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파파리치

장코폴로 2010. 1. 16. 08:35

한 달 용돈으로 2000만원을 쓰고, 한 번에 2억원어치를 쇼핑하며, 30년짜리 양주만 마신다는 20대 부자 2세들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파파리치'가 논란을 빚다가 결국 방송 보류됐다. 거센 여론의 역풍(逆風)에 꺾인 셈인데, 논란을 보면서 그냥 방송하게 내버려 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들 얘기가 방송을 탔다면 그 느낌은 씁쓸한 '블랙 코미디'에 가까울 것 같다. 사람들은 '은수저' 물고 태어난 2세들의 천박성에 혀를 차면서 돈이 많으면 뭐하나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자식 둔 부모라면 '내 아들은 저렇지 않아 다행이야' 하고 안도하지 않을까.

문제 방송의 홍보 동영상에 나온 4명의 자기소개가 맞는다면 이들의 '파파리치(papa+rich·돈 많은 아빠)'는 졸부(猝富)임에 틀림없다. 정상적인 부자들은 자식을 이렇게 키우지 않는다. 대학 시절 동창생 중에 재벌가(家)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우리와 똑같이 청바지 입고 막걸리 마시며 데모도 하면서 4년을 보냈다.

돈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흉기가 되기도 하고, 사람을 구하는 구명대가 되기도 한다. 문제 방송의 졸부 2세들은 돈을 쓰레기로 만들고 있었다. 그저 먹고 마시고, 말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오물처럼 마구 배설하는 듯했다.

이들은 생각도 못했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돈은 '꽃'이다. 월급쟁이의 우상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펴내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엔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것처럼 돈의 참가치를 멋지게 표현한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돈을 잘 써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사람이 진짜 부자다.

돈이 꽃이 되면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의 돈은 소녀 가장을 살리고, 어떤 사람의 돈은 달동네 공부방을 만든다. 어떤 사람이 평생 모은 재산은 장학금이 되고, 학교 교실이 되기도 한다. 철없는 '파파리치' 2세들은 한 달 용돈 2000만원을 쓰레기처럼 소모하지만 이 돈이면 결식아동 300명이 한 달 동안 점심을 굶지 않아도 된다.

부자들만 돈의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희망나눔 캠페인'에서 한 달여 동안 모은 1800억원의 모금엔 지금까지 600여만명이 참여했다. 수백만명이 ARS 전화 기부로 2000원씩 내고, 유아원 아이들이 돼지저금통을 깼으며, 노숙자와 독거(獨居)노인, 장애인 부부까지 참여해 이런 거대한 꽃을 피웠다.

지난 연말에도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아름다운 소식을 참 많이 들었다. 진주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우표를 모아 보내왔고, 인천의 쪽방촌 주민들은 굴과 마늘을 까서 번 돈을 기부했다. 지난해 충남 강경읍에서 가장 많이 기부를 한 사람은 셋방살이하는 44세의 생선가게 주인이었다.

김밥 할머니, 국밥 아줌마, 옥탑방 노인들의 기부 행렬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한국만의 현상이다. 할머니들은 한 푼 두 푼 모은 재산을 훌훌 다 털어 기부한 뒤 오늘도 시장 바닥에서 김밥과 국밥을 말고 있다. '파파리치'를 둔 철없는 2세들은 이런 세상이 있는지 알기나 알까.

사실은 자식들에게 2000만원씩 용돈을 주고, 30년짜리 양주를 마시게 하는 부모가 더 밉게 느껴진다. 이들이 세금은 제대로 냈을까. 증여세 안 내고 10년 동안 3000만원 이상 자녀에게 돈을 주면 탈세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돈의 꽃을 피우는 한쪽에선 졸부 2세들이 돈의 악취를 풍기고 있다. 참으로 대조적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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