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회원님의 개인적 부탁으로 메일로 보냈던 한국의 영화광 세대 이야기를 다른 분들의 재청이 있어서 다시 다른 구체적 정보들을 참고하여 다시 정리해봅니다. 이 글은 이번에 카페 명을 바꾸는 것과도 다소 관련이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우리 카페 사상 최장의 글이자 저의 가장 긴 글(A4 6장 분량)이 될 것이니 스크롤의 압박을 심하게 느끼시는 분은 일독은 포기하시고 사진 근처 부분만 살짝 읽어주세요.
********************************************************************************************************* 영화광이라는 단어 사전에서 '영화광'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취미 이상으로 영화를 매우 좋아하고 자주 감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나옵니다. 위에서 '취미 이상'이라는 외연 설정에는 모든 개량적인 언어의 뜻이 그러하듯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그 취미라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이상, 이하의 선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그것은 각 영화관객의 주관에 미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블로거 중에는 매일 한 편 이상을 보고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많고 영화제 싹쓸이파로 하루에 6편 이상을 보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특정 극장에 가면 매번 만나서 안면이 익은 관객들도 많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영화광이라고 할지는 단지 숫자상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편수 이외에 자신과 영화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자신을 영화광 소위 씨네필이라는 불리는 집단에 포함시킬 것인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글 제목을 단지 한국의 영화광이라고 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나라고 부연한 것에는 저 자신을 영화광이라고 하기 곤란하다는 완곡한 부인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제까지 위에서 예로 든 영화광의 자세를 가진 적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 앞으로도 점점 더 그나마의 열기조차 누그러질 것입니다. (물론 가끔은 앞으로 봐야할 영화목록을 보며 흐뭇해지기도 합니다만) 제게 영화보기는 취미 생활 ‘이상’이 결코 아닙니다. 누구셨던지 보통 한국의 영화광 세대를 나누는 기준은 문화원-비디오-파일이라는 유형의 물리적 관람 양태를 반영하는데 이는 이미 그 안에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남다르다는 소위 영화읽기라는 관념이 묻어있습니다. 즉,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일회성 소비를 지양한다는 지식인적 태도가 관여하는데 이는 각 층들의 계급적 위치와 세대별 문화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난해한 ‘세대론’이 아닌 ‘세대’에 대한 단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들 이전에 소위 영화광 1세대 이전에 누구였든지 하루에 한 편씩 영화를 보러 다니고 극장에서 매일 애인과 데이트를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역사는 결국 현재 일정 지위를 부여받은 이들에게서 기록되므로 그들이 전대의 무명 영화광들을 구체적으로 불러주는 대신에 관객이라는 한 무리로 취급하여 세대를 보여주는 것은 구술상 무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의 아버지 시대(50년대에서 60년대까지)에 만끽하셨을 오직 극장이라는 공간 이외에 영화 매체를 접할 수 없었던 시절의 가난하면서도 낭만적인 영화광들이 부럽고 그리워 감히 선배들이라 호명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그 이전 할아버지 시대(20년대에서 40년대)는 다소 멀게 느껴지는군요.
존 웨인, 몽고메리 크리프트 하워드 혹스의 '붉은 강'
제 가족 안에서만 말씀드리지면 아버님께서는 초창기 자동차 운전학원 강사를 하시면서 직장이 끝나면 매일 100석이 약간 넘을까싶은 부산 동네 극장에 자주 가셔서 미국 영화들을 보셨는데 이후 80년대 초반에 아버지와 같이 서부극을 조그마한 TV에서 볼 때면 항시 저건 옛날에 어디서 본 영화인데 하시며 담배 연기를 가득 뿜어내시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니던 극장은 아니지만 역시 부산 어디 구석진 곳의 극장에서 매표원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인 제가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동생이 연영과를 지원했던 건 다른 배우나 감독 가족 집안의 모습에 비추어볼 때 그 가난한 판본이라고 할까요. 제 1세대 영화광 프랑스와 독일문화원 세대 이전 60년대에 이미 몇몇 신문사와 영화잡지들은 영화평론 부분을 두어서 영화평론가 등단제도를 운영했으니 실제 이 당시 등단했던 평론가 1세대들은 아마도 영화광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생소한 이영일, 김종원,안병섭,변인식, 홍파, 등은 영화예술이라는 잡지와 1960년에 창립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들이 아직 생존해계시는 선배들이다. 5.16. 군부 쿠데타 이후 약 5년간 침묵하던 평론계는 65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1970년대부터 등장하는 ‘영화를 사랑하는 한국 영상 작가 협회’ 등의 일련의 영화단체에 유현목을 비롯한 하한수, 변인식,장석용,하길종, 이장호 ,배창호, 이미례, 신승수 등등의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68년에 개원한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 그리고 1973년 개원한 영국문화원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한 독일문화원의 동서영화연구회에서는 장석용,전양준, 정성일, 강한섭,정유성, 신 철, 홍기선, 김홍준, 정지영, 한상준 등의 현재도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평론가와 영화제 프로그래머, 교수와 영진위원장 등의 실질적인 영화광 1세대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의 면면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문화원 거리
이들이 가지는 프랑스와 독일 문화원에서의 영화 수혈에 대한 이야기는 일정 정도 전설이 되었고, 트뤼포의 유명한 격언이 실제로 최초로 한국에서 연주되는 그들만의 해방구 안에서 어두운 감격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생이라는 당시로서는 자유 신분이었고 모두 지방이 아닌 서울이라는 공화국 안에서 숨쉬고 있었으며 영어나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니 일반 관객들과는 다른 엘리트였으며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프랑스와 미국으로 더 넓은 영화를 보고 공부하기 유학을 다녀올 정도의 중산층 자제들 이였습니다. 그 영화광 1세대들은 90년대 중반 이후 거의 공식적인 문화가 되어버린 영화판에서 가장 큰 지위와 권력을 누리는 첫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후배인 이후 2세대나 아직 출발하지 않은 3세대보다도 현재 영화광들이 영화를 보는 시선과 문체에 가장 강력하게 미치고 있는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는 광주와 꽃병과 지랄탄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 시대 초입인 1982년 서울대 영화동아리 알라셩은 서울 영상 집단을 만들고 이듬해 지금도 헌 책방에 가면 찾을 수 있고 90년대 초반에는 필독서였던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라는 서적을 출간했는데, 네오 리얼리즘과 마당극의 옹호, 다큐멘타리, 열린 영화의 시선들이 들어있는 그 책 저자 명에서 우리는 장선우와 홍기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고 나중에 서울 영화 집단으로 개명했다가 90년대초반 해체했던 이 80년대적 학생 운동의 모습이 연상되는 이 단체에서 박광수와 김의석 등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후 영화판에서 어떻게 그들의 글과 젊음을 발휘했는지는 거의 30년이 흐른 21세기의 관객이 판단할 몫이기는 합니다만. 87년 항쟁의 우스꽝스러운 시대의 자화상 노태우 집권기에 이르면 당시 대학가를 돌며 집회 때나 학교 문화제때 상영되던 영화들을 기억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화들은 그냥 만들어지고 아무데서나 상영된 것이 아닌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너무나 어렵게 극장이 아닌 장소에서 ‘틀어졌기’ 때문입니다.
파업전야 대학교 상영 포스터
‘장산곶매’, ‘노동자 뉴스 제작단’, ‘푸른영상’ 들의 영화집단 ‘오! 꿈의 나라(1989년)’, ‘파업전야(1989년)’, ‘상계동 올림픽(1988년)’ ‘닫힌 교문을 열며(1991년)’ (신일고에서 일부 촬영) 독립영화의 1세대라고 다르게 명명해야할 이 영화들이 1세대와 2세대 영화광 사이에서 만들어졌고 당시 군부 독재의 정치적 상황이 80년대의 영화광의 탄생을 지연시켰지만 제2세대 영화광들은 헬리콥터가 뜨고 전경의 방패발이 도서관에 올 때를 대비하는 그 마음으로 90년대의 시네마떼끄 운동이 시작하게 됩니다. 저도 89년말에 대학교 도서관에서 ‘파업전야’를 경찰 헬리곱터와 같이 만났습니다만 정작 영화는 보지도 못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관객들을 검문이랍시고 했었는데, 물론, 영화광과는 전혀 관계없는 대학초년병의 최전선 임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80년대에는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또다른 영화창고가 있었습니다. 바로 변두리 재개봉관과 재재개봉관이라는 이름의 허름한 극장들이었습니다. 당시 부산에는 100석 규모의 영화관들이 거의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었으니 서울이나 다른 타 지역에서도 아마 같은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라는 영화에 나오는 극장 안 집단싸움 장면의 배경은 바로 부산의 삼성극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지금은 거의 폐관 지경입니다. 저의 경우 그 근처의 부산에서 남자고교생에게 가장 유명했던 007영화와 에로영화를 2본 동시로 상영할 때면 만원이 되었던 보림극장에서 ‘바보들의 행진(1975년)’을 비롯한 후일에 그 실체를 알게 된 감독들의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더불어 80년대 후반 학원가와 유흥가를 중심으로 나타난 소위 비디오방은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1994년)’의 배경이 만화방에서도 심야에 틀어준 성인 포르노물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가끔 불법으로 영화 개봉 이전에 유통된 ‘영웅본색 2’나 ‘람보 3’류 등의 제목도 누구 작품인지도 알 수 없는 영화도 가끔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 두 공간은 극장의 멀티플렉스 홍수와 관객층의 변화와 경제 상황의 변화 등으로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찾을 수 없지만, 80년대 숨은 영화광들의 휴양지 노릇을 했습니다.
제 2세대 영화광 드디어 이 땅에 자생적인 시네마떼끄가 나타났다. 1992년 11월에 문을 열어 지금도 존속 중인 ‘문화학교 서울’과 더불어 ‘영화공간 1895’, ‘씨앙씨에’, ‘영화도서관 빛’, 영화연구소 OFIA', '코아 시네마 라이브러리‘등의 단체들이 서울에서 90년대 영화광들을 맞이하여 영화 사랑을 이른바 영화 내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갈만큼 영화 분석과 토론이라는 진검승부에 열중하였습니다. 소위 ‘B자 비디오’라는 이름으로 떠돌던 자료들은 90년대 중반 영화광들은 누구나 한 두장씩은 만나거나 소장한 기억이 있을 정도로 불법 유통되었습니다. 일본이나 유럽, 미국 등지에서 구입한 비디오들에 자막을 입혀 비록 조악한 화질이지만 어디서도 만나지 못할 우리말 자막의 고전들을 통해 고다르와 우디 알렌과 안토니오니와 제 3세계 영화들을 만나고 광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대학가 영화동아리들은 이들이 유통시킨 비디오들을 두 대의 비디오를 연결해서 다시 복사해서 소장했으니 나중에 떼끄들은 원본을 금고에 보관하고 대여본을 따로 돌렸는데 거의 인물과 배경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최악이였습니다. 저도 아직 당시 복사한 비디오를 몇 장 아직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거의 추억소장품이 됩니다.
이들은 1997년 5월에 전국시네마떼끄 연합회를 발족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부산 씨네마떼끄 24/1(광안리 입구에서 부산대 앞 여인숙으로 옮겨졌던) 대전 컬트,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 전주 온고을 영화터, 대구 씨네하우스, 제7예술, 청주 시네 오딧세이, 강릉 씨네 쿠데타, 평택 씨네마 드리밍, 부천 영화열망, 제주 영화만세, 성남 시선 등 13개 단체가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연합체는 한국 독립영화의 유통과 배급과 상영을 담당하였습니다. 저 또한 당시 부산에서 부산 씨네마떼끄 24/1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앰버슨가(1942년)’를 봤던 기억이 선연합니다. 당시 같이 갔던 여자친구가 어찌나 저를 노려보던지 그도 그럴 것이 환기 시설도 없는 좁디 좁은 공간에 단 둘이서 불편한 의자에서 생전 처음 보는 미국 고전 흑백 영화를 보는데 화면 속에서 주구장창 큰 저택만 나오니 얼마나 지루하고 어색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제 2세대 영화광들의 자양분이 오직 위 시네마떼끄들의 B자 비디오들만은 아니었으니 이는 정치적으로는 90년대 초반 김영상 정권의 출범과 대중 상업 문화의 본격적인 기획화의 흐름, 문화 전반에서 고급 구매력을 가진 층의 등장과 더불어 영화 문화적으로는 찰리 채플린 영화들의 개봉을 필두로 한 고전 예술 영화들의 상영 예술 영화 전용관(서울의 씨네코아, 동숭시네마텍 등)과 예술 영화 수입사(1994년 백두대간 등) 등장 1995년 영화 백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예술 영화 관객층을 대상으로 한 씨네 21(1995년 4월), KINO(1995년 5월) 등의 영화잡지들은 이제 한국 정품 비디오시장에 강력한 수요층을 만들고 자극시켰습니다.
저도 1995년에 씨네 21 지면을 통해서 부산에서 영화동호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대학이 아닌 사회인들의 영화동호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많은 회원모집 광고가 매주 실렸습니다.
80년대초반 비디오대여점 모습
개인적으로 부산에서 90년대 비디오수집가로서 온 골목길을 다니고 1996년 겨울 영화마을 남천 비디오대여점에서 2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영화 친구들을 찾아서 만나고 토론하던 제게는 정품비디오가 오히려 친숙합니다. 우선 비디오대여점으로는 YMCA 좋은비디오숍 경영자모임에서 명칭을 ‘으뜸과 버금(1992년)’으로 바꾸어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개창했고 위 체인점에서 소위 특선비디오라는 상업적 방식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국내 최대의 비디오 프랜차이즈였던 ‘영화마을(1994년)’이 생겨나서 90년대 영화광들이 편하게 그 대여점만 찾아가면 숨어있는 비디오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흐름은 90년대 후반 비디오대여점이 내리막길을 걸을 때까지 ‘엑스트라’ 등의 다른 체인점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영화마을 주간 비디오소개란에 박찬욱 감독이 글을 올렸었고 잡지 KINO는 비디오 천일야화라는 연재를 몇 년간 여름호에 특집으로 실었으며 옥선희, 전영록 등 많은 영화 애호가와 미래감독들이 대여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여점들은 자신들만의 예술 영화 선정목록이 있어 비디오수집가들 사이에서는 비밀리에 입수하여 일종의 족보 노릇을 했습니다. 후일 이 목록은 책으로 3차례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중반 부산에는 으뜸과 버금은 거의 없었고 영화마을 대여점만 4군데 있었는데 그 곳들에 제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수집해서 기증한 비디오들의 추억은 가끔 회상에 젖게 만듭니다.
지금은 흔히 만날 수 있는 ‘시민 케인(1941)’은 1995년에서야 비디오로 출시되었고 당시 씨네마떼끄 24/1과 명화클럽 등 소수 예술 영화 출시사들이 ‘전함 포템킨(1925)’, 자전거 도둑(1948)‘, ’무방비 도시(1945) 등이 히치콕 시리즈와 같이 출시되어 90년대 후반의 영화광들에게는 영화 백년을 맞아서 출간의 붐이 일었던 각종 영화 서적과 짝을 이루어 잘 차려진 만찬같은 저녁식탁을 이루었습니다. 참고로 당시에 가장 유행했던 서적들은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김홍준이 90년대초 잡지 로드쇼에 연재된 것들을 묶은)’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1995년 영화 백년을 맞아서 문화학교 서울이 발간한)’ ‘영화의 이해(큰 책과 작은 책 두 가지 판본이 모두 인기 있었던)’ ‘FILM ART 영화 예술(일명 녹색책으로 불리며 최소 3독 정도는 필수였던)’ ‘세계영화사(이론과 실천에서 출간한 영화사 관련 거의 국내 최초였던)’ 등이었습니다. 사실 이 시기만해도 대형 서점의 영화 서적은 영화진흥공사의 출간물들을 제외하면 서가의 한 장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는 없었습니다.
부연한다면 한국의 비디오 역사는 1981년 9월에 삼화, 뉴비디오, 벧엘, 연합, 지구 등 약 10여개의 회사가 당시 문화공보부에 정식 등록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물론 비디오재생기는 2년전부터 대기업에서 만들어졌고 미군 부대를 통해서 지하 비디오들이 조금씩은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기 음비법이 만들어졌고, 약 100여개의 비디오대여점과 200여편의 정품 비디오가 출시되어 본격적인 비디오문화를 열어갑니다.
초창기 비디오자료들은 이제는 거의 찾을 수가 없으나 ‘리칭의 여선생(1972)’, 독짓는 늙은이(1969)‘, ’전자인간 337(1977)‘, ’77단의 비밀(1978)‘ 등이 그나마 수집가들의 소중한 희귀애장품으로 깊숙이 숨겨져있습니다. 이 외에도 80년대 비디오들 중에서는 제가 이미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 것처럼 ‘위대한 윗츠카랄도(1982)’, ‘검은 수선화(1947)’, ‘헨리 5세(1944)’등이 있으며 이후 90년대 초중반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명작들이 다수 출시됩니다.
한한명감독의 만화영화 검은 별과 황금박쥐(1979년) 삼화비디오 1981년 출시작품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Fitzcarraldo 금성사 1986년 출시
정품 비디오의 경우 대부분 비디오분량(90분, 120분, 105분 등)에 맞춰서 마구잡이로 잘리기도 했지만, 가끔 ‘비정성시(1989)’의 경우처럼 완판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시절 또 한가지 특이할 점은 처음에 비디오 한 장의 대여료가 2천원으로 시작되었다가 1,500원으로 한동안 기준을 지켰지만 부산에서의 덤핑 전략이 전국에 덮치면서 나중에는 단돈 백원인 적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버스를 타고 한 장에 백원하는 대여점에서 30장씩 한번에 빌려서 완전히 차비를 건지고 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90년대 초중반 영화광들은 B자 비디오와 정품 비디오들의 축복 속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90년대 영화광들의 존재를 확연히 언론 앞으로 등장시킨 것은 1994년 서울단편영화제, 1996년 부산영화제와 인디포럼, 1997년 부천영화제 등의 각종 국제영화제의 개최 물결이었습니다. 제1회 때만해도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리에 국내 영화제 중 최선두를 달리면서 성황을 계속해서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만, 벌써 13회를 맞은 부산의 열기는 이제 1,2,3세대의 영화광들의 집합소가 되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몇 안되던 영화학과 이외에 더 많은 영화학과가 대거 신설되고, 1995년 3월에 개원된 영상원과 1984년에 열린 한국 영화아카데미는 열혈 영화학도들의 꿈에 그리는 배움처가 됩니다.
2세대를 규정할만한 두 가지 매체 중 1992년 11월 1959년 4월까지 약 2년반동안 진행되었던 '정은임의 영화음악실'과 현재 724회를 맞이할 정도로 장수프로그램인 EBS의 '시네마천국'이 있습니다. 두 방송 모두 90년대 초중반 영화광들에게는말 그대로 친구이자 교과서였습니다. 전설의 방송답게 현재 각 동호회가 여전히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막강한 화력을 발산시켰던 PC통신을 기억해야합니다.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4대 PC통신은 드디어 인터넷을 통한 영화광들의 만남을 일상화시키며 영화퀴즈방과 각 영화동호회 그리고 '번개'라는 만남을 통해서 9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화광들의 존재를 넷상에서 확인시켰습니다.
당시 저도 유니텔에서 잠시 영화퀴즈를 했었는데, 당시 영화퀴즈는 문제 출제자가 영화의 특기사항이나 장면 묘사를 하다가 끝가지 모르면 감독, 배우 이름 마지막에는 제목의 한글 초성을 ㅎ ㅊ ㅋ ㄹ ㄷ 식으로 올려서 문제를 맞추는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영화퀴즈 뿐이 아니라 영화토론을 통해서도 자신들의 영화 내공 수위를 겨루는 자리도 많았습니다.
제 3세대 영화광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P2P와 다운로드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영화자료 받기를 제 3세대로 구분지었을 때 여기에 수반되어야할 다른 특징은 영화 동호회의 몰락과 더불어 블로거들의 대거 등장합니다. 관객의 입소문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시사회족이 생겨날 정도로 많은 시사회가 만들어지고 모든 상업영화들이 그랬겠지만, 특히 2000년대에는 관객의 기호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한 영화기획의 임무가 됩니다.
초창기 FTP서버에서 다운로드, 게시판 다운로드 등에서 유명했던 모 여성연예인의 비디오사건에 이어 소리바다의 충격 이후 웹하드 방식이 2000년에 도입된 이후 전에는 어떤 창구로도 볼 수 없었던 수없이 많은 외국의 영화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영화유학을 외국으로 가지 않은 2대에게는 기껏해야 B자 비디오와 정품 비디오라는 한정된 자료 안에서 영화를 발견했다면 이제 영화는 그야말로 책상 앞에서 편하게 햄버거를 먹듯 소비될 수 있습니다. 자막으로 전문으로 하는 사이트도 생겨났고 미국,일본 드라마시리즈 등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이제 거의 모든 영화 자료 사이트들은 유료화되었으며 DVD와 블루레이 등의 신매체의 고전 예술 영화 자료가 비디오시절보다 기획되어 출시됩니다.
물론 2000년 이후 서울 시네마떼끄를 비롯 부산씨네마떼끄 등 전국 각지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고전 영화를 전문 상영하는 공간이 90년대보다 휠씬 쾌적하고 좋은 시설을 갖추고 많이 생겨났으며 한 편으로는 전국적인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이 아트플러스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집니다. 영화제는 더욱 더 많아져서 이제 영화제 전용사이트가 따로 만들어질 정도입니다.
90년대 제 2세대 영화광들 중 외국유학파와 단편영화제 출신들은 이제 제 1세대를 이어가는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이 됩니다. 이제 70,80년대에도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 중에서 실제 활동하는 이는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배창호 등으로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봐도 세대교체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진행 중인 제 3세대 영화광은 대부분 영어학습을 통해 영어에 능통하고 쏟아지는 영화 정보의 홍수와 너무나 많은 영화 안에서 그 이전의 선배들이 너무나 어렵게 한작품한작품 찾아가던 시절을 지나서 완전한 만족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충분한 환경 안에서 제 1세대와 2세대의 영향 아래서 자신 만의 특색과 본질을 가지고 영화를 보고있습니다. 후일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한국의 영화판에 등장할 지 그건 미래의 몫입니다.
한 달에 극장에 한번이나 갈까 한달에 영화 20편이나 볼까싶은 다만 90년대 비디오수집가로서의 추억 때문에 지금도 영화를 놓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언제까지 영화를 보게 될지는 모르지만 가능한 항상 영화 안에서 친구를 찾고 편안함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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