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탐방

직지사

장코폴로 2010. 2. 23. 11:01


[여행]설경속의 '직지사'
하얀 눈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황악산 직지사는 사실 김천보다 더 유명하다. 서울에서 김천은 몰라도 황악산 직지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에 대항파출소가 직지파출소로 개명된 것을 보았다. 아마 김천시 대항면도 ‘직지면’이라도 불렸으면 더 알려지고 편리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 유명한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인 417년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구미 해평의 도리사 창건 이듬해다. 그만큼 직지사의 역사가 깊다는 것이다.

 


직지사의 창건설을 보면 창건주 아도화상이 구미의 도리사를 창건하고 나서 김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해서 '直(바를 직) 指(손가락 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직지사는 선종사찰로 선종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이 말은 “수행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버리고, 그 마음까지 비우면 그 자신이 부처요, 그 마음이 곧 불심이다.”라고 하는 가르침의 앞 글자를 따서 직지사라고 하는 말도 있다.

 


직지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527년 법흥왕 14년보다 100여 년 전에 이미 창건됐다는 점에서 신라불교의 발상지이자 포교의 전진 기지인 셈이다.


918년 고려의 건국과 함께 직지사는 대중흥기를 맞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전투에서 당시 1만 군사 중 8천 여 명이 전사할 만큼 대패한 뒤 구미 인동현을 거쳐 직지사 인근에까지 도망 왔다.

 

 

도망 온 왕건은 유일한 희망으로 당시 직지사 주지인 능여조사를 만나 도움을 간청했고, 왕건의 인물 됨됨이에 감복한 능여조사는 짚신 2천 켤레를 삼아주고 큰 짚신을 사방에 흩어둬 후백제군의 추격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왕건은 능여조사의 도움을 발판으로 전열을 재정비 하고 다시 견훤과 붙은 안동의 고창 전투에서 견훤군을 대파했고, 결국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는데 결국 이것은 직지사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승자 왕건은 밭 1천결(지금으로 치면 약 1천만㎡)을 직지사에 내려 보내고 왕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어 절의 세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고려 국민들이 한번이라도 가서 참배하는 그런 곳이 되었다.


그런 직지사도 조선의 불교 '탄압'에 큰 피해자가 될 수 있었으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어태(御胎)를 직지사의 북봉(뒷산)에 안치하여 직지사는 임금의 태를 묻은 곳으로  '탄압'의 그늘을 피할 수 있게 됐다.

 


그것뿐만 아니라 임금의 태를 보호하는 수직사찰(승려가 수직군이었고, 수직군의 수장이 주지였다)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고, 또 태실을 보호하기 위해 직지사 주위 30리 내에는 벌목과 사냥, 수렵도 금지하였다.


특히, 직지사 서쪽 200m 지점에 있는 천룡대서 부터 펼쳐지는 능여계곡은 이 산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봄철에는 진달래, 벚꽃, 산목련이 볼만하고 가을철 단풍 또한 절경을 이루고 대웅전 뒤쪽의 소나무 군락은 500년 이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또, 당시 직지사가 위치한 지금의 김천시인 김산현은 김산군으로 승격까지 하는 아이러니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 김천혁신도시가 완료되는 시점에는 김천광역시로 승격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두고 볼 일이다.


이렇게 많은 역사를 가진 직지사는 대한민국의 중심인 황악산에 위치하고 있어 전국 어디서든 2시간 이면 거뜬하게 올 수 있는 곳이다. 그 직지사 초입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의 웅장함은 이곳이 국내 25본산 중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8교구 직지사 관할구역은 김천, 구미, 상주, 문경, 예천 등 5개 시 군에 말사는 54개를 두고 있다. 산문을 지나 사찰로 올라가는 길은 4계절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눈이 내린 오늘은 더 아름답고 밝고 깨끗해 보인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3문과 2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삼문의 첫 번째가 일주문이다. 일주문의 ‘황악산직지사’라는 현판 글씨는 송설체로 유명한 원나라 조맹부의 필체로 알려져 있다.


보통 사찰에 모면 문들이 많다. 그런데 이 문에도 다 뜻이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우주관이 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에 가상의 산인 수미산이 있다고 보고 하나 하나의 문이 수미산 정상까지 가는 하나의 관문들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처음 만나는 문이 일주문이고 그 다음은 금강문, 천왕문, 그리고 나면 수미산 정상, 거기서 마지막 문인 해탈문(불이문)이라고 하는 문을 뚫고 가면 거기서부터는 허공이라고 한다.


그 곳에서 다시 몇 층의 하늘을 솟구쳐 올라간 그곳에 석가모니가 계신다는 불국정토가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우주관이라고 하는데 그 불교의 우주관을 그대로 조형물로 옮겨 놓은 것이 문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찰에 처음의 일주문은 다 있고 나머지 문들은 절의 규모에 따라 있고 없고 한데 그 불교의 우주관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춘 곳이 직지사라고 한다.


그리고 일주문에는 그 사찰의 대문이므로 사찰의 이름을 적어 놓은다. 그래서 “황악산 직지사”가 쓰여 있고 기둥은 일직선으로 해서 불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일심을 은연중 알리고 있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두 번째로 나오는 금강문 양쪽에 금강역사가 입을 벌리고 ‘아’하면서 공격 자세를 취하고 한 금강역사는 ‘훔’하면서 입을 다물고 방어 자세를 취하는데, ‘아’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의 첫 글자이고, ‘훔’은 끝 글자라고 한다.

 


이 역사들의 입은 무얼 뜻하는가 하면 일주문에서 수미산을 향해 걸어 올라오던 구도자들이 금강문쯤 오면 피곤하고 지쳐 포기할 때쯤 금강역사의 입 즉, ‘아’와 ‘훔’은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통일, 완성, 영원, 성취, 조화, 행복 등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구도자들에게 “영원이 멀지 않았으니까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라”는 격려 차원에서 금강문과 천왕문이 수미산 중턱에 세워진다고 해서 일주문 바로 다음에 있다고 한다.

 


이어 나오는 천왕문은 동서남북 4방위를 지키는 천왕이 모셔져 있고, 남쪽을 지키는 남방 중장천왕은 붉은색,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흰색,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검정색,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있다.


이것은 동양의 음양오행설의 오방색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남은 한 가지는 이곳 중앙에 위치한다고 보는 부처님의 황색(살색, 자금색)이라고 한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면 불교 우주관에서 거의 수미산 정상에 가깝다. 수미산 정상은 중앙에 선경성이라는 궁궐에 재석천왕이 머물면서 천상계를 다스리는 곳인데, 이 선견성을 중심으로 또 사방에는 각각 8개씩의 성이 있다고 한다.


4x8=32성, 32성 +선견성=33성이 된다. 우리가 흔히 천상계를 33천이라고 하고, ‘33' 은 인도말로 ’도리‘ 이기 때문에 도리천이라고 하므로 불교에서 도리라는 말이 자주 듣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있는 마지막 문인 불이문(해탈문)을 넘어서면 극락정토가 있다. 불이문은 지상과 허공의 경계, 번뇌와 깨달음의 경계라고 한다.


직지사에 이렇게 많은 문이 각기 뜻하는 것도 틀리는 것을 알고 이곳을 찾는 다면 또 느낌이 다를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곳에 서면 직지사의 가장 중심전각인 대웅전이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대웅전은 불국정토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그의 왼쪽에 약사여래, 오른쪽에 아미타여래까지 모셔져 있고 유수한 세월의 역사를 그대로 품은 듯 채색되어 있다.

 


이렇듯 직지사는 오래된 나무들과 사찰은 물론 경내를 흐르는 계곡물은 또 다른 느낌으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명각은 조선 정조 11년에 지어졌고 사명각 현판의 글씨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3세 때 황악산 아래 유촌마을(직지사 앞 상가 일대)의 황여헌 선생(황희 정승의 증손자로 당대 석학) 문하에서 공부하다 양친을 모두 여의자 직지사로 출가하여 당시 주지인 신묵대사의 제자가 됐고, 18세에 승과에 당당히 장원급제한 뒤 불과 서른의 나이에 직지사 주지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사명대사와 신묵대사와의 재미있는 만남 설화가 있다. 어느 날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중 꿈에 직지사 입구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룡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는 깨어나 꿈에 본 장소를 가보니 한 소년이 잠을 자고 있어, 신묵대사가 소년의 사연을 듣고 거두어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바로 사명대사였다고 한다.


사명대사는 31세에 선종의 본산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의 보현사에 칩거 중인 휴정을 찾아가 교우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임란 후 3번이나 일본으로 건너가 수천명의 조선인들을 데려오는 탁월한 외교능력과 신비한 능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 사명대사는 종교를 떠나 당시 성리학자들과 교류했고, 당대 대유(大儒·대유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석학으로 직지사는 임란 당시 43개 전각 중 일주문, 천불전, 사천왕문을 제외한 40개의 전각이 소실될 만큼 참사를 겪었으나 사명대사라는 호국불교의 지도자를 배출한 덕으로 조선 8대 가람의 위치에 올랐다고 한다.


이 같이 직지사는 신라 불교의 선구자였고, 고려 왕실과의 인연을 거쳐 서슬 퍼런 조선에서도 호국불교의 성지로 이름을 널리 알려 지금도 서울에서 김천은 몰라도 직지사는 다 기억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명부전 내 오른쪽에 마련된 사당 속에 불교신도였던 부모를 따라 직지사를 다녔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고 육영수 여사, 박 전 대통령의 부모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대에 직지사 주지였던 녹원 스님에게 부모의 천도재를 지내달라고 부탁하는 등 직지사와 많은 교류를 했고 서거 후 녹원 스님 주도로 영정과 위패를 봉안했고, 매년 추도재와 박 전 대통령 서거 일에 맞춰 기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 옆에 있는 비로전은 고려 태조 때 능여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 중 하나로 1707년 쓰여진 <直指寺千佛殿重創記>에는 비로전에 안치된 천불상은 1656년 景岑 스님이 처음 만들었으며,

 

비로전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661년에 창건되었고, 1668년에는 機日 스님이 천불상과 별도로 5구軀의 불상을 조성하여 비로전 불단에 모셨으며, 이들 다섯 불상은 1707년 개금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비로전을 나와 조금 내려오면 설법전, 남월료와 만덕전이 웅장하게 펼쳐지는데 특히 만덕전은 동양최대의 사찰건물이라고 들었다. 만덕전 앞마당에 고불고불한 물길을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눈이 쌓여 자연예술품과 같이 보였다.

 


직지사에는 이외에도 성보박물관을 비롯하여 문, 루, 전각, 당 등 약 35개가 있어 이를 다 보고 소개하기는 너무 많아서 다음으로 미루고 소개하지 못한 백련암과 운수암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구정(2월14일) 하루가 지난날이지만 3일 동안 내린 눈이 황악산은 온통 백색가루를 덮어쓰고 있었고 백련암 가는 길은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채색되어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백련암 표식을 보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조금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맨 먼저 엄청 높은 나무위에 까치집이 먼저 들어오고 해바라기가 눈 이불을 덥고 추위를 이겨내는 듯 다소곳이 도열하고 있다.

 


암자에 올라가니 깨끗하고 아담하게 너무 조용하고 방 마다 신발이 놓여 있어 이곳에서 공부하는 곳임을 실감할 수 있었고 눈이 쌓이듯 공부를 계속하면 언젠가는 원하는 것을 만나게 되기를 바랬다.

 


이곳을 나와 운수암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높은 곳이라서 그런지 더욱 하얀 눈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고 마치 흰 트리를 만들어 놓은 듯 모든 나무들이 눈으로 옷을 갈아입고 눈꽃나무 터널을 만들어 이 길을 지나면서 탄성을 지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듯싶었다.

 


운수암에 올라가자 바로 앞에 힘들게 올라온 나그네의 갈증을 하는지 감로수가 혹한의 추위에도 얼음으로 전체를 덮지 않고 손님을 배려하는 듯 물을 먹을 수 있게 했다.

 


그 황악산 정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감로수를 마시니 속이 시원하고 머리까지 많아졌다. 운수암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능선이 설경을 더해 한 폭의 동양화로 마음까지도 환하게 만들어 버렸다.

 


운수암을 나와 이 겨울의 눈을 더 느끼기 위해 황악산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등산로를 올라가자 시내에서 보다 산에서 더 자주 만나는 이성하, 신범재 선생님이랑 있어 기념촬영을 한 컷 찍고 황악산 하얀 세상으로 입산했다.

 


 


 

 

 

 

 

 

 

 


김광수(topgim@gc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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