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제 기적 vs 문화 콤플렉스

장코폴로 2010. 1. 31. 16:45

사회

[Views] 경제 기적 vs 문화 콤플렉스

2010.01.31 11:39 입력 / 2010.01.31 14:12 수정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예브기니아 리 카자흐스탄TV 기자
며칠 전 회기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숨을 돌리는데 나이 든 노인 세 명이 곁에 서 있었다. 허리가 아주 굽은 할아버지와 무거운 짐을 멘 할머니 두 분이었다. 바로 앞에는 한 남성이 서너 살 된 여자애 두 명과 앉아있었다. 애들은 끊임없이 다투고 노래하고 창문을 두드렸다. 시청역까지 30분 동안, 전철 문에 기대 힘들어 하는 노인들에게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경로석은 꽉 차 있었는데….

내 나라 카자흐스탄에서 노인들은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다. 그들은 전쟁과 기아, 개혁과 위기의 역사를 모두 겪었다. 한국 노인들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왜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지. 알마티에서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카자흐스탄(이하 카자흐) TV방송국의 기자. 지금은 학생으로 서울 생활 4주째다. 중앙일보와 경희대 국제교육원 초청으로 한국어 연수 과정에 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데, 이상하게 종전과 달리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난해 4월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가슴이 벅찼다. 소녀 때부터 꿈꾼 ‘역사의 조국’ 한국을 볼 첫 기회였다. 옛소련서 태어나 지금 카자흐에 사는 고려인 아버지는 1990년대 초 어린 내게 자주 ‘한국의 옛날 얘기’를 러시아어로 읽어주셨다. 종이도, 인쇄 질도 나쁘지만 이 책을 난 아직도 좋아한다. ‘흥부와 놀부’ ‘효녀 심청’ 같은 얘기는 어린 내게 새 세상 같았다. 한국은 꿈이었고 언젠가 갈 수 있기를 빌었다. 마침내 꿈은 이뤄졌다. 하지만 ‘역사적 조국’의 속사정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한국이 정말 내가 꿈꿨던 나라가 맞나’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카자흐에서 ‘Korean’이란 단어는 성실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통한다. 카자흐 고려인들은 ‘한국인은 전통을 아끼며 수준 낮은 서방 문화를 추종하지 않는 자부심 큰 민족’이라고 배웠다. 수백 년 역사를 담은 고풍스러운 경복궁을 걷거나 전통음악 공연장을 찾을 때면 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러나 번잡한 강남역 사거리로 나서는 순간 생각이 바뀐다. 일본의 최신 유행으로 한껏 치장한 한국의 많은 젊은 여성들은 머리를 무슨 색으로 물들일지, 저녁엔 어디서 술을 마실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TV는 또 어떤가. 미국의 보이 그룹 ‘백스트리트 보이즈’나 5인조 아이돌 그룹 ‘엔 싱크’ 등을 흉내낸 듯, 인형 같은 소년·소녀 그룹들이 판친다. 도발적 차림으로 관능적인 춤을 추며 영어와 한국어로 ‘사랑해요’를 반복하는 쇼에서 한국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순 없다. 많은 나라가 감탄하는 ‘경제 기적’의 나라에서 왜 ‘문화적 콤플렉스’를 보게 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내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교육원 복도에는 이곳을 거쳐간 외국 학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한국을 배우려는 외국인은 늘고 있다. 내가 알기론 매년 수천여 명의 외국 젊은이들이 한국과의 운명적 만남을 위해 서울을 찾는다. 카자흐 사람도 한국 꿈을 꾼다. 그런데 매년 수천 명의 한국 젊은이들은 ‘가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미국과 유럽을 찾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카자흐에 사는 130개 민족 가운데 카자흐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민족이 ‘고려인’이다. 이들은 오랜 이역 생활에도 한국 전통과 문화를 잊지 않았다. 설과 추석을 지키며, 어른을 공경하고 된장국과 김치, 밥을 먹는 음식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 음식 수업 시간에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 음식에 손대지 말라’고 가르쳤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예순인 아버지는 지금도 형님 앞을 피해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온다. 카자흐에 사는 다섯 살짜리 조카는 아빠가 러시아인이지만 “나는 한국인”이라고 자랑한다. 한국인들도 자신의 문화와 전통에 더 큰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예브기니아 리 카자흐스탄TV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