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영화일반론)

신상옥론

장코폴로 2010. 2. 11. 11:11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립한 영화계의 큰 스승/ 신상옥

                    

  

  80세를 상회해도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60년대 3거장 중 한 명인 천재 감독 신상옥은 분단이후 남․북에서 최초로 영화연출을 시도하고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였다.  

  민족수난사의 同脈 선상에서 영화수난사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그의 업적을 기려 2001년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회고전을 준비하고 있다. 김기영, 유현목 회고전에 이은 그의 회고전은 우리영화의 전통미학과 시대상을 조망하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견과 원로 감독들 상당수가 그의 조련을 받았고 그는 한국영화계의 큰 스승으로 우뚝 서 있다.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실천력은 한국 영화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사극과 문예물들은 한국영화 만이 가질 수 있는 역사성과 시대성을 반영하였다.

  일본의 동경제국대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에게 영화를 배워 광복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최인규 감독의 사회 변혁에 따른 적응력을 배워온 그로서는 한국영화를 세우는 섯가레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굳건한 각오가 있었다.

 그의 주옥같은 영화들은 1953년 최은희라는 부동의 스타와 결혼, 호흡을 같이함으로써 작품성을 드높인다. 쉽게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은 많은 사극 영화 속에서 휴머니즘을 주창하고, 뒤틀린 사회에 대한 조소와 변혁을 시도하면서 관객을 계몽하는 훈장 역을 자임했다.

 당시 영세하던 영화 시장을 기업화하는 계기가 된 1966년의 신 필름 설립은 한국영화의 소재 개발과  다양한 영화창출의 본거지가 된 점에서 의의가 있었고, 이형표,이장호,박철수 같은 영화감독들이 감독으로 세공 된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신감독은 1925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하여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한 한 해외파 감독이었다. 제작자, 감독, 촬영기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52년 『악야,惡夜』로 감독 데뷔, 올해로 꼭 50년 감독생활을 하고있다.

 전쟁중 생활비․제작비에 시달리며 공군촬영대 소속 신상옥은 이색작가 金光州 원작의 양공주를 다룬『악야』로 ?현실은 추악하다?는 것을 고발한다. 데뷔작의 문제제기는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도 계속 제기되는 문제점들과 상통된다. 그는 늘 깨어 있으면서 시대의 타락․예술성의 상실․피박받는 국민들을 안타까워했다.  

 미국에서  흥행영화를 만들었고, 일본에 있으면 그는 영원한 팬들이 생겼다. 북한에서 그의 작품들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는가하면, 깐느영화제에선 심사위원을 맡았다. 부천에서도 심사위원장을 맡고 부산에서는 그의 회고전을 마련했다. 그는 살아있는 신화가 된 것이다.

 말년에 분당에 둥지를 튼 그는 박세리와 같은 골퍼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나 일본만화가 주는 깜찍함이 배어있는 영화들을 구성하고 있었다. 아직도 합작으로 영화재정을 타개하고 싶은 그는 『징기스칸』과 같은 우리민족의 원류를 찿아가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미 미국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한 모범을 제시한 그는 아직도 해외시장은 넓고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행동으로 역설하고 있다.

 살아있는 映畵史인 그의 10년간 초기작들은 『악야』,『코리아,1954』,『꿈,1955』,『젊은 그들,1955』,『무영탑,1956』,『지옥화,1958』,『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1958』,『춘희,1959』,『동심초,1959』,『자매의 화원,1959』,『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로맨스 빠빠,1960』,『이 생명 다하도록,1960』,『백자부인,1960』,『성춘향,1961』(22회 베니스영화제에 출품),『상록수,1961』,『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제23회 베니스영화제에 출품),『연산군,1961』,『폭군연산,1962』,『열녀문,1962』,『빨간마후라,1964』등으로 그의 작품성향이 역사의식과 서정적 문예물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추악과 과거의 허망으로 표현되는 6편의 작품을 지나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나 『성춘향』은 신필름의 기업화에 용기를 준 작품이다.

  초기 작품들로 영화적 실험을 마친 그는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 내고, 전형적인 공식을 만들어 내게 된다. 수용의 모티브, 페미니즘적 이미지등 자기만의 해석을 바탕으로한 기반 위에 남자 주인공들은 형이상학적 미의식이나 이상을 상실해야하고, 여주인공들은 불가항력적인 숙명에 희생당해야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고는 이 원형질을 언제나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보관할 뿐이었다.

 신감독은 한국영화 50주년이 되는 1969년까지『배비장,1965』,『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내시,1965』와 같은 시대극을 꾸준히 만들었다. 영화 쇠퇴기인 1970년대에 들어와 검열과 영화관객의 급감으로 더욱 우울해진 신감독은 『궁녀,1972』,『삼일천하,1973』,『13세 소년,1974』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60년대의 화려함을 뒤집지는 못하였다. 

 특히 그가 1978년 납북되어 87년 탈출할 때까지 북한에서 만든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탈출기,1984』, 『소금,1985』,『사랑 사랑 내사랑,1985』, 『심청전,1985』,『방파제,1985』,『불가사리,1985』7편의 영화는 한국영화 통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탈북후에도 『마유미,1990』,『증발,1994』등으로 우리에게 건재함을 알렸던 신감독의 수상경력은 화려함 그 자체이다.『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제1회 대종상 감독상,『벙어리삼룡,1964』으로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돌아오지 않은 밀사』로 카르로비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소금』으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게하는등 그의 능력은 전세계에 알려져 있다. 신상옥의 대표작들은  재평가되고 있으며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찿아가는데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신감독의 영화제작 시스템은 노련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문된 파이를 들고 오듯 이미 그 성향들을 다 알고 있었다. 신필름의 노하우는 신속하게 팀웍이 운영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사불란하게 남편 쪽은 스텝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부인 쪽은 속전속결로 캐스트들을 지휘할 수 있는 투톱이 되었던 것이다.

 부인 최은희는 신상옥표 영화의 전속 배우였다. 그들은 처절하게 영화작업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 완벽한 호흡은 작품의 완성도와 빠른 촬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그리던 영화세상 영토피아는 현실에는 없는 것이다. 그 답은 자신의 내부 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데뷔작 『악야』의 상황은 아직도 전개되고 있고, 단지 화려한 영화 이면이 아름답게 21세기형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원로이지만 아직도 건재한 신감독의 건강비결은 무궁무진한 상상력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흥위원회등은 제작지원을 통해 원로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없고 장자꾼만 판치는 영화세상은 아무래도 삭막할 수밖에 없다.    파란을 겪으면서 영화작업을 해온 신감독이지만 아쉬운 점은 1)역사와 문학적 공통성을 앞세워 한국영화를 아시아 영화예술과 산업에 우뚝 세우지 못한 점  2)우회적인 표현으로 한국영화의 리얼리즘 전통을 확실히 세우지 못한 점 3)그의 작품에 다양한 여배우들을 주인공으로 출연, 실험하지 못한 점 4)안정적 영화제작 방식으로 보다 심도 깊은 작가주의 전통을 세우지 못한 점등이다.

 어려운 영화 환경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영화가 있게끔 한 산파역을 제대로 해낸 신감독의 불굴의 작가정신은 한국 영화를 고사위기에서 구해 내었다. 이제부터 신감독에 대한 연구와 지원으로 한국영화 역사를 새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모두 동참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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