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영화일반론)

1990년대의 한국 영화

장코폴로 2009. 8. 10. 08:35

1990년대의 한국 영화

changpau 2004.08.16 10:22

조회 89,219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1990년대 한국영화와 비평의 遭遇


1. 『장군의 아들』 『쉬리』를 낚다

1990년대는 1990년 『장군의 아들』이 60만 명을 돌파하며 화려한 포문을 열었고, 99년『쉬리』가 245만 명에 육박하면서 막을 내렸다. 새로운 물결이 일어, 닫혔던 법조문들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판결이 나고, 영화 소재의 다양화와 사회적 통념을 깨는 영화들이 법적 대응도 불사하는 등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10년이었다.
올림픽을 전후하여 한국영화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되었고, 교류도 빈번해 지는 등 한국영화는 내․외적으로 테크닉과 소재, 흥미와 작품성을 인정받아 유례 없는 관객의 사랑을 받게된다. 또한 단편․독립 영화의 비약적 발전은 깐느 영화제에서 송일곤이 『소풍』으로 그랑프리를 거머쥐게 된다. 그 동안 꾸준히 시네마테크 운동 덕으로 관객의 수준은 높아졌고, 부산, 부천 등 다양한 국제영화제는 관객의 안목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영화의 연도별 제작편수는 90년 111편, 91년 121편, 92년 96편, 93년 63편, 94년 65편, 96년 68편, 97년 59편, 98년 43편, 99년 49편으로 IMF의 후유증 타기도 하였지만 『쉬리』의 성공이 大作영화의 본격적인 탄생을 알렸으며, 우리영화의 산업적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또한 그 동안 미미한 액수의 輸出價가 뛰어 오르고 수출국가도 다변화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략에 따라, 바뀌는 영화법은 93년 3월 6일 9차로 개정되어 문화부가 문화체육부로 개명되고, 95년 12월 30일 영화진흥법도 제정되어 ①공동제작영화제작업 신설 ②소형, 단편영화 등 심의예외 규정 신설 ③영화필름 등의 자료제출의무화-행정사무위탁: 영상자료원 ④복사 프린트 허가, 수출 추천제 폐지 ⑤영화진흥금고에 관한 규정 신설에 관한 항목이 96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97년 4월 10일엔 1차 영화진흥법 개정이 이루어져 ①외국영화 수입 추천권을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이관 ②영화의 제한, 삭제 심의대신 상여등급 부여-모든 관람객이 관람할 수 있는 등급-12세 미만인 자는 관람할 수 없는 등급 (다만, 부모 또는 이에 준하는 보호자 동반시 관람가)-15세 미만인 자는 관람할 수 없는 등급-18세 미만인 자는 관람할 수 없는 등급 ③선전물의 배포, 게시 제한 ④관련업계의 자율정화 및 민간의 자율활동 지원 ⑤영화 상영금지, 정지처분 미이행자에 대한 영업정지 등 항목이 97년 10월 1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역사가 미천한 관계로 한국영화사 연구는 아직 일천하고, 필름 존재의 부재 가운데 영화연구에 대한 이벤트성 주장은 의구심을 가중시키는데 반해 눈부신 영화 테크놀로지는 한국의 영화인력들을 할리우드 상업영화들의 제작방식과 마케팅을 추종하게 만들었다.
위성방송과 케이블 시대가 만개한 95년 봄 한국은 멀티미디어 산업 즉 콘텐츠 산업과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시작된 캐릭터 사업 등 다양한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국제영화제를 통해 국제감각과 판매전략, 배급의 노하우를 익힌 영화제작자들이 영화 한 편 제작으로 재벌이 되는 영화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산업의 산업적 문화적 잠재력을 감지한 당국이 다양한 지원책을 강구한 끝에 오늘의 영화산업에 이르게 되었지만 서투른 人事로 도처에서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한국영화는 직배영화의 두려움을 털고 생존법칙을 터득한 듯 하다.
90년대는 영화계의 대 변혁기에 해당되고, 제2의 영화 전성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영화 흥행 기록이 수시로 갱신되었으며, 우리영화에 대한 국제 인지도도 높아졌다.
아쉬운 것은 아트필름의 감소이다. 이를 뒤집는 것은 역시 단편․독립영화들이다. 소재․지역․언어는 물론이고, 영화의 테크닉이 변화하고 있음을 다양한 작가의 차별화된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다. 연출 방식의 차이는 있어도 독특한 장르와 소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 미국영화들의 장르를 세분화한 영화들이 가공되고, 그것들은 폭력이나 공포를 수반한 것들이 많았다. 동성애 영화들이 등장했고, 새로 영화계를 장악한 것은 신인감독들이거나 젊은 기획자들 이었다. 고질적인 영화계 편가르기는 계속되고 있었고, 기성 영화인들은 도태되는 살벌한 약육강식의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2. 90년대 한국영화의 풍경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로부터 한국영화 75년, 해방 후 50년, 90년대 영화후반기인 1995년에도 영화 창작의 자유는 여전히 답보상태로 흐르고 있었다.이후 몇몇 작품들이 90년대 후반을 풍요롭게 채색하여 90년대는 어느 시기보다 완성도 있는 영화들이 양산되었다.
저급한 오락용 영화들이 常存하는 현실을 보면서, 다양한 소재로 현실감각에 맞춘 영화들과 걸출한 영화감독의 탄생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지만,그 우려는 곧 해소되었다.
90년대에 들어와서 가시화된 남양주 종합촬영소의 완공도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블루시걸』과 같은 성인 만화영화와 『구미호』와 같은 SF물의 시도,전문 기획자의 출현도 한국영화의 질적․산업적 향상을 위한 커다란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프로 영화인들이 등장하고, 각종 영화잡지와 언론의 영화정보 제공, 동아리들의 왕성한 활동 등도 영화저변을 일구는데 한 몫을 했는데, 10년 간 한국영화 베스트 5는 다음과 같다.
※1990년도 흥행순위①장군의 아들②남부군③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④물위를 걷는 여자⑤집시애마
※1991년도 흥행순위①장군의 아들2②나의 사랑 나의 신부③사의 찬미④잃어버린 너⑤젊은 날의 초상
※1992년도 흥행순위①결혼이야기②미스터맘마③경마장 가는 길④하얀 전쟁⑤장군의 아들3
※1993년도 흥행순위①서편제②그 여자 그 남자③그대 안의 블루④가슴 달린 남자⑤투캅스
※1994년도 흥행순위①투캅스②너에게 나를 보낸다③세상 밖으로④태백산맥⑤블루 시걸
※1995년도 흥행순위①닥터 봉②마누라 죽이기③테러리스트④개 같은 날의 오후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6년도 흥행순위①투캅스2②은행나무 침대③꽃잎④귀천도⑤박봉곤 가출사건
※1997년도 흥행순위①접속②편지③창(노는 계집 창)④비트⑤할렐루야
※1998년도 흥행순위①편지②약속③여고괴담④8월의 크리스마스⑤퇴마록
※1999년도 흥행순위①쉬리②주유소습격사건③텔미썸딩④인정 사정 볼 것 없다⑤용가리

3. 90년대를 일군 감독들

90년대를 일군 감독들은 여럿 되지만 동시대에 활동한 감독들의 대표작들을 살펴보자. 대부분 90년대에 데뷔한 감독이고, 언급된 감독의 나머지 작품들은 글에서 언급되어 있다.

강구택:『째즈빠 히로시마』(1992)
강우석: 『투캅스』(1993), 『마누라 죽이기』(1994)
강정수:『우리 사랑 이대로』(1992)
강제규:『은행나무 침대』(1996), 『쉬리』(1999)
강철수:『발바리의 추억』(1990)
곽경택:『억수탕』(1997)
곽재용:『비 오는 날 수채화』(1990)
곽정환:『무서운 새』(1994)
곽지균:『젊은 날의 초상』(1991)
김 욱:『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1992)
김기덕:『악어』(1996)
김기영:『복카치오 92』(1992)
김상진:『주유소 습격사건』(1999)
김성수:『태양은 없다』(1999)
김성홍:『손톱』(1994)
김영빈:『김의 전쟁』(1992),『테러리스트』(1995),『링』(1999)
김용태:『미지왕』(1996)
김유진:『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
김응수:『시간은 오래 지속된다』(1996)
김의석:『결혼이야기』(1992)
김인수:『나는 너를 천사라 부른다』(1992)
김지운:『조용한가족』(1998)
김진해:『49일의 남자』(1994)
김태균:『박봉곤 가출사건』(1996)
김호선:『미친 사랑의 노래』(1991) ,『사의 찬미』(1991)
김홍준:『장미빛 인생』(1995)
남만원:『밀크 초콜릿』(1991)
류숙현:『어른들은 청어를 굽는다』(1996)
문승욱:『이방인』(1998)
민병천:『유령』(1999)
민병훈:『벌이 날다』(1999)
박기형:『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박광수:『그들도 우리처럼』(1990)
박광춘:『퇴마록』(1998)
박기용:『모텔 선인장』(1997)
박기형:『여고괴담』(1998)
박대영:『연풍연가』(1999)
박성배:『해적』(1994)
박종원:『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영원한 제국』(1995)
박찬욱:『달은 해가 꾸는 꿈』(1992)
박철수:『물위를 걷는 여자』(1990), 『오세암』(1990), 『301․302』(1995)
배경윤:『눈감으면 보이는 세상』(1996)
배용균:『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배창호:『꿈』(1990)
백일성:『한 줌의 시간 속에서』(1993)
변영주:『낮은 목소리』(1995)
서윤모:『라이 따이한』(1994)
선우완:『피와 불』(1991)
송능한:『넘버 3』(1997)
송능한:『넘버3』(1997)
신상옥:『마유미』(1990)
신승수:『수탉』(1990)
안재석:『비처럼 음악처럼』(1992)
안재석:『회색도시2』(1990)
양윤호:『유리』(1996)
여균동:『세상 밖으로』(1994)
오병철:『숲 속의 방』(1992)
오석근:『백한번째 프로포즈』(1993)
오일환:『너희들이 재즈를 믿느냐』(1996)
오중일:『블루씨걸』(1994)
원정수:『잃어버린 너』(1991)
유상욱:『절대사랑』(1994)
유현목:『엄마와 별과 말미잘』(1995)
윤삼육:『살어리랏다』(1993)
윤석태:『러브 러브』(1991)
윤인호:『바리케이트』(1997)
이 은:『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이 만: 『뻘』(1991)
이경영:『귀천도』(1996)
이광모:『아름다운 시절』(1998)
이광훈:『닥터 봉』(1995),『자귀모』(1999)
이규형:『공룡선생』(1992)
이두용:『청송으로 가는 길』(1990)
이명세:『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첫 사랑』(1993), 『남자는 괴로워』(1995)
이서군:『러브 러브』(1997)
이성수:『어린 여인』(1994)
이영재:『내마음의 풍금』(1999)
이장호:『명자 아끼꼬 쏘냐』(1992)
이재용:『정사』(1998)
이정국:『부활의 노래』(1991), 『두 여자 이야기』(1994)
이정향:『미술관 옆 동물원』(1998)
이진석:『체인지』(1996)
이창동:『초록물고기』(1997)
이현승:『그대 안의 블루』(1992),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
임권택:『장군의 아들』(1990), 『개벽』(1991),『서편제』(1993),『태백산맥』(1994)
임상수:『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임순례:『세친구』(1996),
임종재:『그들만의 세상』(1996)
장 진:『기막힌 사내들』(1998)
장길수:『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은마는 돌아오지 않는다』(1991)
장선우:『우묵배비의 사랑』(1993), 『화엄경』(1993), 『한국영화 씻김』(1995)
장윤현:『접속』(1997)
장윤현:『접속』(1997)
장현수:『걸어서 하늘까지』(1992), 『게임의 법칙』(1994)
전수일:『내안에 부는 바람』(1997)
정병각:『코르셋』(1996)
정재우:『해피엔드』(1999)
정지영:『남부군』(1990),『하얀 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정진우:『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5)
최청운:『새벽 외출』(1990)
하명중:『혼자 도는 바람개비』(1991)
한지승:『고스트 맘마』(1996)
허준호:『8월의 크리스마스』(1998)
홍기선:『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
홍두완:『세상 끝의 향기』(1992)
홍상수:『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황규덕:『꼴지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1990)

90년대 한국영화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감독들의 특징은 ①연령층이 3, 40대로 젊어졌다는 점, ②연출 성향이 뚜렷하다는 점, ③다양한 소재를 영화화한다는 점, ④흥행에 성공한다는 점, ⑤영화의 고정관념을 깨트린다는 점, ⑥섹스와 폭력을 과감하게 영화 속에서 표현한다는 점, ⑦이데올로기 문제에 나름대로 자기 주장이 실린다는 점, ⑧할리우드 기법을 영화에 과감하게 도입한다는 점, ⑨윤리에 배치되는 사랑도 영화 속에 과감하게 묘사한다는 점, ⑩노출의 정도가 과거와 다르다는 점, ⑪상업영화임을 과감하게 내세운다는 점, ⑫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 ⑬과거 이야기를 현실에 맞게 포장한다는 점, ⑭미학적으로나 수사학 상 새로운 주의를 영화에 도입한다는 점, ⑮탈옥수, 빨치산, 노동운동가, 민중항쟁 지도자, 파계승 등 소재의 범위가 확대된 점, ⑯제작비 중 광고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점, ⑰비디오 판권을 제작비의 기본 고려 사항으로 생각하는 점, ⑱갱들이 미화되는 점, ⑲영화가 문화 현상을 주도하는 점, ⑳마케팅의 과학화를 시도하는 점, 21관객의 심리 읽기와 관람관객 대상 층을 정한다는 점 등을 기본적으로 꼽을 수 있으나 기성감독들의 전략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난다고는 할 수가 없다. 단지 영화형식과 영화미학에 있어서 또한 영화언어의 구사에 있어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단지 영화형식과 영화미학에 있어서 또한 영화언어의 구사에 있어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전문 영역의 참여분야가 혼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감독이 연기를 하고, 촬영기사가 영화감독을 하고, 영화평론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배우가 영화감독을 하고, 시인이 영화 평을 쓰는 등 전문 영역의 해체가 일정한 수준까지 이르고 있다.

4. 기억되어야할 년도별 주요 작품 스케치

1) 1990년/『장군의 아들』의 흥행기록 갱신과 『남부군』의 서울 입성

90년을 연 한국영화는 제작편수의 증가와 수준작 들의 등장은 90년대가 희망을 줄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을 심어 주었다.
90년은『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감독), 『청송으로 가는 길』(이두용 감독), 『우묵배미의 사랑』(장선우 감독), 『남부군』(정지영 감독), 『장군의 아들』(임권택 감독), 『마유미』(신상옥 감독), 『미친 사랑의 노래』(김호선 감독), 『물위를 걷는 여자』(박철수 감독),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김유진 감독),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 곽지균의 『젊은 날의 초상』, 이두용의 『청송으로 가는 길』이 비교적 우수작으로 꼽힌다.
『장군의 아들』이 77년 『겨울여자』의 59만 흥행기록을 14만에 깨고 68만으로 흥행 톱을 하고 제리 주커 감독의 『사랑과 영혼』이 외화 흥행 톱을 차지한 90년은 박광수의 두 번째 작품으로 한 지식인의 고뇌와 행보를 그린『그들도 우리처럼』이 제12회 낭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대상 및 여배우 심혜진이 연 기상을 수상한 해이다.
『장군의 아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남부군』이 서울 하나의 개봉관에서 30만 명을 넘은 것은 빅 히트였고 신인감독들은 여전히 영화계의 희망이었다.
몇몇 작품이기는 해도 흥행의 호조는 영화창작 의욕을 심어주었지만 비디오 시장을 겨냥한 제작경향은 여전하였고 외화 직배 투쟁은 작품외적인 영화계의 내분으로 이어져 불안한 징조를 보인 해였다.
90년도 한국 극영화는 「공윤」의 심의필 기준으로 111편이 제작되어서 89년의 110편에 비해 유사하지만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액션․사극영화가 사라진 가운데 선정적 성애물과 저급하게 급조된 영화들과 멜로드라마들이 기획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10편의 수작과 저급한 20여편을 제외한 나마지영화들은 영화제작 의도를 읽을 수 없는 것들이다.
대작들을 살펴보면 기록적 사실을 영화화한『마유미』와 『남부군』을 들 수 있는데,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과 이태의 빨치산 수기를 토대로한 것이고, 『장군의 아들』은 김두한의 젊은 날의 행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장선우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은 소시민들의 산업화, 도시화의 과정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고,『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작법이라는 점, 『미친 사랑의 노래』는 사랑의 부조리를 탐미적 영상에 담은 멜로드라마, 교도소에서 임종하는 전과 27범 노인의 인생역정을 그린『청송으로 가는 길』,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여성을 옹호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상대편 남자의 혀를 깨문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고,『물위를 걷는 여자』는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 배창호 감독의 『꿈』은 탐미적 영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하명중 감독의 『혼자 도는 바람개비』는 소년가장의 현실극복의지를 그리고 있으나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2) 1991년/『개벽』의 자존과 『사의 찬미』의 꼴라쥬

종합촬영소가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에 40만2백40평 부지에 기공(4월 17일)된 91년은 소재면 에서 다양성을 보여준 한 해로서 동학을 다룬 임권택의 『개벽』, 신여성 윤심덕의 사랑을 그린 김호선의 『사의 찬미』,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선우완의 『피와 불』, 통일 문제에 관심을 둔 박광수의 『베를린 리포트』가 눈길을 끌었고, 이명세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등장, 코믹 에로물이 양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천국의 계단』,『잃어버린 너』등의 서정성을 뛴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했으며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은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의 최첨단을 보여주었다.
장길수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와 『개벽』이 국내에서 부각된 가운데 제15회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이혜숙)과 장길수의 각본 상을 수상했고, ‘91년 한국영화 흥행 톱은 3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장군의 아들 2』가 차지했고 우리나라 흥행사상 최다 기록의 『사랑과 영혼』은 ’90연분 56만 명을 제외하고도 112만 명을 동원해 직배영화의 위력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사의 찬미』(17만6천명),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6만3천명),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15만1천명),『아그네스를 위하여』(12만6천명)등 해외 로케이션영화가 관객동원에 비교적 성공했다.
91년 우리나라는 미국(132편), 홍콩(65편), 프랑스(20편)등 15개국에서 265편(총수입가 2천6백96만 달러)의 외화를 수입했고 일본․홍콩․대만 남미 등지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등 15편이 47만2천8백달러 어치의 수출을 했다.
가장 많이 제작된 장르는 멜로드라마로서 『테레사의 연인』 등 70여편으로 이 가운데 성애영화 20편이 포함되어 있다.『영구와 황금박쥐』등 아동영화 14편, 사회 물로 분류할 수 있는 『서울 에비타』『뻘』등 13편, 『장군의 아들2』를 비롯한 8편의 액션 드라마,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등 종교영화 4편, 사극 『개벽』,『에이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및 전쟁물 『은마는 오지 않는다』,『푸른 옷소매』 등 각 2편이다.
91년도 한국영화의 대표적 특징은 소재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이다. 에이즈 문제, 반미, 전쟁의 상흔, 정치 음모, 정치군인들의 야망과 알력, 운동권 학생의 수난과 사랑등을 작품들이 다루어 졌고, 해외 로케이션영화의 다변화가 눈에 띈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스웨덴, 태국, 소련등 다양하다.
독립프로덕션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원작만화를 영화화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 졌다.
또한 조잡성이 두드러진 아동영화나 청소년을 재대로 그리지 못한 영화들이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점이다.
새로운 소재로 도전한 김현명 감독의 『서울의 눈물』, 록 오페라 『에비타』의 주인공 이경애의 실화를 필름에 옮긴 박철수 감독의 『서울 에비타』도 관객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91년에 이르러 임권택, 김호선, 박철수 등 60~70년대에 데뷔한 중진감독들과 배창호, 장길수, 강우석, 박광수, 유영진 등 80년대 이후 데뷔한 감독들과의 선의의 경쟁은 고무적이다.

3) 1992년/전쟁과 고통의 세레나데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가 92년 흥행 톱으로 한국영화흥행사 3위에 랭크된 관객숫자는 526,052명. 코믹에로물이 범람을 알린 이 영화에 이어 강우석의 『미스터 맘마』(22만7천명)가 흥행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대 안의 블루』,『걸어서 하늘까지』,『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 정지영의 『하얀 전쟁』, 임권택의『장군의 아들2』, 김영빈의 『김의 전쟁』이 우선 떠오르는 한 해였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조재현,『장군의 아들3』의 오연수는 연기자의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제12회 영평상에서 『경마장 가는 길』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해는 제5회 동경국제영화제에서 『하얀 전쟁』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해로서 의의가 깊고 『결혼이야기』가 5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데 비해 『원초적 본능』이 97만 명을 동원해 직배영화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확신을 주었다.
96편의 극영화가 제작된 92년에도『소녀경』등 성인용 영화들이 20여 편이나 들어있다.
92년 한국영화는 직배영화 때문에 고군분투하였다. 외화에 도전한 『하얀 전쟁』(17만6천),『명자 아끼꼬 쏘냐』,『김의 전쟁』은 참패했다.
직배영화는 배급편수(318편)의 증가와 개봉 극장 점유율을 높여갔다. 한국영화가 10만 이상을 기록한 작품은 8편이었다. 기획력이 뛰어난 『결혼이야기』와『미스터 맘마』는 젊은층의 감각과 취향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안성기, 문성근, 최민수, 최진실, 이경영, 심혜진 등의 고정연기자 외에 오연수, 조재현, 김혜리, 염정아 등의 배우가 스크린에 합세했다.
정지영 감독은『하얀 전쟁』으로 제5회 동경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그리고 박종원 감독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제작자상과 하와이 국제영화제 동서문화상(작품상)을 각각 차지했다.
92년 우리 극영화의 특징은 소재의 다양성,10억 이상을 투자한 대작에의 도전, 설태호『에미의 들』, 문여송『비황』, 이혁수『검은 모자』, 정인엽『성애의 침묵』, 박호태『소녀경』, 남기남『머저리와 도둑놈』등 중견감독의 부진과 신인 감독의 두각, 코미디물 증가, 기획력 향상, 신인 감독들 대부분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들고 데뷔작을 들고 나온 것 등이다.
이정국은『부활의 노래』로, 홍기선은『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로 충무로 시스템에 흡수되었다.
제28회 이태리 페사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주간>을 설정,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등 30여편을 소개했고, 불가리아의 <한국영화 주간> 에 이어 프랑스의 아미엥 국제영화제가 <안성기 영화주간>(11월12일)을 개최했고, 임권택 감독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기사훈장을 받은 한해였다.

4) 1993/판소리 가락에 취해 禪의 경지로 간 한 해

극영화63편, 만화영화 1편 도합 64편이 제작되었지만 93년은 1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3편 『그 남자 그 여자』,『그대 안의 블루』,『가슴 달린 남자』뿐이다. 또한 진지한 영화보다는 코믹 터치 영화들이 흥행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 영화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었다. 임권택의 『서편제』, 박광수의 『그 섬에 가고 싶다』, 강우석의 『투캅스』, 김유진의 『참견은 노, 사랑은 오 예』, 장선우의 『화엄경』, 이정국의 『부활의 노래』, 백일성의 『한 줌의 시간 속에서』, 이명세의 『첫사랑』이 기억되는 한 해였다. 이 중 판소리꾼의 애환을 다룬 『서편제』가 104만의 관객을 동원해 『클리프 행어』의 112만 명과 근소한 차이를 보여 한국영화도 잘만하면 흥행에 성공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 섬에......』는 이데올로기 문제를 6․25시점으로 잡아놓고 진지한 성찰을 유도하고 있으며, 『투캅스』영화의 사회고발성과 오락적 묘미를 동시에 갖춘 장르영화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으며, 『참견은......』은 진지한 아동영화의 진수를 선보였으며 『화엄경』은 그윽한 영상 미와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영화이며, 광주 문제를 다룬 『부활의 노래』는 존재 가치를 부여해 주었고, 『첫사랑』은 영상 미와 판타지를, 『한 줌의 시간 속에서』의 돌연변이적 돌출 그 진지함 등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 이현승의 『그대 안의 블루』는 시각에 호소하는 페미니즘 영화로서 신인감독 이현승의 화려한 데뷔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제32회 대종상영화제에서 『화엄경』은 심사위원특별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제14회 청룡상 시상식에서 『서편제』가 여섯 개 부문 상을 수상했다. 제4회 춘사영화예술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 다섯 개 부문 상을 수상해 온통 『서편제』가 한 해를 장식하는 분위기였다. 제18회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살어리랏다』의 이덕화가 최우수남우상을 수상하고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에서 『서편제』의 임권택이 감독상 오정해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46회 살레르노 국제영화제에서 『한 줌의 시간 속에서』의 백일성이 작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 한 해였다.
해외에서의 한국영화의 진출로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93년 10월부터 94년 2월까지 4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국영화 85편이 시사되는, <‘93 한국영화 회고주간>을 대표적인 성과로 꼽을 수 있다.

5) 1994년/『태백산맥』과 『두 여자 이야기』

무게 있는 작품들 보다 가벼운 기획영화들이 흥행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 해 이었다. 신세대 감각에 맞게 포장된 코미디물이 여전히 흥행에 선두에 서 있다. 94년에 언급될 수 있는 작품들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우연한 여행』,『휘모리』,『두 여자 이야기』,『절대사랑』,『만무방』,『49일의 남자』,『증발』,『세상 밖으로』,『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구미호』,『장미빛 인생』,『게임의 법칙』,『태백산맥』, 『너에게 나를 보낸다』, 『블루시걸』,『해적』,『마누라 죽이기』,『젊은 남자』,『손톱』등이다.
94년도 흥행순위는 ①투캅스(86만) ②너에게 나를 보낸다(38만1천) ③세상 밖으로(25만 3천) ④태백산맥(22만 8천) ⑤블루시걸(20만 3천) ⑥구미호(17만 5천) ⑦그 섬에 가고 싶다(14만 7천) ⑧게임의 법칙(13만 4천) ⑨마누라 죽이기(7만) ⑩ 장미의 나날(6만 8천) 이다.
94년 한국영화의 특징들은 1. 연령층이 3~40대로 젊어 졌다는 점 2. 연출 성향이 뚜렸하다는 점 3. 다양한 소재를 영화화하고 있다는 점 4. 흥행에 성공한다는 점 5. 영화의 고정관념을 깨트린다는 점 6. 섹스와 폭력을 과감하게 영화 속에서 표현한다는 점 7. 이데올로기 문제에 나름대로 자기 극장이 실린다는 점8. 할리우드 영화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한다는 점9. 윤리에 배치되는 사랑도 과감하게 영화 속에 묘사한다는 점 10. 노출의 정도가 과거와 다르다는 점11. 상업영화임을 과감하게 내세운다는 점 12.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 13. 과거 이야기를 현실에 맞게 포장한다는 점 14. 미학적으로나 수사학 상으로 새로운 주의를 영화에 도입한다는 점15. 탈옥수, 빨치산, 노동운동가, 민중항쟁 지도자, 파계승 등 소재의 범위가 확대된 점 16. 제작비중 광고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점 17. 비디오 판권을 제작비의 기본 고려 사항으로 생각하는 점 18. 갱들이 미화되는 점19. 영화가 문화 현상을 주도하는 점 20. 마케팅의 과학화를 시도하는 점 21. 관객의 심리 읽기와 관람관객의 대상 층을 정한다는 점등을 기본적으로 꼽을 수 있다
제32회 대종영화제에서 이정국의 『두 여자 이야기』가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한 여섯 개 부문 상을 수상했다. 제15회 청룡상은 장선우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최우수작품상으로


꼽았고 제14회 영평상 최우수작품상을 선정하지 않았고 『화엄경』에 감독상을 주었다.
신진, 중견, 원로 감독이 활약한 ‘94년은 유현목의 『말미잘』, 임권택의 『태백산맥』, 정지영의 fipresci감독상 수상작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박광수의 『그 섬에 가고 싶다』, 강우석의 『투캅스』, 김홍준의 낭뜨영화제 여우주연상 영화 『장미빛 인생』, 이정국의 『두 여자 이야기』, 여균동의 『세상 밖으로』,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등이 두드러진 94년 작품들이다. 94년도 가장 큰 특징은 30대의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자기들만의 영화언어로 무장한 이들은 한국영화를 변모시키고 있고 영화의 질도 향상되었다.
이 중 94년 영화로써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제 42회 산 세바스찬 영화제에서 국제영화 비평가협회상,『만무방』은 제9회 포트 로더 데일 영화제에서 최우수외국영화상,『장미빛 인생』은 제 16회 낭트 3대륙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최명길)과 94 죠르쥬 샤둘상, 『휘모리』는 제 39회 아˙태영화제에서 음악상과 촬영감독상을 수상했다.
93년 작품으로써 94년에 수상한 작품들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제 8회 프리보그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클럽 연맹 동키호테상을, 제9회 샌디에고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영화제상을, 『서편제』는 제9회 샌디에고 국제영화제에 영화제개인업적상(오정해), 『화엄경』은 제 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했다.

6)1995년도/한국영화 퍼레이드

소재, 내용, 형식, 주제의식, 장르적 측면에서 유형이 다른 영화들이 탄생했다. 박광수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여균등 감독의 『맨』,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김정수 감독의 『리허설』,등이 그런 작품이다. 박종원의 『영원한 제국』

, 변영주의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2』, 이명세의 『남자는 괴로워』, 김성홍의 『손톱』, 강정수의 『리허설』도 눈 여겨 볼만하다. 나름대로의 무게중심을 갖고,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승부수를 띄웠던 95년의 흥행순위는 다음과 같다. 1위는 신인 이광훈의 『닥터봉』(38만 2천명), 2위는 김영빈의『테러리스트』(34만 2천 명), 3위는 강우석의『마누라 죽이기』(30만 명), 4위는 화제작 신인 이민용의 『개 같은 날의 오후』(25만 명), 5위는 정진우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만 명)이다.
독특한 영화가 탄생하였다기보다 영화작가들에 의해 진지한 형식실험이나 ꡐ작가주의 영화ꡑ로의 모색이나 튼실한 영화 가꾸기 작업이 있었다고 보면 좋겠다.
95년 한국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을 찿아보면 여균동의 『맨』은 원래 제목이『포르노맨』이었다. 기존의 영화관을 바꾸는 비윤리적인 영화이다. 성(性) 체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해방 이후 50년사를 비판하고 있다. 난해함도 있고 도발적인 설정과 충격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박광수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새로운 영화’, ‘새로운 작가’의 영화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변영주의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가 해방 이후 최초로 일반극장에서 유료로 상영된 점이다.
95년의 페미니즘영화는 거부감 없이 등장했다. 이 분류에 속하는 영화는 이민용의 데뷔작『개 같은 날의 오후』와 오병철의 두 번째 작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이다.
반면 남성의 일상의 고달픔을 그린 이명세의 『남자는 괴로워』와 김의석의 『총잡이』, 구임서의『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등이 있다.

94년작 『블루시걸』이 촉발시킨 95년도 만화영화는 안현두의 『붉은 매』(대원동화 제작)와 신동헌 총감독의 『돌아온 홍길동』(돌꽃 컴퍼니) 등 2편이다. 심형래의『파워킹』(영구아트무비)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의석의 상업 코미디, 김영빈의 액션, 강정수의 섹스 멜로드라마가 독특한 칼라를 나타냈고, 로맨틱 코미디로는 심은하의 영화 데뷰작 신승수의『아찌 아빠』, 박광우의 『배꼽버스』, 강우석의 『마누라 죽이기』, 진유영의 『도둑과 시인』이 있다.
『내일로 흐르는 강』의 박재호와 『개 같은 날의 오후』의 이민용이 돋보인 95년은『헤어드레서』의 최진수와 『꼬리치는 남자』의 허동우, 구임서의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원성진의 『48+1』, 김상진의 『돈을 갖고 튀어라』,신인 감독으로 흥행 톱을 한 『닥터 봉』의 이광훈과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의 김동빈 감독이 눈에 띈다.
박철수의 『301․302』가 호평을 받는 반면 원로와 중견의 작품들 유현목의 『말미잘』, 이장호의 『천재선언』, 정진우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두용의 『위대한 헌터 G. J』는 실망을 안겨준 작품으로 기록된다.
95년은 배용균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과 박종원의 역사스릴러『영원한 제국』은 제작자의 양식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40대 제작자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짐으로써 30대 감독들이 대거 영입되었고, 김성홍, 강우석, 김의석 감독이 공동으로 설립한 ‘시네마서비스’와 이춘연․유인택이 공동 설립한 ‘시네2000’은 대기업 자본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7) 1996년/ 멋부린 상품들의 본격적 등장

코미디 장르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이장르는 90년대의 관객을 우리영화로 끌어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강우석의 『투캅스2』와 강제규의 『은행나무 침대』가 각각 63만, 45만으로 96년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하더니,『고스트 맘마』와 『깡패수업』이 그 뒤를 이었다.
외화수입 403편에 우리영화 65편이 제작된 96년엔 헌법재판소에 의한 ꡐ영화심의는 위헌ꡑ 판결이 났다. 이런 결정에 한국영화학회는 김용준 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한바 있다.
주류에서 기억될 작품들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꽃잎』, 『학생부군신위』,『축제』,『은행나무 침대』, 『러브스토리』,『나에게 오라』가 있다. 또한 『정글 스토리』(서울관객 6,621명),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흑백』, 임순례의 『세친구』,김기덕의 데뷔작 『악어』도 주목할만한 영화에 해당된다.
1996년 한국영화는 홍상수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심리분석,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의 핸드헬드를 이용한 카메라 기법 등은 전통을 깨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장선우의 5․18 영화 『꽃잎』(관객동원 3위, 서울관객 21만 3,979명)은 소녀를 통해 광주를 기억해 내는 영화이다. 장례식에 얽힌 블랙 코미디 『학생부군신위』는 박철수의 익살이 듬뿍 담긴 영화이다. 또한 『축제』는 임권택의 장례 풍경을 전형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96년도에는 유학파인 김홍준(미국)이 『정글 스토리』로 록 음악의 세계를 그렸고, 김응수(모스크바)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80년대 운동권의 후일담을 그렸고, 김기덕 감독의 『악어』는 참신한 발상이 뛰어나다.
단편 『우중산책』의 임순례의 『세 친구』는 심리묘사와 현실감각에 있어 뛰어난 수작이

다. 후반에는 가벼운 터치의 『고스트 맘마』,ꡐ최고의 상처ꡑ로 기록되는 이민용의 『인샬라』의 실패와 이명세의 『지독한 사랑』, 오일환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임종재의 『그들만의 세상』,『지독한 사랑』은 이명세의 성인멜로물,『인샬라』는 이민용의 멜로드라마이다.『고스트 맘마』는 한지승의 데뷰작이며 한국판 『사랑과 영혼』이다.
중견 이일목의 『카루나』,엄종선의 『환희』도 독창성이 없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태균의 『박봉곤 가출사건』과 정병각의 『코르셋』은 한국에서의 여성의 삶을 코미디 형식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체인지』는 이진석의 데뷔작으로 코미디물이다.
96년 최악의 영화로 지목된 작품은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라는 작품이다. 강우석, 김유진, 박종원, 박철수, 장현수, 정지영,장길수 7명의 감독의 7가지 에피소드는 코미디로 끝난 셈이다. 박헌수의 『진짜 사나이』는 액션코미디의 가능성을 연 작품이다.
장현수의 액션 『본 투 킬』과 박광우의 『투맨』의 과욕은 액션영화의 발전에 헌사한 것이며, 유영진의 『보스』는 관객동원 8위를 차지했다. 김상진의 『깡패수업』은 몇몇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연기자를 기용한 야쿠자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이경영의 데뷔작 SF 무협영화인 『귀천도』, 이정국의 『채널 식스 나인』, 유상욱의 『피아노 맨』도 실험적 독창성은 있지만 미학적 업적을 쌓지 못했다. 또한 만화영화는 이현세 총지휘의 『아마게돈』의 실패와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의 성공은 대조적이다.

8)1997년/『넘버 3』에 『접속』하다

예술영화가 고갈 상태에 있고 중견감독들의 중후한 작품도 드문 가운데 올해 30만 이상(서울기준)의 관객을 모은 작품은 7편이다. 대부분 신인 감독들이 주도한 올해 『접속』의 장윤현, 『넘버 3』의 송능한 등이 두각을 나타냈고, 두편째 작품으로 『비트』의 김성수, 『미스터 콘돔』의 양윤호는 흥행에 성공했다.
흥행 베스트 10의 중견 감독의 작품은 『창, 임권택 감독』,『할렐루야, 신승수 감독』,『나쁜 영화, 장선우 감독』 세편이다. 『아버지, 장길수 감독』, 『블랙잭, 정지영 감독』, 『마리아와 여인숙, 선우 완 감독』, 『불새, 김영빈 감독』, 『홀리데이 인 서울, 김의석 감독』은 흥행에 실패했다.
흥행작품에는 연기자 한석규가 늘 끼어 있다. 『접속』은 20대 여성, 『창』은 남녀노소에 구애 없이, 『비트』는 20대 초반까지가 주관객 층을 형성했다.
『접속』이 선두를 기록하고, 『창』,『비트』,『할렐루야』,『고스트 맘마』,『넘버3』,『 편지』가 30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흥행작중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것은 『비트』와 『체인지』 뿐이다.
97년 한국영화의 총 제작편수는 이황림 감독의 『인연』을 포함하여 총 58편(심의신청 기준)으로 기록된다. 1957년 이후 40년 만에 60편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제2회 부산 국제영화제(10월10일~18일)와 제1회 부천 환타스틱영화제(8월29일~9월5일)가 젊은 관객들의 관심 속에 개최됨으로써 한국이 외화 소비국임이 입증되었다.
일본, 대만, 이란 등 우수한 아시아권 영화들과 비교하여 한국영화의 질적 빈곤을 한탄하면서 그래도 관객 20만이 넘은 영화들이 다른 해보다 많이 생산되었음에 위안을 해야했다.
『비트』, 『접속』, 『창』, 『편지』등 빅 히트한 영화들이 꾸준히 나왔으나 작가 정신과 개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드물었다.10만 명 이상이 든 작품도 『편지』, 『올가미』, 『산

부인과』, 『나쁜 영화 』까지 14편에 이른다. 이 중『초록물고기』와 『나쁜 영화 』를 제

외하면 12편이 흑자를 기록했다.
관객들은 여전히 코미디 장르를 선호하고 있고, 후반 『고스트 맘마』, 『접속』, 『편지』등의 멜로 드라마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가 캐나다 밴쿠버영화제(용호상)와 일본의 도꼬 국제영화제(아시아영화 부문 상)에서 수상했다.
서울관객 5만을 못 넘긴 『인샬라,제일제당』, 『용병이반,SKC』, 『불새, 대우』등 대작에 손해를 본 대기업들은 영화제작에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대기업이 전액 투자하여 성공한 영화의 대표작은 『비트, 삼성』이다.
영화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온 영화사가 박철수 필름이다. 저 예산으로 세계시장의 두터운 문을 지속적으로 노크해온 것이다. 그들은 노하우를 습득했고 자생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10억 미만의 제작비를 생각해내고 전열을 가다듬어 왔던 것이다. 시간과 제작비, 해외 적극홍보를 난국을 헤쳐 나아가는 전략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필수적인 사항이다.
우리영화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가운데 외화는 500여편이 해마다 수입되고 있다. 그 중 직배영화의 편수는 70여편에 가깝지만 그 흥행액수는 우리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97년 한국영화계에는 흥행상품은 예년에 비해 많았고 예술 지향적 작품은 전무한 참혹한 한 해로 기록된다.

9)1998년/ IMF의 그림자 영화계에 드리우다

국제통화기금의 여파가 영화계도 미쳤다. 거품제작비를 줄이고, 제작자들은 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었으며 미국의 문화 패권주의는 영화인들을 결속시켰다.
대표적 불평등 조약인 한․미 행정협정이 존속되고 있는 가운데 한․미 쌍무투자협상은 보는 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였다.
신정부가 출범하고 영화진흥법이 손질되어 개혁의 전기가 이루는 듯 하였으나 실상은 과거의 양태나 유사하다. 99년 4월 발효되고, 발효 1개월 내에 10명의 진흥위원을 구성해야하는 영화진흥법은 등급외 전용관을 포기함으로써 미완의 진흥법이 되어버렸다.
이에 따라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이름이 바뀌고, 이 위원회는 정책수립과 집행에 있어서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보장받는다. 한국 공연진흥협의회가 해체되고 영상물등급 심위원회가 등급심의와 외화수입추천을 맡게되었다.
등급심의는 현재 4등급에서 3등급으로 줄고, 모든연령관람가, 12세관람가, 18세관람가로 되었다.영화업은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꾸고 영화배급업의 중요성이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선두로 전개된 98년 우리영화는 『닥터 K』에 이르기까지 별로 주목할 것이 없다.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은 유난히 각광을 받았다.
98년 최고 영화로 꼽을 수 있는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은 민족수난사를 바른 역사관과 영상미학으로 작가주의적 연출로 역사를 조망하는 노련함을 보여 주었다. 시대의 아픔을 진솔하게 포착해낸 이 작품은 동경영화제에서 동경금상과 기린 상을 획득하였다.

98년과 이전에 제작된 영화라도 98년에 국제영화제 수상한 장․단편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시절』(이광모): 제11회 동경국제영화제 동경금상, 기린 상/제17회 하와이 국제영


화제 골든 메일 상/제39회 데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예술공헌상
『벌이 날다(민병훈): 39회 데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실버 알렉산더상/16회 토리노 국제영화제


대상.비평가상.관객상
『햇빛 자르는 아이』(김진한): 제10회 끌레르 몽페랑 국제영화제 최우수창작상/제 41회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단편부문 은상
『모텔 선인장』(박기용): 제27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국제 비평가연맹특별언급상/제 12회 프리보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꽃잎』(장선우): 제1회 방콕 국제영화제 최우수관객상/98국제사면위원회 영화제 관객인기상
『낮은 목소리 2』(변영주): 제1회 타이완 국제다큐멘타리영화제 다큐멘타리 경쟁부문2위상
『비트』(김성수감독): 제 43회 아. 태 영화제 최우수 음향효과상
『거울』(이공희):‘98 뉴욕 국제독립영화제 최우수 환타지상
임권택:41회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구로사와상(평생공로상)

한․일 문화개방의 시혜자가 된 박철수의 『가족시네마』는 영화 스토리의 우여곡절만큼이나 시련을 많이 받았다. 『성철』의 좌절과 『가족시네마』의 개봉 자체가 불투명해서 심란했던 그의『가족시네마』작업은 재일 교포들의 과거와 오늘의 현실을 잘 전개시키고 있다. 일본에서 올 로케이션 되고, 전체대사를 일본어로 처리하고, 재일 교포가 주축이 되어, 한․일 배우가 공연한 『가족시네마』는 한-일 간의 감정의 벽을 허무는 소중한 작업이다.
해방이후 최저편수를 기록한 올해는 단편 『과대망상』,『햇빛 자르는 아이』,『간과 감자』,『스케이트』를 포함 제작편수는 47편이다.
만화영화 하청 세계3위의 한국 만화영화는 『또또와 유령친구』가 선을 보이는 정도이다. .
영화 진흥공사의 판권 담보 영화 『파란대문』,『까』,『가족시네마』 세편이 개봉되었지만 흥행에 실패하였다. 시작에 불과한 흥행동원결과에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르지만 감독들의 진지한 작품 만들기가 요구된다. 『아름다운 시절』이 18만 명(전국23만)의 관객이 관람한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예술영화에 관심을 두는 관객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98년 영화의 몇 가지 특징

1. 정지영. 김유진. 장길수를 제외하면 거의 신인감독들이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된다. 50대 이상 감독들의 작품을 거의 볼 수 없다.
2. 『정사』,『처녀들의 저녁식사』,『파란대문』등 성에 관한 담론들이 본격적으로 시도되 었고, 특히 이런 류의 영화들은 영화의 형식미와 이론으로 무장되어있다.
3. 작년의 『편지』처럼 『8월의 크리스마스』,『키스할까요』.『약속』,『해가 서쪽에서 뜬 다면』,『미술관옆 동물원』.『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등 순수멜로드라마가 인기를 끌었 고, 『남자의 향기』.『태양은 없다』 등은 멜로․액션을 혼합 영화적 묘미를 보여주었다.
4. 『이방인』.『가족시네마』.『투 타이어드 투 다이』,『간과 감자』의 올 로케,『아메리칸 드래건』,『물위의 하룻밤』처럼 배우와 감독, 합작영화들이 다소 눈에 띄었다.
5.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여고괴담』,『세븐틴』,『짱』등 하이틴 영화가 선을 보였다.
6. 코믹잔혹극 『조용한 가족』,『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찜』, 『엑스트라』, 『기막

힌 사내들』등 대부분의 영화들이 개성 있는 소재들로 소재의 영역을 넓혔다.
7.『용가리』,『퇴마록』과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SF영화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8.『실낙원』,『가족시네마』처럼 원작료를 일본에 지급하는 경우가 생겼다.
9.『처녀들의 저녁식사』나 『파란대문』마저도 검열상 특별히 하자가 될작픔이 아니었다.
10. 『8월의 크리스마스』등 대부분 영화들이 거품제작비를 줄여 제작되었다.
11. 『닥터 K』와 같은 미스터리 휴먼 의학드라마로 장르를 넓혔다.
12. 『햇빛 자르는 아이』,『스케이트』와 같은 단편․독립영화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13.『아름다운 시절』과 『강원도의 힘』을 제외하고 이념이나 심오한 주제들을 다룬 영화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소재의 영화나 폭넓은 장르의 영화가 생산된 한해였고, 제작편수는 적었지만 국제영화제의 수상에서 알 수 있듯 알찬 한해였다. 새로운 시도,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 작가적 예술성을 간직한 작가영화 등 다양한 영화들이 선보였다. 멜로드라마의 강세 속에 공포/환타지 영화의 호응과 더불어 기성감독의 부진 속에 신인감독들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통해 우리를 돌볼 수 있게 해준 한해였다.
연령별로 신인감독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50대 이후는 대부분 작품활동을 하지 않음이 입증되었다. 그나마 박철수, 정지영, 김유진 감독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음이 포착된다. 현재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감독들 대부분은 할리우드 시스템을 흉내내고 있고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상술을 모방하고 있다. 또한 그간의 제작비가 거품을 빼며 제자리잡기 시작했고, 우리도 수출․합작을 통한 제작비 조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타이타닉』(235만),『아마겟돈』(130만3천명)『뮬란』(88만2천명) 3편의 합계 관객수가 460만 명의 위협 속에도 한국영화는 30만 명이 넘는 영화가 8편이나 되었다.
30만 이상 동원기록은 97년 7편, 96년 4편이었다. 흥행 베스트 10편중 6편이 멜로드라마로서 경제가 어려울수록 포근한 멜로드라마에 관객들이 관심을 두는 것 같다. 한국영화의 주 장르는 멜로드라마로서 80%이상을 기록해오고 있다. 이의 이면에는 단일 극장 개봉에서 20개가 넘는 다극장 개봉으로 배급체계가 바뀐 것도 관객 수를 모으는 요인이 되었다. 흥행작 10편중 6편이 신인 감독의 작품이다.

서울개봉관 기준으로 한국영화 흥행 10위

1. 편지(82만) 2. 여고괴담(75만) 3. 약속(59만, 99년 분포함 72만. 전국 180만) 4. 퇴마록 (43만) 5. 8월의 크리스마스(42만) 6. 조용한 가족(37만) 7.정사(34만) 8. 처녀들의 저녁식사(30만) 9. 찜(20만) 10. 남자의 향기 (17만)

98년 역사적 사건은 10월 20일 문화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4대 영화제(깐느,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수상작과 한․일 합작영화의 수입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1월 28일 합작영화 ’가족시네마‘가 개봉되었고, 12월 5일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가 개봉되었다. 이어 12일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케무사』가 개봉되었으나 관객동원에는 실패했다.
스크린 퀴터제 유지나 축소냐 폐지냐의 논쟁과 농성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측의 집요한 한국시장 싹쓸이 전략은 계속되고있고, 극장 주들의 향방 또한 변수로 남아있다. 대기업도 현대가 영상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였고, 삼성과 대우도 철수작업중이다.
‘98년을 넘어 ’99년을 겨냥해 제작중인 영화는 약 20여 편이 있다. 우리영화의무상영일수의 행방에 따라 제작열기는 좌우될 것이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이 16세 이상 1022명의 한국여성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는 여성이 우리영화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페미니즘 반영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이 시상식은 독특한 흥미를 끈다. 그들이 뽑은 최우수 감독은 『아름다운 시절』의 이광모 감독이다. 최고 남우는 한석규, 최고여우는 추상미가 선정되었다.
최고의 한국영화에는 1위 『8월의 크리스마스』, 2위 『처녀들의 저녁식사』, 3위 『여고괴

담』, 4위 『약속』, 5위 『정사』 그리고 최악의 한국영화로 1위 『투캅스3』 2위 『처녀들의 저녁식사』, 3위 『편지』, 4위 『남자의 향기』, 5위 『세븐틴』이 결정되었다.
예술. 실험영화 심사위원회가 선정하는 제1회 예술․실험영화로는 박철수 감독의 『가족시네마』와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 뽑혔다. 이들 작품은 거센 상업영화의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작가 영화를 고수한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결과로 해석된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영화제, 광주비엔날레영화제, 서울가족영화제, 서울영화제, 아시아아트필림영화제, 누벨바그영화제, 인권영화제, 퀴어영화제, 영성영화제, 독립영화제, 춘천만화영화제, 노동영화제 등 영화제가 우후죽순으로 태어난 듯한 한 해 이었다.
98년의 영화는 『찜』,『까』,『짱』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이고 경박한 제목처럼 영화적으로 숙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술이 된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많은 실험 영화와 첨단 테크놀로지가 돋보이는 영화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기에 희망을 걸 수 있다.
98년 영화들을 통해 아쉽게 느낀 점은 별 것 아닌 법들을 가지고 호사가들이 안주 삼아 몇 년 동안 떠벌리고 있다는 점이다. 구조조정의 무풍지대인 국립영상원은 엄청난 장비를 도입하여, 비싼 기재를 쓸만한 기술인력과 교육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외화를 낭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문민 정부의 시혜로 설치되었는데도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대학원 과정까지 설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인재들이 그 동안 만든 작품의 수준과 취업의 결과는 기존 연극 영화과와 무엇이 다른가를 설명 할 수 있는가? 영화진흥공사 부설 영화아카데미와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 영상벤처센터가 문을 열었고, 많은 돈이 투자되었다. 영화제를 위한 아이디어들이 도출되었고, 오즈와 같은 고전 영화전용관 및 소수의 관객취향에 맞는 극장의 개관과 단성사, 중앙, CGV강변11과 같은 시네마 콤플렉스가 선을 보였으며 대한극장도 복합영화관으로 바뀔 전망이다. 멀티플렉스는 계속 생겨날 것이지만 직배영화의 도구로 전용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98년 의무상영일수를 채우지 못한 극장이 많다. 행정처분을 받아야 되겠지만 단편 독립영화에 그들이 관심을 둔다면 멋있고 뜻 있는 사업이 될 것이다.
98년은 97년부터 국제적으로 본격 알려지기 시작한 가장 다양한 영화적 실험에 몰두한 김기영 감독과 투철한 영화촬영 정신을 소지했던 유영길 감독의 타계에 아쉬움을 표해야했다.
98년을 관통하여 99년, 21세기를 대비해 국민의 정부는 무엇을 해야하고 문민정부와 차이점을 부각시킬 수 잇는 영화 정책은 무엇인가? 어느 특정집단의 의견만이 전체의 의견은 아닐 것이다. 전체를 어우를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를 제시해야한다. 우리영화 예술인은 눈치보지 않고 국익을 위해 자기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이 시점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것이다.

10)1999년/붓가는 대로 한국영화 대박을 쏘다


『쉬리』의 대박으로 99년은 1월1일 『태양은 없다』부터 12월 24일 개봉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벌이 날다』까지 42 편이 개봉되어, 98년 47편 보다 5편이나 적었다.
98년 영화관람객 총수 5017만 명중에서 한국영화관람객은 1258만 명으로 25.1%의 점유율을 보였는데,99년은 총 5,472만 명 관람객중 한국영화관람객이 2,172만 명으로 39.7%의 점유율을 보였다. 그러나 91년부터 98년까지 외국6개 직배사가 총 477편의 외화를 들여와 3600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본국으로 송환한 돈은 로열티 명목으로 1700억원에 이른다. 99년 외국영화는 60.6 %의 점유율을 보이며 1,734억의 수익을 올렸다.
99년 세계각국의 영화제작편수를 보면 인도 800여편, 미국 570여편, 일본 280여편, 프랑스 160여 편, 한국이 50여 편(98년 극영화 43편) 전후이다.
99년은 외부로부터 스크린쿼터 폐지 압박과 영화진흥위원회구성과 등급보류 판정시비와 같은 내부의 진통이 있었다. 프랑스가 27.4%,일본영화가 30.2%의 자국영화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한국영화는 시장 점유율은 40%를 바라보게 되었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액션 스릴러 『쉬리』를 빼면 결과는 어떨까? 그런 가운데서도 『쉬리,강제규,2백 44만』,『주유소 습격사건, 김상진 감독,95만』,『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76만』,『텔미 썸 딩,장윤현,71만』은 서울 관객 70만 이상을 모았다.『태양은 없다, 김성수』,『링,김영빈』,『유령,민병천』,『자귀모,이광훈,40만』,『해피엔드,정지우』도 30만 명을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이중 『쉬리』는 상영 119일째인 6월 11일 終映때 까지 15세 이상 서울 사람 중 30%가 관람했고, 전국 578만 명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타이타닉』의 470만 기록을 깬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국내 최고 흥행실적을 기록했던 『서편제,110만』의 기록도 깬 것이다. 관객극장 수입만 3백 56억이며 홍콩, 대만, 일본 등 해외판매(1백 61만 달러, 약 20억)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쉬리』는 올해 10만 6천장의 비디오 판매 수익도 올렸다. 31억의 제작비가 든 이 영화는 한국 영화흥행기록을 연일 바꾸며 엄청난 화제를 만들어 냈다.
98년 상위권에 올랐던 영화의 평균 관객 수는 42만 명이고 99년 65만 명에 가까이 되었다. 외국영화는 『미이라』가 1백 21만 명으로 1위 2위 『매트릭스,91만 7천명』,3위『식스센스,91만 7천명』을 동원했고,『스타워즈 에피소드1』,『타잔』,『러브레터』,『셰익스피어 인 러브』,『스크림』,『와일드 와일드 웨스트』가 그 뒤를 이었다.
금년 우리영화는 15개국 이상에 60여 개의 필름이 6백만 불을 넘는 판매수익을 올렸다. 97년까지 우리영화수출은 20만 불에서 40만 불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그러나 98년에는 3백7만 불의 수입을 올렸다.『용가리』가 4백만 불에 사전 판매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거짓말』은 독일 배급사에 30만 불에 판매되고, 10여개국 이상에 판매될 전망이었다.
베니스영화제에는 장편 『거짓말,장선우』, 단편 『냉장고,안영석』와 『베이비,임필성』이 초청되었고,23회 몬트리올영화제에 『만날 때까지,조문진』가 출품되었고,밴쿠버영화제에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비롯한 12개의 장․단편이 초청되었다.
이제 한석규,심은하,전도연,이정재,박신양,최민식은 흥행스타로 부각되어 있고 이들에 대한 출연교섭도 당분간 증가할 추세였다.
영화 속에 용게리 밖에 안나오는 『용가리, 심형래 감독,40만』는 엄청난 홍보와 사전 띄우기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코미디로 끝나고 말았다.
억대 개런티에다 100만 관객 시대에 언론은 연일 한국영화의 미래에 해바라기 예찬론을 펼치기에 바쁘다. 지금의 영화담당기자들이 당장 5년후의 영화기자로 남아 있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의 거품예찬론을 마냥 수긍할 수는 없다.

이미 우리 영화에서 36, 6․25, 4․3, 4․19, 5․16, 10․26, 5․18같은 수치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한국영화 관객점유율 40% 육박의 신화는 『타이타닉』의 질풍노도를 누르고 38세의 강제규를 황제(帝圭)로 만든 『쉬리』의 흥행성공에 기인한 요인이 가장 크다. 특히 안정된 배급망 확보로 우리영화도 장르확대와 할리우드식 재미있는 요소만 듬뿍 가미하면 흥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켜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것은 단 한번의 관객몰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결코 아니며 스크린 쿼터 폐지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올해 미국영화는 우리 관객의 기본정서와 부합되는 작품 등이 많지 않았고 홍콩영화나 유럽영화가 점유하던 5~8%의 시장도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영화는 상대적으로 시장점유율이 높아졌다. 일본영화개방 1차작 『하나비』,『카게무샤』,『우나기』에 이어 기타 70여 개 영화제에서 수상한 일본영화들로 범위를 넓힌 2차 개봉 이후 개봉된 『러브레터』는 60만이 넘는 관객 몰이를 했고,『링』,『소나티네』,『자살관관광버스』,『감각의 제국』,『사무라이 픽션』,『철도원』등을 비롯한 극영화와 『건드레스』등 만화영화들이 당분간 미국영화 시장의 상당부분을 잠식해 버릴 것이다. 일본영화의 잠재력은 우스운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영화도 일본이란 대 시장을 개척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99년 거센 스크린쿼터 투쟁의 바람 속에 잠자던 미국․홍콩․일본 영화는 한국 침공을 위한 시나리오와 작전 개시 체계가 이미 다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과연 급조된 우리의 조직들에게 다시 투쟁이 동반된 동원령이 내려진다면 이전처럼 뜨거운 동지애를 발휘할 수 있을까 겸허하게 생각해볼 때다.
사리사욕이 없을 때 지휘에 힘이 실리고 동지들은 인텔리겐차의 이념을 존중해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크린 쿼터 투쟁 대열에 나섰다. 그리고 투쟁에 선봉에 섰던 독립군들은 모두 감투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몇 사람은 진흥위원회로 가고, 그 나머지 독립군은 또 하나의 세력을 조직했다. 문제는 이러한 단체가 정치적 색깔을 띄고 있다는 점이며 이 힘을 진정한 영화를 만드는데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화자찬에 해당되는ꡐ스크린 쿼터 투쟁의 결과 한국관객이 이만큼 성장했다ꡑ고 하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옛날 같으면 일하고 생색내는 일이나 감투쓰는 것이 집안 남세스럽다고 난리를 칠텐데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리고 투쟁 한번 하지 않고 감투를 쓰는 족속은 무엇이며, 양다리 걸치고 운동한다는 친구들은 무엇인가? 실망스런 것은 꿈은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을 버리지 않고 반성하는 지식인등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현상에만 집착해 있고 과거에 대한 정리와 반성,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와 대안이 없이는 그 숱한 정책 좌담회나 공청회, 세미나가 공무원들의 면책을 도와주는 데 일조할 뿐이다. 왜 우리는 방안의 공기만을 얘기하는가 창밖의 풍경과 풍광, 푸르른 빛은 거론하지 않는가?
소리 없이 내리는 90년대의 폭압에 대해서는 화두조차 던지지 않는 것일까? 우리에게 지금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덕목은 시대적 감성을 담은 영화찿기와 사람의 향기를 찿아가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겐 어쩜 반성은 없고 자기 주장관철과 일그러진 거울을 드려다 보는 수동적 자세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의 영화 평론이나 영화학도 재빨리 기존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하며, 우리의 토착 연구 풍토가 새로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ꡐ진리가 있다ꡑ.ꡐ진리란 없다ꡑ에서 모던이즘과 포스트 모던이즘이 공방을 벌였는데 지금은 어쩔 것인가? 그 주창자들은 고인이건 아니건

나름대로 주장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학문을 스쳐 가면 되는 것이다. 영화를 가르치는 선생은 절대라는 틀에 담아 열강이 식민을 만들듯 교육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이념이 퇴색되어가고 있고 새로운 학문이 우리를 현혹시키지만 결론은 언제나 자신에게 와 있을 뿐이다. 그것의 깨달음은 결국 무위가 될 것이다. 노․장 사상과 불가의 화엄사상은 도도하게 우리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경박한 조소도 아니고 야유도 아니다. 그저 깨달음의 세계가 깊다는 것만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유교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비판하고 반기를 드는 것처럼 영화에 대해 알지 못하고 표피만을 연구하고 선배나 후배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비판하거나 칭송하는 태도도 문제가 될

것이다. 참다운 역사의 개안을 위한 반역의 역사는 아름답다. 부질없는 속세의 번뇌는 물욕에서 온다. 깨우침은 어디에서 오는가? 물욕과 대가를 위한 반역은 추하기 그지없는 배반이며 오물보다 가치 없는 미물들의 추행이다.
우리영화가 70만 이상 관객몰이 한 것들 중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제외하고, 영화미학으로나 작품성, 영화철학이 들어있는 영화는 거의 없다. 흥행에 성공한 또 다른 요인들은 거의 억지와 광란, 상업성에 혈안이 되어있는 작품들로 특이한 영화적 발상이라고 다수 평론가들이 이에 적극적․묵시적으로 동조했고, 관객들은 이에 따랐을 뿐이고 상대적으로 재미있는 외국영화나 우리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게 보면 한국영화를 부흥시킬 호기는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관객이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났고, 국민의 정부가 2000년부터 3년 간 임기 중 1500억이라는 진흥기금을 영화제작자들에게 약속한 이 상황은 나쁠 것이 없다. 다만 官주도로 이루어진 영화판권담보 융자금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철저하게 관객에게 외면당한 전례에 비추어 거품 제작비로 이익을 챙기려는 검은 손들의 활약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자생적 영화 발전은 찬성하지만 무엇을 내걸고 해온 대다수 대규모 사업이라는 것이 별로 성공을 거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삭발까지 하며 한국영화 지키기 운동을 해왔던 터에 쉬리 망령이 만들어낸 자국영화 시장점유율 40%는 달성되고 이제 무슨 논리로 세계경찰국가 미국의 입김을 막아낼꼬!! 강제규가 삭발까지 하면서 지키고자했던 우리 영화는 역설적으로 『쉬리』때문에 망하게 생겼다.
올해의 해프닝 1위는 단연 영화진흥위원회 구성이다. 구성 초부터 김지미, 윤일봉씨가 심사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참여를 거부하더니 임권택 감독이 촬영 때문에 참가가 불가능해졌고, 그 다음에 김지미․윤일봉씨가 합류하더니, 정지영․문성근․안정숙씨가 사퇴하고 퇴직관료 박종국씨를 위원장에 앉히더니 김우광․채윤경씨가 최근에 사퇴의사를 밝히고 있고 임감독 마저 사퇴의사를 밝혀 결국 위원 4명만이 남은 꼴이 되었으니 그 엄청난 영화진흥기금의 행방은 어디로 갈지 위원회 꼴이 꼴이 아니다.
두 번째 해프닝은 『거짓말』에서 나온다. 등급외 전용관 설치가 장관 발표 며칠 뒤 국회에서 부결되어 물 건너 간 것이다. 『거짓말』이 정말 시대정신, 한 사회의 미의식, 미학적 가치와 역사가 배어있다면 몇 번을 벗고 몇 번 성교를 하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거짓말』이 시대적 정신이 담아져 있고 영화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 상업영화 한 편에 온통 영화계 전체가 물세레를 맞고 고민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거짓말』은 수출실적에 관계없이 초등생의 원조 이상의 허무감을 남기는 씁쓸함을 남긴다.
세 번째 해프닝은 정부 당국의 입에 맞지 않는 거짓말이다. 문화관광부의 인사정책과 거짓

말 번복, 외교통상부의 어처구니없는 밀어 부치기 정책이다.
지금 영상자료원에는 99년 8월 31일 기준으로 30년대 영화 2편, 40년대 영화 8편, 50년대영화 49편, 60년대 영화 543편, 70년대 영화 970편, 80년대 영화 752, 90년대 영화 544편 총 2,868편이 보유되어 있다.10년대 7편과 20년대 61편의 필름은 전혀 행방을 찿을 수 없다. 잃어버린 역사의 기록은 찿을 길 없는데 가설에 버금가는 글 쓰기가 횡행하고 있다.
200여 편을 양산 해되었던 60년대 후반보다 90년대 후반은 50여 편 정도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다양한 장르의 수준 높은 영화들이 칼라를 입히고 세밀한 사운드로 우리를 현혹시키지만 영화인들의 열정과 영화 정신사는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나 혼자만 있고 남이 없으면 자폐증이 아닌가? 내 안의 길 찿기는 이미 있는 길을 지우는 것에서 시작한다는데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각인시키려고 애쓰는지는 아닌지 궁금하다.

5.1990년대 한국영화와 비평이 남긴 것

90년대 한국영화는 21세기의 산업적 토대를 이루는 다양한 실험이 이루었던 시기이다. 영화산업의 팽창과 더불어 평단이나 학회의 작업도 활발하게 이루어 졌으나, 언론매체 중 신문매체에서 평론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축소되었고, 방송의 기획․특집 물이나 맞춤 인터뷰로 독특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캠퍼스에 있어야할 선생들은 언론의 변방이나 정치권의 끝자락에 달라붙는 추한 몰골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국 영화 연구의 괄목할 성과는 보이지 않았고, 우리영화사 연구는 뒷전으로 물러나 앉았으며, 평단이나 학회에서 작업이 최고의 논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미국 편중의 논문 쓰기는 일반인이나 영화학도들에게 다양한 사고의 장을 열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 연구는 영화학회가 발족된 29년, 영화평론가협회 발족 36년이 된 이 지음에도 토착 영화연구 방법론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영화평론의 역사는 1925년 이구영 선생의 「조선영화계의 과거․현재․미래」가 조선일보에 11월에 발표된 이래 76년이 되었고, 1950년 9월 10일,오종식, 허백년, 박인환, 이봉래, 오영진, 유두연, 이진섭 등 11명이 주축이 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부산에서 창립되었으나, 이들의 다양한 성격과 직업들로 곧 해산을 맞았다.
50년대 후반인 57년 10월 호현찬, 임영, 신우식, 이명원, 김진찬등이 시네마 클럽을 만들어 ꡐ한국영화비평가협회ꡑ로 명명한 적이 있고, 60년대인 60년 9월, 故 이영일 (대표 간사), 김종원(총무), 김정옥 등이 발의한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5․16으로 자진 해산 형식을 밟는 비운을 맞았다. 따라서 90년대 평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평단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65년 11월 10일 저녁 8시, 을지로 3이, 중국집 「안동루」에서 이영일, 최일수, 변인식, 김종원 등 7인이 모이고, 김정옥, 이진형, 허창 3인이 총회에 전권을 위임 10명이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을 선언했다.
올바른 비평정신 확립과 비평 활성화를 통해 한국 영화 발전에 이바지를 주창한 이 단체는 ꡐ한국영화비평가협회ꡑ후신인 셈이다. 故 최일수, 故 허창, 변인식 등이 가담 새 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든 셈이다. 65년부터 79년까지 이영일 선생이 회장을 맡았고, 80년부터 정일몽 회장이 임기 1년으로 있다가 조관희 전임회장부터 오늘까지 임기가 2년으로 되었다.
발족 당시 10명이던 영평회원은 현재 45명으로 늘었고, 그들 대부분은 언론계․ 학계에 대부분 포진되어 있다. 영평은 오늘까지 영평상 시상식 21회, 연간 협회지 「영화평론」 12권

의 간행, ‘ 한국 영화의 방향타’를 잡는 역할과 영화분석의 전문가 집단으로 우뚝 서 있다.
평론가 정영일 (89),여수중 (90),최일수(95), 김진찬 (99), 안병섭(00), 허창(00), 이영일(00)등 평론가가 타계했고, 학회에서는 실험영화와 미국현대영화 이론을 강의하던 권병순 선생이 고인이 되었다. 이들의 작업은 직․간접적으로 90년대 한국영화 평단에 연관되어져 있다.
90년대의 영화비평이 그 이전의 영화연구 작업들과 확연한 차이를 이룬다고 보기에는 어려우며, 장문의 연구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영상시대』,『영화평론』,『영화연구』등의 협회 지들이 간행되면서 부터이고,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한 번역서 작업, 현대미학사를 비롯한 몇몇 예술서적 전문출판사들이 영화연구의 기틀을 만드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한 80년대부터 작업을 해오고있는 영화전문 월간지 『스크린』등이 대중적 영화정보 제공과 영화감상의 기본적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다. 90년대에는 『공연과 리뷰』,『키노』등이

장문의 영화비평들을 수용하면서 정부가 해내지 못하는 작업들을 해내고 있는 편이다.
90년대는 필자가 한국영화학회의 총무․학술간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출판간사,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의 섭외이사, 독일에 본부를 둔 국제영화비평가연맹의 한국본부 사무국장을 지냈고, 이태리 세인트 빈센트 정기총회 참석과 이태리 황금금배상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국․내외적으로 영화평단을 조망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아쉽게도 한국영화평단을 제단하기에는 아직도 전문화․분업화가 덜 이루어졌기에 구체적으로 영화비평의 성과를 논의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힌다.
영화의 전문영역을 논한다 함은 국가별로 영화전문가 존재와 장르별로 영화전문가, 영화음악, 영화조명과 같은 부문별 전문가, 映畵史家등 존재를 말한다.
영화가 연도별로 세분화되고 작가별 주제별 장르별로 10년 단위로 묶을 만한 시간과 노력등 깊은 호흡으로 작업을 하기에는 이를 격려할 경제적 뒷받침이 부족함도 한 요인이 될 수있다. 사실 영화비평집단의 가시적 성과는 개인들의 단행본, 연감, 세미나와 영화제 등에서의 발표된 연구 성과물과 학위논문들이 될 것이다.
이 기간에 쓰여지고 발표된 논문들이 연구자들의 열정으로 쓰여진 것이라기 보다는 학위나 학술지원비등을 염두에 둔 것들이라서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데는 부족하고, 현실감 실려있지 않은 글들의 대한 성과성의 검토는 서평과 마찬가지로 무리가 따른다.
이런 이유로, 이 項은 개관․학술과 비평 의 큰 줄기․이슈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으며,90년대 비평집단의 성과물로 읽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비평에 영화흐름이 실리는 것이 아니라, 영화흐름에 대한 비평적 모색으로 생각함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영화 역사 82년 동안 90년대 10년의 단편들은 타 시대와 유별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며 새로움을 모색하는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평론가들은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90년대의 영화들을 우회하여 보면서 전체의 흐름을 읽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결국 영화와 비평사이의 불협화음과 조화가 영화비평의 발전의 장이 되어왔고, 갇혀있고 움직이지 않은 글들은 비평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1) 90년대의 영화비평

영화비평에 대한 평론가들과 학자들의 구체적 업적이랄 수 있는 학회지 『영화평론』과『영화연구』는 90년대의 흐름을 비교적 긴 호흡으로 읽을 수 있다.


1965년의 영화평론가협회, 1972년에 발족한 영화학회는 사실 한국영화의 양대 산맥이다. 저널리즘에 강한 영화평론가협회와 학술연구 성격이 강한 영화학회는 1990년대에 해마다 한 권의 협회 지를 간행했는데 90년대 후반에 필자들은 다수의 젊은 필진으로 채워지고 내용도 다채로워졌으며 각 협회의 칼라를 확실하게 나타내었다.
영화평단도 케이블과 위성, 다매체의 소용돌이 속에 기존의 방법과는 다른 엔터테이너 화하는 양상을 띄고 급기야는 기자, 아나운서 및 프리랜서 영화 소개자들이 영화평론의 전부인 것처럼 호도 되고 영화평론가들은 뒷전으로 밀리는 듯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영상 ,사운드, 몽타쥬의 역사를 심도 있게 연구하는 사람들은 영화평론가들이기에 일반대중들이 브라운관에서 보는 영화의 단편적 지식들은 신기루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니, 기호학이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서양이론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영화들을 그것들에 짜깁기하는 어색한 짓거리를 계속해 왔는지도 모른

다.
피자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바보시하고 조롱하는 듯한 경박한 풍토는 아직도 그 도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결국 그것은 우리영화계가 정체성의 혼돈을 일으키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90년대 영화비평의 특징은 난삽한 문장으로 미로를 헤매는 듯한 문체들이 칭송되어지는 분위기도 있고, 외국용어와 이론으로 도배한 어색한 글들의 나열이나 우리영화를 죽이고 비평이 살고자하는 얄팍함 등으로 매체가 채워지는 혼돈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상을 주었다.
타성으로 일관한 한국영화비평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모색이나 스타성 발언에 대한 질책과 같은 문화착시현상에 대한 비평에 대한 혁명적 도전은 불가능해졌고 한국영화의 미학에 대한 탐구와 모색은 원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비평문화의 수용과 변화에서 우리영화의 역사와 미학, 정체성과 산업 등에 대한 사적 퇴적층이 얕은 결과가 지금에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분단예술사의 복원 가능성모색이라든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영화제목이나 이질화된 용어문제등도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영화연구를 논의하고, 아직 관객에 대한 통계가 엉터리인데 쓰여지는 연감을 두고 무엇을 말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통증으로 와 닿는 금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바른 영화 연구방법론을 제시해야한다. 화려한 외국이론에 주눅 들지 말고 토착영화이론이 나올 공간을 마련해야한다.

2) 영화비평의 심도에 관한 단상

예술장르 중 가장 흔하게 많이 쓰여지는 글들은 영화에 관한 글들일 것이다. 모든 애호가들이 가장 쉽게 비판하고 욕하고 칭찬하고 아부하는 장르가 될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글들이 얼마나 전문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평론가들이라면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평론가의 글들은 매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간혹 어떤 독자적 견해에 의해서 글의 방향이 잘못 되어질 때도 있는 것이다. 평론가의 글이 모두 같다면 평론가는 한사람 있으면 될 것이다.
영화연구자들이 저명한 단체에 발표한 글들이 얼마만큼 자기 목소리를 담고 있으며 독창적

인가 하는 문제는 90년대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독창적인 연구들은 오히려 타학문에서 영화 쪽으로 접근하면서 활기를 띄는 모습을 모여주었다. 예를 들면 영상문학회의 활동이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런 작업은 영화연구자들에게 자극을 준 셈이다.
이런 경우는 유럽에서도 그랬고 신 이론이 탄생해서 발효 숙성된 대부분의 경우가 그랬다. 종가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단체들보다도 배양 정제되는 과정에서 그 에너지는 영화와 연계된 외부 학문과의 조우에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시킬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1930년대 영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킨 프랑스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앙리 랑글로아의 경우, 도서관 개념을 도입시켜 체계적으로 영화를 학문으로 접근시킨 경우이다.
이제 영화는 종합예술의 각 영역은 물론 컴퓨터 사진 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영화전공자는 예술 각 장르의 전문적인 지식습득이 필수적이 되어버렸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마케팅, 영화경영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인턴쉽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 동안의 영화연구는 문학성에 너무 친밀도를 나타내었다. 영화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는 그만큼 힘들어 졌으며 많은 연구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잡화점식 영화언급은 저널리즘에 맡겨야하며, 비평가는 그 본래의 영역인 聖職에 버금가는 외로움을 타야되는 계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총체비평이 될 것이다. 각 장르의 비평가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한 작품을 심도 깊게 평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술평론가들의 집단 활동이 활성화되도록 도와주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이다. 장기적 안목에서 영화발전은 좋은 비평가 그룹이 대상작품을 정하고 철저하게 분석 검토하면서 각 장르의 예술이 동시에 발전하는 것이다. 그 보고서는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진보적인 흐름을 주도하며 학파를 탄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건설적 스타디와 토론, 세미나는 필요하지만 변질되고 분질화를 자초하는 집단의 탄생은 한국적 상황에서 위험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3) 90년대 영화비평은 거품인가, 리에종인가?

영화비평은 분석에서 출발하여 정제과정을 거쳐 종합, 피드백 되어야 한다. 분석 자체로 임무를 끝내버린 90년대의 평단은 이전 세대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비평가 전문가 연구가들은 제작자들이나 프로듀서들이 듣건 말건 영화의 바람직한 발전 방안에 대해 설파할 책임이 있다. 그 점에서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결과 오늘의 영화는 독특한 한국전통을 못 세우고 미국아류의 영화를 생산하는 일회용 껌공장으로 바뀌어 있다.
물론, 비평가들의 일차적 임무가 영화 분석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분석이 왜 필요하고 결과물을 어떻게 가져갈지를 따져주어야 한다. 몰아주기식으로, 패거리 형태로 자기중심적평들이 객관성을 획득한 듯 오도되는 상황은 어느 나라나 가능한 일이지만 비평가는 어는 한쪽에 쏠리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객관적 시각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90년대 영화비평은 영화비평의 홀로 서기를 두려워한 측면이 없지 않다. 다중의 힘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쪽이 있었고, 바른 글들은 실릴 곳이 없었다. 또 그렇게 치열하게 평단의 전통을 세우거나 비평가로서 이론가로서 예봉을 세우는 사람들도 찿기 힘들었다.

합종연횡의 패거리 문화가 영화비평 쪽에도 유입된 것이다. 진압군이나 계엄군에 진배없는
세력들이 새로운 질서를 재편한다는 명목으로 50대 이후의 향수 신장권을 박탈하고,40대 후반이후를 노인정감으로 여기도록 고립시켰다.
이런 황당무계한 비평풍토는 사회현상과 절대적 관계가 있음이 타 장르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영화비평계는 어설픈 짝짓기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다양한 비평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얼마만큼 내공을 쌓으며 연마했느냐, 그 성과물검색에 봉착되는 것이다. 90년대의 영화비평은 앞으로 겪게될 서러움의 전주곡이다.
현재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 영화비평의 대상은 아니다. 영화역사를 소설식으로 그려나갈 수는 없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우리 것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는 근거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영화사료들이 얼마나 빈약한지 알 수 있다.
사실 이 글은 나 자신의 주관적인 글임과 동시에 나의 비평 반성문으로도 볼 수 있다. 결국 필자의 글처럼 90년대의 영화비평은 양적으로는 비대해지고 보다 과학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는 했어도 이전과 확연히 차별되어지는 글들은 눈에 많이 띄지 않는다.


6. 終言을 위한 附言

음악에 정통했던 정영일과 같은 선배 영화평론가들도 소리 없이 이슬로 내리고, 충무로에서 武勇談을 얘기하던 여러 선배들도 영화잡지 『스크린』도 나이가 15세가 넘었다. 영평상 나이도 21세가 되었고, 틴 에이지 에서 청년으로 탈바꿈한 영화들도 나이가 들었고, 청년 영화학도들이 점령해 버린 영화계는 급속도로 젊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영상영화학과가 생기고 ,영화학도들이 교수가 되었고, 어린 감독이 제작자가 되어있다. 그 오솔길에서 앞에서 제기된 몇 가지 문제들 중에서 영화발전을 위한 알맞은 명제들을 찿을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는 40대들의 공간이었다. 이제 새로운 40대들이 채색할 2000년대는 장밋빛이 아닌 고색창연한 鼓動이나 브라운이 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영화노트(영화일반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현목 감독의 '말미잘'  (0) 2009.08.10
신상옥 감독론  (0) 2009.08.10
신상옥론(1부)  (0) 2009.08.09
90년대 한국영화자본의 흐름   (0) 2009.07.27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  (0) 2009.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