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공우익의 영웅, 창랑 장택상
자유당의 2인자는 만송 이기붕이 아니라 창랑 장택상과 철기 이범석이었다. 운석 장면도 자유당 초기의 2인자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승만의 곁을 떠나고 한국민주당으로 가고 말았다.
창랑 장택상은 일제 강점기때에는 유학파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외교위원부, 친임정 친목조직인 청구구락부에서도 활동했고, 해방정국에서 수도경찰청장, 경무총감 제1관구 경찰청장 등을 지내며 남로당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단속 등 좌익단체 색출 검거 등 건국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본인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에서 단속된 박낙종이라는 자의 손자가 김대중 정권의 고위직을 지낸 일도 있다는 것이다.
좌익 빨갱이 세력 소탕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면서도 좌익인사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보통 정치노선이 다르면 척을 지게 마련이지만 장택상은 해방공간에서 좌익소탕활동을 하면서도 좌익인사인 여운형이나 이만규와는 인간적인 관계를 시종일관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좌익에서 온건우익으로 전향한 조봉암을 신뢰하고 친분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장택상은 경북 칠곡의 양반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승원은 경기도관찰사와 비서원경과 중추원찬의를 지냈고, 양할아버지 장석용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장승원은 생부가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던 일가 아저씨뻘 장석용의 양자로 입양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광복단을 사칭한 강도떼에 의해 아버지 장승원이 살해당했다. 장승원이 살해당한 원인은 그들에게 자금을 내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강도떼인지 광복단인지 불분명했고 그 광복단의 당시 단원 중에는 김좌진 장군도 있었음에도 장택상은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을 미워하지 않고 적극 신뢰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유혹에 빠져 45년 9월초엔 조선공산당에도 드나들었던 김두한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남의사를 본따 백의사를 만들었던 백의사 의백 염응택을 만나 김좌진이 고려공산당 당원에게 암살당한 사실을 접했다. 김두한은 그대로 주먹계에서 손을 씻고 해방정국의 공산주의자들을 깨끗이 소탕하는 반공전사로 거듭났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장택상은 김두한을 밉게 볼수도 있는 문제였다. 당시는 고도의 수사기법이 발전한 시대가 아니라서 증거가 없더라도 혐의나 소문만 있으면 원수가 될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영국으로 유학가던 길에 보재 이상설을 만난다. 조선 조정에서 찬정대신을 역임한 이상설은 조정에서 만난 정치적 동지인 장승원의 아들임을 알자 그를 극진히 대우하고 후원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 독일여성의 기지로 러시아돈 20만 루블을 의심없이 독일 돈 20만 마르크로 바꿀수도 있었다. 장택상은 어렵게 영국에 도착하여 옥스퍼드에 다녔으나 공부가 안됐는지 중퇴하고 말았다.
영국에서 활동하던 중 장택상은 우사 김규식을 만났다. 김규식과 같은 중도보수주의자가 됐지만 미군정이 김규식을 지지하여, 1948년 대통령 자리를 놓고 이승만과 김규식이 경쟁할때 장택상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규식은 1919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파리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1차세계대전 종전협정 회의장에 나가 한국의 독립을 열심히 연설하고 있었다. 장택상은 임시정부 파리외교위원부 소속으로 위원회 원장 김규식과 함께 한국 독립을 홍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곳에서 김규식이 데려온 김탕, 장덕수, 여운홍 등을 만나게 됐고 그들이 프랑스에 실망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이승만, 서재필, 조병옥과도 만나게 됐다.
옥스퍼드를 중퇴하고 귀국한뒤 1930년대엔 국내의 친이승만계 독립운동조직인 청구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창랑 장택상은 고하 송진우와 친밀하였던 듯 하다. 고하 송진우와 친밀한 한민당계 인사였지만 송진우가 암살된 이후 장택상은 이승만의 독립촉성회 계열로 넘어가서 계속 자유당에서 활동했다. 사실상 이승만 박사를 총재로 하던 준정당성격의 독립촉성중앙회는 1952년 자유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정당으로 본격 활동한다. 1948년 5월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칠곡 선거구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된 이후 장택상은 2,3,4,5대 국회에서 내리 5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정부수립 뒤에도 장택상은 초대 외무부장관, 제2대 국회 민의원 부의장, 제3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45년 11월 3일 김구가 귀국하여 경교장에 도착했을 때 장택상은 송진우, 장덕수, 김병로, 김준연, 조병옥과 함께 경교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구는 실내에 있으면서도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에 밖에 있던 장택상과 송진우, 장덕수, 김병로, 김준연, 조병옥을 세 시간이나 눈밭에 세워두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열심히 소탕하던 장택상은 열 번 넘게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한번은 차량에 폭탄이 들어와 자녀들이 다쳤고, 한번은 그가 공산주의에서 전향시킨뒤 애지중지하던 청년들이 그렇게 죽었다. 장택상 본인도 서울 도심에서 피습을 당했지만 그러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다.
창랑 장택상은 김영삼 등을 키워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장택상은 1951년 찬조연설을 하던 대학생 중 김영삼을 눈여겨보았다. 그를 눈여겨 본 장택상은 부의장시절 국방부 정훈국에 있던 김영삼을 특별히 자신의 비서관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56년 국회의원선거 출마하기 전까지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어느 좌익인사도 좌익 경력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장택상은 젊었을때는 공산주의에 빠질수도 있다면서 구명하고 비서관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김영삼이 키워낸 인물은 노무현인데 그는 스승을 배신하고 김대중에게 건너갔다. 장택상은 결국 문민정권 지도자를 발굴해 낸 정치적 뿌리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철기 이범석이 자유당 공천 부통령 후보자로 나가려 했으나 이승만 박사는 제2인자로 이범석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였던지 이범석을 밀어내고 이기붕을 선택했다. 최기일의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이라는 책 3단원을 보면 이기붕이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것은 단지 예의바른 것 하나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총애하였다. 이승만은 미군정기때부터 퇴임 직전까지 일민주의 사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민주의는 단군왕검의 자손이라는 것과 홍익인간정신을 강조했고, 한 조상의 뿌리를 가진 한 민족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문교부장관 안호상, 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 등을 시켜 민족주의 연구단체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범석은 만주 군벌에서 독립운동 중 그의 활약을 접한 이승만이 보낸 선물에 감격했다. 이승만의 격려편지와 그가 수시로 보내온 만년필들과 장갑, 가죽옷 등의 선물에 감격하였다 한다. 그때 이범석의 감격은 이범석의 저서 우둥불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해방 뒤 50년대 초 이범석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승만은 부통령에 출마하려는 이범석을 억제하고 함태영을 대신 부통령으로 앉혔다. 자신이 부통령 후보자로 내정되고 부통령 자리를 순탄하게 계승할 것을 의심하지 않은 철기 이범석은 자신이 부통령 후보자자리에서 낙마하자 자유당의 실력자인 장택상을 고소하였다.
55년 호헌동지회 회원 중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일을 놓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갈라졌을 때 조병옥과 장면은 조봉암을 격렬하게 반대했고, 신익희는 중립적 입장이었던 반면, 장택상은 박기출, 서상일, 그리고 당수인 인촌 김성수와 함께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 찬성입장을 표했다. 하지만 조병옥과 장면의 반말이 너무 거세서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일은 취소되었다. 조봉암을 거부한 이 사건으로 박기출과 서상일은 진보당 창당에 참여했고 장택상은 자유당계 인사로 돌아갔다.
자유당계 인사이면서도 이박사의 3선개헌에 정면 반대하였는가 하면 공산주의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북한에 비밀리에 왔다갔다 하던 암거래상인의 정치자금을 받은 이유로 조봉암이 의심을 받자 장택상은 홀로 나서서 조봉암을 변호하며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동지이자 정적인 조병옥이 6.25 동란중 고급 연회장에 출입했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3.15 부정선거에 반대하여 항의도 했고, 이승만 박사에게 용퇴를 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3대 대선때는 자유당을 떠나 상해의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임시정부에서 만난 정화암, 운암 김성숙 등 군소야당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대통령 후보자로 나서기도 했지만 암흑세력의 방해로 출마도 못하고 등록취소된 일도 있었다.
진심으로 장택상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목적이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지만 장택상을 추대하기 전 정화암과 운암 김성숙은 자신들이 창당했던 군소정당들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 김성숙은 임시정부에 억지로 합류했던 사회주의자 좌경 승려 출신이었다, 이들은 어찌보면 원수일수도 있을 장택상, 반공주의자였던 장택상을 떠받들었을까?
이범석이 탈당하자 자유당 부당수가 된 장택상은 이승만이 물러가고 이기붕이 자살하자, 자유당을 홀로 떠맡게 된다. 그리고 구정치인들을 숙청하던 5.16 의 시련을 견뎌낸다.
5.16 혁명뒤 장택상은 박정희의 구정치인 정화법에 엮여서 정치활동에 제한을 받더니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사라지고 허정까지 물러난 자유당의 총재직에 추대되기도 했다.
박정희는 장택상을 원로로 모시려 했지만 장택상은 거절했다. 박정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은 듯하다. 반대로 이범석 장군에게는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국토통일원 위원 겸 고문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그뒤 장택상은 박정희의 군정에 반대하는 활동, 불법적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한일회담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발히 하다가 자유당의 옛 원로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당이 쇠퇴하여 70년 자유당이 해산됨에 따라 사실상의 정계은퇴를 했다. 그리고 73년에 사망했다.
우파이면서도 그는 특이한 이력을 갖는다. 독립운동과 반공활동, 조병옥의 동지이자 정적, 죽산 조봉암과 시종일관 친분을 유지했고 그가 누명을 썼을 때 변호하는 유일한 친구였으며, 이승만 정부 탄생에 기여했으면서도 자유당 정부의 독재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조병옥의 동지이자 정적이기도 한 묘한 관계를 지녔는가 하면 조병옥이 싫어하던 조봉암과도 친하게 지냈다. 공산당을 소탕한 열혈 반공주의자이면서도 여운형, 이만규 등 공산당 거물들과 인간적인 친분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생애 후반에는 정화암, 김성숙이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시도까지도 했다. 좌우가 팽팽히 맞서던 시절에 참으로 독특한 이력을 밟은 것은 틀림없겠다. 이승만, 김구, 조만식, 박정희와는 사뭇 다르고 보수주의자로 조병옥, 장면과도 또다른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해방정국에서 장택상은 좌파 출신 청년 박일원 등을 감화시켜 전향시켰는가 하면 어느 좌익 인사(뒷날 용공 친북으로 변절)는 청년때 좌익에 빠질수 있다고 보고 살려준 일도 있다.
우익인사이면서도 재조명을 받지 못하는 인사이지만 그는 후대에 김영삼 등의 쟁쟁한 인물들을 길러냈다. 장택상은 한번쯤은 기억해둘 필요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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