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 것 없는 풍운거사의 화화(畵話) | ||||||
[전시회] 한오의 <흙손 - 투우透牛 하다>展 | ||||||
11월 4일부터 일주일간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서양화가 한오의 <흙손-투우透牛하다>전(展)이 열리고 있다. 가야금의 변주, 다섯 줄 선율에 실린 듯한 소와 닭들의 품세가 금새라도 프레임을 뛰쳐나와 달려들 듯하다. 소의 가슴에는 사랑이 가득 침전되어 있을 것이다. 투박한 흙손으로 빚어낸 생기발랄한 형태를 빌려온 가축들은 야생성 그 자체의 순수성으로 그윽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치우천황의 먼 옛날부터 뒷동산 떡깔나무 숲의 낭만에 이르는 서사의 터널에서 ‘소’로 시작된 담화는 피어할 것은 필연 개화임을 알린다. 그의 거대한 십육년 겨울은 해동되어 삼월에 이은 늦가을에 뜨거운 온기로 다가온다. 전자파로 감지되는 에너르기 ‘쿠, Kuh’의 현란한 무우(武牛)는 작가 한오의 삶과 정신으로 곧장 직결된다. 늦가을로 투영시킨 소는 섬찟할 정도의 분노와 혁명적 기운을 담지하고 있다. 소와 닭이라는 고정 이미지를 제거하면, 한오의 화계(畵界)는 숲이 되고, 계곡이 되고, 작가 마음의 바다가 된다. 투박함 위의 날카로운 질감은 화각의 다양성으로 입체화되고 한오의 가슴 깊숙이 숨겨 두었던 녹색 희망이 기축년의 막바지에 걸린다. 녹슬지 않은 작가 정신은 절필 기간에도 진행형이었고, 비탈진 프론티어쉽은 작품들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동행한 작품들은 콜로세움의 검투사가 토해놓은 전투의 전리품 같은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도 고갈 되지 않고 한오가 존재한 것은 흙손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 한오(HanO)는 청년 화가 이전에 부친과 같이 만졌던 물과 흙의 촉감을 느끼면서 또 다른 벽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우직한 일상 속에 흙을 다듬어 벽면을 찬란하게 만들던 그 테크닉을 생각하며 밸런스와 울분사이의 황금배율을 생각해 내었다. 그의 벽은 갑옷이 되었고, 두꺼운 나무껍질이 되었다. 재질의 다양함 못지않은 인간사에서 한오는 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림에 투영되는 혁명의 빛깔은 번짐으로 꿋꿋이 버틸 수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한오의 이미지 소(昭)에는 작가의 정신과 자세가 배어있다. 소박하게 보여준 전사의 현장은 생각과 달리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듯한 충격 그 자체였다.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이미지 구축으로 한오 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작품들은 우매한 관람객들을 깨어있게 만들며 장르 확장의 묘미를 선사한다. 닭을 시종으로 쓰고, 소를 주로 한 한오가 친 100호,80호,50호,30호,10호,2호의 20여점의 그림은 환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 추상과 구상의 묘미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비법을 터득한 그는 그림을 통한 치유의 효험을 느끼고 기운의 나눔을 보여주고 있다.
한오의 그림은 한 권의 철학 책 이다. 그 깊이는 느끼는 자의 몫이다. 그가 부조리한 구역을 썰어내듯 냉철한 응시와 상상력으로 세상을 재단해 나간 뒤 총체적으로 느낀 것은 ‘짐승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은 구도자적인 삶’이다. 그의 소는 세상을 구원하는 소인 셈이다. 결국 한오는 허위의 질서에 들떠있던 사람들에게 공간을 양보해 보았고, 변화의 조짐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그는 상상의 소를 타고 거대한 흐름을 선언한 셈이다. 세상을 곱게 바꾸고 싶어 한다. 튼실한 소를 낳은 한오의 산고가 세상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저녁놀이 되었으면 한다. 그의 소들이 무리를 이뤄 평화의 춤을 추고 안락을 얻었으면 한다. 오늘도 인사동 쌈짓길 너머 토포하우스엔 태양을 삼킬 듯 소가 서있다. 장석용(문화비평가, 숙명여대 문신미술연구소 연구위원) | ||||||
기사입력: 2009/11/10 [11:29] 최종편집: ⓒ kiupil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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