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파트 한 채의 병원비

장코폴로 2010. 2. 9. 10:13

 

아파트 한 채의 병원비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엎어지면 코가 닿을 가까운 곳에 큰 병원이 생겼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연만하신 어떤 분은 이제 이사를 가지 않을 것이라 한다. 좋은 병원이 집 앞에 생겼으니, 몸에 급한 탈이 나도 치료 받기에 수월하기 때문이란다.

         평생 모은 재산인 아파트 한 채, 병원비로 털어먹을 판

몇 해 전 가족의 병간호 때문에 병원에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2인용 병실을 같이 쓰던 노년의 그분은 몇 차례 수술을 거친 무릎이 다시 도져서 말 못할 고초를 겪고 있었다. 한데 환자 못지않게 괴로운 사람은 24시간 남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병수발을 드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평생 술 먹고 속을 썩이던 영감, 이제 병수발까지 들어야 한다며 신세한탄을 늘어놓았다. 그 중 푸념 삼아 하는 말이 귀에 걸렸다. “저 영감, 평생 모은 재산이라고는 아파트 한 채뿐인데, 그것마저 병원비로 털어먹고 가게 생겼어!” 몇 해를 병원을 집 삼아 지내며 수술에 수술을 거듭하다 보니, 치료비가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라, 급기야 아파트를 잡혀 빌린 돈으로 치료비를 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뼈저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비슷한 처지에 있었으니까.

알다시피 1801년 정약용은 장기현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한다. 장기에 도착하고 몇 달 만에 집안에서 기별이 왔는데 의서 수십 권과 약초 한 상자도 있었다.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는 귀양지라 다산은 오직 의서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몸이 아플 때도 집에서 보내온 약초로 다스렸다. 그것을 본, 다산이 머무는 집의 주인의 아들이 어느 날 이렇게 청한다. “장기의 풍속은 병이 나면, 무당이 푸닥거리를 합니다. 푸닥거리가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습니다. 뱀도 듣지 않으면 그만이로구나 하고 죽을 뿐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보고 계시는 책으로 이 깡촌에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렵니까?” 이 말에 느낀 바 있는 다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서에서 간단하고 쉬운 처방을 가려 뽑았다. 또 특정한 병에 가장 잘 듣는 약재 하나를 골라 쓰고, 그 밖의 보조가 되는 약재도 4,5종을 덧붙였다. 희귀해서 시골사람들이 구할 수 없는 약재는 아예 적지 않았다. 다산은 이 책에 『촌병혹치(村病或治)』란 이름을 붙이고, 퍽 만족해한다. 잘만 쓰면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니, 세상의 의술의 이치를 모르는, 내용이 뒤죽박죽인 의서와 비교하면 도리어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낯선 귀양지에 떨어져서도 시골사람들의 병을 걱정하여 의서를 엮다니, 정말 다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산의 ‘촌병혹치’와 의료제도의 정신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이 인간을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삶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새로운 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에이즈는 전에 없던 병이 아닌가. 인간이 질병에서 해방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근대 이후 의료가 이윤을 추구하는 산업이 됨에 따라, 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발전한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술과 친절하고 쾌적한 병원이 있다 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집 앞에 생기는 대형병원을 보고 이사를 가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시던 그분은 소문난 알부자다. 병원비 따위는 걱정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결코 완쾌되지 않을 병을 다스리기 위해 전 재산인 아파트 한 채를 날리게 되었다는 한탄도 있다. 돈이 병을 고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다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의술을 남에게 제공하는 데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원래 의술의 속성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인간은 병들 수 있기에, 의술은 원래부터 공유되어야 하고, 거기에 드는 비용 역시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지금 한국의 의료보험은 바로 이 정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데 요즘 영리병원을 도입해야 한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추진하는 의료제도 개혁이 점차 어려워진다는 소문도 있다. 동료들과 반갑잖은 소식을 두고 이런 저런 걱정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촌병혹치』의 서문이 떠올랐고, 그 김에 몇 마디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파트 한 채를 날리게 되었다는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기거하시는지 퍽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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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