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영화일반론)

영화인식

장코폴로 2010. 1. 22. 08:15

1. 영화의 의미


 영화는 현대의 산물이다.

  --->현대와 같이 태동. 동시대의 예술.

  --->영화 연구의 역사는 아직도 초보단계.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1.영화: 20세기의 산물

 2.현대사회는 대중사회==>대중매체가 중요한 역할


[영화에의 접근 (용어정리)]

 -프랑스(질벨 코깅세아)-

   1. film: 영화에 대한 미적, 철학적 접근 가능(문학적 정의)

   2. cinema: 사회적, 기능적 접근(인쇄술의 의미)

 -미국(제임스 모나코)

   1. movie: 경제상의 한 상품으로서의 가능


[예술언어 (기호, 상징)]

==> 관객사회(관객의 집합)=대중적 기호=사회의 성격을 반영

==> 영화는 관객이 만든다.

헐리우드는 공중(대중)이 자발성을 무시할 수 없다.--->자발성이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그것을 소비한 사회의 산물이다.

fun morality, mass leisure-->영화의 오락성 강조

현대사회의 성격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오락성이 강조되고, 예술성은 점점 위협받아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 수용 문제 ; 미디어를 통해 판단-->현실수용의 관점에 관한 문제-->직접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걸러진 상태의 것을 받아들인다.



2. 영화의 역사


1) 영화의 발명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 그라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 발명

 뤼미에르 형제, 1895년 --->처음으로 영화제작

   1.1895년 2월 10일 특허획득

   2.1895년 3월 22일 일반공개

 최초영화인 [공장에서의 귀가]를 완성

   3. 프랑스의 그랑 카페에서 1프랑씩을 받고 최초로 영화상영


2)  영화의 발달

   - 멜리 에스 : 1902년 세계 최초의 공상과학영화 [달세계로의 여행]

   - 포터 : 1903년 [대열차 강도]

   -그리피스 : 영화문법과 영화언어의 정립 1915년 [국민탄생]

                1916년 인톨러런스


3) 세계의 무성영화 - 몽타주의 포토 제닉 이론

                     찰리 채플린 - 키드/시티라이프/모던타임즈/황금광시대

4) 세계의 유성영화 - 1927년 워너 브러더스의 [재즈싱어]

                     1941년 오스웰슨 [시민 케인]


[한국 영화사]  

   - 최초의 영화 : 1919년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와 함께 공연된

                   [경성전시의 경] - 키노드라마

   - 최초의 극영화 : 윤백남의 1923년 작품인 [월하의 맹세]

   - 민족 영화 : 나운규 - 아리랑, 들쥐, 벙어리 삼룡이

                 이규환 - 임자 없는 나룻배


초창기 광복이전 한국전쟁이후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광복 이전(1923~1945)


1. 개요


한국영화의 기점을 놓고 한국영화사는 혼란스럽다. 우선 기점의 출발이 영화의 전래부터인지 한국 영화의 태동부터인지의 관점이 정리되지 않았다. 한국 영화의 태동부터 기점을 언급하더라도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냐 김도산의 <국경(1922)>이냐 또는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1923)>냐가 명백치 못하다. 이 밖에 확인되지 않은 자료로도 연쇄극 <과거의 죄(1917)>가 있으며 또다른 차원에서 완벽하게 우리손으로 만들어진 한국영화를 기점으로 본다면 이필우의 기록영화 <조선여자정구대회(1924)>와 박정현의 <장화홍련전(1924)>이 있다.

어쨌든 1923-26년의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극영화가 등장하고 아울러 영화제작사가 발족하기 시작한다. 초기 영화제작사들은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한 작품으로 끝나고 만 예가 대부분이었는데, 영화를 잘 모르고 제작에 뛰어든 것에 불과했고 문화적 사명이나 참여 의식보다는 투기성을 띤 시도가 많았다. 또한 영화제작에는 경제적인 뒷받침과 기술 습득이라는 두가지 요소에다 인재 양성이라는 절대 요건을 갖추어야 되었음에도 모든 것을 일본에 의존하고 배워야만 했다.

영화 제작이 본격화한 후 1926-35년까지 10년간은 진정 흑백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는데, 1926년 9월에 발표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한국영화의 전환기를 마련한 작품이었다. <아리랑>은 일제하 우리 한국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영화라는 매체가 어떤 일을 담당하여야 하는 지를 여실히 가르쳐 준 작품이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한국영화계는 활력을 갖게 되었고 다른 영화인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이 기간에 나온 작품 수는 80편에 달한다. 이는 해방 전 작품의 반 이상을 넘는 숫자다.

30년 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에도 발성영화가 등장하게 된다. 한국 영화의 최초 발성영화는 이필우가 녹음하고 그의 동생인 이명우가 촬영하고 감독한 <춘향전(1935)>이다. 이 작품을 만든 ������경성영화소������의 발성영화 시대가 개막되자 한국영화계는 촬영소 시설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메이저 시스템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발성영화의 시작은 엄청난 자본과 인원, 기술 개혁이 요구되는 한편 이에 따르는 뒷받침을 우리의 힘에 기댈 형편이 못되었던 때였기에 새로운 요구는 결국 제작의 위축을 뜻했다. 이러한 위축을 넘본 일본의 겨냥은 때맞춘 그들의 동양지배와 나아가서는 세계 대전의 망상을 버리지 못한 소용돌이와 겹쳐서 드디어 긴축과 통제 경제 속에 우리 영화계도 휘말리게 되어 서둘러 일본 일색의 영화, 특히 전쟁을 합리화하는 군부 지배하의 방향제시를 내세우는 데까지 이르고 만다. 따라서 우리 영화계는 일본의 지배하에 예속되었고 많은 인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백기를 겪게 된다.


2. 무성 영화 시기


연쇄극 시대가 가고 드디어 온전한 무성 영화가 도래하는데, 1923년 4월9일 우리나라 최초의 무성 극영화 <월하의 맹서(윤백남)>가 제작된다.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제작한 저축을 장려하는 극영화로,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필름으로 제작되었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극영화이며 각본, 감독, 출연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로 영화사적 뜻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성 영화의 효시가 <월하의 맹서>보다 몇 달 전에 발표된 <국경(김도산)>이라는 설도 만만찮게 제시되고 있는데, 비록 필름이나 스틸 한장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기록으로 인해 제법 설득력있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24년 당시 유일한 조선인 극장주였던 단성사의 박승필은 한국 사람들만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취지 아래 단성사 촬영부를 신설하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감독(박정현), 각본(김영환), 촬영(이필우) 등 스탭, 캐스트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최초의 영화였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우리에게 귀중한 경험이었고 순수한 우리 영화의 시작이었다.

극장이 늘고 관객층이 형성됨에 따라 제작사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영화 시장이 형성된다. 윤백남은 1925년 한국에서 첫번째 개인 프로덕션인 <백남 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심청전(1925)>을 첫 작품으로 내놓고, 비슷한 시기에 단성사 촬영부를 해체한 이필우, 이구영 등이 <고려영화 제작소>를 차려 <쌍옥루(1925)>를 개봉하여 흥행 성공을 하는 등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퇴폐적이고 유치한 통속소설을 윤색한 <쌍옥루(1925)><장한몽(1926)><농중조(1926)> 등의 영화가 주로 흥행하였으나, 이경손의 <개척자(1925)>는 이광수의 소설을 각색한 최초의 문예영화로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발아를 보여 줬다. 또한 이필우의 <멍텅구리(1926)>는 만화를 영화화한 최초 영화로 풍자적인 한국 희극영화의 출발이다.

1927년은 한해 동안 14편을 제작하여 해방전 최다 영화 제작을 한 기록이 남기도 했다. 우선 나운규의 <아리랑(1926)>의 등장은 영화사적으로 매우 의의가 큰데, 첫째 민족적 사실주의 영화의 대두이다. 종래의 한국영화가 유치한 모방과 신파물을 벗어나지 못할 때, 농촌의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사실주의 영화형식의 창조와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심리를 대변한 민족주의의 의식을 발아시킨 작품이다. 둘째, 영화의 개봉은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의 개봉이었다. 관객의 호응을 절대적으로 얻었던 <아리랑>의 흥행은 한국 영화산업의 개화를 촉구하였고 영화를 통한 조선인의 인식변혁이 시작되었다. 세째, 영화미학의 발전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아리랑>에서 보여준 몽타쥬나 사실주의 영상 감각은 연극 무대로부터 영화 예술을 탈피시켰다. 네째, 영화검열의 강화가 대두 되었다.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1926)이 제정, 공포되어 1928년에는 강화 시행되었다. 홍개명의 <혈마(1928)>는 상영 금지된 최초의 작품이다.

이 시기에 나운규는 <나운규 프러덕션>을 창립하고 <잘 있거라(1927)><옥녀(1928)><사랑을 찾아서(1928)><사나이(1928)><벙어리 삼룡이(1929)> 등을 제작, 감독, 시나리오, 주연까지 맡았다. 나운규를 중심으로 황운, 홍개명, 심훈, 김상진 등 많은 영화감독들이 활동하였다. 특히 카프계의 영화 활동은 주목할만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였으나 미숙한 영화 기법과 사상 탄압의 검열로 개봉조차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였다. 김유영의 <유랑(1928)>, 강호의 <암로(1929)> 등 대표작이 있다. 카프계의 논란은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쇠퇴시키는 요인으로 한국영화는 방향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영화 검열로부터의 회피이다.

우리는 무성영화 시대를 마감하면서 영화의 해설자인 변사를 기억해야 한다. 변사의 능력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했던 무성영화의 스타, 변사들은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고 비극과 활극으로 분류된다. 신파조의 목 쉰 목소리로 소설체의 대사를 읊었던 변사는 영화 해설 뿐만 아니라 효과음 그리고 영사기까지도 경우에 따라서 조작해야 했다. 일제의 검열은 변사의 자격증을 부여함에 있어서 그의 사상을 은근히 파악하였다. 그만큼 변사의 능력은 영상의 기능을 좌지우지 하였다.


3. 발성 영화 시대 개막


1935년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발성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녹음 기술을 위해 일본을 오가며 노력한 이필우의 연구와 공로의 결과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은 대사도 많지 않고 주제음악 및 배경음악도 양악을 사용하여 고전적인 내용과 일치되지 않는 등 기술적으로 허술한 구석이 많았지만, 당시 대단한 인기와 환영 속에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춘향전> 이후로 한국 영화계는 본격적인 발성영화 시대의 개막을 보게 되었다. 무성영화의 종말을 인식한 각 영화제작사들은 앞다투어 시설 근대화와 자본의 대형화를 계획하게 되었다. 기술 대혁신이 필요하게 되었고 연기자들도 실력이 없으면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 녹음 촬영이었으므로 연기자와 기술자 사이의 협력 체제가 절실히 필요했고, 이는 반사적으로 한국 영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리랑 3 (1936,나운규)><나그네(1937,이규환)><심청전(1937,안석영)><오몽녀(1937,나운규)> 등이 모두 토키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로 너나없이 모두 발성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던 제작자들은 당장 경영 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을 만들어 위세를 떨치던 <경성촬영소>마저도 <오몽녀>를 마지막 작품으로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자본으로 무성 영화의 몇배나 드는 발성영화를 경쟁적으로 만들었으니 영화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사의 대형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청구영화사><성봉영화사> 등 대형영화 주식회사다 설립되었다. 대형 영화사들이 설립되자 그동안 난립했던 중소 영화제작사들과 군소 프로덕션들은 자연 도태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 수가 줄어드니 제작편수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영화 일색인 흥행 현실에서 관객의 입장료는 일본 영화업자들의 배만 불릴 뿐이었다. 한국 영화계는 갈수록 위축되었는데, 한국영화사의 분기점이 되었던 발성영화의 등장이 역설적으로 영화계의 자본 사정 악화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4. 친일영화 제작 시기 


일본은 1937년 <만주영화법>을 제정하여 만주국의 영화제작, 수출입, 배급과 상영을 일원화하였고 1939년에는 일본 문부성에 영화과를 신설한 후 <일본영화령>을 제정하고 1940년 <조선영화령>을 공포하기 1년 전부터 내선일체와 식민지 침략전쟁에 비협조인 영화인들을 내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38년에 만들어진 <군용열차>는 경향파 영화평론가였던 서광계의 변절로 일지사변에 편승하여 제작된 군국 어용 영화의 시작이었다. 1941년 조선영화제작협회와 조선영화배급협회의 결성은 1942년 조선영화제작자를 축출시킨 <조선영화주식회사> 발족으로 한국영화의 제작, 배급은 일본에 의해 완전 장악되고 한국영화의 암흑기는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은 일제 하의 조선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황국 신민으로서 일본에 협력할 것을 선동, 교화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최인규의 <집없는 천사(1941)><가미가제의 아들들(1945)>, 안석영의 <지원병(1940)><흙에 산다(1942)>, 방한준의 <승리의 뜰(1940)><거경선(1944)><병정님(1944)>, 신경균의 <우리들의 전쟁(1945)><감격의 일기(1945)>, 박기채의 <조선해협(1943)>, 허영의 <너와 나(1944)> 등이다. 반면에 전창근의 <복리만리(1941)>, 윤봉춘의 <신개지(1942)>는 일제의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족의 계몽영화를 고집하였다.

1940년 이후 일본의 가혹한 억압은 한국 영화계를 꼼짝달싹 못하게 족쇄를 채웠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저력은 일본의 극악한 동원령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비록 암울한 시기이기는 했으나 인동초처럼 겨울을 지나 광복의 날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전쟁 직후(1945~1959)


1. 개요


일제 식민지 하에서 해방된 한국영화계는 새로운 질서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 현실은 영화인들의 노력이나 영화계 고유의 동력에 의해 주도적으로 결정될 상황이 아니었다.영화계 자체 입장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동향이 영화계를 좌우하는 상황이었는데, 영화는 그 자체의 특성상정치적인 선전 목적으로 무한정 이용될 수 있고 자본주의적 이윤추구 목적에 의해 무한정 지배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윤백남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영화 건설본부>의 발족은 일제의 <조선영화 주식회사>의 시설과 기자재를 인수하였다. 이어서 1946년에는 좌익계의 <조선영화동맹>과 <조선영화감독구락부>가 결성되어 한국영화의 새로운 질서의 형성과 함께 혼란이 예견되었다. 1946년 미군정청이 공포한 법령 제68호와 115호는 새로운 영화법령으로 또다른 차원에서 우리 영화계의 활동을 제재하였다. 그러한 와중에서 영화 배급과 흥행 계통의 혼란은 이후 한국영화의 미래를 양적으로만 팽창시킬 뿐 실속이 없는 악순환적인 현실을 직면케 한다. <조선영화 건설본부>는 <조선영화 주식회사>에서 인수한 껍데기뿐인 열악한 기자재와 시설을 가지고 미군정청의 뉴스영화 제작 의뢰를 맡아 영화제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한국영화계의 한 쪽 구석에서는 연쇄극이나 16미리 무성영화가 출연하는 한국영화 기술의 후퇴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고려영화협회>의 재건과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개봉은 광복 영화의 효시로서 출발한다. 이 시기의 광복 영화는 애국투사, 순교자, 의사의 전기와 투쟁사를 통해서 민족해방을 위한 겨레의 아픔과 수난을 그리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되면서 한국영화계의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영화인의 납북과 월북, 기자재의 파괴, 기존필림의 유실 등이 그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물자 부족의 현실은 민간인 차원에서 영화를 제작하기가 벅찼고, 그나마 활동했던 영화인마저도 군영화 제작 활동에 투입되었다. 미502부대의 <리버티 뉴스>, 부산 정훈국의 <국방뉴스><백만인의 별>, 공보처의 <대한뉴스> 등 전시의 한국 영화는 일반극영화 보다 기록영화 제작에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서울의 환도는 다시 한국영화 제작의 활기를 구가하였고 1954년도의 제작편수는 18편으로 전쟁 전의 수준으로 복귀하였다. 작품경향은 전후방에 걸친 시국적인 계몽영화와 전시 사회를 배경으로 범죄를 다룬 서스펜스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밖에 기록 영화의 활성화는 동란기 한국영화의 특진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영화사에 있어서 50년대 후반은 20년대 후반처럼 한국영화의 제2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1954년 한국 영화계에 대한 면세조치는 영화 제작에 있어서 양적인 증가를 유도했고 영화 산업의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1955년에 불과 15편 제작으로 시작된 전후 영화는 59년에 이르러 109편 제작을 달성하는 영화 산업의 성장을 과시했다. 과거의 영세한 수공업 형태의 보따리 장사에서 어느 정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와 기자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영화계는 대거 새로운 영화인을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인의 양성을 위한 전문교육 기관인 <서라벌 예술학교>(1953)를 시작으로 설립되었다. 전란으로 파괴되었던 극장들은 빠른 시일 내에 복구가 되었고 신축된 극장의 증가는 영화 시장의 확대를 유도했다. 그 결과 한국영화계의 급속한 성장은 다양한 영화예술을 가능케 하였다.

민중오락의 대표적 매체로서 군림하게된 영화는 대중의 호응도와 함께 산업으로서의 성장은 물론이요, 영화의 예술적인 면에서도 괄복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1956년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은 ������제4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특별 희극상을 수상하여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억될 만하다.


2. 광복 후의 영화


광복의 기쁨은 1945-50년 사이의 한국영화에 엄청난 파장을 미쳤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누리려는 욕망이 이 시기 영화의 주조를 이루었다. 소위 ������해방 영화������������광복 영화������라 불리우는 일련의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1946년 10월에 개봉된 최인규의 <자유만세>가 바로 그러한 ������광복 영화������의 대표적 작품이다. 대일 항쟁을 위해 싸우는 독립 투사들의 모습이 활극 형식으로 다루어진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는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사랑도 외면한 주인공이 악착같은 일본 순사의 추격을 피해 끝까지 항전하다가 광복을 눈앞에 두고 장렬하게 죽어간다는 내용은 당시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외 대표적 작품으로는 윤봉춘의 <윤봉길 의사(1947)><유관순(1948)>, 전창근의 <해방된 내 고향(1947)>, 이구영의 <안중근사기(1946)>, 신경균의 <새로운 맹세(1947)>, 이규환의 <민족의 새벽(1947)> 등이 있다.

또한 해방과 함께 새사회를 건설하자는 계몽적인 영화와 국민 계몽을 목적으로 만든 정책 영화의 제작도 활발했다. 새로운 농촌 건설과 사회 계몽, 아동 교육에 이바지 할 것을 다짐하는 계몽 영화로서 <그들의 행복(1947)><해방된 내 고향(1947)><사랑의 교실(1948)> 등이 있으며, 정책 영화로는 선거 제도 계몽용으로 만들어진 교육 영화 <국민 투표(1948)>, 한국 농촌의 풍물을 소재로 한 해외 홍보영화 <희망의 마을 (1948, 최인규)> 등이 있다.

이러한 계몽영화와 정책영화의 홍수 속에 윤대룡의 <검사와 여선생(1948)>, 최인규의 <죄없는 죄인(1948)>,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홍성기의 <여성일기(1949)> 등 멜러드라마와 활극 오락영화 그리고 반공 영화를 비롯한 차분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이 등장했다. 해방 이후 부족한 기자재와 시설 탓에 16mm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검사와 여선생>은 전형적인 신파조의 멜로드라마에다 변사의 해설을 들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으나 전국에서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마음의 고향>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은 작품인데,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각색해서 만든 이 영화는 1949년 ������제1회 서울시 문화상 영화부문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특히 홍성기의 <여성일기>는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로 기록된다.


3. 폐허 속의 영화


해방을 맞은 지 5년 만에 우리 민족은 사상 유례없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1950년의 참사는 우리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감을 준 다분히 숙명적인 것이었으나 이러한 자기 반성의 계기는 오히려 일제 36년을 벗어난 단순한 해방감만 느끼던 8.15 직후와는 다른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질 문화와의 마찰 속에 국민 의식에는 변화가 왔으며, 사회에 대한 깊은 불신은 정신적인 방황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시기는 한국 영화의 두번째 공백기였다.

전쟁 기간인 1950-3년까지 거의 모든 영화인들이 정부기관과 군대에 소속되어 영화제작을 계속 하였다. 전투 현장이나 후방의 상황을 찍은 보도 영화등의 기록 영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소수의 극영화도 제작되었는데, 대개 적의 만행을 고발하고 승전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반공 계몽 영화의 형태를 띄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전쟁과는 별도로 제작된 한국 극영화으로는 신경균의 <애인애사(1950)><3천만의 꽃다발(1951)>, 이경손의 <흥부와 놀부(1950)>, 윤봉춘의 <성불사(1952)>, 전창근의 <낙동강(1952)>, 민경식의 <태양의 거리(1952)>, 신상옥의 <악야(1952)>, 이만홍의 <애정산맥>,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손전의 <내가 넘는 삼팔선(1951)><공포의 밤(1952)> 등 전시 중 년 5~6편 제작 수준에 머물었다.


4. 새로운 도약기


1954년 서울로 환도한 영화인들은 폐허가 된 서울거리를 재건하는 과정을 그린 <빛나는 건설>을 공보처에 납품했다. 서울의 빛나는 건설 못지않게 곧 영화계에도 빛나는 봄이 도래하는데, 휴전 후 사회 분위기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영화 제작도 평상 수준을 회복해 갔다. 1959년에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한 해 영화 제작 편수가 100편을 넘어서게 된다. 작품 경향에 있어서도 문제 의식이나 형식, 영화 장르나 소재도 전에 없이 다양해 졌다.

1955년 국방부에서 문교부로 영화 행정 이관, 영화인의 상호간의 단결을 의미하는 각종 협회의 조직, 국산 영화에 대한 보상책 등이 한국 영화의 활성화를 위해 보탬이 되었고, 외국 영화는 국산 영화의 내용과 질에 있어 많은 노력을 촉구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1955년에 개봉된 이규환의 <춘향전>과 한형모의 <자유부인(1956)>의 흥행 성공과 화제거리는 한국영화 중흥의 횃불을 밝혔다. 보수적 윤리를 다른 역사극 <춘향전>과 전후의 혼란 속에서 새롭게 직면한 자유주의의 만연된 풍조를 그린 <자유부인>은 우리의 혼란된 윤리의식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 시대의 민중오락의 갈증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50년대 후반의 작품 경향은 사극, 멜러물, 코미디 영화, 액션, 예술물 등 다양하다. 이규환의 <춘향전>이 흥행하자 먼저 사극영화의 붐이 일게 되는데, 고전 소설, 왕조비사, 야사의 로맨스 등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함께 화려한 의상과 무대 세트가 관객을 끄는 요인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김기영의 <양산도(1955)>, 전창근의 <단종애사(1956)>, 안종화의 <사도세자(1956)>, 신상옥의 <무영탑(1957)> 등이 있다.

또한 우리 영화의 가장 전통적인 장르로서 50년대 후반 다시 등장한 멜로드라마는 당대의 세태를 현저하게 반영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홍성기의 <실락원의 별(1957)> <청춘극장(1959)>, 신상옥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동심초(1959)>,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1957)> <구름은 흘러도(1959)> 등 낡은 윤리나 도덕, 기성 관념 등이 변화하는 세태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코미디 영화가 많아진 것도 이 시기 영화의 특징이다. 일제 치하와 6.25를 겪으면서 그간 한국 영화계는 발디딜 곳이 없었던 것이다. 1956년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과 홍일명의 <벼락감투(1956)>가 초기 코미디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후 권순영의 <오부자(1958)>, 유현목의 <인생차압(1958)>, 김화량의 <뚱뚱이와 홀쭉이, 논산훈련소에 가다(1959)> 등 서민생활을 그린 세태의 풍자로 당시 인기 코메디언들인 이종철, 구봉서, 양훈, 양석천, 김희갑 등이 감초로 출현했다.

이러한 50년대의 다양한 장르적 접근과 실험 덕분에 우리 영화계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해방 후부터 고착되어온 분단의 불안정성과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상이 6.25 전쟁으로 더욱 완고하게 굳어져 버린 감은 없지 않지만, 60년대 4.19로 표상되는 민주, 자주, 자유의 바탕과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던 것이다. 50년대 영화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르의 세분화, 소재의 다양화, 제작편수의 급격한 증가 등 이 모든 징후가 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배태하게 된다.

1960년대(1960~1969) 


1. 개요


60년대는 또한 한국의 방송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TV 보급이 확대되면서 종래의 영화가 가지고 있던 상업적 구조가 깨어지고 지금까지의 영화 관객이 안방으로 분산된다.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던 극들을 안방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된것이다. 이러한 TV의 영향 속에서도 60년대에는 많은 영화가 발표되는데,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1,500편이 훨씬 넘는 한국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양적 풍요 속에서도 작품의 뚜렷한 경향은 없었는데, 다만 2-3년마다 히트작의 아류작들이 이어지고 다양한 장르 영화가 공존했다.

1962년 1월 법률 제995호로 한국 최초의 ������영화법������이 만들어 진다. 그 내용의 핵심은 한국 영화의 보호와 육성인데, 신규 영화법의 제1조건의 목적에 ������영화회사의 육성발전을 촉진하고 영화문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민족예술의 진흥에 기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법제정의 강제성만큼이나 제도적으로 영화 내용에 제동을 거는 장치가 되고 말았다. 비단 한국영화 뿐만 아니라 외국영화의 수입에도 외화 절약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관객의 보는 권리마저 제한한 제도였고 앞선 영화의 접근을 사실상 막아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이 영화법은 당시 71개사에 이르던 영화사를 16개사로 통폐합시켰고 신규등록 여건을 엄청나게 강화 시켰다. 그 결과 64년 <영화법 폐기촉진 위원회>의 활동은 영화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6차에 걸쳐 영화법이 개정되었다. 본 영화법은 스크린 쿼터제 등 긍정적인 한국영화 보호책도 있었지만 영화 검열의 대폭 강화는 한국영화의 작품제작 경향을 변화시키게 된다. 유현목의 <공갈>, 이만희의 <휴일> 등은 개작 명령을 받았고 <폭로><7인의 여포로(1965)><춘몽> 등은 사회 목적에 어긋난다고 해서 심한 가위질을 당했다. 이 밖에 박종호의 <벽속의 여자(1969)>, 신상옥의 <내시>, 이형표의 <너의 이름은 여자> 등의 작품은 외설 혐의 시비를 받아 검찰에 입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몇몇 감독들은 의식이 뚜렷한 창작활동에 이바지하게 되어 자못 멀어져 가려는 관객을 되돌려 세우는 데 공헌했다. 유현목은 <김약국 집 딸> <잉여인간> <순교자> 등으로 그의 위치를 다졌고, 신상옥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이어 <상록수> <열녀문> <벙어리 삼룡>에서 그 나름대로의 영상미를 시도해 보였다.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 <고려장>, 김수용의 <혈맥> <안개>, 이만희의 <시장> <만추> 등 역시 높은 수준의 작품으로 개성이 뚜렷한 작가들로 인정받았다. 이 밖에 문예물이나 오락 위주의 영화는 작품 전체의 수만큼 많았는데, 현실을 벗어난 안이한 영화들은 점차로 국적불명의 내용으로 치닫고 만다.


2. 멜로드라마의 흥행


60년대 멜로드라마는 서민층의 생활, 또는 가정을 중심으로 한 여러가지의 생활 현실을 반영했다. 서민층의 생활이나 가정사를 놓고 보수적인 논리와 새로운 세대 또는 사회 현실의 단면이 극적인 갈등을 일으키는데, 신상옥의 <로맨스 빠빠(1960)>, 홍성기의 <길은 멀어도(1960)>, 박상천의 <가족회의(1962)> <또순이(1963)>, 김수용의 <굴비(1963)> <월급봉투(1964)>, 유현목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있다(1961)> 등 전후 세대간의 거리와 윤리적 갈등, 생활 현실의 어려움을 가정을 통해 드려내려 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색채는 후반에 오면서 신파의 경향이 짙어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소영의 <미워도 다시 한번(1968) >을 들 수 있다. ������젊은 미혼 여성이 기혼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남자의 아내가 나타나 두사람은 헤어진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주인공은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른다. 아이가 자라자 여주인공은 아이의 장래를 위해 아이를 남자 주인공에게 보낸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많은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우리의 사회의식을 엿보게 한다.

첫째는 남자 아이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다. 두 주인공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는 대부분 남자아이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화는 남자아이를 데려가려는 남자 주인공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여자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둘째는 영화를 보는 여성들의 모성을 자극하는 부분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져 홀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한다. 특히 우리 사회의 구조 속에서 여성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은 크고 작은 일에 장애를 겪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를 남자 주인공에게 보내고 돌아서는 여성을 통해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보내는 것 같은 깊은 모성애를 느낀다.

이 작품의 큰 성공으로 인해 <속 미워도 다시 한번(1969)><미워도 다시 한번 3편(1970)><미워도 다시 한번 대완결편(1971)> 등의 속편이 제작되었으며, 비슷한 이야기 구조의 아류작들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3. 청춘영화의 대두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청춘영화라는 뚜렷한 하나의 경향이 나타났다. 청춘영화란 한마디로 젊은 세대의 영화다. 해방과 무참했던 동란을 거쳐 20대 전후에 이른 젊은 세대가 주인공이 되고 관객이 되는 그런 영화다. 4.19가 있은 후 젊은 세대들은 하나의 세대 의식을 가지고 형성된다. 그들은 전후의 기성세대와는 다른 사회 현상을 경험하고 그들만의 스타일을 추구한다. ������청춘영화������의 주인공들은 기성 세대에 반발하거나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면서 젊은 관객층으로부터 열렬한 반응을 일으킨다.

이러한 청춘영화는1963년부터 68년까지 약5년동안 김묵의 <성난 능금(1963)>, 정진우의 <배신(1964)>, 김기덕의 <맨발의 청춘(1964)>, 박종호의 <학사주점(1964)>, 유현목의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1965)>, 김수용의 <여자 19세(1964)> 등 많은 작품들이 제작된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김기덕의 <맨발의 청춘>이다.

이 시대의 청춘영화 역시 공식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뚜렷한 계급 차이를 지닌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대개 여주인공이 부유한 환경이고 남자 주인공은 가난하거나 가정적인 결함이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한다. 그들은 부모에 의해 강제로 헤어지거나, 두 주인공 중 한쪽이 죽는 결말이 난다.������ 지금까지의 세대들은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면 대부분 가족의 뜻에 따랐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가족의 뜻에 따르기 위해 그리움을 참고 견디는 그런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청춘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랑이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청춘영화는 전후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세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4. 문예 영화의 위세


������문예 영화������란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을 의미하는데, 60년대 후반 들어 본격적인 문예 영화 붐이 일기 시작한다. 이는 정부의 우수영화 보상제도에 따라 외화 수입 쿼터를 얻기 위한 제작 경향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주제의식에 따라 영화가 제작되기 보다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작품들을 영화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문예 영화들 중에는 작품의 주제 의식이 뚜렷하고 정제된 영상 처리의 예술성이 높은 작품도 제법 있었다. 유현목의 <오발탄(1961)> <잉여인간(1964)>,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정일몽의 <빼앗긴 토요일(1962)>, 김수용의 <혈맥(1963)> <갯마을(1964)>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이성구의 <젊은 표정(1960)>, 이만희의 <흑맥(1965)> <만추(1966)>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현목의 <오발탄>은 문제의식이 강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6.25를 겪은 한 가정을 통해 그 당시 사회가 느끼는 삭막한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혼란한 시대를 사는 소시민의 모습을 통해 삶 자체가 하나의 오발탄과도 같다는 메시지를 남기며 전후의 혼란상과 살아남는 데 급급한 소시민의 모습에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작품은 현실의 비참함과 피폐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내용으로 한때 상영 금지되기도 했다.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김수용의 <갯마을>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 심리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어 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특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원작과는 달리 어머니의 재혼을 문제삼는데, 어머니의 오빠를 통해 이제는 구습을 벗고 사회 변화에 맞추어 우리의 가족제도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아저씨가 서울로 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이만희의 <만추>는 줄거리 위주의 전개방식을 벗어난 묘사 위주의 단순한 이야기다. 정제된 대사와 늦가을 폐선 위로 석양이 비껴가는 바닷가의 밀회장면은 인상적인 장면인데, 이제까지의 영화가 대부분 복잡한 줄거리 위주로 이어졌다면 이 작품은 정제된 대사와 뛰어난 영상미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60년대 문예영화의 붐이 소재 부족의 한국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무분별한 소설의 영상화가 빚어낸 어설픈 작품들이 다수를 이루었지만 개성있는 작가군의 출현과 활발한 영화 제작은 모처럼 한국영화에 전성기를 부여했다.


1970년대(1970~1979) 


1. 개요

70년대의 한국 영화계는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침체되고 암울한 시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TV의 전국적인 보급과 함께 유신 정국하에서의 가혹한 검열로 인한 표현의 제한은 한국 영화를 불황 속에 내던졌으며 영화의 질적하락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1972년 들어선 유신 정부는 73년2월16일, 제4차 영화법 개정을 시행한다. 영화사 등록 여건을 한층 엄격하게 규정하여 은연 중에 활동하던 개인 영화업자들의 움직임을 막아버렸으며, 1년에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게 하는 의무 편수 조항을 적용했다. 물론 모든 영화는 유신 이념을 구현해야 했으며 초기 법령과 마찬가지로 20개 영화사는 독과점 형태로 영화 시장을 나뭐 먹기식으로 주물러 가며 다른 세력을 키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서로 견제, 단합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외화 수입은 한국 영화 육성이라는 이유 하에 국산 영화 제작의 1/3을 넘지 않고 상영일수는 전체 상영일의 2/3을 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자연히 1년에 약 30편을 넘지 않는 외화는 희소가치 때문에 흥행은 보장되었고 외화 수입 쿼터를 싸고 계속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또한 영화의 검열 기준을 강화하는 한편 합작영화의 기준을 명시하여 위장 합작영화 방지와 그 밖에 배급 업무를 담당하는 ������영화배급협회������를 설치 운영케 했다.

검열은 긴급 조치에 위배되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내었는데, 사전 대본 심의와 실사 심의가 공존했다. 이 때문에 사회적, 시대적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먼 영화들이 양산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타난 돌파구가 호스티스물 등이었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에 이은 호스티스물의 범람은 삶에 대한 냉소, 육체적인 자유 추구, 여성의 상품화라는 소비성 강한 사회 풍조가 크게 대두된 것이다.

우수 영화를 만들어 스크린 쿼터의 보상을 받는 제도는 60년대에 이어 문예영화를 양산하는 지지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는 사라지게 되었고 사회의식이나 작가의 비판은 당국의 강력한 통제하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수 영화는 국책 영화������ 라는 의식의 팽배로 대부분의 관객이 신파물, 호스티스물에만 시선을 돌리는 사이에, 여전히 ������국난을 극복한 위인������을 다룬 영화나 독립 투사의 활약, 반공 영화, 계몽 영화들이 우수 영화로 지목되고 보상이 주어져 영화계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계는 산업화하지 못했고 소수의 영화 자산가를 만들어 내면서 영화감독들에게는 박탈감을 안기고 영화에는 질적인 퇴보를 가져왔던 것이다.


2. 유신 정권 하의 작품 경향


이 시대에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손쉽게 관객을 사로 잡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의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60년대 말에 제작되어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정소영의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의 속편(1969-1971)들과 그 아류작들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최루성 멜로 드라마들은 고정적인 여성 관객들을 확보하는 수확을 얻는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과연 당대의 리얼리티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 어렵다.

60년대 청춘영화의 계보 역시 고교생이나 대학생들의 학창시절을 코믹하고 낭만적으로 그린 하이틴물 대체된다. 김응천의 <여고 졸업반(1975)>을 비롯하여 <고교 얄개(1976)>, <모모는 철부지(1979)> 등 수많은 하이틴 영화들이 만들어지지만, 이들 영화에서도 당대의 리얼리티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 영화의 또 하나의 경향은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자란 향락 소비문화의 희생자들인 ������호스티스������와 ������창녀������의 이야기들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은 호스티스를 주인공으로 하였고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는 창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사회에서 불우하게 살아가던 일군의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특히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한 <별들의 고향>은 기념비적인 숫자의 관객을 동원하며 영화사적 의미에서의 70년대를 열었다. 주인공 ������경아������는 고도 성장의 그늘 아래서 부생(浮生)하던 많은 유흥업계 여성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화들은 이후에도 계속 아류작들이 만들어져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희생된 여성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서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70년대에도 <별들의 고향(최인호 원작)>,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원작)>를 비롯해 유현목의 <분례기(1971, 방영웅 원작)>, 최하원의 <독짓는 늙은이(1972, 황순원 원작)>, 김수용의 <토지(1973, 박경리 원작)> 등 많은 문예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이외에도 미국 UCLA에서 체계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은 전위적인 작품 <화분>으로 당시의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70년대 한국 영화계는 이들 작품들로 인해서 그나마 명맥을 이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로 말미암아 영화를 통해서 당대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내보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회 의식이나 작가적인 비판정신은 사라지고 당대의 풍경을 가볍게 다루거나 제도권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소재나 내용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70년대 한국영화는 대중들로 하여금 불안하고 암담한 사회 상황에 대해서는 회피하게 하고 집단적인 마취상태에 빠져들게 한 셈이다.


3. 우울한 시대의 대표작들


1979년 김응천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모모는 철부지>는 6-70년대 한국영화에서 심심찮게 나타나는 청춘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당시 엄청난 흥행 성공을 했다. 대학생들이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기본 줄거리에 삼각관계로 인한 인물간의 갈등을 가미한, 지금 보기에는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진부한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당시 인기를 얻었던 이유은 무엇일까?

1979년이라는 시간대를 생각해 볼 때,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대학생은 흔치 않은 계층의 인물이다. 당시 20세 안팍의 청소년들은 대부분 공장이나 회사에서 산업일꾼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는가 하면 깡패나 창녀가 되어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에게 대학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의 삶을 체험하고자 했던 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주인공들 모두가 부유층에 속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의 삶이야 말로 이상적이며 완벽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결국 당대에는 이런 영화를 통해서나마 고단한 현실을 잊고 장미빛 꿈을 꾸려는 관객들의 욕구와 그것을 만족시키려는 영화 제작자의 욕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들이 붐을 일으키며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974년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은 자본주의의 휘황찬란함 뒤에서 이름없이 시들어가는 ������호스티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70년대는 공업화, 산업화가 최우선 과제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1차 산업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생업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이러한 때에 많은 시골 젊은이들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노동자가 되었던 것은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여성들은 공장을 전전하다가 좀더 돈벌이가 나은 직업을 찾게 되는데, 그 일이라는 것이 바로 호스티스나 매춘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적 여건 속에서 주인공 ������경아������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인물의 삶이란 절망과 두려움 뿐이었다. <별들의 고향>은 겉으로는 휘황찬란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뒷골목 인생들을 조명하고 그녀들의 삶의 실상을 파헤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하길종 감독의 <화분(1972)>은 당시의 관점으로 보나 오늘날의 관점으로보나 한국영화사상 상당히 독특한 작품이다. 이효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데, 사건의 의미들을 뚜렷하게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인물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가히 새로운 형식이었다. 시종일관 음울하고 괴이한 분위기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표정이나 화면까지도 모종의 음모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원작에서는 인물들의 애정관계를 방탕하게 보여주고 있는 반면, 영화는 이들의 애정관계를 지극히 단순화시킴으로서 비교적 절제있고 심도 깊은 효과를 얻어낸다.

이 작품은 당시 안일하게 영화를 제작하던 영화인들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어 우리 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대중들에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비판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1980~1989) 


1. 개요

980년대의 한국 영화는 또 한번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환기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의 하나다. 그 중요한 개혁의 골자는 70년대 영화에 대한 정책적 통제에서 80년대의 개장정책으로의 전환에 의한 영화제작의 자유화라고 할 수 있으며 커다란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1979년에 제 4공화국의 막이 내리고 1980년에는 제 5공화국이 출범하였으며 이것은 곧 한국사회의 전면적인 전환, 즉 통제적인 폐쇄사회로부터 폭넓은 개방적인 민주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양시대 사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그 변혁은 현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폐쇄로부터 개방으로의 사회적 변화는 한국영화 구조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몰고 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영화법의 개정이었다. 지난 70년대에 줄곧 정부가 연례의 영화시책에서 주장했던 유신이념의 구현이라는 특정한 정책명령이 사라지고 ������영화 예술의 향상������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영화 검열에 있어서 크게 완화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서 1980년대의 한국영화는 70년대 영화와는 그 미학적 특징을 현저하게 달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모의 원인이 되는 것을 70년대의 폐쇄적인 영화 환경이 80년대의 보다 개방적인 영화 환경으로 전환한데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영화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 된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한편으로는 영화에 주어지는 소재로서의 개방과 성장의 사회변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규제의 요인으로서의 영화정책이 지양되므로서 80년대 영화의 몇가지 특징을 볼 수 있게 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한국 영화는 본래의 작가적인 눈으로 정직하게 생생한 소재를 선택하고 표현의 영역을 넓혀 한국영화가 소생할 가능성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리얼리즘의 회복과 진지한 작품의 제작을 그 주조로 하게 된데서 깊은 뜻을 갖게 한다. 한편 매우 실험적인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점도 80년대 영화의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은 70년대에 그 작가 의욕이 억제되었던 일견의 중견 감독들과 80년대에 데뷔한 신인감독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의 진지한 눈으로 한국사회의 현실이 안고 있는 가난한 서민층의 생활이나 억압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인간 생활의 모순과 비참함을 그려냈다. 물론 80년대의 사회 현실은 5-60년대의 처참한 전후 현실과는 다르다. 한국인의 GNP가 불과 100달러였던 1950년대에서 2000달러가 넘게 죈 거대한 산업사회로 발전함에 따라 괄목할 만큼 달라진 사회적 변화, 그 변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오락 영화는 다시 멜로드라마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대잠한 에로티시즘이 그 주조가 되었다. 이것도 역시 영화 검열이 완화되면서 나타난 경향이다. 70년대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농도 짙은 섹스 장면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 80년대의 영화 장르는 사극 영화와 종교영화의 새로운 대두가 주목되었다. 한편 활극과 희극 영화들이 잠시 살아났다가 쇠퇴했으며 70년대까지 정책적인 장르였던 군사영화, 반공영화,계몽영화 등은 거의 눈에 띄지않게 되었다.


2. 새로운 영화 미학의 시도들


먼저 50년대에 데뷔한 거장 유현목이 만든 <사람의 아들(1980)>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민요섭이라는 한 이단적인 신학생의 사회참여의 신념과 행동을 심각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이 믿어왔던 이단적인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만 결국 그의 광신적인 추종자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사회참여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70년대에 있어서는 용납되지 않았던 주제다. 유현목은 70년대 오랜 슬럼프에 빠져있다가 <사람의 아들>에서 또한번 그의 독특하고 강렬한 사실적인 영상미학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60년대 주요한 활동을 한 임권택 감독의 작품으로는 <짝코(1980)><안개마을(1982)><불의 딸(1983)><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길소뜸(1985)><씨받이(1986)><티켓(1986)> 등이 있고 그의 작품은 현실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통해서 그것을 완벽한 영상으로 표현하는 오소독스한 연출을 찾아볼 수 있다. 임권택의 작품 속에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만다라><길소뜸>이 있다. <만다라>는 베를린 영화제의 본선에 올라크게 평가되었고 이어서 세계각국의 영화제에 초청되어 한국영화의 수준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길소뜸> 역시 베를린 영화제의 본선에 올라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던 작품으로 6.25동란으로 헤어지게 된 남녀가 휴전 후 30년이 지나 아들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극적 감정을 전혀 배제한 카메라의 객관적 응시를 통해서 시간적인 매몰 속에 묻힌 분단 민족의 전쟁과 찢겨진 남녀의 애정, 그리고 끝내 친자 확인을 거부하는 인간의 변화에 깊은 비판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통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그렸다. <길소뜸>은 또한 시카고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정진우가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63년 <외아들>로 였다. 25세에 감독이 된 그는 60년대의 청춘영화의 기수로 젊은 세대들의 욕구불만과 센티멘탈리즘을 담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그의 1982년작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는 도시의 가난한 처녀가 돈에 팔려 어느 낙도에 작부로 가는 데서 시작한다. 낙도로 팔려간 작부는 뱃군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며 생선 한마리 값에 몸을 팔아야한다. 그녀는 한 선원과 사랑을 하게 되면서 섬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정진우는 남해 낙도에 로케이션을 감행해 자유를 갈망하는 한 여인의 처참한 생존 싸움을 고발적으로 묘사했다. 조직적인 폭력배의 그물 속에서 이처럼 생존의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치열하게 묘사한 작품은 보기 힘들었다.

70년대 데뷔한 이두용과 이장호는 임권택과 함께 80년대 대표 감독들이었는데, 이두용은 70년대에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했다. 그는 지금까지 50여편 가량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피막(1980)><최후의 증인(1980)><욕망의 늪(1982)><물레야 물레야(1983)><장남(1984)><뽕(1985)> 등이다. 이중 <물레야 물레야>는 그의 가장 중요한 대표작으로 이조시대 유교적 신분 계급사회의 제도와 관습하에서의 여인의 비참한 운명을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거의 금욕적일 만큼 높은 의식성의 미학을 보이게한 영화 스타일의 확립이다. 이 영화는 엄격하게 억제된 모든 화면과 결백하리만치 정서가 억제된 영상의 쌓아 올림을 통해서 아름답고도 슬픈 한 여인의 비극을 의식화했다. 이 영화는 1984년 깐느영화제에 참가해서 ������어떤 시선������부문의 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이 밖에 이두용은 현대의 한국 가정에 있어서의 장남의 역할과 가족구조의 의미를 다룬 <장남>과 일제 식민시대에 있어서의 삶의 고통을 성적 해학으로 묘사한 <뽕>을 만들었다.

이장호는 80년대 한국영화에 가장 정력적인 영화활동을 했는데, 그는 영화의 흥행면에서도 방대한 관객동원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문제작이나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는 면에서 또하나의 작가적인 개성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이장호의 작품으로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어둠의 자식들><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바보들의 행진><과부춤(1983)><어우동(1985)> 등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 지적될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가 그가 만든 작품들이 심각한 주제나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인데, 흔히 예술작품은 관객이 적고 흥행작품엔 예술성이 빈곤하다는 영화계의 통념을 이장호는 보기 좋게 깨뜨렸다. 이러한 예술성과 대중성의 동조를 보게 하는 그의 주요작품들의 주인공은 거의 현실사회의 밑바닥에 깔린 비천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비천한 인간들을 취급한 감독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장호는 이러한 인간들을 다양한 영화미학을 통해 호소력 강하게 그리고 있다.


3. 에로티시즘류의 멜로드라마


80년대 만들어진 한국 영화 중 뚜렷한 기세를 회복한 것은 멜로드라마이다. 70년대에 만들어진 애정물이나 통속물은 전체 제작편수의 약 40% 정도였는데 반해 80년대의 비율은 15%상승한 55%이다. 이로서 긴장되고 정서가 메마른 시대에는 멜러 드라마가 감소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다. 80년대의 멜로드라마의 회복은 그런 의미에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의 완화를 대변하며 내용 부분에 있어서는 짙은 에로티시즘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 1981년 박봉호의 <자유부인>과 김성수의 <색깔있는 여자> 그리고 이두용의 <욕망의 늪(1983)>, 이장호의 <무릎과 무릎 사이(1984)>가 있다. 이러한 영화는 대개 기혼 여성들의 사생활을 다루었다. 청춘영화와 10대 청소년영화는 김응천과 문여송이 집념을 가지고 만들어 왔다. 특히 김응천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살려는 청춘군상을 그려 왔으며 긍정적인 삶의 의지를 사랑, 우정, 노동 등을 통해 긴장하게 그려내면서 뮤지컬 영화로의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갈채><깨소금과 옥돌매>(1982-83)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문여송도 <사랑만들기><연인들>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1983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배창호는 <철인들><적도의 꽃><고래 사냥><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84)와 <고래 사냥2><황진이><기쁜 우리 젊은 날>(1985-87) 등을 만들며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4. 사극 영화의 새 경향 및 80년대의 신인 감독들


80년대의 영화제작 경향의 하나로 사극 영화의 부활을 가져다주는 의미는 크다. 1970년대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한 후 실상 제작비가 많이 드는 역사극은 영화제작에서 거의 그 자취가 사라지고 대신 안방 극장의 단골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역사극은 새로운 모습으로 영화 제작에로 복귀되었다. 5-60년대 사극이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야사나 고전 소설을 각색한 사극 멜러 드라마와 궁중 비사, 권력간의 싸움을 그린 궁중 사극 이었던데 반해 80년대의 사극 영화는 이것과는 훨씬 다른 의미의 작품으로 역사 속에서의 낡은 제도와 관습을 비판하며 그것을 새로운 영화미학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이두용의 <피막(1981)><물레야 물레야> 등 다수의 작품들이 제도와 관습을 비판하면서 보다 더 서민적, 민중적 입장을 취했고 임권택의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 이장호의 <어우동(1985)> 등이 그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사극에서처럼 왕후나 권신 또는 역사 속의 유명한 위인이 아니라 비천한 서민들이며 이들은 제도와 관습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들이다. 서민 사극으로 되살아난 이같은 역사에 대한 영화감독들의 태도에는 영화미학에 관한 관심과 함께 6-70년대 이후 폐쇄되어온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이장호의 <어우동>은 사극영화로는 최대의 흥행적 성과를 거두어 사극제작의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80년대 영화계는 또한 신인 감독들에게 보다 많은 등장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는데, 이러한 신인 감독들 중에서 비교적 주목해야할 사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배창호는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꿈> 등 활발한 활동으로 자신의 영화스타일을 확립하였고 하명중은 <X><땡볕><태>(1982-85)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이 중 <땡볕>은 1985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어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영화적인 감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장길수는 <밤의 열기 속으로(1985)><레테의 연가(1987)> 를 만들었고 정지영은 <거리의 악사(1987)><위기의 여자(1987)> 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한 신승수는 1985년 <장사의 꿈>과 1987년 <달빛 사냥꾼>을 통해 현대 사회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젊은이의 고뇌를 유연한 감성으로 표현했고, 박철수는 <어미(1985)><안개기둥(1986)> 등 현대사회의 모순과 가정생활의 위기를 다룬 작품들을 만들었다. 대개 80년대 신인 감독들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작품세계를 그려내었는데, 어느 면에서 이들은 선배들이 제시하고 있는 심각한 주제나 소재, 그리고 원숙함이나 실험성 등이 결여되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90년대 한국영화의 또다른 창조적 기여를 위해 최선의 노력 속에 있었다.


1990년대(1990~) 


1. 개요

1990년대의 중요한 사건은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1998년 50년만의 평화적 정권 교체이다. 감시와 통제의 지난 7-80년대 상황 속에서 이런 역사적 사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던가. 한국영화계 역시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연례없는 호황을 누릴 수가 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한 대기업의 영화업 진출은 지난 80년대 말 UIP 직배 파문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던 한국 영화계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시장의 호황과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소프트웨어의 필요성이 절실해 졌고 대기업들은 다량의 소프트웨어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단관 경영의 극장가가 복합 상영 시스템으로 대형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대기업 자본 유입의 영향이 크다. 신인 감독의 대거 등장 또한 90년대의 중요한 특징인데, 대기업에 종속된 자본에 의해 상업적 논리에 입각한 감독 데뷔가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했다.

1990년대 초입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장르적 상상력에 대한 경도는 두 가지로 원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한국영화의 산업추세이며 다른 하나는 전 세대와는 달리 영화적 세례를 충분히 받고 영화 연출 분야에 뛰어들고 있는 세대의 출연이다. 이때부터 허구의 구경거리라는 게임의 규칙을 만끽하려는 조짐이 나타났던 것이다. 스타일에 대한 자의식이 두드러지는 반면 잡종 장르에 나타난 빈약한 상상력 또한 나

아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산업이 정체되어 있던 까닭에 산업체계와 필연적으로 맞물리게 되어있는 장르적 표현 관습이 취약했던 한국 영화는 비로소 장르의 규칙과 긴장을 이루는 관습을 축적시킬 기미를 보인다.

또한 90년대는 영화가 문화로서 확실하게 정착되는 지점이기도 했는데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제의 개최 또한 영상문화의 폭을 넓히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는 서울 중심의 집중을 해소하기위해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인한 문화의 분산화 덕택이다. 1996년 개막한 부산 국제 영화제는 아시아 중심의 예술영화를 선보이며 영화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의 사고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98년에는 3회를 맞이하게 된다. 1997년에 개막된 부천 판타스틱 국제 영화제 역시 오락영화만의 축제를 표방하며 세계 각국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 외에도 서울 국제 독립 영화제, 여성 영화제, 인권영화제 등 특징적 주제의 영화제가 속속 개막되어 알찬 영화 문화의 시간을 경험케 하였다. 그러나 1997년 말부터 불어닥치기 시작한 IMF 경제한파로 인해 다시금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어 영화제작 환경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대기업의 계속되는 영화 제작의 실패로 인하여 다수의 기업들이 영화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앞으로의 한국 영화계가 어떤 미래를 가질지는 의문 부호로 남겨둘 수 밖에 없다.


2. 중견감독들의 활약 


먼저 임권택 감독은 <개벽(1991)>으로 90년대를 시작한다. 1993년 작인 <서편제>는 한민족의 고유한 정서인 한(恨)을 임권택만의 깊이와 무게로 표현해 낸 판소리 영화로 한국영화 사상 최대의 관객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이후 <태백산맥(1994)><축제(1996)><창(1997)>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활동과 성과로 거장의 입지를 굳힌다.

한편 박철수 감독은 <301 302 (1995)><학생부군신위(1996)><산부인과(1997)> 등의 작품으로 저예산 영화의 길을 모색하는데, 기존의 영화들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던 소재와 한달을 넘지않는 짧은 제작기간 등 그의 새로운 영화 제작방식은 자금력이 미비한 한국영화에 새로운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80년대 말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장선우, 박광수, 정지영 등의 감독들은 제각기 자신 나름대로으 색깔을 완성하며 꾸준한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정지영 감독은 <남부군(1990)><하얀전쟁(1992)>등 정치적인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 오다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의 흥행 실패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블랙잭(1997)>이라는 미스테리 멜로물에 도전해 흥행을 노렸지만 여전히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박광수 감독은 70년대 노동운동가의 삶을 그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로 '1990년대 최고의 성과'라는 찬사를 받으며 작품성과 흥행 모두 성공하지만 현재 잠시 활동을 접어둔 상태다. 장선우 감독의 행적은 90년대 한국영화계의 화제인데, <경마장 가는 길(1992)>로 그 불씨를 던지더니 포르노그라피를 표방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라는 영화로 지식인 사회의 허위를 풍자하는 야한 농담을 시작한다. 1996년에는 <꽃잎>으로 80년대 광주항쟁을 강간당하는 어린 소녀로 묘사하여 그의 여성관에 관한 수많은 억측과 인간성을 시험당했으며 1997년에는 <나쁜 영화>라는 의도적으로 형식을 파괴한 삐딱한 10대들의 삶을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에서 그려내 또한번 화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계속되는 실험적 활동은 한국 영화사적으로도 흔치 않는 일이다.

또한 오랜 만에 작품을 선보인 중견감독들도 눈에 띄었는데, 이장호 감독은 <천재선언(1995)>을 만들어 사회 풍자와 은유의 예리함을 표현했고, 유현목 감독은 <말미잘(1995)>을, 정진우 감독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5)>, 배창호 감독은 <러브스토리(1996)>를 만들었으나 모두들 전작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평가를 받아 예전의 화려했던 명성을 되찾는데 역부족인 듯했다.


3. 90년대의 신인 감독


1992년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상업적 한국 영화의 모델을 제시한다. 기획-시나리오-연출- 후반작업-홍보 등에 걸친 영화의 전과정에서 뛰어난 팀워크를 보여 준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입하는 전기를 마련 한국 영화의 다양화에 앞장서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대기업의 자본 유입으로 인한 90년대 신인 감독의 데뷔는 러쉬를 이루는데, 그 중 몇몇의 감독들은 계속적인 활동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반면 단 한 번의 연출로 영화계를 떠난 감독들도 많다.

80년대 데뷔한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1994)>의 성공으로 블랙 코미디 장르의 개척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사업가로 성공하는데, <마누라 죽이기><미스터 맘마><투캅스2> 등으로 계속적인 흥행을 이룬다. 흥행성 위주의 감독 이외에도 독특한 개성을 지닌 신인 감독들도 많았는데, 이명세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개그맨(1989)> 으로 흥행으로서는 불행한 데뷔를 한 그였지만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1)><첫사랑(1993)><남자는 괴로워(1995)> 등의 작품으로 자신의 독특한 영화 미학을 구축해냈는데, 만화적인 세트 공간에서 벌어지는 그의 모든 이야기는 신선하였고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 낸다.

여균동은 <세상 밖으로(1994)>라는 무정부주의적인 주인공의 삶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 블랙코메디로 흥행과 비평면에서 모두 주목을 받았는데, 이후 <죽이는 이야기(1997)>등 자의식이 강한 영화들로 계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장미빛 인생(1994)>으로 평단의 이목을 집중하며 등장한 김홍준은 8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사회 속에 그늘진 이들의 이야기들을 하고있는 지식인 감독으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많은 글로서 자신을 드러냈던 인물인데, 최근 <정글스토리(1996)>라는 록 영화를 만든 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의 1인 프로그래머로 활약하고 있다. 이 밖에도 <게임의 법칙> <본투킬>의 장현수, <그대안의 블루> <네온 속에 노을지다>의 이현승, <손톱> <올가미>의 김성홍, <절대사랑> <피아노맨>의 유상욱,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영원한 제국>의 박종원, <개같은 날의 오후> <인샬라>의 이민용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많은 신인 감독들이 있으며 한국 영화계를 풍성하게하는 밑거름이다.


4. 독립영화의 붐

1990년대에는 충무로와 대기업의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영화들과는 제작형태를 달리하는 독립영화. 단편 영화들이 각광을 받았는데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는 기록 영화로서는 최초로 극장개봉을 한 작품이다. 특히 <낮은 목소리>는 일제 치하에서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아픈 기억에 대한 진술과 현재 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내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1997년 <낮은 목소리2>도 개봉된다. 박재호 연출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은 6.25전쟁으로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문제를 그리면서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어온 동성애를 사회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묘사 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용균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역시 독특한 시각을 가진 초현실주의적인 예술적 작품으로 그의 감독 이력을 빛나게 했다. 신인 감독의 영화치고는 이례적으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은 복잡한 의미를 지닌 영화인데 홍상수의 차기작을 기대해 봄 직하며 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 임순례의 데뷔작 <세 친구(1996)>역시 섬세한 연출력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3. 영화의 여러 가지 용어 및 의미

 

[Angle]


촬영각도는 그 피사체에 대한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일반적인 촬영은 눈의 높이 (eye-level)에서 이루어진다. low angle shot(양각)은 피사체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고 촬영한다. 그래서 이것은 지배나 권력등을 암시할 수 있다. high angle shot(부감)은 피사체를 실제있는 것 보다 작게 보이도록 내려다 보며 촬영한다. 피사체의 왜소함, 약함을 나타낼 수 있다.

이외에도 비스듬이 촬영하는 것(oblique anlge)이 있는데 이런 경우 지평선이 기울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숏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예를 들어 술취한 사람의 비틀거림, 인물들의 심리적인 긴장, 폭력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1. 선택된 소재에 대한 감독의 논평, 태도가 표현된다.

  2. low(불쌍함), eye(사실), high level(존경심)

  3. 사실주의: 대부분 눈 높이에서 잡는다.(관여를 하지 않는다.)

  4. 표현주의 감독: 대상물이 조금 왜곡되더라도 상징적인 진실을 캐내려고 함.


1.bird's eye view: 사람 머리 바로 위에서 촬영. 운명의 힘에 의해...

                    운명의 힘이 발휘됨을 표현할 때 

2. high angle: 인물이나 소재가 매우 나약해 보이고 무력해 보일 때

3. eye level shot: 지상에서 150-180cm 정도에 따라 카메라 고정,

                      카메라는 냉정 유지. 관객스스로 판단하게 끔 함

                      야수지로 오주(일본):120cm 정도, 일본식 다다미 문화

4. low level: 인물강조, 공포감, 경외심, 피사체의 중요성 강조.

5. oblique angle(사각앵글); 비뚤어진 카메라, 비스듬하게, 긴장, 긴박감, 고독 등등




[영화에서의 동작]

 1. 인물의 움직임

 2. 카메라의 움직임

 3. 인물+카메라의 움직임

카메라의 이동시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 ‘시간의 이동’ --->공간의 시각화


  1. PAN, TILT: 삼각대에 카메라가 고정

     PAN: 카메라의 수평이동

     TILT: 카메라의 수직이동: 심리적인 면에 관여(심리적 변화)

 

 2. DOLLY: 어떤 수단의 이동차량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촬영(=tracking, trucking)

            심리적으로 천천히 알려줄 필요가 있을 때

             ---> 공간의 시각화, 심리적 상태 표현

3. CRANE SHOT : 공중에서의  DOLLY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많은 시간 소요.

4. ZOOM LENSE : 카메라의 이동 없이 초점이동. 가장 경제적.


     

[동작의 기계적 왜곡(fast motion, slow motion)]

1. fast motion; 1초에 16 frame-20 frame. 저속 촬영. 표준 24 frame.

2. slow motion: 1초에 24 frame 이상. 고속촬영. 비극적. 장황하고 의식적인 면.

              폭력비화. 영사는 표준속도

3. animation: 실제의 움직임은 없으나 1초에 24 frame 영사.

4. reverse motion: 역동작.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서 촬영.

5. freeze frame: 정지화면. 소요시간만큼 필요한 영상을 복사해서 편집.

                죽음과 연관된 문제


[SHOT] 


영화는 숏 과 씬(scene) 그리고 시퀀스(sequence)로 구성되어진다. 

숏은 카메라가 작동하기시작해서 멈출 때까지 한번의 카메라 조작에 의해 기록되는 것을 말한다. 장소, 사건 등과 같은 중요한 한 관심사로 통일된 일군의 상호 연관된 숏들이 모여 연속된 행위를 이루는 것이 씬이다. 그리고 시퀀스는 일군의 씬들이 모여서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있는 자기 독립적인 단위를 형성하는 것을 지칭한다

 숏(sequence shot)은 보통 지속 시간보다 훨씬 긴 숏을 말한다. 숏은 사실적 진술을 하거나 상징적 의미를 나타낼 수 있지만 어떤 이야기를 전달 할 수 없다. 이 롱테이크는 화면 속의 인물, 대상, 배경들에 이해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준다. 숏은 피사체로부터 카메라까지의 거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롱 숏(long shot)은 카메라가 피사체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촬영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러 의미를 전달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죽는 장면을 롱 숏으로 보여주면 보기에 덜 고통스럽다. 그러기에 롱 숏은 코메디물에 이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얼마전 광고에 사자에 쭂겨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코믹한 광고가 롱 숏 기법에 의해 텔레비젼에 나온 적이 있다. 이들은 분명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들이 당하는 고통의 표정을 알 수가 없기에 웃음을 자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롱 숏은 인물들이 그 배경에 비해 얼마나 왜소한지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외로움, 쓸쓸함 등을 보여줄 수 있다



 미디엄 숏(medium shot)

 클로즈 엎과 롱 숏 사이에 미디엄 숏(medium shot)이 있는데 보통 무릎에서 머리까지를 커버하는 숏이다.  피사체에 대해 보다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클로즈 엎이나 롱 숏과는 달리 이 숏은 피사체를 편견없이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1. 화면에 담기는 소재의 양에 따라서 결정

2. 일반적으로 카메라와 피사체와의 거리에 의해 결정

3. 예외적으로 (망원)렌즈에 의해 촬영

 

1. E.L.S (extreme long shot) : 구축 shot(=establishing shot)

2. L.S (long shot) : 고객과 무대사이의 거리에 해당

3. F.S (full shot) : 전신이 다 나옴

4. M.S (medium shot) : 무릎이나 허리 위에서 잡는다.

                    (two shot:두 사람의 대화시, shoulder shot)

5. C.U (close up) : 가슴 위

6. E.C.U (extreme close shot) : 예. 얼굴 중 눈

7. deep focus shot : 피사체의 심도가 깊다. 한 화면에 모든 것을 잡는다.

8. wide angle shot : 전부 뚜렷하게 (광각 렌즈로 촬영-거리왜곡)


 

 

[몽타주(montage)]


 몽타쥬는 분리된 이미지의 병치를 의미하며 영화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한 방식이다.

이 용어는 러시아의 영화가 이자 이론가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이 불어에서 빌려온 말로서 원래는 필림의 한 조각들을 다른 조각과 컷팅 하고 붙이는 편집의 물리적 행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몽타쥬에 대한 정의는 에이젠 슈타인의 경우 이미지들이 하나의 관념을 창조할 수 있도록 이미지의 결합을 강조하는 원칙으로 여겨졌지만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컷팅(cutting)이나 디졸브(dissolve)등을 통해 시간을 압축하고 연결하는 시퀀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정의는 공통적으로 의미가 한 어떤 한 숏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숏의 병치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MISE-EN-SCENE(미장센)]


미장센은 불어로 원래는 "장소에 배치하기"를 의미하는 연극 용어이다. 몽타쥬가 분리된 숏/이미지들과의 병치를 통해 의미를 성취하는 반면 미장센은 한 숏의 내부에서 보여진 사물들의 관계를 이용해서 의미를 성취한다. 미장센 스타일의 영화는 현실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기교적인 면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기에 미장센은 리얼리즘의 스타일로서 그 프레임은 (Frame: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져 그 안에서 영화의 화면이 보여진다) 단순히 객관적 관찰자인 카메라 앞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몽타쥬 프레임처럼 미장센 프레임도 인위적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미장센 에서는 인물과 인물, 인물과 대상, 대상과 대상사이의 공간적 관계가 의미를 전달한다. 관객이 이런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즉 전경(foreground)의 인물, 대상뿐 만 아니라 배경(background)의 인물, 대상까지도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미장센 숏에서는 거의 딮 포커스(deep focus:  모든 피사체가 초점 거리 내에 포착되어 선명하게 보이도록 촬영하는 것)가 사용된다. 미장센 영화의 기본적 단위는 관객이 프레임 내부의 공간적 관계를 이해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는 롱 테이크이다.


장면화(=화면구성)  1. 무대 위에서 배치

                    2. 카메라 앞의 소재를 배치함으로써 “대상물의 공간적 배치”

                    3. 항상 3차원 --> 화면에는 2차원

                    4. ‘스크린의 지리학을 만든다.’--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5. 극적 긴장감 --> 공간배치

                    6. 영화에서의 공간: 의사소통의 주요매체


[편집(editing)]

 

 7개의  scene으로 구성 1 scene을 cut 3개로 나눔

 --> 영화의 최소 기본 단위가 shot이다.

 --> 동일한 시간에 일어난 일을 시점 변화에 의해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관적인 시점이 도입되게 되었다.)


[편집의 세 가지 기본유형]

 

 1) 연속 컷팅: 물리적으로 시간과 순서를 축약. 속기하듯이 줄이는 것.

 2) 고전적 컷팅: 클로즈 업 사용(정서적, 심리적 극적인 감동 위해)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변형을 준다. 다시 역행해서 CU를 준다.

                 심리적 동기에 의해서 CU를 사용한 최초의 감독

 3) 주제적 컷팅(montage):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시공간을 무시한 채 연결.

 

                 


[음향(SOUND)]


 - 음악

 - 음향효과: 분위기 살리고 부수적인 효과. 원초적인 음악은 아니다.

 - 대사(언어): 사람의 대사를 통한 문학성은 크게 지향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영상으로 승부를 걸려고 한다.

              방언은 적절히 사용하면 풍부한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독백은 화면 밖 소리이다.

              시간을 압축하는 데  있어서 독백만큼 좋은 것은 없다.

  ==> 사실주의의 음향은 화면 내에 음원이 있다. 음악은 어쨌든 화면 밖 소리

      (외재적 소리)


* 다큐멘터리 영화란...


 1. 존 그리어슨: 사실 또는 현실의 창조적 처리.

 2. 프랭크 비버: 비허구적인 영화, 논 픽션 필름.

 3.1948년 제 1회 다큐멘터리 세계 연맹 회의에서 : 사실에 입각한 촬영 또는 진실하고 합리적인  재구성을 통해서 현실의 상황을 기록하는 모든 방법.


현실성: 물질세계의 외면 뿐 아니라 인간생활의 내면을 포함해야 한다.

       기록영화는 작가의 주관적 표현이므로 예술일 수 있다. 성찰이 나타난다.

       기록영화도 촬영의 플랜 등 예술적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또 다른 효용성을 지니고 있다.

객관성: 주제를 편견 없이 드러내는 통찰성. 균형과 혼돈.

       종사하는, 제작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교묘하게 숨긴다.

       관객에게 보여지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예술적 재현인 것이다.

       편집 과정에서 객관성이 유지되기 힘들다.       

    윤리성: 진실을 찾기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의 접근방식(80년대 이후)


 1. 투명성(transparency): 제작진이 투명인간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2. 성찰성(reflexity): 연출에 의해 창조되고 인위적인 구성물이다라는 것을 미리 보여줌



4. 영화제

   - 베니스 영화제 : 1932.5 이탈리아

                     가장오래된 영화제

                     신마르코 [금사자상]

                     강수연이 [씨받이]로 주연여우상(1987)

   - 칸느영화제 : 1946.프랑스 칸느

                  최고의 권위 자랑

                  

   - 베를린 영화제 : 1951년 베를린

                     황금 곰상

   - 모스크바 영화제 : 1959, 격년으로 열린다

                       강수연 [아제아제바라아제] 여우상(89)

                       이덕화 [살어리랏다] 남우주연상(93)

   - 로카르노영화제 : 1949 스위스 르카르노

                      신인영화제

   - 아카데미상 : 1927년 로스엔젤레스          

                  일명 오스카상

   - 골든 글러브 : 세계 84개국 신문 잡지기자 114명이

                   최우수 영화의 각부문과 남녀배우 수상


5.감독과 작품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노스텔지어(83), 희생(86)

   - 구로자와 아끼라 :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 알랑 레네 : 히로시마 내사랑

   - 고다르 : 네멋대로 해라/경멸/미치광이 삐에로/알파빌

   - 장자크 베네 : 디바  (누벨이마주)

   - 뤽베송 : 니키타     (누벨이마주)

   -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누벨이마주)

   - 베르톨루치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마지막 황제/레즈/딕트레이시/순응자

   - 데이비드린치 : 이레이저 헤드/광란의 사랑/블루벨벳

   - 마틴 스콜세지 : 성난황소/좋은 친구들/택시 드라이버

   - 폴커 슐렌도르프 : 양철북

   - 프란시스 코플라 : 대부

   - ILM : 조지 루카스가 만든 특수효과 전문회사

   - 후 사요시엔 : 비정성시

   - 왕가위 : 열혈남아/아비정전/중경삼림/타락천사/부에노스아이레스


  


6. 연극과 영화


- 연극과 영화는 일견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와 연극의 담화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체로 영화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의 범위가 연극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연극 속의 시간은 영화보다 덜 유동적(flexible)이다. 막(scene)을 기본단위로 하는 연극에 비해 그 길이를 대단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샷(shot)을 단위로 하는 영화는 긴 시간단위를 끊어내어야 하는 연극과 달리 샷을 통해 시간을 늘이거나 압축하는 것이 자유롭다. 연극의 공간은 무대위로 제한되며 이를 벗어나는(예컨대 탈의실) 공간은 관객의 염두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무대에 해당하는 영화의 frame은 사물과 사람을 오로지 일시적으로만 가두고 있을 뿐, 또 다른 국면들(aspects)이 그 frame너머에 있음은 전제되어 있다.(예컨대 close-up샷의 경우 일련의 샷 속에서 그 close-up의 맥락이 드러난다) 연극의 관객은 고정된 좌석에서 배우들과는 동일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람한다. 그러나 영화의 관객은 자신을 카메라 렌즈의 시점과 동일시하며 어떤 방향, 어떤 거리로도 움직일 수 있는 셈이다. 즉,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연극의 공간은 실제 사물과 사람들이 놓인 삼차원공간이며, 배우들의 미묘한 교감이 실제 상황으로서 펼쳐진다. 영화는 이를 복제할 수 없으며, 공간과 대상들(objects)의 2차원 영상만을 제공한다. 연극배우들은 각각의 관객들마다 그에 맞는 섬세한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나 영화속의 배우들은 새로운 관중에게 구식의 연기를 새롭게 고쳐 변화를 줄 수 없다.

연극은 시각적 요소가 충분치 않은만큼 관객이 능동적으로 의미를 선별, 보충해야 하는 반면 영화는 편집을 통하여 시각적으로 밀도있게 정보를 갖추고 있으므로 관객이 보충해서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따라서 관객은 수동적이게끔 된다.


*연극은 발화되는 언어에 중심을 두는 영화보다 좁은 매체이다. 연극에서 전달되어야 할 의미는 대부분 대사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문학의 일종이자 작가의 역할이 중시된다. 반면 영화는 일반적으로 시각적 예술이자 감독의 매체이다. 연극을 영화화할 때 이점이 두드러지는 바, 영상과 대사가 동일한 정보를 담을 경우 자연스럽지 못할 경우가 있다. 연극은 연기와 대사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바, 연극의 연기는 비교적 크고 길어야 하되 극도로 길거나 커다란 범위의 경우는 형상화(stylized)되어야 한다. 즉, 무대 위에서의 대부분의 미묘한 행위와 반응은 시각적 수단보다는 언어를 통하여 전달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연극의 연기는 long-shot, full-shot range로 한정된다. 필요할 경우 연극은 비사실적인 관습 즉 발레라든가, 극도의 long-shot에 해당하는 형상화된 광경, close-up에 해당하는 언어적 조음(articulation) 등에 의지한다. 연극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영화 역시, 움직이는 카메라나 표현적 음향, 편집 등을 통해서 마찬가지로 인공적인 관습에 따른다.


 *연극은, 배우에 의하여 대사가 발화되고 배우에 의해서 갈등이 구체화되는 등, 사람이 미적 가치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영화는 연극만큼 사람에 의존하지 않으며, 미적 가치가 사진, 그리고 촬영될 수 있는 대상에 있다. 따라서 연극을 영화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영화를 연극화하는 것은 많은 경우 불가능하다. 야외 촬영된 영화는 당연히 불가능하며, 설사 실내 촬영된 영화라 할지라도 영화의 시공간 불일치라든가 카메라 각도, 사물을 통한 표현 등은 연극화될 수 없다.  

THE DIRECTOR

 

-50년대 중반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지는 영화예술 속의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가주의 이론을 대중화시켰다. 이에 따르면, 영화속의 미장센을 조정하는 감독이야말로 진정한 영화의 작가이다-

*영화와 연극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지니는 사람은 각각 감독과 극작가이다. 즉, ‘감독(direction)만 빼고는 다 좋은 영화’라든가 ‘극본만 빼고는 다 좋은 연극’같은 말은 다분히 모순적인 것이다. 연극에서의 무대감독은 다분히 극본의 구현을 담당하는 해석적(interpretive)역할을 지닌다. 물론 그는 연기를 지도하고 시각적 요소를 지휘하지만, 이는 극본에 비해 부차적인 지위를 지닌다. 형편없는 ‘리어왕’연극을 보고서 우리가 비난하는 것은 세익스피어가 아니라 그 연극에서의 특정한 리어왕 극본 해석인 것이다. 무대감독의 영향력은 막이 열리고 난 후에는 사라지게 된다. 이에 반해 영화에서 감독은 완결된 작품(final product)에 대해서까지도 훨씬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다. 작품의 선행작업을 지휘한다는 점은 영화감독과 연극감독이 공통되는 점이나, 연극감독과는 달리 영화감독은 사실상 마지막 작품에까지 거의 모든 면을 통제할 수 있다. 필름은 움직이는 영상에 주로 의지하며, 이 영상의 시각적 요소―샷의 선택, 각도, 조명효과, 필터, 옵티칼 이펙트, 프레임, 구성, 카메라움직임, 편집―을 결정하는 사람이 감독인 것이다.

 

*연극과 영화에서의 감독의 역할은 각각의 미장센의 조절에서의 차이를 통해 그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연극에서, 무대 감독은 하나의 장면에 하나의 고정된 세트내에서 작업해야만 한다. 그는 3차원 공간인 무대의 넓이와 깊이(depth), 무대의 단(platform)조정을 통한 높이 등을 활용(exploit)한다. 무대 감독은 분명성(clarity)을 위해 일정한 연극적 관습에 의지하며, 관객들은 짐짓 벽 하나가 없는 방을 들여다보고 있는 체 하는 셈이다. 당연히 뚫려있어야하는 그 ‘벽’에는 장애물이 있어서 안되며 배우들은 관객에게 오랜시간 등을 돌리고 있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관습은 최대한의 분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연적이다. 반면 영화감독은 3차원 공간을 2차원의 공간 영상으로 바꾸어낸다. 따라서 연극에서와 같은 ‘깊이’는 문자그대로처럼 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같은 평평한 영상은 일정한 이점을 지니는 바, 연극에서와 같은 한정된 벽으로 막힌 무대공간에 머무르지 않고(이는 eye-level long shot으로 구현가능하다) 각각의 샷마다 원하는 횟수만큼 새로운 프레임―연극에서의 벽―을 설정함으로써 분명성의 희생 없이도 최대한의 표현성(expressiveness)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연극에서는 무대감독의 미장센이 한 막의 구성요소만으로 구현되어야함에 따라 어느 정도의 타협(표현성과 명확성 사이에서의)이 필연적인 데 반해 영화감독은 이런 종류의 타협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영화감독은 훨씬 더 다양한 장면의 가능성(scene-lets)을 지니고 있다. 영화감독은 단 한 개의 피사체도 수많은 방식의 샷으로 찍을 수 있고, 어떤 샷에서 인물은 등을 돌리고 있을 수도 있다. 소리는 인물의 대사를 분명하게 전달해주므로, 인물은 깊은 숲이나 유리에 가린 채로 나타날수도 있다. 영화의 샷은 길게 지속될 필요가 없으므로 분명성은 좀더 표현적이기 위해 잠시 유보될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일반화는 연극무대는 본질적으로 사실적(realistic)인 데 반해 영화는 기본적으로 형식적(formalistic)이라는 가정을 전제한다. 물론 이는 다분히 상대적인 것으로서, 표현적인 성향이 짙은 연극이나 사실적인 영화또한 가능하다.



SETTINGS AND DECOR


-훌륭한 영화와 연극에서 세트는 연기를 위한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제나 성격의 상징적 확장(symbolic extensions)의 역할도 한다-


*세트는 특히 영화에서 많은 정보를 나르는 구실을 하는 바, 연극은 관객과의 공간적 간격 및 무대의 제한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셋팅에서의 상세함(detail)이 덜하다. 무대감독은 세트를 만드는데 있어 끊임없이 타협을 하는데, 광활한 들판이나,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공간의 수직․수평․사선이라든가, 대단히 협소한 공간 등은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하는데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영화감독은 세트에 있어서 많은 자유로움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야외촬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커다란 이점이다. 서사영화(epic film)는 야외촬영을 필요로 하는 장르이다. 한편, 어느 정도의 양식화(stylization)나 의도적인 비사실성(unreality)을 요구하는 영화-뮤지컬영화, 공포영화, 역사물(period film)등-는 스튜디오촬영과 관련깊다. 물론 이런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세트디자인에서의 사실주의/형식주의 라는 용어구분 역시 영화의 다른 측면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편의를 위한 것이다.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은 실제 사건과 장소를 재현한 것을 내세우는 영화이나 사실은 스튜디오에서 창조된 모사(facsimile)였으며, 에이젠스타인의 ‘세상을 뒤흔든 열흘’은 겨울 몇 달간 실제장소를 빌려 촬영하였으나 형식적으로 복잡하고 기이한(baroque) 영상들을 담아내었다.


*사실주의에서의 미의 본성은 복잡한 문제이다. 형태의 아름다움은 시적 사실주의(poetic realism)에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펠리니 초기영화(p.304의 예)는 시각적 감각에 호소하기 위해 미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존 포드의 서부영화 다수는 스펙터클한 아름다움을 위해 monument valley에서 촬영되었다. 한편 다른 종류의 사실주의 영화에서는 관습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은 그 역할의 중요성이 덜한 바, 의도적인 조야함(dileberate roughness)이 오히려 미의 기준이 된다. 예컨대 알제리 인민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다루기 위한 알제리 전투와 같은 영화에서는 소재의 윤리적 성격이 형태적 고려(formal consideration)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같은 영화에서는 세트의 아름다움은 그 사실성에 있으며, 의도적으로 형태를 꾸미는 것은 성실치 못함(insincerity)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감독들은 더운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위해 실제로 스탭진을 열대지방으로 이끌고 가는가 하면, 빈민층의 영화를 찍기 위해 배우들에게 실제로 빈민가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게끔 강제하기도 한다. 스펙터클 영화들은 세트가 특히 중요해서, 바빌로니아에 관한 그리피스의 ‘Intolerance'같은 영화의 경우 당시로서 천문학적 숫자인 190만달러의 비용이 세트제작에 사용되기도 하였다.(p.302에 자세한 에피소드)        


*표현적인 세트는 공상적인 느낌에 호소한다. 표현주의적인 세트들은 보통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 실제성(reality)이 섞여 들어가는 것(contamination)을 방지할 수 있다. 멜리에스의 경우 세트에 페인트칠을 하여 깊이감을 준다든가, 실제 배우와 공상적 세팅을 뒤섞는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꿈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전성기에는 각 메이저 영화사마다 특색있는 세트스타일을 만들었다. (p.305~6에 상술) 특정 형태의 로컬 세트는 영구히 사용되기 위하여 제작되기도 하였다.(back-lot sets) 대부분의 스튜디오는 서부 개척자 마을, 목장, 중서부형태의 농장 등을 L.A교외에 가지고 있었다.


*세트에서 중시된 것은 그것이 감독의 예술적 시각 및 줄거리 소재의 핵심을 어떻게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p.307 Robert Mallet-Stevens의 설명) 또한 세트는 성격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동 페이지 La Strada의 예) 무대에서의 세트가 배우들의 등장과 더불어 관심대상에서 벗어나는 데 반해, 영화 속에서 감독은 심리적, 주제적(thematic) 필요에 따라 하나의 세트를 여러 샷으로 나눈다든가, 한 측면을 강조한다든가 하여 세트에 담긴 의미심장함을 관객에게 알릴 수 있다.(p.308의 예)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이나 블레이드 러너 등의 영화속의 세트는 심지어 중심 관심사가 될 수도 있다.



COSTUMES AND MAKEUP


 -세심한 영화나 연극에서 의상과 분장은 착각을 향상시키기 위한 단순한 치장이라기보다는, 인물과 주제의 일면들이다-


*의상과 분장의 스타일은 계급, 자기이미지, 심리적 상태까지 드러낼 수 있다. 특히 옷감의 클로즈업도 가능한 영화의 경우에서는, 의상은 매체(medium)의 구실을 한다. (p.310의 예) 의상의 색깔은 인물의 성격의 상징으로 쓰일 수 있으며, 의상의 선(lines) 또한 심리적 성질을 제시하는데 쓰일 수 있다. 예컨대 수직적인 의상은 당당함과 위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수평적인 의상은 저속함과 해학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의상은 찰리 채플린의 tramp(뜨내기, 룸펜) 모습일 것이다. 복장은 계급과 성격을 지시하며, 채플린을 대단히 호소력 있게끔 만드는 허영과 허세의 복잡한 혼합을 전달한다. 콧수염, 중절모, 지팡이들은 괴팍스러운 멋 부림을 보여주며, 그의 지팡이는 적대적인 세상을 자신감 있게 뻐기며 걷는 찰리의 자존심의 인상을 전하는데 쓰인다. 그러나 너무 부풀어오른 바지라든가 너무 큰 신발, 너무 꼭 끼는 코트 등은 찰리의 가난함과 낮은 사회적 지위를 보여준다. 채플린의 허영심, 불합리함, 매섭게 상처받기 쉬움 등의 인간성에 대한 시각은 그러한 의상으로 상징화된다.


*의상은 스타 배우의 매력을 부풀리기 위해 때때로 영화에 걸맞지 않게 만들어지기도 하는 반면, 동시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사실적 영화에서는 기성복 중에서 구입되기도 한다. 의상은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언어 체계를 재현하며, 감독이 사용하는 다른 어떤 언어 체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정보 전달적인 의사소통의 상징적 형태이다.



*영화에서의 분장은 일반적으로 연극보다 섬세하다. 연극에서의 분장은 주로 먼 거리에서도 배우의 특징을 잘 알아볼 수 있게끔 과장시켜서 행해지지만, 영화에서 분장은 좀더 자제된다. 영화속에서는 약간의 분장 변화도 지각될 수 있어서, 여러 의미를 전하는 데 쓰인다. (p.315의 예) 영화의 분장은 배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대체로 스타들의 분장은 자신을 좀더 화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화려한 치장에 무관심한 배우들은 배역을 위해 가발이나 가짜 코를 달기도 하며, 비전문적 배우들은 최소한의 화장으로 그들의 흥미롭고 본래적인 신체적 외양을 드러내게끔 한다.



7. 영화-리얼리즘


리얼리즘의 문제는 영화의 시초에서부터, 그러니까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시오타 역의 기차의 도착>을 보는 관객들이 기차가 접근해오자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겁에 질려 일어났던 때부터 영화사에 각인 되었다. 그때 이래로 극소수의 관객들만이 이미지를 현실 자체로 오해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을 모방한 영화의 각별한 힘은 리얼리즘을 영화 미학의 중심적인 특징으로 만들어왔다.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선호하거나 적대하는 편견들은 곧잘 모방적 재현의 그 독특한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카메라 앞에 있는 것을 영화가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것은 창의성이나 자기표현의 여지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현실의 폭로가 영화의 특권인 동시에 소임이라는 것을 동일한 열정을 가지고 주장했다.

 영화에 관한 사유의 모든 다른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쟁 역시 1968년 이후 정치적 전환을 맞이했다. 더욱이 리얼리즘의 문제들은 리얼리즘적 텍스트-그것이 수많은 리얼리즘 양식 중 어떤 것에 속하든 간에-가 변별적 인, 심지어는 유일무이한 인식론적 지위를 갖는다는 압도적인 이유로 인해 이처럼 정치화된 미학에서 중심성을 획득하게 되어 있었다. 리얼리즘 텍스트는 사물들을 그대로 재현하며 따라서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브레히트가 리얼리즘을 주요한 정치적, 철학적, 실천적 쟁점이라고 부르면서 인식했던 것처럼, 리얼리즘의 중요성은 리얼리즘 텍스트가 갖는 인식론적 지위의 직접적인 귀결이다. 모든 정치적 입장과 강령은 사회현실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정부와 다른 정치적 기관들이 현실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추진하는데에, 그리고 특정한 제안들을 진실한 것으로, 다른 것들은 허위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데에 그토록 관심이 컸던 이유다. 그러므로 어떠한 리얼리즘적 작품이든 정치적 파생효과를 갖는다.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해서 영화는 일련의 주장을, 혹은 다양한 주장들을 내놓는다.

 


그래서 68년 이후의 영화이론가들은 재현의 정치학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과 담론의 겹구조 라는 푸코의 개념에 의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리얼리즘의 실천들에 대한 고찰을 자신들의 주요한 임무의 하나로 보았다. 의미화 작용에 대한 소쉬르적인 이론은 리얼리즘이라고 가정된 것이 환영주의적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효과가 산출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보였기에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그 임무에 접근했다. 그러나 그 임무는 감지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이 이내 명백해졌다. 그 문제가 근원적인 정치적, 철학적 쟁점들과 어느 정도나 얽혀 있는지가 분명해졌을 때, 텍스트의 기능에 대해 소쉬르에게 영향을 받은 이론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가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어려움은 진리의 문제였다. 리얼리즘 텍스트는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정립해 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진리주장을 내놓기 때문에, 리얼리즘의 분석은 텍스트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참조를 수반한다. 따라서 리얼리즘의 기능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이든 리얼리즘의 텍스트적인 실천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상황 설정되는 사회적 실천을 고려해야만 했다. 텍스트 하나만에 대한 이론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요구된 것은 어떻게 현실이라는 개념과 진리가 사회 속에서 확립되는가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사유가 진행될수록 이 보충의 요구는 더 분명해졌고 그 부재 또한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다.



  명징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는 리얼리즘과 관련하여 채택되는 세 가지 주요 접근방식을 구별할 것인데 실천에 있어서는 그 세 가지 접근방식들이 결코 그처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접근방식들은 매개 테제, 맑시즘, 그리고 구조주의이다.


 세가지  접근방식 중 첫 번째 것은 어떤 의미에서 거의 상식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수반하는 것 같다. 그것은 영화가 현실과 관객 간의 매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테제의 실천적인 예로서 하원의회를 TV로 방송하는 것에 반대해서 주창된 논의들 중 하나, 요컨대 그렇게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그 의사록에 대한 허위적 현실감을 주리라는 논의를 살펴보자. 논쟁이 방송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일련의 질문들이 ‘어떻게’에 관해서 제기될 것이다. 예를 들면 몇몇 구성원들은 그림자에 가리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게 하는, 그럼으로써 모든 함축에 연루되는 기존의 조명법을 이용해야 하는가? 다른 의원 한 명이 의원들에게 발언하고 있을 때 앞쪽의 음향과 뒤쪽의 음향을 어떻게 섞어야 하는가? 어떠한 결합도 상이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은 발언하고 있는 구성원만을 보여주어야 하겠는가? 아니면 실내의 다른 곳으로 가는 커트들이 있어야 하겠는가? 만약 그대야 한다면 다른 어디로 커트해야 하는가? 격분한 반대편으로? 상대를 존중하여 경청하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졸고 있는 구성원에게로? 대처 수상은 표준 렌즈로 촬영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소프트 포커스로 촬영되어야 하는가? 세평에 의하면 토니 벤은 그 자신이 몹시 싫어한다는 광각 렌즈가 아닌 다른 어떤 렌즈로 찍혀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 및 기타 질문들에 대해 어떠한 대답이 주어지든간에 그 대답[이 제시하는 방식]은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의 의미를 조건짓게 될 것이다. 선택은 이루어져야 하며 그 결과 우리는 하원의회의 현실에 대한 상이한 상을 얻게 된다. 의회를 방송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가 보기에 초점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내적 현실, 그 본질을 배신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1968년 이후의 비평가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장 루이 코몰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유사한 불만을 강력하게 표명해왔다.

       

         직접영화의 기본적인 기만은 그것이 삶의 진실을 진실하게 전사하며

          그 진실과 관련하여 목격자의 위치를 잡기 시작한다는, 따라서 영화는

          그저 대상들과 사건들을 기계적으로 기로 기록하는 것이라는 바로 그

          주장이다. 실제로는 영화화라는 사실 자체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미 기

          록된 자료를 수정하고 변형하는 생산적 개입이다. 카메라가 개입하는 그

          순간부터 어떤 형태의 조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록 현실감이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주장하듯 투명한 묘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구성이며 그 투명한 묘사를 거부하는 구성이라고 위의 논의는 발전했다. 따라서 이러한 비평가들로 인해 매개 테제는 리얼리즘의 관습성을 새로이 강조함으로써 강화되었다. 리얼리즘은 그러하리라고 가정되는 현실의 충실한 묘사와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그 역사 전체에 걸쳐 받아들여온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 리얼리즘 그 자체가 창문이나 거울이 아니라 일련의 관습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하나의 리얼리즘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다수의 리얼리즘들이 있을 뿐이다” 그 리얼리즘들의 역사적 변이는 앤드루 튜더가 주목했던 것처럼 <국가의 탄생> <노스페라투> <북극의 나누크> <시민 케인> <게임의 법칙> <파이자>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화들에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적용되었을 정도였다. 그 수많은 리얼리즘들은 그것들을 다른 리얼리즘에 대립시키는, 즉 이것은 그럴 듯한 것이고 저것은 우스꽝스럽게 불투명한 것이라고 지표하는 역사적 계기들의 차이에서부터 파생한다.

 리얼리즘을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들에 따르는 하나의 구성으로 이해하는 것의 의미는 다양한 것이었다. 최초의 것중 하나는 기존의 정설과의 대결이었는데, 그 정설은 무엇보다도 앙드레 바쟁과 연관된 것으로서 리얼리즘의 투명성이라는 신화를 폭로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그 신화를 선전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설과의 대결에는] 바쟁과 그의 추종자들의 오류를 교정하는 것 이상의 것이 연루되어 있었다. 영화가 투명한 매체라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주장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통해, 그리고 그 영화 제작의 징표들을 지워버리지 않는 새로운 자기반영적 영화의 발전을 통해 구축될 대규모의 탈신화화 프로그램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문제들은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애초에 68년 이후의 혁명적 열정으로 이루어진 바쟁의 사유란 비체계적이고 때로는 혼란스러웠다 할지라도 그를 영화의 투명성의 신봉자로 특징짓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었다. 오히려 테리 로벨이 지적했듯이 그려져야 할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 그리고 사실묘사에 형식과 기법을 종속시키자는 그의 요구는 그녀가 “복제의 오류”라고 부른 것, 요컨대 유일한 리얼리즘이란 현실의 정확한 복사나 그러한 복사의 환영을 재생산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그의 신념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쟁이 오해를 받았던 이유는 그의 작업, 그 중에서도 특히 엠마뉘엘 무니에를 중심인물로 하는,[사람이건 신성한 것이건 인격에 궁극적 가치와 진실을 부여하는 근대 철학운동인] 인격주의로 알려진 30년대 운동의 지적 배경에 대하여 그를 비판하는 이들 쪽에서 불충분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폴란과 헤스는 주장했다. 가톨릭주의와 실존주의의 합성물인 인격주의는 선택의 실습을 통해서만 개인의 구원이 이루어질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 세계는 로고스를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자유롭게 신앙하는 개인만이 지각할 수 있다고 무니에는 말했다.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러한 도약을 이룰 수 없듯이 세계 속에서의 신적 의지에 대한 인식 역시 개인의 문제였다. 바쟁의 영화미학은 이런 믿음에서 나왔다. 세계를 파편화하는 몽타주에 대한 바쟁의 비난은 그와 같은 어떠한 현실의 재구성도 그것에 감독의 해석을 가하게 마련이라는, 따라서 관객을 조작하며 그럼으로써 세계 속의 신의 현존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묘사한다는 근거에 입각해 있었다. 역으로 현실 앞에서 스스로를 지워없애는 영화적 리얼리즘의 한 형식에 대한 바쟁의 옹호는 신의 면모를 드러낼 수 있는 신앙행위를 하기 위해서거나 하지 않기 위해 현실 자체 앞에서 그 또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관객을 자유로운 상태로 내버려둔다는 근거에 입각해 있었다. 폴란이 설명하듯이 인격주의는 사제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민주적 신학이었다. 감독의 개입에 대한 바쟁의 반대 및 작가정책으로부터 그가 스스로 거리를 두었던 것은 영화의 사제를 거부하려는 노력이었다. 결국 바쟁은 참을 수 없는 정설의 발의자가 아니라 어떤 점에서 똑같이 비조작적인 영화를 주창했던 68년 이후 세대 비평가들의 선구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만약 정치적으로 바쟁과 그를 비판한 평자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 양극단이었다면 이론적으로 그들은 후자에 속하는 많은 이들이 평가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공통적이었다.

 


관습성에 대한 관심은 리얼리즘의 다양한 양식을 상술하는 데에는 유용했지만 탈신화화의 기획에는 거의 공헌하지 못했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재현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관습을 이용한다는 사실은 그 인식론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결국 만약 관습이 허위성의 표지라면 언어 자체가 일련의 관습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떠한 제안이 됐든 그 제안은 허위적일 것이다. 그러한 관념은 명백히 부조리하다. 진리가 진술될 수 있는 것은 언어 및 기타 재현체계 내에서, 오직 그것 내에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푸코가 담론은 특정한 진리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진리를 산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권력은 생산적인 것이라고 논할 때 약간 다른 의미에서 지적된 초점이다.

 어려움의 세 번째 원천은 매개라는 개념이 추측되어왔던 것보다 더 문제인 것임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해 보였다. 매개란 이미 주어진 현실이 영화화 행위에 의해 그 현실의 영화화된 표상으로 변형되는 과정인데, 그 표상은 기껏 잘해야 하나의 관점을 제공할 뿐이며 최악의 경우 왜곡을 제공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주어진 현실을 위치설정하는 것에 있었다. 앞서의 사례로 돌아가보면, 하원의회의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혹은 그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재적소를 유지하게끔 헌법을 고안해낸 이들의 지속적인 위협 아래 있는 영국 헌법의 특성에 대한 토리당의 소박한 시각인가? 그것은 오히려 계급투쟁을 추구하기 위한 약간의 잠정적 유용성만을 갖는 낡은 제도적 형식인 것이 아닐까? 혹은 모르긴 해도 그것은 원죄로 인해 타락한 남자와 여자가 지옥행과 구원이라는 그들 개인의 드라마를 연기하는 극장일까? 사우스 다운 출신의 의원은 그것을 권력의지의 표명으로, 그리고 최후 인간의 가파른 피난처로 파악하는 것을 더 선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요컨대 그 현실에 대해 상술할 담론들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하원의회가 존재한다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 제안은 사실이란 없고 오직 해석만이 존재할 것을 필요로 하며 또한 확실성의 기반이 분명 존재한다는 이의에 부딪힐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철학의 추세는 그러한 이의를 거스르며 나아갈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철학에서 지배적인 한 경향은 대개 소여의 신화로 불리는 것에, 즉 해석으로 오염되지 않은 자기인증적 현존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는 관념에 도전하려 해왔다. 표상들이 상응할 수 있는, 해석도 개념화도 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이처럼 거부하는 것은 하나 혹은 또 다른 하나의 개념적 구조틀이나 패러다임 내에서 어떤 사실들이 분명히 설명되기 전에는 그 어떤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쿤과 파이어아벤트의 논의에 의해 과학철학 내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 모두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이론이 일고 있으며 영화이론 내에서는 철학적 리얼리즘에 대한 테리 로벨의 옹호를 포함하여 만만찮은 반대에 부딪혀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은 겉보기에는 조리있는 매개 테제가 전제하는 것을 포함하여 어떠한 입장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비록 영화적 재현이 어떤 중요한 점들에 있어 언어적 재현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진리를 진술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매개 테제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디에서도 확증되지 않았다.


 테리 로벨이 분명히 밝혔듯이 모든 리얼리즘은 어떻게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구상 및 그것들을 폭로하거나 재현하기 위한 과저에 의존한다. 맑시즘 비평은 두 가지 점에서 기존의 리얼리즘에 도전했다. 현실에 대한 그 리얼리즘들의 구상이 틀린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리얼리즘들의 재현 수단이 주어져 있는 한 그것들은 그런 식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 비판은 만약 지식이 단순히 여러모로 생각해봄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이라면 과학에 대한 요구는 전혀 없으리라는 맑스의 주장을, 특히 상품 물신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적 관계들이 사물들 간의 관계의 외양, 즉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외양을 취한다는 맑스의 주장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과정의 현실은 그 외양과 사뭇 다르며 그것이 어떠한지를 분별하는 유일한 길은 토대의 구조 및 사회의 동학을 결정하는 세력들을 폭로하는 역사유물론이라는 과학을 통해서이다. 폭넓게 말해서 그것은 맑시즘적 전통 안에 있는 두 명의 주요 이론가 루카치와 브레히트가 공유하는 입장이었다.

 루카치와 브레히트에게 예술의 역할이란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오판을 유발하는 사물들의 표층을 뛰어넘어 나아가는 것이었다. 루카치에 따르면 자연주의는 대면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직접적으로 명백한, 하지만 물화되어 있는 형식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하여 실제 사회구조나 역사과정에 관해 그 무엇도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진정한 리얼리즘은 이와 대조적으로 특수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과학의 추상개념들을 산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지식을 낳으며 여전히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 그 수단은 그의 삶이 자기 시대의 역사적 조류들을 반영하는 주인공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서사에 의한 것이었다. 주인공은 추상적인 화신도, 통계학적 평균도 아니며 그 계급 갈등 및 기타 모순들과 아울러 특수한 역사적 계기 속에 뿌리박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한 세력들 속에 사로잡혀 거기에 대해 반응하는 개인의 삶은 따라서 어떻게 특수성이 늘 전체성에 의해 매개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처럼 진정한 리어리즘을 위한 모델들은 부르주아가 여전히 진보적인 세력이었던 시기에, 즉 부르주아가 사회의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기보다는 폭로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에 나온, 스코트,스탕달과 발자크의 소설들이었다. 루카치는 작가들에게 “물화의 베일”에 침투할 진보적 리얼리즘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그들의 작품의 모델로 삼아 프롤레타리아트에 복무할 것을 강요했다.



 로벨이 다시금 지적했듯이 루카치과 브레히트는 때때로 참작되는 것 이상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브레히트는 진보적인 리얼리즘의 모델로서 19세기 소설이 과연 적합한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그의 모더니즘적 대안은 변화된 역사적 환경이 변화된 예술적 관습들을 요청하고 있다는 단순한 가정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처럼 변화된 환경에 대한 브레히트의 전반적인 이해는 루카치와 달랐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승리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따라서 예술의 기능은 그 진행을 계획하고 성원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루카치의 맑시즘이 본질적으로 낙관적이었던 반면 브레히트는 비관론에 기울어 있었다. 파시즘과 대면하여, 민중을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그들의 자기만족적인 계획으로부터 끌어내어 뒤흔들어 놓을, 그리고 그들에게 정치적 행동의 필연성을 확신시킬 예술이 요구되었다. 루카치가 동일화와 카타르시스의 과정을 강조했던 곳에서 브레히트는 관객을 자극하여 그들을 능동적인 응답으로 이끌어들이고 싶어했는데 그 응답은 그들이 연극을 뛰어넘어 정치에 개입하게 하는 서곡이 될 것이었다.

  우리가 주장해왔던 것처럼 구조주의라는 계기는 리얼리즘의 문제를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매개 테제의 지지자들에게는 어떠한 재현이든 그것은 선재하는 현실의 부분적이거나 부적확한 묘사였던 반면 구조주의자들에게는 상응해야 할 그런 어떠한 현실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떠한 실재적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에 관한 모든 사유가 의미화작용적 체계들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에서 현실은 언어 내에서 구축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말의 세계가 사물들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라캉의 진술 및 “화자에게는 언어와 현실 간의 완벽한 등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방브니스트의 진술의 의미이다. 그럼으로써 전담론적 현실의 존재는 의심되지 않지만 우리의 현실 체험은 결코 전담론적일 수 없다. 사실상 라캉이 주장하듯 전담론적 현실을 명확한 형태로 나타내거나 그것으로 돌아가려는 어떠한 시도가 됐든 이는 담론을 통해 경로를 잡게 되어 있다. 이러한 정향성을 가정한다면 리얼리즘은 구성이다. 결코 반영이 아니고 말이다.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글쓰기는 더 이상 기록, 주해, 재현의 작용을 나타낼 수 없다.” “기표없이는 어떠한 기의도 없다”는 슬로건은, 어느 정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영화의 와양과는 반대로 말에 대해서 참이듯 이미지에 대해서도 참이다. 구조주의자에게 이러한 리얼리즘 효과는 특수한 재현체계가 주체를 위치설정하는 방식의 최종 산물이었을 뿐이다.



 비록 반리어리즘이라는 이처럼 구조주의적인 변형이 70년대의 영화연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도전받지 않은 채 지속되지는 않았다. 테리 로벨은 더욱 상식적인, 즉 직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입장을 옹호할 채비를 갖추고 있던 이들의 최전선에 있었다. 자신의 저서 [현실의 상]에서 그녀는 맑시즘이 소쉬르적인 언어학에서 도출된 반리얼리즘적 개념들과 양립할 수 있을지를 의문시했다. 맑시즘은 언어가 이론의 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접근할 수 있는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언어에 좌우되지 않으며 언어로 환원될 수도 없는 현실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리어리즘이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반리얼리즘적 입장은 현실에 대한 어떠한 담론적 접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함에 있어 “알 수 있는 외적 현실이라는 범주 자체”의 거부에 의존하고 있다. 모든 인습주의가 지향하는 제한적인 입장은 상호배타적인 담론이나 이론들을 통해서만 현실에 대한 접근이 존재한다는, 그 결과 현실 개념은 어떠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현실을 문자 그대로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현실에 대한 개념들이 존재하는 것 만큼이나 많은 현실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리얼리즘적 조류는 방향을 틀지 않았는데, 그 조류는 힌데스와 허스트의 개입을 뒤따르는 리얼리즘적 인식론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해가 낮은 데 부분적으로 기인할 뿐만 아니라 로벨이 지시라는 개념에 가한 잘못된 중요성에도 부분적으로 원인이 있다. 용어들의 의미는 언어체계 내에서 부여되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용어들은 그 체계밖에 있는 실재 세계를 지시했다는 점에서 소쉬르주의자들은 “언어를 결과적으로 유일한 현실로 만듦으로써, 혹은 현실을 언어의 기능으로 만듦으로써” 그 문제를 회피했다. 한편으로는 의미와 지시를 구별하는 데 대한 인습주의자들의 실패의 결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 세계란 알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지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의 결과로 인해 담론들은 두 가지 방식 중 하나의 방식으로, 즉 담론들의 내적 일관성을 통해서나 여타의 특권화된 담론들과의 통합성을 통해서 비준된다. 그리고 이는 하나의 부조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로벨의 입장과 연관된 이처럼 다양한 어려움들은 리얼리즘에 관해 의견을 표명하면서 하나의 시금석에 호소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알기에 독자적으로 하나의 문제가 되는, 즉 다른 무엇인가가 문제인 리얼리즘 텍스트의 주장에 반하여 설정되는 것에다 대고 호소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논평이 갖는 중요성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문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혁신의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이론이 이미 상응 테제의 형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로벨 자신의 주장은 그러한 발전의 길을 닦는 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구조주의적 사유는 만약 의미화작용이 반영하기보다는 생산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현실감을 창출하는가를 질문함에 있어 그 문제에 반대하여 등장했다. 그 대신, 어떻게 어떤 텍스트나 재현이 진실한 것으로 판정되고 다른 것은 허위적인 것으로 판정되는가? [하는 것이 구조주의의 문제였다.] 구조주의자들에게는 의미화작용에 앞서 주어진 어떤 현실에의 상응이나 비상응에 기초하여 떠오른 이러한 생각에 대해 자연히 어떠한 질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대안적인 대답이 있었다.


 첫 번째 것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며 거의 상식적인, 통합성 테제의 이형이었다. 관객들이 갖고 있던 기존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것이라면 그 텍스트는 리얼리즘적이라고 주장되었다. 텍스트의 표상들이 관객의 신념들에 맞추느냐 그러기에 실패하느냐에 따라 리얼리즘 효과가 산출되거나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티븐 히스는 70년대 초에 쓴 글에서 한 작품이 “특정 사회가 ‘현실’로 서 제시하거나 가정하는 현실을 재현” 할 때 그것은 리얼리즘적이라고 주장했다.

 통합성 테제의 불리함은 확실히 그 어떤 그럴듯함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영받지 못한 그 실천적 귀결에 있다. 그것은 리얼리즘의 이데올로기적 성공이 영화와 사회 양자에서 변화가 있을 때까지 지속되리라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영화의 형식만을 바꾸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관객들의 기존 신념체제가 그들의 수용을 제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테제가 작인을 텍스트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그저 그러한 실천들을 바꾼다고 해서 기존의 리얼리즘적 실천들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무너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변화하는 텍스트들에 의해 변화하는 관객들의 길을 결과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에, 어떻게 특정 텍스트들이 리얼리즘적인 것으로 특권화되는가에 대한 대안적 설명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대안으로 나온 이 변형판이 고전적 구조주의였다.


8. 영화의 장르

   - 갱스터 영화

   - 거리영화

   - 뮤지컬 영화 :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남태평양/7인의 신부/코러스라인/파리의 아메리카인

   - 버디영화 : 남자들의 우정

   - 사이버펑크영화 : 84년 울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국내 [채널69]

   - Occult Movie : Exorcist

                    오멘/서스피리아

   - 인디즈 : 인디펜던츠 영화의 약칭

              짐자무쉬

              스파이크 리

    - 컨셉 영화 : 영화요소중 한가지만을 특화 하여 제작

    - 필름 느와르 : 폭력/범죄영화

    - 네오리얼리즘 : 2차대전 후 이탈리아

                    [로셀로니] - 무방비 도시/전화의 저편

                    [데시카] - 구두닦이/자전거도둑/움베르트 D

    - Porno Movie : Blue Movie

    - 누벨바그 : 58년경 프랑스

                 [카이에 뒤시네마]의 신예비평가들의 영화제작활동

                 [드뤼포] - 어른들은 모른다/400번의 구타/쥘앤드짐

                 [고다르] - 네멋대로 해라

                 [루이말]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 메이킹 필름 : 영화제작 다큐멘타리

  

   - [포토제니] : 1919, 프랑스 루이텔릭이 처음 사용

                 영화영상의 유기적 내재성

                 장치, 조명, 억양,  - 감독이 자유롭게 선택, 창조 ,영화의 예술성획득

   - 필름북킹 : 배급회사와 전속 계약하지 않고, 어려운 배급 회사나 영화제작사와 계약

9. 한국영화

한국 영화는 오랫동안 대중과의 교감 통로를 잃어버린 상태로 있었다. 대중적 영향력 면에서는 방송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문화적 영향력 면에서는 아무도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구석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변화하는 내적, 외적 상황의 조건에 밀려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기운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빠른 속도로 대중 문화의 중심에 편입된 한국의 영화 문화는 그러나 산업과 장르의 미묘한 관계를 정비하기에는 아직 겨를이 없어 보인다. 아직 정착되지 않은 형태로나마 지금의 제작 체계는 자본의 견제가 훨씬 심해지는 체계를 지향하고 있다. 현재 한국 영화계의 자금력이 난국에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모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저항을 얼마나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느냐에 따라 최종의 성과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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