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고정림(顧亭林)의 ‘생원론(生員論)’에 붙인 발문」이란 짤막한 글에서 다산은 고정림은 온 세상 사람들이 생원이 되는 것을 걱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고정림은 알다시피 명말 청초의 대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다. 그의 저작 『일지록(日知錄)』은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의 필독서였고 그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다만 다산이 인용하고 있는 ‘생원론’은 『일지록』이 아니라 문집인 『정림집』에 실려 있다.
실력도 기여도 없이 대접만 받는 족속들
고염무는 ‘생원론’에서 천하의 생원이 50만 명이 넘지만, 국가와 사회에 쓸 인재가 없다고 한탄한다. 정치와 행정에 무지하기 짝이 없는 생원이 이토록 불어난 것은 경전과 경세(經世)에 관한 공부에 골몰해야 할 선비들이 수험용 교재만 달달 외어 과거에 붙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붙었다 해서 생원이 모두 벼슬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생원이 되고자 하는가? 생원이 되면 일반 백성이 겪어야 하는 고초를 겪지 않고, 사족(士族)으로 예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중국의 생원은 조선의 양반과 같다고 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중국의 생원은 과거에 합격해야만 생원이란 이름을 얻게 되지만, 조선의 양반은 문과나 무과를 치르지 않고도 얻는 이름이며, 또 생원은 그나마 정원이 있지만 양반은 정원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생원의 경우, 생원이었던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고, 또 다른 집안에서도 생원이 나올 수가 있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은 한 번 양반이 되면 대대손손 영원히 양반이다. 이러니 양반의 폐해는 생원의 폐해보다 훨씬 크다고 한다.
다산은 조선의 양반으로 인해 생기는 폐해를 걱정한다. 하지만 그는 생원이 줄어들기를 바란 고염무와는 달리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반이 되기를 바란다. 어디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반이 된다면 결과적으로 양반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젊은이가 있어야 어른이 드러나게 되고, 천한 사람이 있어야 귀한 사람이 드러나는 법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면, 곧 존귀하게 여길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가? 양반을 그토록 귀하게 여겨 양반이 되기를 열망하니, 모두 양반을 만들어준다면 어찌 좋지 않으랴. 그 결과 양반이 없는,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니, 그런 사회야말로 유사 이래 인간이 꿈꾸어 왔던 이상사회가 아니랴.
정원제한이 아니라 정원 철폐도 한 방법
그런데 희한하게도 다산의 이 말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고질을 치료할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근자에 논란이 되고 있는 세종시에 이른바 일류대학이라는 서울의 모모 대학이 새 캠퍼스를 열 계획이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비판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다만 이왕에 서울을 벗어나 새 캠퍼스를 여는 김에 장소를 확 늘리면 더 좋지 않겠는가? ㅅ대학, ㄱ대학, ㅇ대학 등 자칭 타칭 명문이라 자부하는 서울의 모모 대학들은, 부산 대구 광주 전주 청주 춘천 등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골고루 캠퍼스를 여럿 열어야 마땅하다. 이런 대학에는 교육부에서 정원을 몇 만 명씩 불려 주어야 할 것이다. 비용은 어떻게 하냐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서울에서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어떻게 키우겠는가. 학교의 상징이 될 만한 곳만 남기고 나머지 비싼 땅 팔아서 이전 비용으로 쓰면 된다. 산수풍광 좋고 공기 맑은 곳에서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가 자라날 것이니, 금상첨화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이른바 일류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을 것이니, 입시경쟁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굳이 밤 10까지 ‘야자’를 할 필요가 없고, 학원에 가서 밤 12시를 넘어서까지 과외를 할 필요가 없다. 초중고등학교 교육이 절로 정상화될 것이다. 다산 선생께서 온 백성의 양반화(兩班化)란 기막힌 아이디어로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신 것처럼, 나 역시 여기서 모든 대학의 일류화(一流化)를 통해 수렁에 빠진 대한민국 교육을 건져내고자 하는데,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덧보탤 고견이 있다면 보내 주시기 바란다(追記. 새해 벽두에 실없는 소리를 해서 독자 여러분께 송구스럽다. 웃자고 한 소리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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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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