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세탁 시대

장코폴로 2010. 1. 6. 12:56

 

세탁 시대

                                                             송 재 소(성균관대 명예교수)

더러운 것을 씻어내어 깨끗하게 만드는 행위를 세탁이라 한다. 이 말은 주로 의복의 더러움을 씻는 데에 사용되지만 보다 광범위한 뜻으로도 쓰였다.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백수산(白水山)을 유람하고 쓴 시에서 “다만지 속된 마음 세탁할 수 있다면 / 신선과 선약(仙藥)이 나와 멀지 않으리”(但令凡心一洗濯 神人仙藥不我遐)라고 했다. 옷이 아니라 마음을 세탁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역시 송나라 때의 문인 증공(曾鞏)은 “뭇 산이 푸르게 껴안고 있어서 / 티끌과 안개가 세탁한 듯하다네”(群山翠相抱 塵靄如洗濯)라 하여, 공기 중의 티끌과 안개가 사라진 것을 세탁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세탁이란 어느 경우이건 맑고 깨끗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세탁 본래 뜻과는 거리가 먼 세탁들

그런데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이 말은 종래 사용되던 뜻과는 다르게 쓰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 세탁’이다. 돈세탁이란, 불법으로 취득한 돈을 정당하게 얻은 깨끗한 돈으로 보일 목적으로 또는 취득한 사실 자체를 아예 숨길 목적으로 그 출처나 소유관계를 은폐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대가성 있는 정치자금을 수수할 때 애용하는 방법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세탁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에는 ‘아동 세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작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발제자로 나온 제인 정 트렌카 씨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녀는 생후 6개월 만에 4살 된 언니와 함께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수년 전 친부모를 찾기 위하여 한국에 와보니 자신의 ‘가족 호적’과는 다른 ‘고아 호적’이 별도로 작성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트렌카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태어난 날짜도, 태어난 곳도 모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낳아준 어머니가 저를 낳자마자 버렸다는 것도, 아버지가 저를 보육원에 두고 간 뒤 ‘친부와 친모는 함께 살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도 거짓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동의 신상정보를 조작하는 것은, 입양을 쉽게 하기 위해서 양부모의 입맛에 맞춰 아동을 상품처럼 포장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입양인 중에서 후에 가족과 상봉하는 비율이 2.7%에 불과하다고 했다. 입양 직전 아동이 사망했을 때 다른 아이로 바꿔치기를 하고, 친부모의 동의 없이 타인 명의의 동의서를 조작하는 등 아동 세탁의 유형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동 세탁’에 ‘얼굴 세탁’까지

‘국적 세탁’도 있다. 지난 해 5월에는 중국산 위조 명품들을 인천공항으로 들여와서 마치 한국산 제품인 것처럼 속여 미국으로 수출하려한 일당이 검거되었다. 이른바 국적 세탁이다. 어디 그 뿐이랴. 각 대학에서는 ‘학점 세탁’이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학점이 낮게 나온 학생들에게 횟수에 관계없이 무제한으로 재수강을 허용해서 성적을 올려주는 것을 말한다. 엄격한 재수강 제한 때문에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학교당국의 배려이겠지만 이런 현상을 두고 한 대학교수는 “대학이 학점 세탁소가 되었다”고 자탄하기도 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학점 세탁과 함께 ‘얼굴 세탁’도 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자연산’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난 해 연말에는 ‘4대강 정비’ 문제로 국회 예결위원회장에서 농성중인 민주당의 정세균 대표가 “수자원공사를 통한 ‘예산 세탁’을 제대로 돌려 놓으라”고 요구했다.

세탁, 세탁, 세탁 … 우리 사회는 각계각층에서 바야흐로 세탁하느라 여념이 없다. 세탁을 하면 더 깨끗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지저분해지는 것이 오늘날 세탁의 현주소이다. 이 부적절하고 비정상적인 세탁 풍조를 진짜 세탁해버릴 날은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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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재소
· 성균관대 명예교수
· 전통문화연구회 이사장
· 저 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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