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이 아픈 강한 남성들의 대결
-장훈의 영화 세계
1. 동세대 감독에 대한 갈구
문학평론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부러울 때가 있다. 동세대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을 평하면서 서로에게 깊이 공감하는 이들을 보며 영화계에서는 왜 그런 현상이 드문지 생각해 봤다. 문학계에서는 대부분 시인과 소설가와 비평가의 나이가 엇비슷한 30대 초중반에 등단해 활동하며 얼굴을 익히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모두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자의식도 이런 공감대 형성에 큰 역할을 할 것이지만, 그보다는 마셔온 시대적 공기가 같으니 쉽게 동감을 나눌 수 있다. 이를 배경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고 동지가 되어 새로운 문학의 지도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사실 원로 평론가나 학자가 30대 초중반의 시인이나 소설가의 세계를 세심하게 이해하기는, 30대의 동세대 평론가와 학자에 비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자라온 환경이나 사회적 배경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등단하는 문학계와 달리 영화계는 그렇지 않다. 비평가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에 활동을 시작한다면, 감독은 주로 30대 중후반에 데뷔한다. 글을 쓰는 사람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구분도 작용한다. 게다가 ‘창비’와 ‘문지’라는 뚜렷한 성향을 기준으로 지향점을 구축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영화계에서 세대적 공감대를 구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영화계에 우리 또래의 감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봉준호나 윤제균, 김상진은 나와 비슷한 세대이다. 겨우 한두 살, 많아야 세 살 정도 더 많을 따름이다. 그러나 봉준호는 이미 오래전에 등장한 거장인 듯한 느낌이 들어 동세대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 윤제균이나 김상진의 영화는 상업적으로는 매우 재미있는 영화지만, 영화에 대한 자의식이 부족해 보인다. 1970년을 전후로 출생한 세대의 특징은 이들이 영화를 영화로서 인식한 첫 세대라는 점이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영화가 사회변혁의 무기도 될 수 있지만, 예술로서의 영화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태생적’으로 깨달은 세대이다. 1980년대의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자란 1970년 전후의 세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타고 나면서부터 TV와 함께 생활한 ‘영상세대’이다. 프로 스포츠의 개막과 더불어 개인적 취향도 다양한 세대이다. 이들이 영화를 대할 때 그것은 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데 봉준호는 여전히 사회적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윤제균과 김상진은 영화의 산업적 측면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영화적 공감대의 형성과, 영화에 대한 인식의 문제, 이것이 세대를 구분하는 특징이다. 이렇게 봤을 때 내가 주목하는 감독은 민규동, 김태용, 류승완, 김한민, 김지훈 등이다. 이들의 영화는 기존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감수성을 토대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퀴어적 감수성에서 기존 사회 인식에 대한 미묘한 거부, 그 형식적 실험, 1960년대 액션 영화의 자의식 강한 재해석과 재현, 영화 속에 녹아있는 어쩔 수 없는 1980년대의 공기 등이 그들의 영화에서는 잘 드러난다. 이들의 영화에 쉽게, 자연스럽게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영화적 자의식이 강하다. 이들의 영화에 그것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런 자의식은 변혁의 시기에 영화를 접한 박찬욱과 봉준호의 자의식과는 또 다르다. 강하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오래가는 힘, 여기에 1970년 전후에 출생한 세대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영화가 문화라면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나는 이들의 영화에서 그것을 본다.
이제 이 리스트에 장훈을 올려야 할 것 같다. 사실 장훈은 이 리스트에 올리기 애매한 감독이다. 1975년생. 그러나 그의 영화를 보면, 단지 세대가 태어난 나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영화에 대한 자의식과 영화적 공감대가 쉽게 형성이 된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쉽게 시도하지 않으면서도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을 끊임없이 실험하려 한다. 장르의 틀 속에 들어가지만 결코 안주하지 않는다. 장훈은 일관되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다. 사실 나는 <영화는 영화다>를 보고 잘 만든 독립영화지만 김기덕의 흔적이 너무 강해 그의 존재를 그리 크게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형제>를 보면서 이 감독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했다가 <고지전>을 통해 그가 정말로 좋은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것일까? 이제부터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2. <영화는 영화다>, 영화 매체에 대한 실험
세상에 장훈의 존재를 알린 것은 <영화는 영화다>였다. 이 인상 깊은 데뷔작은 영화를 둘러싼 여러 설정과 더불어 강한 연기, 그리고 적절한 조율이 이루어진 연출을 통해 비평과 흥행에서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장훈은 자신의 영화에서 끊임없이 강한 남성들의 대결 구도를 다루었다. <의형제>에서는 아예 남한 국정원 직원과 북한 간첩의 대결을 그렸고, <고지전>에서는 한국전쟁의 치열한 현장에서 대립하는 두 남한 병사, 또는 남북한 병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쉽게 말하면, 장훈은 강한 두 남성의 대결을 통해 판타지적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분단의 현실과 역사적 맥락을 살짝 넣었다. 이렇게 그의 영화는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영화는 영화다>는 할 말이 많은 영화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깡패영화라는 장르영화이다. 2000년을 전후해서 잠시 등장했다가 빠르게 수명을 대한 조폭 코미디에 비해 깡패영화는 그 이전에 등장해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감을 증명했다. 폭발적인 흥행력은 없지만 더 질기고 더 오래 살아남기. 아마 깡패라는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을 통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여기에 액션을 추가하고 멜로드라마적 요소도 넣으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주기에는 깡패영화만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깡패영화의 큰 틀은 대동소이하다. 착한 깡패와 나쁜 깡패가 존재하는데, 같은 조직에 있다가 배신한 깡패이거나 주인공인 깡패의 적대자가 나쁜 깡패이다. 조직에 들어가서 일을 하던 착한 깡패는 결국 적대자 손에 죽게 된다. 아니면 같은 조직의 보스에 이용만 당한 뒤 죽음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면서 비극적 결말을 맺게 된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영화는 드라마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다> 역시 이런 흐름을 따라간다. 이름만 봐도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이강패(소지섭)는 조직의 넘버2이다. 회장이 감옥에 있는 사이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박 사장이라는 이가 회장을 배신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회장의 명령에 따라 박 사장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를 살려둔다. 해외로 보냈던 그가 다시 국내로 들어와 세를 모아 강패의 목을 겨눈다. 이제 회장에게도 신임을 잃은 강패는 자신의 수하를 다 잃은 뒤 혈혈단신으로 박 사장을 찾아가 잔혹하게 복수한다. 이것이 대략적인 깡패영화의 흐름에서 본 <영화는 영화다>의 줄거리이다. 대부분의 깡패영화는 이런 줄거리 안에서 약간의 변용을 가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강패와 그의 적대자인 배신자 박 사장의 대결 구도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강패가 어떻게 수하들을 잘 거느리는지, 회장을 어떻게 모시는지 남성들의 판타지인 의리와 힘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 게다가 복수를 통해 남성들의 본능의 핵심을 깊이 찌른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다>는 이런 틀을 변용한다. 제목이 의미하는 <영화는 영화다>는 무슨 뜻일까? 이 영화는 깡패영화라는 의미이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다루는 영화라는 의미가 아닐까? 내용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강패는 한때 영화배우였다. 영화 속에 그려진 바로는 이창동의 데뷔작이자 깡패영화인 <초록물고기>에서 문성근이 연기한 깡패 두목 배태곤의 운전수였다. 그러나 단역에 그치고 그는 조직에 들어와 넘버2가 되었다. 그런데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배우 장수타(강지환)가 액션영화에서 상대 배우를 폭행해 물의를 일으키고 더 이상 그와 함께 영화를 촬영할 배우가 없게 되자 강패가 상대역으로 영화 촬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깡패영화라는 장르 안에 주인공으로 진짜 깡패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황당하면서도 기이한 설정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감옥에 있는 회장의 의중을 살피면서 조직을 관리하는 깡패가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것이나, 깡패를 무서워하지 않고 마치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영화배우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조폭 코미디의 핵심 사항 가운데 하나였던 역할 전도의 코드가 등장한다. 깡패 같은 배우와 배우 같은 깡패의 역할 전담. 영화 속 배우는 폭행 사건으로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킨다. 이것도 모자라 자신이 깡패보다 더 잘 싸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육체적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에 비해 깡패는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 참고 또 참으면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잔혹한 폭력을 휘두른다. 여기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상황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이미 보아온 설정이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이 진행되면 될수록 관객은 궁금해지게 된다. 깡패가 깡패 연기를 더 잘하는가, 배우가 깡패 연기를 더 잘하는가? 그리고 감독은 미끼를 던져 놓는다. 두 사람이 액션 장면을 촬영할 때 진짜로 싸우는 것이다. 두 사람의 연기는 대부분 진짜 감정을 영화로 표현한다. 그래서 (영화 속 감독과 관객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렬하다. 심지어 여배우와는 러브신에서도 진짜로 섹스를 시도하는, 강도 높은 촬영을 한다. 이것은 여배우나 수타,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강패의 의지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영화의 제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영화는 영화다>. 깡패 영화를 찍는 이들을 다룬 것이기도 하고, 영화를 통해 관계 맺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문제 삼으면서 영화는 단지 영화라는 이야기를 한다. 때문에 강패가 정말로 수타와 싸우는 연기를 하는 것은 현실과 연기를 구분 못하는 행동이다. 수타가 강패에게 깡패가 연기를 모른다고 하는 말이나, 강패의 부하에게 수타가 맞을 때 강패가 현실과 연기를 구분 못하냐고 하는 대목을 보면 이것은 명확히 드러난다.
결국 <영화는 영화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 즉 현실과 영화의 구분에 대한 이야기를 깡패영화라는 장르의 컨벤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에서 박 사장을 왜 강패가 살려준 것인지, 박 사장이 왜 그렇게 빨리 귀국한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현실이라는 사실과 영화라는 연기가 어떻게 현실에서 접목되고 구분되는가, 거꾸로 말하면 현실이라는 사실과 연기라는 허구가 어떻게 교묘하게 이어지는지 이야기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 모든 촬영을 끝낸 뒤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박 사장을 죽이러 간 강패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때 강패는 어디 가냐는 수타의 말에 영화 촬영하러 간다고 말한다. 수타가 카메라라고 말하면서. 결국 그는 수타라는 카메라가 촬영하는 가운데 실제로 박 사장을 죽이는 깡패영화를 촬영함으로써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영화인가? <영화는 영화다>라는 영화로 보면 합당한 결말이고, 강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맞는 영화를 촬영한 것이며, 수타에게는 자신의 관념을 깨는 새로운 영화이다.
3. <의형제>, 냉전 시대의 판타지 분단 영화
<영화는 영화다>에서 영화 매체에 대해 나름 의미 있는 실험을 했던 장훈은 독립 저예산영화의 틀을 벗어나 차기작은 메이저 영화사에서 대작을 촬영했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인 송강호와 강동원을 주연으로 한 <의형제>가 바로 그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도, 장훈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두 남자의 강인한 대결을 그리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남과 북의 극단적인 대결을 영화적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두 손을 잡은 2000년 6월을 배경으로 한다. 김정일을 비판하는 책을 출간한 김정일의 사촌 김성학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에서 암살 요원 ‘그림자’가 내려와 남파 간첩 송지원(강동원)과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 이미 자신의 정보원으로 둔 남파 간첩 손태순을 통해 위치를 파악한 국정원의 이한규(송강호)가 출동하지만 그림자도 놓치고 송지원도 놓친다. 이 문제로 (게다가 남북 화해 무드로 인한 인원 감축으로) 이한규는 국정원에서 파면되고, (송지원이 배신자라고 믿는 그림자에 의해) 송지원도 버림을 받는다. 영화는 갑자기 6년 후로 시간이 흐른다. 도망 간 동남아 신부를 찾아주는 흥신소를 운영하는 이한규는 우연한 기회에 송지원을 만나 둘은 동업을 하면서 한 집에서 지내기 된다. 서로의 정체를 모를 것으로 착각한 이들은 이제 서로에 대한 정보를 모으게 되는데, 정작 각자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문제는 왜 갑자기 영화가 2000년에서 6년이 지난 200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느냐에 있다. 이 시기는 북한에서 핵실험을 한 년도이다. 여기서 두 사람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하면서 영화는 다시 클라이막스를 통해 나가게 된다.
처음 <의형제>를 봤을 때 나는 영화에 부정적이었다. 영화적 설정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간첩과 국정원의 총싸움이 펼쳐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이 같은 집에서 동거하며 서로의 정보를 염탐하는 것도 영화적 억지 설정으로 보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니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간첩과 국정원의 대결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남과 북에서 공히 같이 버림 받은 이들이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영화였다. 그런데 문제는 버림받았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국가로부터 버림 받았지만 가장의 책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쌍한 가장이라는 점이다.
이한규는 부인과 이혼했다. 아이는 영국에서 재혼한 전 부인이 기르고 있는데, 자신은 양육비만 보낸다. 그들을 만날 수 없어 전화 통화만 가끔 할 따름이다. 집보다는 일에 치중했던 그가, 그것도 국정원에서 국가 안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가 국가로부터 파면 당하고 부인에게는 이혼 당했으며, 아이도 그에게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자신의 신원을 회복시켜줄 단 하나의 방법, 그림자를 잡는 것이다. 송지원의 입장도 그리 좋지 않다. 그에게는 북한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가 있다. 자수하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 없고, 스파이 활동을 하자니 배신자로 낙인 찍혀 정보가 단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아직도 이한규가 국정원 직원이라고 믿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대답 없는 곳에 접속해 알린다. 한편 송지원은 북한의 아내와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민간 기구에 위탁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의형제>는 남과 북의 대결 구도를 다루고 있지만, 그 속살을 한꺼풀만 벗기면 남과 북으로부터 버림 받은 가장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신한 손태순 역시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거북이 날다>를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인 이한규의 처지는 <거북이 달리다>의 조필성(김윤석) 형사와 너무도 비슷하다. 경찰이 실추된 지위와 가장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거물 범인을 끈질기게 추적해 결국 범인을 잡아 복직하고 가장의 권위도 회복한다는 이야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이 있다. <의형제>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송지원과 이한규가 버림 받은 가장이거나 가장의 짐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서로에게 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유교적 질서가 강한 사회에서 가장이라는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송지원이 배신자 손태순을 죽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위해 무리수를 둔다. 남파한 그림자와 송지원, 이한규가 옥상에서 마지막 대결을 펼치다가 결국 그림자는 죽고 송지원과 이한규는 살아남는다. 이것이 왜 무리수냐고? 이 영화가 개봉한 시기는 2010년이었다. 이때는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어 남과 북이 극단적인 대결 구도로 치닫던 때였다. 천안함 사건이 있었고 이후 곧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대립 구도에서 이한규가 딸을 만나러 영국으로 가는데, 그 비행기 안에 송지원의 가족이 타고 있다. 그림자를 죽이면서 심하게 다친 송지원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더 나가 무슨 돈으로 그가 이한규에게 비행기 티켓을 보낼 수 있을까? 이제까지 등장한 영화 속 간첩은 대부분 죽었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쉬리>에서 간첩은 살아남지 못했는데, <의형제>에서는 살아남아 북한에 있었던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떠나간다. 송지원은 간첩이었고 자수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잡혀 가서 조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게다가 핵 실험 때문에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는데 이 문제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결국 장훈은 남과 북의 대결 구도 속에서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버림 받았던 이들에게 판타지를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던 시기에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결국 주인공이 죽었는데(오히려 그래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레드 콤플렉스를 보여주었는데), 남과 북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경색된 2010년에 만든 영화에서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는 것은, 그리고 이런 결말을 맺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은 2010년의 대중들은 남과 북의 대결, 대립보다는 화해와 평화를 판타지로라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장훈은 <의형제>에서 북에서 버림 받은 간첩과 남에서 버림 받은 국정원 직원이 어떻게, 제목 그대로 ‘의형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자문(自問)했고, 판타지로라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자답(自答)했다.
4. <고지전>, 명분 없는 전장에 좀비가 된 병사들
<의형제>에서 분단을 다루면서 영화의 규모까지 키웠던 장훈은 <고지전>에서는 아예 분단이 몰고 온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의 한가운데로 영화적 규모를 더 키운 채 들어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장훈이 다루는 영화적 시간과 공간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거나 남과 북의 밀고 당기기가 극적인 1950년 6월에서 1951년의 7월까지가 아니라 휴전 직전의, 어떻게 보면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휴전 직전인 1953년 2월에서 7월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더욱 특이한 것은 이 시기에 가장 치열했던 에록고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고지의 주인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모를 만큼 치열했던 전투에서 휴전이 성립되기까지의 과정, 그러니까 영화는 휴전 후 남과 북이 자신의 영토를 더 넓히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을 사지로 몰고 갔던 고지에 대한 이야기이자(高地傳), 고지 앞(高地前)에서 숱하게 죽어간 병사들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두 남성의 대결 구도를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두 남성은 방첩대의 강은표(신하균) 중위와 에록고지의 김수혁(고수) 중위의 대결구도이다. 친구 사이였던 이들이 2년 전 첫 패배에서 헤어진 후 에록고지에서 대면하는데, 적과 내통한다는 에록고지의 아군을 조사하러 나온 강은표와, 실질적으로 그곳에서 부대를 이끌고 있는 김수혁의 대결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나약한 김수혁이 2년 사이에 중위가 되어 가장 치열한 전투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두 중위의 대결을 통해 그린다. 영화에 또 다른 대결이 있다면, 남한의 악어 부대 지휘관 김수혁과 북한의 부대 지휘관 현정윤(류승용)의 대결이 있다. 첫 전투의 인연 이후 한 고지를 두고 적으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이는 두 지휘관의 대결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긴박하게, 때로는 애련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장훈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이들의 대결은 대결 자체에 치우치기보다는 대결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포근한 애정이 오가는 대결을 그린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강패와 수타의 대결이 서로에 대한 이해로 나간 것처럼, <의형제>에서 이한규와 송지원의 대결이 서로에 대한 포용으로 나간 것처럼, <고지전>의 대결 역시 서로의 입장을 포용하면서 고지가 바뀔 때마다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부탁을 하는 지경으로 바뀌게 된다. 고지의 주인이 바뀌어 북한군의 편지를 남한군이 발송해 줌으로써 이들이 적과 내통한다고 방첩대에서 생각하게 되었고, 에록고지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출세와 계급의 권위에 기대 함부로 작전을 명령하다가 ‘전쟁의 달인’이 된 부하들에게 오히려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이것도 북과 내통한 스파이의 짓이라고 오해를 받게 된다. 실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김수혁은 늦게서야 오해를 풀고 전쟁의 참상에 통탄하게 된다.
김수혁이 에록고지로 오기 전 남과 북의 지리한 휴전 협상은 진전이 없다. 숱한 군사들을 죽이면서 작은 고지 하나 때문에 지리한 전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화가 났던 김수혁답게 전장으로 오지만 그 역시 전쟁의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실제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병사들은 점점 좀비가 되어간다. 이미 정신병자가 된 이도 있다.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지만 남북의 지도부에 의해 전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남북 병사, 그 민중들의 애절한 사연이 영화 속에 펼쳐진다. 그들의 애환과 씁쓸한 연대가 '안개처럼' 몽환적으로 피어난다.
영화에서 가장 기막힌 부분은 휴전 협정이 발효되기까지 12시간이 남아있어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직전에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남과 북의 병사들이 대치해 있는 장면이다. 이대로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전투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고지에 있는 북의 병사들이 <전선야곡>을 부른다. “장부의 길 길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라는 장면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은 모두 울면서 고향으로 마음이 달려가지만 현실은 안개가 걷히면서 최후의 전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끔직한 그 전투에서 모두 전멸하고 만다. 그들은 전투를 하고 싶지 않았고, 전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두 전투와 전쟁에 휘말려 전멸하고 말았다.
장훈은 <의형제>에서 분단의 대립을 그리기보다 그것을 넘어 의형제가 되는 판타지를 그렸다면, <고지전>에서는 과거의 사건이지만 냉정한 현실의 잣대로 다가간다. 거기에는 어떤 판타지도 없다. 남과 북의 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하면서 왜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남과 북의 병사들은 좀비가 되어간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상황이다. 처음에 현정윤이 북한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그 말을 한 이유를 이제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결국 병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생에 대한 욕망이었다.
5. 강한 남성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그리기
장훈은 강한 남성들의 대결을 자신의 영화에 꾸준히 그렸다. 깡패나 간첩, 전쟁 군인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육체적 힘과 폭력으로 대결하는 과정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장훈이 그린 영화 속 남성들은 결코 강하지 않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강하게 보이거나 강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뿐이지 그들이 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들은 가고 싶지 않지만 이미 조직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서, 남과 북에서 버림 받은 후 가장의 짐마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휴전을 원하지 않는 정치 지도자들의 야망과 분쟁 때문에 사지인 줄 알면서도 가야만 한다. 그래서 판타지로 해피 엔딩을 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다시 한국의 우울한 현대사와 만나야 한다. 분단과 전쟁, 대결을 조장했던 우리의 현대사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대결과 전투를 원하지 않는 민중들은 멈출 수 없는 싸움의 현장으로 끌려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장훈은 이것을 깡패 영화, 액션 드라마, 전쟁영화의 틀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렇게 보면 장훈은 기존의 장르 틀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하는 감독이라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내용, 즉 강한 남성들의 대결을 주로 다루는 류승완이나 이준익, 강우석의 영화와 비교하면 장훈의 영화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강한 남성들의 육체적 대결이 내품는 아름다움이나 복수의 의리를 중시하는 류승완이나, 시대에 패배한 남성들의 삶에 질기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드라마 중심의 이준익이나, 강한 남성의 힘이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쉽게 결합하는 강우석의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길을 간다.
반복하자면, 장훈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장르를 통해 때로는 사회적으로, 때로는 역사적으로, 때로는 미학적으로 펼쳐 놓는다. 그리고 그런 스펙트럼 안에 한반도의 역사와 분단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더 나가 장르라는 틀에 대해 사고하게 만든다. 이것이 장훈의 영화적 물음이고 그의 영화적 실행이다. 아마 2010년대 영화계는 장훈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얄밉도록 잘 잡는 감독이다. 그의 대중적 촉수와 영화적 감성은 놀랍다는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영화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영화적 지식을 비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올바르게 하는 이는 더욱 드물다. 이런 감독과 같은 시대를 살며 그의 영화를 계속해서 본다는 것이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강성률,<공연과리류> 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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