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씨(奇氏)는 본관이 행주(幸州)입니다. 본관도 단본(單本)이고, 또 성씨를 함께하는 씨족의 숫자도 적어, 크게 번성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매우 유명한 집안이 바로 기씨 가문이었습니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에 기건(奇虔)이라는 높은 벼슬아치가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훌륭한 정치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도 유능한 관리들이 발탁되던 때여서, 기건은 학행(學行)으로 천거 받아 고관에 이르렀습니다. 죽은 뒤에는 정무(貞武)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세상에 큰 이름을 전한 분입니다.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오래지 않아 제주목사로 발령받아 제주도민을 계도하고, 그 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이룩한 큰 공을 세웠습니다. 뒤에는 황해도 연안군수도 지내고 전라도관찰사, 전주부윤, 호조참판, 개성부유수, 대사헌 등의 고관을 지내면서 관공서의 물품을 절약하여 사용하고, 청렴한 관원의 본보기를 보여준 청백리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뒤에 평양감사를 역임하고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나,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임금에 오르는 패악한 정치가 행해지자, 세상에 등을 돌리고 일체의 벼슬에 응하지 않은 의리의 선비로서도 유명했습니다.
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던 그는 세조의 위협에 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청맹(靑盲: 달걀봉사)이라 자처하면서 송곳으로 눈을 찌르려해도 끝내 눈알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버텨낸 사실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 그분의 청렴과 의리정신 때문인지 그의 후손에는 많은 학자와 높은 벼슬아치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기묘명현이던 복재(服齋) 기준(奇遵),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판서 기언정(奇彦鼎),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었습니다. 다산은 『목민심서』 절용(節用)편에서 그의 청렴정신과 검소한 삶에 대해서 크게 칭송하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기건이 제주도의 안무사(按撫使)가 되었는데, 성품이 곧고 굳으며 청렴하고 신중하였다. 그곳에는 전복이 생산되는데 백성들은 전복 채취하는 일에 무척 괴로움을 느꼈다. 기건은 ‘백성들이 저처럼 괴로움을 당하는데 내가 어떻게 차마 이런 음식을 먹으리오’라고 말하면서 끝내 전복을 먹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청렴함에 감복하였다”라는 글을 전했습니다.
다른 기록에는 연안군수 시절에도 붕어 잡는 농민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하여 절대로 붕어를 먹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벼슬아치라면 모름지기 기건처럼 백성의 아픔과 고충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직자들이 있다면 기건을 배우면 어떨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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