작가는 웃음 속에서도 이런 주제가 관객과 소통되길 바랐던 듯싶다. 전반부의 인물들의 산만한 등장과 그로 인한 느슨한 전개는, 결국 후반부에 보여줄 감동을 위해 작가가 놓칠 수 없었던 부분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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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지침극, <그냥청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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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고려대 박사과정)
극단 : 조은컴퍼니 작, 연출 : 홍영은 공연기간 : 2011.3.4~4.3 공연장소 : 키작은 소나무 가변극장 관람일시 : 2011.3.17
연극 <그냥청춘>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극장 밖의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청춘들도 작품 속 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대형서점에 따로 마련된 청춘지침서 코너, 이 코너를 소개하는 글에서 청춘의 수식어는 불안, 막막, 흔들림, 외로움 등의 단어였다. <그냥청춘>은 여섯 명의 인물들을 통해 극장 밖에서 청춘지침서를 손에 쥐고 있을 젊은이들에게 ‘짠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꿈과 현실 사이
작품 속 인물들은 연극을 하기 위해 모였다. 자신들의 꿈인 연극을 하기 위해 이들은 새벽부터 공사판에서 벽돌을 날라야 하며, 주유소에서 사장 눈치 봐가며 일해야 한다.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이들은 극장 대관비 낼 돈이 없다. 현실은 모순적이고 냉랭하기만 하다. 차갑고 모순된 현실에서 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이 힘든 과정은 물리적 힘듦을 넘어 자신의 꿈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꿈은 저편에서 웅크린 채 있고, 힘든 현실만이 지금/여기에 있을 뿐이다. 29살의 열혈청년 철수는 모순으로 엉겨 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친다.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되묻는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한없이 작은 철수는 영희와 연극 단원들과의 부딪치면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아 간다. 철수는 “진짜 연극이 하고 싶”다. 성공이 보장된 연극도, 모든 조건이 아름다운 연극도 아닌 진짜 연극을 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철수가 생각하는 진짜 연극은 무엇일까. “연극쟁이가 하는 연극이 진짜 연극이”며, 이 연극은 아무런 수사(修辭) 없는 ‘그냥 연극’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냥 연극을 하기엔 모순된 현실은 여전히 막강하게 이들 앞에 버티고 서 있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 악순환으로 꿈을 접은 인물이 고선배이다. 고선배는 그냥 연극, 진짜 연극을 하고 싶어 37살이 될 때까지 연극판에서 버텨왔지만, 결국 절대 권력자인 현실과 타협하고 만다. 그는 현실의 씁쓸함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고선배의 역할은 더 씁쓸하다. 관객은 고선배의 첫 등장에서부터 본능적으로(?) 그가 앞으로 극에서 어떻게 연출될지 예상할 수 있다. 저 인물은 분명히 후반부에 가서 뭔가 결정적 행동을 보여줄 인물이라는 것을. 이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는다. 고선배는 후배의 교통사고 소식에도 밥타령을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곳은 식당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누워있는 후배의 병원이다. 존재감 없이 행동하고 있지만, 너무 큰 존재감을 보여주는 그의 행동들은 작품 후반부까지 계속되며, 마치 관객에게 “인내를 갖고 기다려봐. 내가 뭔가 보여줄 테니까”, 이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무심한 듯 따뜻한, 그리고 엉뚱한 성격의 그는 결국 극 후반부에 가서 현실과의 싸움에 지친 철수와 함께 강산에의 ‘넌 할 수 있어’를 부르는 감동적인 결정적 모습을 보여준다. 고선배는 다소 진부하고 판에 박힌, 클리셰(Clich)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그의 행동은 많은 생각의 거리를 제공해 준다. 이 작품은 꿈을 향해 전진하는 철수와 현실과 타협하는 고선배를 무대에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희망과 용기의 단어들로 가득찬 청춘지침서가 아닌, 냉정한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청춘지침서가 된다.
여러 색깔의 사랑
청춘을 이야기할 때에 빠질 수 없는 단어가 ‘사랑’이다. <그냥청춘>에는 여러 색깔의 사랑이 있다. 철수와 영희는 한때 연인 사이였다. 영희는 철수를 작가와 연출가라는 공적 관계의 자리로 보내고 성국과의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영희의 꿈꾸는 사랑은 실현될 수도 없는 사랑이다. 남자인 성국은 고등학교 동창인 철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철수와 성국, 그리고 영희는 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철수와 성국의 관계를 표현할 때에 작품은 이 둘의 관계에 관한 정보를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는다. 극은 이 둘에게 있었던 사연을 하나하나 천천히, 그리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에게 던진다. 비교적 넓은 무대 공간은 둘의 관계를 긴장감 있게 연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극 배경이 연극 연습실이고 극중극도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무대 중앙과 앞쪽 공간이 비교적 넓다. 너무 넓은 탓일까. 두 명의 인물이 무대에 나와 연기할 때에 가끔 휑한 무대가 연출된다. 하지만 무대 양쪽 끝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는 철수와 성국의 거리, 철수를 지난날 사랑했던 시절로 되돌리려고 하는 성국과 이를 외면하고 부정하는 철수의 거리, 둘의 감정이 오고 가는 무대상의 거리는 이들 심리만큼이나 긴장감 있게 연출된다. 철수와 성국의 사랑을 숨죽이고 보느라 피곤했을 관객에게 선후배 사이인 미정과 필구의 사랑은 숨 돌릴 여유를 준다. 이 작품은 연상연하 사이인 이 둘의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티격태격 하는(미정이 일방적으로 필구를 몰아세우지만) 이 둘의 모습은 즐겁고 유쾌하다. 한편 <그냥청춘>의 또 하나의 볼거리인 극중극에서도 사랑이 존재한다. 극중극의 무대는 우주의 아스탄이란 행성이고, 이 우주 공간은 조명으로 매끄럽게 연출된다. 그리고 극중극 안에 재미있는 대사와 행동들을 곳곳에 배치해 보는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요한이란 인물말고는 극과의 연결이 모호하고 긴밀하지 못한 인상을 줘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사랑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곳에서도 요한과 철희, 그리고 시온이 삼각관계로 얽혀있다. 아스탄 여인과 지구인 비행사 사이에서 태어난 요한은 “어디에 있든 늘 이방인이”며, 타자일 뿐이다. 이방인으로서의 요한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이방인이며 타자로 호명되는 성국이 연기를 한다. 이 둘은 非이방인, 非타자들과 똑같이, 그들처럼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들의 사랑을 수용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이름을 보면 하나 같이 평범한 이름들이다. 김철수, 오영희, 강성국, 장미정, 정필구 등 이름으로 인물의 캐릭터를 분석하자면 이들은 모두 평범한 캐릭터들이다. 여기에 작품이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그냥청춘>은 평범한 청춘에게 건네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서의 청춘이란 꿈을 가진 아름다운 이이다. 그리고 관객은 이 아름다운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이것이 이 작품의 롱런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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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리얼 선언, 조심스러운 발걸음- <꽃피는 포장마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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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영(극동대학교 강사)
연출; 적이 극단 ; 맥놀이 공연기간 ; 2011. 3. 4~3. 13 공연장소 ; 대학로 풍기문란센터 관람일시 ; 2011. 3. 12
연극 <꽃피는 포장마차>의 이야기는 종로 3가에 자리 잡은 작은 포장마차에서 이루어진다. 주요인물은 커밍아웃을 하고 집을 나와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인철, 성정체성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는 덕만, 덕만의 소개로 인철과 좋은 만남을 시작하려는 태준, 그리고 인철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철 어머니로 구성되어 있다. 인철의 포장마차는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이 고달픈 이들이 고된 하루를 넋두리처럼 고백할 수 있는 공간이다. 덕만은 말투, 몸동작, 옷차림 등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특징만 보더라도 일반화된 게이의 표상을 드러낸다. 그는 밝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커밍아웃을 선언한 당당한 스타일이다. 그러나 그런 덕만에게도 유일하게 모든 것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은 인철의 포장마차이다. 애인의 양다리 문제로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하며, 은밀한 이야기도 맘껏 할 수 있는, 사회적 가면을 벗어버린 채 자신의 진실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포장마차인 것이다. 또한 인철의 포장마차는 새로운 사랑이 싹트는 공간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연인과 이별을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 설레는, 사실 사람들이 모이는 일상적 공간에서라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지친 하루를 술 한 잔으로 달래며 풀리지 않는 연애와 미래의 장대한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은 비단 인철의 포장마차에서만 찾을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그러므로 <꽃피는 포장마차>는 성적소수자의 사회적 갈등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물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인철 어머니는 그들을 경계 지으려 하는 사회적 시선들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철과 어머니의 갈등은 멜로영화에서 흔히 겪는 시련의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또 해결된다. 게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을 기대하는가? 작품은 관객에게 묻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항상 사회적 냉대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거나, 어둡고 험난한 과정들만 엮어야 하는 걸까? 그렇기에 밋밋한 극 전개도, 갑작스러운 해피엔딩의 결말도 성적 소수자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별 짓기 좋아하는 시선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연출가의 시도로 본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게이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리얼 스토리는 어쩌면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호기심어린 시선보다 좀 더 세심하게 그들의 진정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기를 관객에게 요구한다. 그러기에 <꽃피는 포장마차>는 인물들의 대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무대공간이 한정적이라는 데 있어서는 아쉽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는 포장마차 내부로 향해있다.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는 포장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와야만 가능해진다. 즉 커밍아웃을 선언한 사람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포장마차라는 공간에서만 이야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적 소수자의 진실한 이야기에 집중하려 했음은 이해하고도 남을 만한 연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철의 포장마차는 슬프게도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분명히 인철이 어머니와의 화해를 위해 하는 행동들(매일 집에 장미꽃을 놓고 오는 일)은 외부사회를 향한 적극적 제스처이다. 그러나 여전히 포장마차 문을 박차고 나간 인철 뒤에는 암전뿐이다. 가족, 직장 등 외부로의 공간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쉽게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포장마차의 화해의 장미꽃은 조금 쓸쓸하다. 공간 활용이 외부와 내부로 분리되어 어머니의 이야기도, 또한 인철의 과거도, 그를 잊지 못해 방황하는 여인도, 각 시간과 공간 안에서 표출되었다면 포장마차에 걸린 화해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의미하는 장미꽃은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연출가는 이 작품이 자신의 커밍아웃의 계기가 되었음을 밝힌바 있다. 포장마차의 인철, 태준, 덕만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린 그의 발걸음이 <꽃피는 포장마차>에서는 아직 조심스럽다. 미약하고 조심스러운 발 돋음 이후 펼쳐질 또 다른 무대위의 리얼한 그들의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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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백신 그리고 면역력 -연극 <디너>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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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주 (컬처 디자이너 2004flower@naver.com)
공연명 : 디너 작 : 도널드 마글리즈 번역 : 우현주, 정호진 연출 : 이성열 극단 : 맨씨어터 공연기간 : 2011, 3, 4~ 4, 3 출연 : 우현주 정수영 정승길 이석준 장소 : 대학로 예술마당 3관 관람일 : 2011년 3월 29일 8시
“결혼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부조리와 버무려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연극 <디너>를 보러간 지난 3월 29일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무척 심했던 날이었다. 한낮의 따스했던 봄기운은 공연을 보고 나오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두운 골목에서 차가운 겨울바람만 불어온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아마도 극중 부부 탐과 베스가 이혼 직전에 느낀 심정도 이러했으리라.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봄은 온다. 연극 <디너>의 원제는 'Dinner With Friends'이다. 작가 도널드 마글리즈에게 2000년 퓰리쳐 희곡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1998년 초연된 이래 뉴욕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연극인데 극단 ‘맨씨어터’를 이끌고 있는 우현주가 정호진과 함께 번역하고 연출가이자 극단 백수광부 대표인 이성열이 연출을 맡아 작년 9월에 초연을 가졌다. 언뜻 그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보면 남녀 간의 섬세한 감정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우현주와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내면탐구에 집중해온 이성열의 만남은 쉽게 공감가지 않는 부분이다. 이성열 자신도 인터뷰에서 “내 인생 최초의 멜로”라고 밝히고 있다. 일견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둘의 만남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까?' 하는 호기심은 막이 오르기 전까지 지속된다.
무대 위로 조명이 켜지면 한 쌍의 부부와 한 여자가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원래 십년지기 친구사이인 두 쌍의 부부 (카렌과 게이브, 베스와 탐)가 모이기로 한 자리였는데 베스의 남편 탐이 출장을 가게 되면서 균형이 깨지게 된 것이다. 비대칭적 구도에서 약자는 언제나 소수자이다. 중압감에 못이긴 베스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고 곧 이혼을 할 거라고 친구부부에게 털어 놓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은 한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모범적인 부부생활을 해나가는 (해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 카렌과 게이브는 친구를 만나 설득하려 들지만 결국 베스와 탐은 각자의 사랑과 행복을 찾아 떠나간다. <디너>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력이 가장 빛났던 부분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친구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카렌과 게이브는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사랑인가 가정인가를 고민하는 장면이었다. 탐은 게이브에게 “널 최고라 느끼게 하는 여자가 있고 다른 한쪽엔 널 똥으로 만드는 아내가 있어, 너라면 누굴 선택하겠니?”라고 되물으며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음을 말함과 동시에 게이브에게 “넌 지금 어떤 여자와 살고 있니?”를 암묵적으로 되묻는다. 친구가 마셔버려 빈 와인 잔과 마시지 못한 자신의 잔을 양손에 들고 멍하니 멀어져가는 친구를 바라보는 게이브의 흔들리는 눈빛을 카렌의 활기찬 목소리가 깨운다.
카렌은 베스가 예전 결혼생활에서 느끼지 못한 행복을 맛보며 하루하루 가슴 벅찬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충고가 친구에게 의미가 없음을 깨달고 자신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카렌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제 내가 더 이상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거야?”라는 카렌의 말에 남편 게이브는 “무슨 소리야, 아직 여자지. 미안해 아가씨~ 남자라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하는 거야”라며 책임과 의무가 담긴 말과 함께 아내의 불만을 해결해 주며 위기를 넘긴다. 이때 엔딩음악으로 미국 TV드라마 <트윈픽스>의 메인테마가 흘러나온다. <트윈픽스>는 트읜픽스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욕망과 탐욕이 만들어낸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서로의 목적을 위하여 잔인하고 치졸한 암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앞에서 우현주와 이성열의 낯선(?) 조합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극의 마지막 장면을 <트윈픽스> 테마곡으로 마무리한 것을 보고 이 연극의 연출이 이성열인것이 생각났다. 결국 우리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일까 목적일까 아니면 수단에 불가한 것일까?
연극 <디너>의 홍보자료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이 작품은 결혼에 대한 안도감과 불편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연극이다. 결혼을 앞둔 사람에겐 미리...애써... 권하고 싶지 않은 연극이다." 사실 배우자의 불륜문제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비롯해 TV드라마에서 흔하게 다루는 내용이라 진부한 면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강한 것을 기대하고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 왜 이런 진부한 문제를 다룬 연극이 ‘퓰리처상’까지 받은 것일까? 미국의 이혼율은 50%에 육박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초혼일 경우 40%, 재혼은 60% 그리고 세 번째 결혼의 경우 73%의 이혼율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묶여진 이상 부부는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모범답안 같은 태도와 법과 제도에 선행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추구권이라는 입장이 카렌과 게이브, 베스와 탐 두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진다.
연극 <디너>를 보는 동안,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내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바이러스”와 “백신”이었다. 병리학자들은 인간의 역사는 바이러스와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인간은 바이러스와의 투쟁을 통한 정복과 공존의 과정 속에서 생존하고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결혼제도가 정립된 것은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결혼을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간주한다면 “결혼”은 앞으로 무수히 많은 바이러스와 싸워야 할 것이다. 도태될 수 도 있고 더 진화될 수 도 있는 것이다. 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연극 <디너>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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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유희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이중성 <라이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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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양은 (연기전공 교수)
연출: 김윤주 극단: 극단 수 공연기간: 2011.03.03 ~ 2011.03.13 공연장소: 설치극장 정미소 관람일시:
극단 수의 연극 <라이겐 Reigen, 1897>은 2011년 3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 동안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되었다. 극작가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아르투어 수니츨러 (Arthur Schnitzler, 1862-1931)로 그의 대표 희곡 작품으로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 등이 있다. 그는 아버지처럼 의사였으나 오히려 작가로서 더 많이 활동을 했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의 희곡들은 자유주의 연출가 오토 브람에 의해 무대에서 형상화 되었고, 빈 브르크테아터와 베를린극장 등에서 공연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19세기말 빈의 왕정 퇴폐의 시대적 분위기, 사회전통의 압박, 외로움, 소외, 자유와 희생, 거짓과 사실에 대한 갈등 등 인간의 모습과 삶이 잘 담겨져 있다고 한다.
<라이겐>은 ‘윤무’라고 해석이 되는데, 윤무란 상대가 계속 바뀌며 추는 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작품 속에서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를 계속 바꾸어 가며 즐기는 인간 심리의 성적 유희 본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거짓 속에서 속고 속이는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과 태도는 그 안에서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죄책감이나 책임감이 아닌 인간의 성적 본능을 채우고 거리낌 없이 버리는 비도덕적이고 이중적인 인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두려움은 이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게 들킬까 하는 염려만 있을 뿐이다.
인물들의 일회적 사랑놀이는 창녀와 경찰, 그 경찰과 북한 사투리 쓰는 여인 (하녀), 그 하녀와 여관 젊은 남자 손님, 그 남자와 채팅에서 만난 유부녀, 그 유부녀와 남편, 그 남편과 클럽에서 만난 어린 소녀, 그 소녀와 극작가, 그 극작가와 여배우, 그 여배우와 박사 (의사), 그 의사와 다방 아가씨 (처음 등장하는 창녀)의 관계로 10개의 에피소드를 이룬다. 모두는 속임수 이뤄진 만남, 원 나잇 스탠딩, 불륜, 하루살이나 페스트 푸드 같은 잘못된 쾌락의 얘기를 다룬다.
<라이겐>은 1903년 출판되었으나 그 다음해에 출판 금지가 되었고 1908년, 1931년 등에 다시 출판되었으나 서문을 없애는 등의 제재가 가해졌다. 검열로 자유해진 뒤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등 많이 이들이 공연하려 했으나 그 첫 공연권은 게르트루트 아이졸트(Gertrud Eysoldt)에게 돌아갔다. 1920년 베를린 국립음악대학 내의 샤유스필하우스에서 첫 상영을 되었으나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인 자극성으로 공연 금지가 내려졌다. 그러나 극장주는 공연을 지속했고, 이에 소송에까지 이르고, 1921년에 공연금지가 풀려났다. 수니츨러는 1922년 6월 이후 무대에 작품을 올리지 않기로 결정, 그의 사망 후 50년이 지나 여러 연출가들에 의해 공연화 되었다. 프랑스에서 <라 롱드 La Ronde>라는 영화가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뮤지컬로 재탄생하였다.
10명의 배우들은 각자의 인물을 자연스럽게 구축해 성적 유혹과 욕망의 표출을 대담하게 보여주었고, 인물들의 성적 유희는 외설적 에로티즘이 아닌 풍선으로 상징화 되어 묘사되었다. 풍선은 에피소드마다 색과 크기가 다르게 사용되어 욕망의 표현과 함께 휴머와 연결되어 관객의 웃음을 이끌었다. 무대 세트는 등받이가 없는 4개의 벤치로 각 에피소드의 공간적 특징에 따라 조명의 분위기를 받아 간결하고 깔끔하게 표현되었다.
서구적 사고와 성의 개방, 매체와 인터넷 등의 영향으로 젊은이들과 가정 내에 도덕성(morality)이 결여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공연 <라이겐>이 그려내는 욕망의 거짓과 속임수, 빠르게 즐기고 쉽게 버리는 등의 이중적인 삶을 통해 하루살이 같은 단순한 성의 유희가 아닌 책임과 성실, 이해와 기다림을 아는 진정한 사랑이 짙어가는 사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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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의 비극과 미디어의 비극, <메디아 온 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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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승 (연극평론가)
극단 : 성북동비둘기 작 : 에우리피데스 재구성, 연출 : 김현탁 공연기간 : 2011. 2. 24 ~ 4. 10 공연장소 :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관람일시 : 2011. 3. 26
두 비극 사이의 연결 고리
고전의 재해석은 늘 세 가지 수용의 과정이 맞물리게 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연출이 고전을 어떻게 파악하였는가, 관객이 그 고전을 어떻게 파악하였는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관객은 어떻게 파악하였는가. 이 세 가지 기대지평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들이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메디아 온 미디어>가 고전을 가져온 방식은 꽤 독특하다. 김현탁 연출은 그리스 고전인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를 현대 사회의 미디어와 결합시켰다. 그러나 이때 미디어와의 결합은 흔히 상상하듯 내용으로서의 메디아와 형식으로서의 미디어의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의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상징적인 결합을 시도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메디아>라는 고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신, 현대 사회의 미디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신화적 인물 메디아와 현대 사회의 미디어를 연결지어주는 고리로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 중 하나는, 일단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Medea와 Media의 언어적 유사성에 있다. 즉, 글자 한 끝 차이―e와 i―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미디어라는 요소를 과감하게 끌어들인 셈이다. 철자상의 유사성 외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러한 관련짓기가 오히려 더욱 흥미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전개 방식에 대한 호기심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강력한 요소는, 양자가 지니고 있는 공통된 비극―본질 은폐와 기만, 폭력과 외설 등―을 연결시키려 한 점이다. 김현탁 연출이 메디아의 신화적 내러티브 속에서 미디어와의 공통 분모로서 이러한 지점들을 포착하였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리고 이러한 결합 방식은 메디아라는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내리는 대신 이 인물을 들여다 보는 우리의 방식을 문제 삼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더욱 의미가 있다. 즉, 이 작품에서는 미디어라는 틀을 통해 메디아를 바라보게 한다. 메디아를 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대신 밖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 셈이다. 결국 작품의 기둥에 해당할 수 있는 이러한 관련짓기는 기발함을 넘어서서 <메디아> 혹은 미디어의 의미 모두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차원의 해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다양한 미디어 속에 놓인 메디아
작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인터뷰, 신파극, 리얼 토크쇼, 성인 채널, 갱스터 영화, 인터넷 게임 공간, 만화. 이들이 차용하고 있는 현대적 미디어들은 특별한 원칙 없이 어지럽게, 단절적으로 등장한다. 게다가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배우들은 암전 없이 모든 소품과 의상들을 노출시킨 채 무대 배치를 바꾸고 의상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다시 음악을 틀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오히려 장면 전환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장면 간의 단절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이러한 시도는 어찌 보면 이 작품의 고유한 전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액자 테두리와 같은 기능이랄까? 즉, 이러한 장면 전환의 노골적인 노출은 이야기의 전환이나 시간과 장소의 비약과 같은 고전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하나하나의 장면들 자체가 제각기 다른 미디어임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메디아 온 미디어>에는 극적 전개를 담당하는 인물들―메디아와 이아손, 크레온과 글라우케― 외에 4명의 코러스가 등장하는데 원작의 코러스의 기능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때로는 기자로서, 때로는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스태프로서, 또는 영화의 조연이나 엑스트라, 만화 영화의 성우로서 계속 역할을 바꿔가지만 결국 이들은 현대 사회의 미디어라는 현상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이 선택한 미디어 혹은 표현 방식들은 내용의 전개 역할 외에도, 매체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내용이 다루어질 것인가의 문제들을 생각케 한다. 리얼 토크쇼로 치환된 인물 간의 갈등 장면과, 만화 없이도 더욱 리얼한 만화를 연상시켰던 성우들의 더빙 작업 장면은 미디어를 거칠 때 어떤 효과가 강조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예컨대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어린이용 만화의 더빙 장면으로 표현하여 희극적인 껍데기를 씌워버림으로써 상당히 강한 느낌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내었다. 또한, 토크쇼에 등장했다가 어느 순간 격투기 선수들이 되어버린 두 여인의 모습에서는 폭력이 매체를 통과하여 드러나는―또는 매체를 통해 폭력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미디어 양식 속에서 메디아라는 인물이 변화해 가는 방식에 있다. 내러티브의 전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 속에서 메디아는 때로는 신파극의 여주인공으로, 때로는 격투기 투사로, 때로는 만화적 캐릭터 느낌으로 계속 거듭난다. 미디어라는 공간를 거치면서 메디아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고 바뀌어지고 왜곡된 채로 드러나는 것이다. 메디아는 그런 식으로 관객에게 보여지고 관객은 그런 메디아를 응시한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려 한 미디어의 비극은 무엇인가?
그러나 상당히 뛰어난 시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지닌 전제와 의도에 아쉬움이 남는다. 미디어는 정말 비극인 것일까? 미디어의 의미는 기만과 폭력성으로 대표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들은 진정 ‘무방비 상태’로 미디어 앞에 노출되고만 있는가? 미디어에 대한 일방적인 도덕 판단의 잣대가 <메디아>의 의미와 맞물리면서 자칫 흐름을 매우 단순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즉 메디아와 미디어, 두 요소 사이의 본질적인 관련짓기의 시도가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작품에서 이미 ‘미디어란 무엇이다’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출발한 데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주인공 메디아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의 보여주기를 실현시켰던 것과 달리, 현대 사회의 미디어에 대해서는 결론을 성급히 내려버린 채 양자의 조합을 꾀했던 것이다.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몫을 관객에게 돌려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4명의 코러스가 고군분투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적절히 찾아가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디어의 폐해’와 같은, 대상에 대한 단선적인 판단이 집요하면서도 줄기차게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던 데 반해, 정작 <메디아>와 미디어라는 두 요소를 연결해줄 4명의 코러스들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이들 코러스들은 미디어 자체도, 미디어의 소비자도, 그렇다고 원작의 진짜 코러스도 아닌 채 표류하게 된 셈이다. 미디어의 문제는 결국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보여주기의 방식의 문제이며 보는 방식의 문제이다. “미디어는 다양하게 얽혀드는 욕망들 속에서 질주하고 있고, 그 안에서 메디아가 허우적거리고 있으며, 우리는 관음증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메디아가 미디어와 더욱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이며, 연출의 의도 속에 원래는 이 비슷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메디아가 여러 가지 미디어에 걸쳐 다층적인 목소리를 내며 자리를 잘 잡아주었던 데 반해, 이러한 구도를 완성시켜 줄 수 있는 4명의 코러스는 미디어 자체를 보여준다기보다는 미디어의 폐해를 일부러 알려주려 애쓴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들이 어떤 종류의 결론을 굳이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빼앗긴 관객으로서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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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태를 풍자하는 희극 <모두 안녕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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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복 극단 : 가족 작 : 천정완 연출 : 박정근 공연기간 : 2011.3.18~2011.5.8 공연장소 : PMC 소극장 관람일시 : 2011.3.16(수) 8시
극단 가족의 신작 <모두 안녕하십니까>(천정완 작)는 현대사회의 소통의 부재 및 그로 인한 소외와 단절을 풍자적인 코미디로 보여주고 있다. 거의 석 달에 걸친 장기공연이라 더블 캐스팅으로 공연되고 있는 이 작품은 극단의 명칭에 걸맞게 한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극의 등장인물로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박부장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 및 박부장과 아내를 각각 태웠던 두 명의 택시 기사 그리고 흥신소 직원 등이 있다. 박부장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소통을 못하고 대인기피증까지 있다. 그는 집에 들어온 도둑을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집의 유선 전화를 사용하여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게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어서 집에 엽총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애정보다는 남편의 돈을 차지하려고 흥신소 직원과 모의를 하며, 이들의 아들은 불의의 엽총 사고로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에도 진지한 애도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편 두 명의 택시 기사는 우연히 택시에 탔던 박부장이 가방에 현금을 잔뜩 가지고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그 돈을 훔치기 위해 박부장의 집에 몰래 들어간다. 이처럼 이 극의 등장인물들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소통하지 못하는 인물들이거나 혹은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 막장인생을 사는 자들이다. 요컨대 ‘모두 안녕하십니까’라는 제목은 안녕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반어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물들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박부장의 가족 중 어느 한 사람도 정상이 아니고 그 주변 인물들 또한 돈에 눈이 어두워 남의 것을 가로채거나 훔치려고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오늘날의 세태를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인물들을 설정한 것으로 보이지만 좀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작가나 연출은 과장된 코미디 형식을 통한 사회풍자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대 양쪽을 가로지르는 움직이는 문은 무대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혹은 택시 기사들이 식사할 때는 뚫린 벽면 위에 그림으로 그려진 음식을 제공하기도 해서 연극적인 재미를 주었다. 하지만 천 위에 벽돌담을 그려서 택시기사들이 그것을 쉽게 뛰어넘게 만든 것은 무대장치의 통일성을 깰 뿐만 아니라 극이 진지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무대를 하려면 전체적으로 통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징적인 간단한 소품으로 암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크겠지만 말이다. 기사들의 택시는 풍선처럼 바람을 넣어서 만들어 마치 아이들 장난감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이것 역시 비사실적인 양식이라서 박부장의 집을 나타내는 움직이는 커다란 문이나 가구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다분히 코미디 양식을 따르고 있어서 이 극의 어두운 주제를 희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장된 몸짓과 얼굴표정 그리고 대사는 희극적인 효과를 낳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볍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어느 경우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택시 기사가 손님이 탔음에도 불구하고 출발을 안 하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이유가 잘 설명이 되지 않고 있으며, 박부장의 집에 택시 기사들이 몰래 들어왔을 때 흥신소 직원도 들어와 있지만 박부장이 그를 보지 못하는 장면 또한 설득력이 약하다. 요컨대 이 극이 세태를 풍자하는 세련된 코미디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무대 양식을 통일하고, 텍스트가 좀 더 긴밀하게 짜여져야 할 것이며, 배우들의 코믹 연기도 보다 진정성을 띠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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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의 무대화- <상사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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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영(경기대학교 교수) 극단 : 여행자 연출 : 양정웅 공연기간 : 2011.03.12 ~ 2011.03.20 공연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옛날이야기를 오늘날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극단 여행자의 <상사몽>은 우리의 고전소설인 <운영전>을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그런데 고전 소설을 무대화한다는 것은 오늘날 현대의 관객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으로 각색되어 무대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극단 여행자의 <상사몽>(양정웅 각색/연출,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2011.3.12-3.20)은 그러한 현대관객에 대한 고려보다는 원전을 충실하게 무대화하고자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하여 공연시간은 현대의 대부분의 연극공연이 1시간 반정도 내외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2시간 20분이라는 장시간을 공연에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되는 작품의 내용은 단순하다. 운영이 김진사를 만나 사모하다가 그들의 사랑이 만천하에 알려지자 스스로 자살한다는 내용인 것이다. 제작진은 이 작품을 한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담고 있는 반전이나 복잡미묘한 상황이 보여지는 것도 아닌, 이상의 단순한 줄거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단순한 줄거리를 2시간 20분이라는 장시간에 걸쳐 봐야 하는 관객의 입장은 그러므로 난처하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이 이야기를 무대에서 봐야 하는걸까. 아니 이 작품을 만든 제작진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는가. 즉 그러한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이 작품이 시사하는 몇가지 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무대언어로서 시적인 언어가 과연 적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그 시가 한글로 된 시도 아니고 한문으로 된 한시일 경우 이러한 시적언어가 과연 어떠한 연극적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시를 쓰는 궁녀들이라는 점, 그리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이 선비들이 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서 주요인물들의 대사는 주로 시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의 관객들에게 이러한 한시들이 주는 정감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무리 자막을 통해 그러한 시들이 관객들에게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깊이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한시를 한번 낭송했다고 해서 그 내용과 맛이 관객들에게 음미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현대어도 아니고 고어도 아닌, 한시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한시낭송은 액서서리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한시를 낭송하고 자막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내용을 전달하기 보다는 이 작품의 시 청각적 효과를 보완하기 위한 장식품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제작진의 의도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이 작품은 오늘날 한국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외국의 관객들에게 우리의 옛날이야기를 한편의 아름다운 이국적인 서정시로 소개해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한 소개용이기에 오늘날 한국의 정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해석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시사점중의 하나는 바로 순수예술의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안평대군은 시를 쓰는 궁녀들을 모아 속세와는 고립된 별개의 공간에서 비밀리에 양육하고 있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이들이 세속적인 삶과는 관계없이 시를 위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상적인 왕국을 꿈꾸는데, 그것은 권력왕궁이 아니라 문장왕궁으로서 그 곳에 왕이 있다면 바로 이태백이 왕이 되는 그런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순수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그런 순수한 세계를 오염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과 같은 개인적인 욕망이다. 사랑에 빠진 운영의 시에서 그러므로 안평대군은 그러한 흐트러짐을 읽는다. 시와 작가를 구분하지 않고 글에서 그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읽음으로써 시와 작가는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대순수의 세계를 지향하는 안평대군의 세계에서 운영의 사랑은 그러한 절대순수의 세계를 해치는 오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영의 사랑을 알게 된 안평대군은 궁녀들을 고문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개성적인 욕망을 옹호하는 궁녀들의 반론에 의해 충격을 받는다. ‘내꿈이 너희 꿈과 같을 줄 알았다’라면서 충격을 받은 안평대군은 운영을 제외하고 나머지 궁녀들은 풀어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사몽>은 시를 쓰는 궁녀집단을 통해 만든 자들의 기호에 충실해야 하는 순수예술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순수예술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서도, 혹은 어떠한 세속적인 삶과도 결부되지 않은채 절대적인 순수의 세계속에서 절대순수를 위한 예술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그러한 순수예술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는 절대 상치되어서는 안되는 삶인 것이다. 그것이 권력이든 사랑이든 그러한 순수예술은 그를 만든 사람을 위해 봉사를 할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응징되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상사몽>에 나타난 시와 예술의 의미를 이렇게 읽었다. 그러나 과연 현대의 순수예술이 이러한 형태와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것은 따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며, 그로 인해 이 작품이 현대적 상황에서의 의미를 묻지 않고 과거의 시대적 상황에만 머물러 있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여하튼 이러한 운명에 의해 운영과 그녀의 연인 김진사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유영’이라는 이야기꾼에 의해 책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관객들이 무대에서 본 이야기는 유영이라는 서술자가 운영과 김진사를 꿈인지 현실인지 혼돈된 상태에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러한 이야기를 책으로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객이 이제까지 본 이야기는 유영이 전해들은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이야기를 한편 들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꾼은 유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제작진이 현대의 관객들에게 그러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꾼의 존재는 싹 빠지고 옛날이야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시사점은 이러한 옛날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어쩌면 제작진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 고전소설에서 유일한 비극이라는 점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한국판 비극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꾼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을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비극을 이야기꾼이 이야기로 전달해준다는 것은 현대 연극이론에서 보면 다분히 현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꾼의 존재를 단지 장식품으로만 머물게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의 현대적 의미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관객들이 여유가 많아서 한편의 단순한 옛날 이야기를 들으러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장시간 극장에 앉아 있는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관객은 그러한 옛날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그러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이야기꾼들의 생각과 아이디어, 그리고 예술적 감각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현대화는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시청각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포장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 작품이 외국의 관객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를 아름답게 포장해서 소개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한국의 관객으로서 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이러한 옛날이야기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한국관객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고, 위안을 줄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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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다른 이름 - 소통과 나눔 <아미시 프로젝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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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문(숭실대 강사)
극단 : C바이러스 작 : 아미시프로젝트 연출 : 이현정 공연기간 : 2011.3.5~2011.4.10 공연장소 : 신촌 THE STAGE 관람일시 : 2011.3.16(수) 8시
인간에게 의사소통의 도구들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 의사소통을 통해 인간관계도 형성된다. 소통이란, communicare란 어원에서부터 알 수 있듯 나눔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극단 C바이러스의 <아미시 프로젝트>(2011.3.5~4.10)는 소통하고픈 소망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아미시라는 공동체 마을에 갑자기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살인자(에디)마저 자살했다. 아미시인인 죽은 소녀들(안나, 벨다), 에디, 살인자의 아내(캐롤)와 비아미시인(셰리, 아메리카), 아미시인을 대변하는 자(빌노스) 등 각 인물의 시선에 따라 총기 난사 사건은 덤덤하게, 빠르게, 느리게 여러 번 재현된다. 극은 살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사건이 일어난 이후 사람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미시 프로젝트>는 소통의 부재와 용서에 대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캐롤(살인범의 미망인)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캐롤은 에디가 저지른 일의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만 했다. 자책감과 원망, 혼란, 혐오, 수치심은 그녀를 황폐하게 만든다. 캐롤은 CF와 ‘뉴스 속보’를 통해 소통 하려하나 실패하고, ‘자외선 차단제’를 덕지덕지 바르며 숨으려 한다. 이런 ‘화장하는 행동’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거리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비아미시인인 두 여성(셰리, 아메리카)으로 대변된다. 캐롤에게 ‘싸이코’ 라고 가장 신랄하게 공격하는 이는 셰리이다. 평범해 보이는 셰리는 13살 때 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처벌을 가하지 못했다. 마트 계산원인 아메리카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어린 임산부이다. 이렇게 상처를 지닌 이들이 캐롤에게 ‘타인의 왜곡된 시선’ 이란 같은 상처를 준다. 이 부분은 연극의 핵심사항이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나누고, 소통해야 하는지 모르기에 과거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숙제와 같다. 이에 반해 아미시인들은 대변인(빌노스)를 통해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종교 공동체 공간에서 벌어진, 비종교인의 행동에 대해 가장 상처 입었을 아미시 시장은 두 딸을 죽인 자의 아내, 캐롤을 찾아가서 애도를 표한다. 사실 아미시 시장은 과거 빌노스에 의해 죽을 뻔 했었다. 그러나 시장 아버지는 빌노스를 받아들였고, 유대적인 관계를 오래 간직했던 것이다. 아미시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그려진다. 캐롤은 처음에 아미시장의 애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미시장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뒷모습을 보이며 작게 흐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일방적인 상처가 아닌 소통과 나눔이라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적 용서’의 한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대 가운데 우물처럼 패여진 공간에선 아미시의 죽은 아이(안나와 벨다)의 천진난만한 놀이가 펼쳐진다. 현실 속에선 있을 법하지 않은 이 공간은 현대인이 가고 싶어하는 그 공간일수 있다. 캐롤과 아미시장이 소통한 이후 비 아미시인들이 그 공간으로 들어가서 미소짓는 것으로 그들의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었으나, 과연 현실 속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질수 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어린 여자아이를 키우기가 무서운 세상 속에 살고 있다. TV를 틀면 온갖 사건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범죄자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찾으려고 할수록 그들의 가족은 상처를 받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내가 하지 않은 일로 타인에게 손가락질 당하던 그녀나 한순간에 살인자가 된 그나 한때는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순간의 잘못으로 모든 것은 헝클어진 것이다. 빠른 해결방식을 요구하는 현재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이 연극은 임무를 다한 듯 하다. 제시카 디키의 원래 대본은 모노드라마였다고 한다. 번역되면서 극중 인물은 8명으로 바뀌었고, 극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는 좀 더 탄탄해졌다. 아미시인/비아미시인의 층위를 좀더 정교하게 가꾸어서 해석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80년대 신촌에서의 연극부흥을 꿈꾸는 신촌 연극제를 알리는 첫 작품으로 “소통과 용서”의 메시지를 담은 이 작품이 선택된 것은 2011년의 화두로 분명 의미가 있다. 종교적인 가치관을 떠나 우리는 현재 얼마나 소통하고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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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게 역사를 기억하는 요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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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무
공연명: 야끼니꾸 드래곤 극작/연출: 정의신 극단: 한국 예술의 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 공동제작 상연일시: 2011.3.9-3.20 상연장소: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관극일시: 2011.3.15. 19:30
피해자의 강박 일본은 참 불편하다. 침략과 약탈로 얼룩진 오랜 역사적 관계가 그렇고,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일제강점시기의 앙금이 그렇다. 과거의 만행에 대한 반성 없이 식민통치기를 찬양한다거나, 한민족을 비하하는 망언을 서슴없이 저지를 때면 불편은 곧 분노로 바뀐다. 때린 놈은 다리 뻗고 자지 못한다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보기에 일본은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강자 행세를 하고 있고, 전쟁범죄와 학살, 인권유린을 반성하기는커녕 호시탐탐 군국주의의 칼날을 가는 음험한 사무라이 흉내를 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본을 어깨동무 친구로도, 배척하고 도외시할 남으로도 대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이다. 겉으로는 선린과 우호의 구호를 남발하지만, 그 이면에는 침탈과 착취로 인한 피해의식과 굴욕과 열등감으로 인한 자기비하,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씻기지 않는 분노와 경쟁 심리, 질투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울분이나 원한을 과도하게 억압할 경우 자기방어기제로 속마음과 전혀 반대되는 행동양상이 발현되는 것을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명명하는데,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신경증적 강박 증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중감정의 음영 수십 년간 반복적으로 체화된 이런 정신분열적 징후는 최근 일본 대지진과 독도 교과서 문제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지진 초기에 국적을 초월한 휴머니즘적 지원이 쏟아지다가 순식간에 그 열기가 식어버린 것이 그것이다. 3월 15일부터 17일 사이에 매일 30억 원에 가까운 성금을 걷은 대한적십자사는 일본 독도 교과서 논란이 시작된 3월 21일 이후로 하루 모금액이 10억 후반대로 급감했다고 밝혔다. 교과서 왜곡이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라고 해도 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국가적 재난에 비견될 수는 없다. 아니, 비견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릴지라도 교과서 왜곡과 인도적 지원은 서로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이다. 아이가 장난감 사달라고 떼쓴다고 흐르는 코피를 닦아주지 않을 텐가. 어렵게 꺼낸 자선의 카드를 이처럼 쉽게 철회해버리는 경박함은 떼쓰는 아이에 대한 응징도, 보복도 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내부에 잠재한 강박적 민족 정서의 교착(交錯)에 불과하다. 증오와 우호의 양립불가능성을 스스로 노출시킬 뿐이다. 이는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하중에 짓눌려 스스로 패착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 패착의 한 가운데에 재일동포 문제가 폐가처럼 쓸쓸하게 버려져 있다. 증오도 우호도 아닌 애매모호한 회색 감정은 남북대립이라는 변수까지 개입하여 점점 더 운신의 폭을 제한시킨다. 우리가 망설이고 티격태격하는 동안 재일동포들은 잊혀지고 버려졌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김희로 사건은 왜 일어났고, 추성훈과 이충성은 왜 귀화를 했는지 우리는 관심이 없다. 정대세, 안영학, 량용기, 리한재가 어떤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 우리는 냉담하다. 우토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재일동포의 문제에서 우리의(정부도, 국민도) 유일한 태도는 침묵이고 외면이다. 모순적이고 이중적 감정의 틈새에서 그들은 점점 더 지워지고 있다.
미학과 윤리의 방정식 그러던 차에 실어증과 이지메, 자살 시도, 고교 자퇴의 상처를 안고 유미리가 왔고, 그 후 빈민촌 고물상 아버지와 청소부 어머니 슬하에서 가난과 차별, 멸시를 견뎌낸 정의신이 왔다. 호적에서 파낸 자식이 제 부모의 위선과 강박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상처와 슬픔을 안고 고향을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열렬히 환대한다. 고난과 좌절을 극복하고 일본 주류 연극계에서 당당히 명함을 내민 정의신을 찬양하며 영웅화 작업에 여념이 없다. 기특하고 장하단다. 야끼니꾸 드래곤의 예술성에 대한 찬사가 이어진다. 부모가 버린 자식이 훗날 성공하여 집을 찾아오자 그 애비가 자식이 가져온 재산목록을 보며 흐뭇해하는 풍경이다. 자식이 겪었어야 했던 신산스러운 삶의 역경은 보지 않고, 애정 결핍된 자식의 상처를 핥아줄 생각은 않고, 혼자서도 잘 자란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꼴이다. 찢겨지고 할퀸 자신의 상흔을 보여주는데도 그것이 제탓 아니라는 듯, 이미 지나간 일이란 듯 딴청이다. 아니, 제탓이라는 죄책감을 호들갑으로 애써 은닉시키려 한다. 심지어 애초에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인멸을 공모하려는 듯한 무의식적 음모까지 느껴진다. 야끼니꾸 드래곤에 대한 찬사 수위가 높아질수록, 재일동포의 고난은 미화되거나 침식된다. 그리고 우리의 죄책감도 경감된다. 미학에 손을 들어 윤리를 잠재우려는 것이다. 미학과 윤리의 반비례 관계를 못 박기. 호들갑 속에 감춰진 우리의 무의식은 이처럼 불순하다.
과거는 미래에서 시작 된다 야끼니꾸 드래곤을 향한 시선에는 우리가 방치했던 그들 삶에 대한 반성과 분석은 없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눈물겨운데, 상황 종료된 듯 고생했다고 어깨를 두드린다. ‘반쪽바리’의 삶은 계속 되는데, 우리가 할 말은 여전히 ‘알아서들 사시오’, 이다. 이 모든 것을 얼버무리는 열광적인 박수소리에 넋이 나간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찬사는 마치 우리의 정신분열증이 발각된 것처럼 민망하고 부끄럽다. 이제는 감정의 이중성조차도 더 이상 불편하지 않는 이 ‘극복의지없음’이 낯 뜨겁고 열없다. 예술이 보여주고자 한 삶의 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 아름다움에만 경도되어 형식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삶을 보지 못하고 삶의 거적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가 겪는 강박의 일종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야끼니꾸 드래곤은 우리에게 육중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보상을 요구하는 버림받은 자식의 투정이 아니다. 진정 우리는 야끼니꾸 드래곤에 대해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화두, 우리가 코앞의 이익에 눈멀고(한일협정), 이중감정의 현기증에 시달릴 때, 이들이 자존심과 생존권을 담보로 하여 다져온 그것. 용길이 부부는 일본에 남고, 시즈카 부부는 북한으로, 리카 부부는 남한으로, 미카는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극은 종결된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사지선다형 문제의 네 가지 제시안을 우리에게 내밀고 있다. 재일동포들이 수없이 선택을 강요받아 왔을 네 가지 삶의 방식. 일본이냐, 조선이냐. 일본이라면 우리끼리냐, 일본인과 함께냐. 조선이라면 남조선이냐, 북조선이냐. 그렇다, 야끼니꾸 드래곤는 아픈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 남한에서, 북한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용길이네 가족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이들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일본과 한국, 남한과 북한으로 갈가리 찢겨진 이들에게 우리는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재일동포의 과거와 미래를 규정하는 이에 대해서 답을 궁구하지 못하면 야끼니꾸 드래곤에 대한 찬사는 허구다. 이 문제에 대한 강박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면 야끼니꾸 드래곤의 예술성은 빛 좋은 개살구이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소외받고 멸시받은 자의 자기고백 속에서 진주처럼 영그는 진실한 깨달음과 진지한 관조를 담고 있다. 그것은 분열을 통합으로, 증오를 화해로 전환시키는 강렬한 염원을 내포한다.
체호프의 잔영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깨달음과 관조의 미덕은 야끼니꾸 드래곤을 체호프 드라마와 한 무리로 엮어주는 주요한 근거이다. 실제로 야끼니꾸 드래곤에는 체호프적 특성이 넘쳐난다. 탈출을 꿈꾸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엇나간 사랑과 삼각관계 등 연정을 토대로 한 드라마가 펼쳐지고(갈매기), ‘떠나기’로 무대 막을 내린다. ‘일’에 대한 집착과,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도 결국 미래엔 잊히고 말 것이란 체념(바냐 삼촌), 땅을 밀고 공원으로 재개발하는 설정(벚꽃동산)도 체호프에게 의지하고 있다. 특히 책임감 강한 노처녀 올가, 불행한 결혼생활에 지친 마샤, 순진하고 꿈 많은 이리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외아들 안드레이가 등장하는 세 자매의 가족 구성은 용길이네 가족 구성(시즈카, 리카, 미카, 토키오)과 정확히 겹친다. 의사소통의 단절과 희비극적 분위기도 일정부분 체호프에게 빚지고 있다. 개인적인 절망과 비애를 집단적인 웃음과 폭소로 희석시켜버리는 것도 체호프를 따르고 있다. 삶을 개조시키려는 의지나 가능성보다는 운명과 팔자에 의탁하려는 태도도, 부성의 권위가 약화되거나 퇴화되어 드라마적 탄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점도 체호프적이다. 그렇다고 야끼니꾸 드래곤이 체호프의 잔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개성이 넘치는 인물묘사와 여흥과 서정, 갈등과 이완을 적절히 엮는 플롯 구성의 묘미,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부산스러운 리듬감과 활력, 슬픔과 기쁨의 감정적 진폭을 극대화하여 희비극적 효과를 산출하는 연출적 집요함, 발성, 몰입, 제스처, 표현력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력 등 야끼니꾸 드래곤이 내세울 수 있는 연극적 미덕은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스산하고 음울한 철거건물을 배경으로 벚꽃이 날리는 마지막 장면은 누구나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선사한다.
부성 부재 하지만 무결점 공연의 종결자인 야끼니꾸 드래곤에도 거슬리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웃음의 범람과 부성 부재가 그것이다. 야끼니꾸 드래곤에는 3년 전 공연에 비해서 훨씬 웃음이 많아졌다. 아니, 웃음이 헤퍼졌다. 삶에 대한 낙관과 소통에 대한 회의, 희비극적 전략 등 야끼니꾸 드래곤에서 웃음을 포진시킨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합당하다. 하지만 웃음이 극의 상황 분석과 정서 파악을 방해할 정도로 자주, 그리고 과하게 쏟아진다. 자막을 읽으며 웃음소리에 취하다보면 에피소드가 훌쩍 지나가버린다. 자기절제에 능통한 일본 문화 속에서 그렇게 웃음이 방임될 수 있는 지도 의문이다. 극적 긴장감이 가끔씩 파스farce적 분위기 때문에 붕괴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둘째, 부성 부재는 정의신이 아버지 용길의 원형으로 삼은 인물들이 있기 때문에 그 리얼리티에 대해서는 논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극적 기능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긴다. 아버지 용길은 사는 게 싸움인 사람이다. ‘인생은 전쟁’이라는 은유를 체현하는 사람이지만, 그가 어떤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지는 정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토키오의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밑도 끝도 없는 완고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토키오의 자살 후에도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반성도, 후회도 안 한다. 그는 늘 집 밖에 존재한다. 공동우물에서 곱창을 씻고, 가게 골목길에서 물끄러미 앉아 있는가 하면, 중요한 장면에서는 무대를 비운다. 몸도 마음도 집 밖에, 가족 밖에 있다. 위치가 불안한 만큼 배역도 힘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게 당신 팔자고 내 운명이”라는 그의 푸념은 무책임에 가깝고,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가 있지”라는 마지막 메시지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체호프 극에서 부성 부재는 지난 세대와 단절된 뿌리 뽑힌 존재를 그려내지만, 야끼니꾸 드래곤에는 딱히 맥락이 드러나질 않는다. 굳이 유추하자면, 가부장적 부성의 종착인 ‘국가’가 부재한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짐작된다. 아버지의 행위가 인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지만, 그의 기능이 드라마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교정되어야 한다.
하늘 아래 다 같은 생명 무대에 관해서 한마디. 공연 20분 전부터 인물들은 무대 위에서 곱창을 구우면서 ‘삶’을 시작한다. 관객들은 ‘야끼니꾸 드래곤’을 지나가는 행인이자, 이웃으로 자연스레 무대의 리얼리티 속으로 스며든다. 자질구레한 소품까지 실제 사물들을 끌고 들어온 듯한 사실적 무대구성은 최근 우리 연극이 잊어버린(혹은 몰아낸) 리얼리즘의 환영성(illusion)에 대한 향수까지도 자극할 정도다. 실로 간만의 풍경이다. 상세하고 세세한 디테일은 일본의 70년대라는 낯선 시공간을 망원렌즈 앞으로 호출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한 전형을 상기시키는데, 어쩌면 해방 전부터 이식된 우리 강단 연기술의 원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자체로 짜릿한 면이 있다. 다시, 야끼니꾸 드래곤이 던지는 화두로 돌아가자.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지는 이중감정과는 별개로, 작가는 비극을 웃음으로, 감정의 빗장을 화해의 교두보로, 그리고 절망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놀랄만한 관조의 너른 품을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무대를 열고 닫는 토키오의 역할은 명확하다. 지붕 위에서 지난 시절이 좋았고 외치는 토키오의 고백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준엄한 명령과도 같다. 일본에 머무르든, 남한으로 가든, 북한으로 가든 반드시 행복해야한다는 지상과제. 환경을 탓하기 전에, 차별을 원망하기 전에 먼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 그것은 증오와 원한을 넘어서는 고차원적 가치이다. 이중감정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이 용서하되, 잊지 않는 진정한 승리의 전략이다. 대입 국사시험을 영어로 보자는 고위공무원이 있는가 하면, 국사를 아예 선택과목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 우리들이다. 친일파 척결, 강제징용과 정신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강박은 역사적 근거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남한과 북한이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토키오의 고백 앞에서 당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자, 누구보다 처참하게 일제에 능욕당한 정신대 할머니들은 “하늘 아래 다 같은 생명입니다”라고 외쳤다. 토키오의 죽음에 먹먹한 것도, 그들의 차별에 분노하는 것도 그 ‘생명’ 때문이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도 ‘생명’ 때문이다. 이보다 더 높은 가치를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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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연기 미학, 연출가의 연기 철학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장석조네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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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영(평택대학교 방송연예학과)
극단 : 드림플레이 작 : 김소진 연출 : 김재엽 공연기간 : 2011.3.17~27 공연장소 :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관람일시 : 2011. 3. 26. 3시
2005년 이후 잠시 국내에 없던 시절 인터넷이나 연극 잡지 등에서 종종 들려오는 연출가 김재엽과 극단 드림플레이,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작품의 특이한 제목이 그랬다. 연세대학교 앞에 있던 작은 사회과학 서적, 오늘의 책이 어디로 사라졌냐고 묻는 황당한 질문이,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 할 것이냐는 오지랖 넓은 물음이 그랬다. 이번에는 지난 시대의 작가, 김소진의 소설이란다. 젊은 작가와 감각 있는 연출가들의 로맨틱 코메디가 판치는 대학로에 여전히 참 진부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가져왔구나 싶었다. (그것도 젊은 사람이) 어쩌면 김재엽 그의 질문과 그가 가지고 오는 이야기는 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끝물에서 386세대에는 끼지 못한, 그렇다고 서태지와 함께 신세대도 되지 못한 나같은 세대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책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대한민국 20대를 이렇게 내버려 둬도 괜찮은지, 그리고 잊혀져 가는 것들이 정말 잊혀져도 되는 것들인지 이야기는 해 봐야 할 것 같은 죄책감. 그리고 왠지 모를 책임감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말이다. 그동안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만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날이 서있지는 않지만 작품 전반에 단단하게 깔려 있는 문제의식과 더불어 그 문제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힘을 주지도, 그렇다고 가볍기만 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장석조네 사람들” 역시 소설가 김소진의 따뜻한 시선을 그대로 연극으로 옮겨 오며 무대에는 도저히 옮길 수 없을 법한 많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삶을 관객 앞에 나열한다. 소설보다 더 세련되게 혹은 좀 더 극적인 구성을 만들지도 않고 많은 인물과 그들의 소소한 삶을 관객 앞에 그대로 들이대며 정면승부 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세 시간이라는 긴 공연 시간 내내 70-8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기쁨을 맛본다. 그 시대를 살았던 잊혀져간 삶들과 그 삶속에 내재되어 있는 잊어서는 안되는 삶의 가치들이 다시 솟아난다. 하지만 “장석조네 사람들”은 그 공연의 형식면에서 관객과 소통하는데 과연 성공했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 2009년 혜화동 1번지와 연우무대에서 만들어진 장석조네 사람들은 2011년 남산예술센터를 거쳐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으로 집을 넓혀 이사한다. 소극장에서 만들어졌을 때를 상상해보면 지금보터 훨씬 더 복작복작, 아기자기 재미있었을 듯싶다. 여러 인터뷰에서 연출이 이미 고백했듯이 소극장의 작품을 중극장으로 가져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고 그로인해 많은 고민과 시도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관객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대학로 예술극장은 관객과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삶의 소소한 모습을 담아내는 작품에는 그리 걸맞지 않은 극장인 것은 사실이다. 연출가와 배우들은 이 넓어진 공간과 멀어진 관객과의 거리를 메우려고 부단히 애쓰는 듯 보였다. 배우들은 평상을 중심으로 빈 공간 없이 장석조네 마당 전체를 메우고 서 있으려 했으며 좀 더 멀리 있는 관객도 아우르려는 듯 관객을 향해 대사를 쏟아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극 중간 관객석으로 내려와 관객과의 접촉도 시도했고 소극장에서도 그러했겠지만 피날레를 막걸리 파티로 마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극장에서 만난 장석조네 사람들은 몇몇의 배우들을 제외하고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중극장을 의식한 과장된 몸짓과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이야기 하는 태도들은 순간순간의 목표를 잃고 헤메고 있었다. 극이 시작되고 거의 30분간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각종 사투리가 잘 안 들려서도, 많은 인물들이 쏟아져 나와서도 아니다. 관객의 일원으로 어떻게 배우들을 따라가야 할지 몰라서였다. 장석조네 마당에 나와 서 있는 배우들은 다른 배우가 대사를 하는 순간에 모두 정지동작을 취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오면 평상에 올라가 크게 소리 내고 대사를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태석 연출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극적 장치라고 생각했다. 서로 바라보지 않고 관객을 향해 대사를 하거나 다른 사람이 움직일 때 정지하고 있는 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말이다. 하지만 곧 그러한 순간들이 의도가 아님을 알게 된다. 1인 2역, 혹은 3역의 문제도 심각했다. 배우는 변신을 시도했지만 관객은 변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1인다역의 연기는 관객에게는 고통이다. 주혜원의 연기가 그랬고 우돈기와 김주령의 인물들도 그 차이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힘든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은 드라마에서 1인 다역에 성공했다. 그녀는 'Angels in America' 라는 작품에서 유태인 할아버지를 연기했는데 완벽한 변신으로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공연에서의 1인다역의 묘미는 관객이 극이 끝날 때쯤, ‘아, 이 인물이 그 인물이랑 같은 사람 아니었어?’ 라는 질문으로 극을 다시 반추하게 만드는데 있지 않다. 같은 배우인줄 몰랐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때, 한 배우에게 저렇게 다른 모습이 공존하는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묘미, 혹은 같은 배우임을 알고 보더라도 한 배우가 짧은 시간에 여러 역할을 소화하는 것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1인다역의 묘미가 아닐까? 이것은 비단 배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연출가가 원하는 배우의 연기, 그 전반적인 철학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장석조네 사람들’에는 그것이 부재했음을 알 수 있다. 무대 한 가운데 펼쳐진 평상이 사실적이지만 구성원 전체의 소통의 장이 되는 공간으로 상징화 된 것처럼 연기도 좀 더 양식화되는 지점들이 필요했는지, 혹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에 맞추어 여러 사투리들과 어울려 아주 사실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가기를 원했는지 연출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다. 소극장 공연 후 여러 매체에서 칭찬한 배우들의 앙상블도 다른 공연에 비해 특별하지 않았다. 다같이 멈추고 다같이 과장된 것이 앙상블이라면 그렇다 치다. 오히려 감초처럼 등장해 이완된 몸으로 인물을 만들어 나간 이정은과 김하리의 연기는 중간중간 관객들에게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었다. 연출가는 중간 중간 영상을 사용함으로 관객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허용했고 무대 뒤쪽에 납작하게 붙어버린 작화 무대를 사용함으로 노골적으로 관객이 작품 깊숙이 들어오지 않아도 됨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극의 중요한 장치인 평상이 무대 한 가운데서 시간을 뛰어 넘은 공간, 장소적 의미에 갇혀있지 않은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 역시 이에 걸맞은 통일된 양식이 필요했다. 더구나 몇 년을 함께 해온, 눈빛만 봐도 서로의 호흡을 알 수 있는 동인제 극단이 아닌가? 극단 드림플레이의 연기 철학과 미학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정이 넘쳤고 지저분했지만 서로 소통했으며 보잘 것 없었지만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대 위에 존재하는 소통과 공존을 관객이 향유 할 수 있었다면 3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거의 일주일 이상 연기와 연극배우들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20대를 지나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서는 배우들의 연기와 그들의 삶을 묵상했다. 열정과 패기, 그리고 연기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온 20대와는 달리 이제 30대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배우는 좀 더 다른 국면에 처하게 된다. 열정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시기가 오는 것이다. 수많은 대학로의 선배들이 경제적 빈곤과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의 열정을 연기에 쏟아냈기에 우리의 연극하는 환경이 많이 좋아지고 있음을 항상 감사하고 그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작품, 더 좋은 연기자를 만들어내는 대학로를 기대해야 하고 그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이야기 해야 한다. 나는 대학로의 30대 연극배우들이 정체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배우들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는 자신의 예술의 깊이를 위해 철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얼마 전 타계한 화가 김점선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깨에 마비가 올때까지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예순이 넘은 대중가수 조용필은 아직도 관객이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나, 나의 노래를 좋아할까 라는 두려움으로 무대에 선다고 한다. 배우도 역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과 그에 걸맞는 끝없는 노력만이 깊이 있는 배우를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또한 비평가들이 연극배우들의 연기를 열심히 이야기해주기를 소망한다. 영화는 일단 만들어지면 가차 없는 관객의 평가를 받는다. 박스오피스 순위로부터 평론가의 호된 비평, 심지어는 네티즌들이 주는 별이 두 개인지 다섯 개인지도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연극 비평 혹은 연기 비평은 아직 이런 통로가 많이 부족하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씨 연기, 박쥐의 송강호씨 연기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았던 것처럼, 연극배우들도 이 갑론을박의 중심에 서야 한다. 오태석, 이윤택, 박근형, 고선웅 등의 연출가들의 작품에 나오는 배우들은 굳이 극단의 단원이 아니더라도 항상 같은 배우들이 무대에 서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재엽의 드림플레이도 마찮가지다. 이런 배우들에 대한 연기비평이 더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단순히 비평 제일 마지막에 몇 줄 써주는 성의 없는 비평이 아니다. ‘캐릭터를 훌륭히 창조했다’라거나 ‘앙상블이 좋았다’는 식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로의 중견 배우들을 향한 치열하고도 애정 어린 비평가들의 평론이 우리 연기의 지평을 더 넓혀 주리라 확신한다.
드림플레이와 연출가 김재엽에게 관심이 많다. 그들이 아직도 뭔가 촌스러운 이야기와 형식을 고집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아직 힘주지 않은 힘과 값싸지 않은 동정, 그리고 기분좋은 애정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기대할 것이다. 다음 작품에서는 더 치열한 고민으로 무장한 따뜻한 이야기를 깊이 있는 철학과 미학을 담은 그릇에 담아내기를. 드림플레이의 배우들이 대학로 모든 술자리의 화두에 올라 그들 연기에 갑론을박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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