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관객의 감정에 양보를 보이면 영화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De Sica가 그들에게 이러한 만족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이는 드라마의 논리적인 면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런 경험은 부자간의 관계에 있어서 사춘기와 같은 확실한 단계를 시작한다. 그때까지는 그 사람은 자기 아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의 관계는 존경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런 행동을 함으로서 아버지는 그들을 화해시킨다. 그들이 팔을 흔들며 같이 걸어가면서 흘리는 눈물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슬픔을 상징한다. 하지만 아들은, 타락한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그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간으로서 사랑할 것이다. 그가 쥐어주는 순은 용서의 징표도 아니요 위안의 유치한 행동도 아니다. 오히려 숭고한 동작이 부자간의 관계를 표시해주고 그들을 동급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영화 속의 소년의 여러가지 이차적 기능 (이야기 구조에 대한 기능과, mise en scene에 대한 기능)들을 열거하자면 너무나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적더도 (거의 음악적인 의미로) 그가 영화 중간에 등장할 때, 어조의 변화에는 신경써야한다. 우리가 소년과 일꾼 사이를 천천히 왕복하면서 사회 경제적인 수준에서 사적인 면까지 보게 되고, 소년을 익사시킴으로서 가정된 죽음은, 아버지로 하여금 그의 불운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극적인 오아시스(레스토랑 장면)를 이야기 중심에서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이 가까운 관계가 소중한 자전거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로써 소년은 극적인 준비를 마련하고, 그것이 보완적인 사물이 되거나 반대로 음악적인 구조로 간다.
나아가서 이야기에서의 이 기능은 아이와 어른의 걸음의 편성에 뚜렷히 나타난다. De Sica는 소년을 택하기에 앞서서 그에게 연기를 하지 말라고 했고 단지 걷기만 하라고 했다. 그는 어른의 넓은 걸음과 아이의 좁은 종종걸음을 대조하여 일치하지 않는 화음을 영화를 이해하는데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다. Ladri di Biciclette가 부자의 로마 산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걷든 - 귀싸대기를 맞아서 뚱해져있을 땐 그는 복수의 행위로 뒤에서 쳐져 있지만 - 그는 행동하는 데에서 고의가 없다. 반대로, 극본의 현상학이다.
일꾼과 그의 아들을 성곡적으로 짝지운 후에 De Sica가 인정된 배우들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전문적인 배우들이 없다는 것은 극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자전거 도둑]은 앞의 작품들보다 앞서간다. 여기서 부턴 배우들의 극적인 순수성은 실력, 운, 또는 주제, 시대, 인물의 좋은 궁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민족적인 배우에 중요도가 많이 실리지 않았나 싶다. 이탈리아인들이, 러시아인들처럼, 가장 극적인 민족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무 길거리의 개구쟁이가 Jackie Coogan과 똑같이 위급받고 인생은 commedia dell' arte다. 그렇지만 필자에겐 이런 연기라는 것이 Milanese, Nespolitan, Po의 소작인들이나 Sicily의 어부들에게 똑같이 배분된다고 보이진 않는다. 인종을 떠나서, 역사, 언어,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의 이점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배우적 성격에 이의를 제기한다. Paisa', Ladri di Biciclette, La Terra Trema, 그리고 심지어 Il Cielo sulla Palude 처럼 서로 다른 영화들이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연기력을 가진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시의 이탈리아인이 자연스런 연극조의 행동의 특기가 있다는 것을 믿을만 하지만, Farrebique의 농민들과 비교하면 Cielo sulla Palude의 소작인들은 원시인에 가깝다. Rouquier가 소작인들을 대사 중간에 웃는 걸 막을 수 없어서, Farrebique의 대사의 반은 무대 밖세어 녹음 되었다.
Cielo sulla Palude의 Genina와 La Terra Trema의 Visconti는 많은 소작농들과 어부들을 다루며 그들에게 어려운 역할도 주고 미국 스튜디오 처럼 카메라를 얼굴에 집중시킨 상태로 긴 대본을 외울 수 있게하였다. 이런 일시적인 배우들이 잘한다는 말은 조신스러운 표현이다. 이런 영화에는 배우, 연기, 성격이라는 관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배우가 없는 영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런 공식의 원래 의미는 오래된 것이고, 우리는 배우, 연기, 성격이 상관없는 현대 영화를 거론해야 한다.
Ladri di Biciclette에서 그리 많이 주제를 벗어난게 아니다. De Sica는 출연진을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며 특정 성격들을 발굴하였다. 고귀한 신분, 순수한 표정 등등... 그는 이 사람 저사람을 찾으며 수 달을 끌었고, 100여 번의 시험을 치루었지만 끝끝내 골목길에 그림자만 보고 선택한 직관을 발회해버렸다. 그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하면 큰 오산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결정짓는 것은 일꾼과 아이의 독특한 우수성이 아니라 그들에게 맞춰진 기획이다.
De Sica가 자기 영화를 지원해 줄 사람을 찾다가 드디어 찾았으나, 일꾼의 역할을 Gary Grant가 해주는 조건하에서 받았다. 이런 점이 이상하다. 실제로 Gary Grant는 이러한 역할을 잘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은 누가 하느냐가 아니라 이런 행동 자체의 개념이다. 일꾼은 자기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익명이고 객관적이어야 했다.
배우의 관점은 나머지와 다른게 없다. 일꾼의 연기는 심신의 매력과 양을 암시한다. Tabu', Thunder over Mexico, Mother와 같이 배우가 아예 없거나 일부 없는 Hitherto 영화들은 상당히 독창적이거나 한 장르에 국한된 영화로 성공했다. 완전한 사려 없이는 Ladri di Biciclette과 같은 영화가 50개씩 만들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문 배우들의 공백은 주제 제한과 절대로 관계 없는 점을 알 수 있다. 무명의 작품이 드디어 자신만의 미적 존재를 확립한 것이다. 어쩌면 미래의 영화들은 배우가 없을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배우인 De Sica는 이것을 부정하겠지만. 이것은 단지 특정 형식으로 다루어진 주제들은 더이상 전문 배우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이탈리아 영화계는 이런 조건들을 강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우의 개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라짐과 함께, 무대의 삭제도 동반된다. 일단은, 서로를 이해해보자. De Sica의 작품은 준비하는데 오래 걸렸고, 모든 것이 자세히 줌비되었으나, 나는 채플린 작품처럼 정격으로 드라마틱 효과를 본 장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장면의 나열과 호명은 Ladri di Biciclette은 다른 작품으로부터 크게 구분시키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스타일을 최소화하면서 투명성을 최대화하는데 된 것이다.
이런 객관성은 Paisa'의 Rossellini의 그것과는 사뭇 틀리지만 미적인 분류로는 같은 데에 속한다. Gide와 Marin du Garde가 공상적인 산문을 비판했듯이 이를 비판할 수 있다 - 가장 중성적인 투명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연기를 초월함의 경과가 배우의 공백으로 나오듯이, mise en scene의 공백도 해설의 진보에 따른 결과다. 사건이 전혀 도움이 필요 없이 완벽할때, 이는 무대가 완벽한 조명상태에 이르렀고 이는 예술이 자연의 가면을 풀어 그를 모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가 관객의 감정에 양보를 보이면 영화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De Sica가 그들에게 이러한 만족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이는 드라마의 논리적인 면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런 경험은 부자간의 관계에 있어서 사춘기와 같은 확실한 단계를 시작한다. 그때까지는 그 사람은 자기 아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의 관계는 존경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런 행동을 함으로서 아버지는 그들을 화해시킨다. 그들이 팔을 흔들며 같이 걸어가면서 흘리는 눈물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슬픔을 상징한다. 하지만 아들은, 타락한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그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간으로서 사랑할 것이다. 그가 쥐어주는 순은 용서의 징표도 아니요 위안의 유치한 행동도 아니다. 오히려 숭고한 동작이 부자간의 관계를 표시해주고 그들을 동급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영화 속의 소년의 여러가지 이차적 기능 (이야기 구조에 대한 기능과, mise en scene에 대한 기능)들을 열거하자면 너무나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적더도 (거의 음악적인 의미로) 그가 영화 중간에 등장할 때, 어조의 변화에는 신경써야한다. 우리가 소년과 일꾼 사이를 천천히 왕복하면서 사회 경제적인 수준에서 사적인 면까지 보게 되고, 소년을 익사시킴으로서 가정된 죽음은, 아버지로 하여금 그의 불운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극적인 오아시스(레스토랑 장면)를 이야기 중심에서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이 가까운 관계가 소중한 자전거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로써 소년은 극적인 준비를 마련하고, 그것이 보완적인 사물이 되거나 반대로 음악적인 구조로 간다. 나아가서 이야기에서의 이 기능은 아이와 어른의 걸음의 편성에 뚜렷히 나타난다. De Sica는 소년을 택하기에 앞서서 그에게 연기를 하지 말라고 했고 단지 걷기만 하라고 했다. 그는 어른의 넓은 걸음과 아이의 좁은 종종걸음을 대조하여 일치하지 않는 화음을 영화를 이해하는데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다. Ladri di Biciclette가 부자의 로마 산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걷든 - 귀싸대기를 맞아서 뚱해져있을 땐 그는 복수의 행위로 뒤에서 쳐져 있지만 - 그는 행동하는 데에서 고의가 없다. 반대로, 극본의 현상학이다.
일꾼과 그의 아들을 성곡적으로 짝지운 후에 De Sica가 인정된 배우들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전문적인 배우들이 없다는 것은 극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자전거 도둑]은 앞의 작품들보다 앞서간다. 여기서 부턴 배우들의 극적인 순수성은 실력, 운, 또는 주제, 시대, 인물의 좋은 궁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민족적인 배우에 중요도가 많이 실리지 않았나 싶다. 이탈리아인들이, 러시아인들처럼, 가장 극적인 민족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무 길거리의 개구쟁이가 Jackie Coogan과 똑같이 위급받고 인생은 commedia dell' arte다. 그렇지만 필자에겐 이런 연기라는 것이 Milanese, Nespolitan, Po의 소작인들이나 Sicily의 어부들에게 똑같이 배분된다고 보이진 않는다. 인종을 떠나서, 역사, 언어,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의 이점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배우적 성격에 이의를 제기한다. Paisa', Ladri di Biciclette, La Terra Trema, 그리고 심지어 Il Cielo sulla Palude 처럼 서로 다른 영화들이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연기력을 가진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시의 이탈리아인이 자연스런 연극조의 행동의 특기가 있다는 것을 믿을만 하지만, Farrebique의 농민들과 비교하면 Cielo sulla Palude의 소작인들은 원시인에 가깝다. Rouquier가 소작인들을 대사 중간에 웃는 걸 막을 수 없어서, Farrebique의 대사의 반은 무대 밖세어 녹음 되었다. Cielo sulla Palude의 Genina와 La Terra Trema의 Visconti는 많은 소작농들과 어부들을 다루며 그들에게 어려운 역할도 주고 미국 스튜디오 처럼 카메라를 얼굴에 집중시킨 상태로 긴 대본을 외울 수 있게하였다. 이런 일시적인 배우들이 잘한다는 말은 조신스러운 표현이다. 이런 영화에는 배우, 연기, 성격이라는 관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배우가 없는 영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런 공식의 원래 의미는 오래된 것이고, 우리는 배우, 연기, 성격이 상관없는 현대 영화를 거론해야 한다.
Ladri di Biciclette에서 그리 많이 주제를 벗어난게 아니다. De Sica는 출연진을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며 특정 성격들을 발굴하였다. 고귀한 신분, 순수한 표정 등등... 그는 이 사람 저사람을 찾으며 수 달을 끌었고, 100여 번의 시험을 치루었지만 끝끝내 골목길에 그림자만 보고 선택한 직관을 발회해버렸다. 그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하면 큰 오산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결정짓는 것은 일꾼과 아이의 독특한 우수성이 아니라 그들에게 맞춰진 기획이다. De Sica가 자기 영화를 지원해 줄 사람을 찾다가 드디어 찾았으나, 일꾼의 역할을 Gary Grant가 해주는 조건하에서 받았다. 이런 점이 이상하다. 실제로 Gary Grant는 이러한 역할을 잘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은 누가 하느냐가 아니라 이런 행동 자체의 개념이다. 일꾼은 자기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익명이고 객관적이어야 했다.
배우의 관점은 나머지와 다른게 없다. 일꾼의 연기는 심신의 매력과 양을 암시한다. Tabu', Thunder over Mexico, Mother와 같이 배우가 아예 없거나 일부 없는 Hitherto 영화들은 상당히 독창적이거나 한 장르에 국한된 영화로 성공했다. 완전한 사려 없이는 Ladri di Biciclette과 같은 영화가 50개씩 만들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문 배우들의 공백은 주제 제한과 절대로 관계 없는 점을 알 수 있다. 무명의 작품이 드디어 자신만의 미적 존재를 확립한 것이다. 어쩌면 미래의 영화들은 배우가 없을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배우인 De Sica는 이것을 부정하겠지만. 이것은 단지 특정 형식으로 다루어진 주제들은 더이상 전문 배우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이탈리아 영화계는 이런 조건들을 강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우의 개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라짐과 함께, 무대의 삭제도 동반된다. 일단은, 서로를 이해해보자. De Sica의 작품은 준비하는데 오래 걸렸고, 모든 것이 자세히 줌비되었으나, 나는 채플린 작품처럼 정격으로 드라마틱 효과를 본 장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장면의 나열과 호명은 Ladri di Biciclette은 다른 작품으로부터 크게 구분시키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스타일을 최소화하면서 투명성을 최대화하는데 된 것이다.
이런 객관성은 Paisa'의 Rossellini의 그것과는 사뭇 틀리지만 미적인 분류로는 같은 데에 속한다. Gide와 Marin du Garde가 공상적인 산문을 비판했듯이 이를 비판할 수 있다 - 가장 중성적인 투명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연기를 초월함의 경과가 배우의 공백으로 나오듯이, mise en scene의 공백도 해설의 진보에 따른 결과다. 사건이 전혀 도움이 필요 없이 완벽할때, 이는 무대가 완벽한 조명상태에 이르렀고 이는 예술이 자연의 가면을 풀어 그를 모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Ladri di Biciclette의 인상이 그렇게 진실되다.
만약 이 극한 자연스러움이, 즉 시간이 흐르면서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흐름이, 안보이는 미의 시스템이라면, 이는 분명히 시나리오의 구상 덕분이다. 배우의 공백, mise en scene의 공백? 확실히 Ladri di Biciclette의 원리는 스토리의 공백이기 때문이다.
좀 애매한 개념이다. 당연히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것이 또한 De Sica가 자신을 뒷받혀줄 지원자를 못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Roger Leenhardt가 수년전에 예언자적 평에서 "만약 영화가 스펙타클이라면"이라고 했을 때 그는 드라마틱한 영화와 소설같은 영화 구조를 대조하고 있었다. 전자가 극에서 숨은 원동력을 얻는다.
소설 이론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 비록 거론할 만한 것이지만 - 소설의 해설자적 형식 또는 거기에서 이끌어지는 형식이 여러 모로 다르다고 하자. 극에 해당되는 접속사는 "그러므로"이고, 소설에는 "그리고"가 해당된다. 이런 다소 애매모호한 정의는 머릿속의 두가지 다른 생각을 형상화하는 에서 상당히 정확하다. 프루스트는 우릴 마델라인에서 잃을 수 있으나, 극작가는 우리의 호기심을 계속 잡아놓고 있지 않으면 실패한다. 그래서 소설은 한번 내려놓아도 또 나중에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연극은 조각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펙타클의 완전한 통일성은 필수적이다. 나아가서 스펙타클의 물리적 조건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스펙타클의 정신적 법칙을 벗어날 수 없지만, 소설의 모든 자원을 포함시키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런 까닭에 영화는 선천적으로 잡종이다. 모순을 숨기고 있다. 더군다나, 영화의 진보는 소설같은 잠재력을 향하고 있다. 영상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스크린이 어떤 점에서 발전하고 극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면, 특정 영상적 가치도 필요하다. 첫째가 배우의 실제 등장이다. 이에 반해서, 소설은 최소한 영상물에 정복당할 일이 없다. 영화를, 나약하고 잠정적인 글의 초소설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말한 것이, 현재의 영상 스펙타클의 조건에서 얼마나 보일까? 영화가 요구하는, 극적이고 볼만한 필요성을 빠뜨릴 수가 없다. 최종적으로 결정할 사항은 바로 모순의 해결이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영화는 스펙타큘러의 명령을 거역할 정도로 첫번째로 용감한 계다. La Terra Trema와 Cielo sulla Palude는 "액션"이 없는 영화들이다. 영화 속의 사건들이 하나하나 연달아 일어나는데 각각 비중이 똑같다. 어떤 것들은 조금 중요도를 가지고 있으나, 단지 회상이다. 우리는 "그러므로"나 "그리고" 중 아무것이나 사용해도 된다. 특히 La Terra Trema는 상업적인 실패작으로, 삭제 없이 개발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De Sica와 Zarattini의 장점이다. 그들의 Ladri di Biciclette은 비극으로 탄탄히 뭉쳐져 있다. 극한 드라마틱 힘으로 충전되지 않은 프레임이 없으나, 드라마틱 계속성을 떠나서 재미있다고 느끼는 부분 없다.
영화는 완전한 사고의 수준에서 펼쳐진다. 비, 신학교 학생들, 가톨릭 퀘이커 교도들, 레스토랑 - 겉보기론 교체가 서로 가능하게 보이고, 아무도 이들을 극적인 순서로 배열하지 않았다. 도둑들의 아지트에서의 씬은 의미가 있다. 일꾼이 막 쫒아간 사람이 실제로 자전거 도둑인지 모른다,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액션"으로서 이 에피소드는 소설같은 가치가 없었다면 무의미했을 것이다.
Vittorio De Sica의 싸이클에 대한 관점
Salvatore Quasimodo가 저녁과 하루의 마무리를 축복하는 행위는 해질녁에 주 분위기가 사는 이탈리아 운문의 어둑어둑한 집다, "a crepuscolari"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단테나 앞선 시인들과는 달리 현대 시인들은 모든 것의 끝에 매혹되었다. 이런 시인들은 하루의 끝인 저녁에 대해, 일주의 끝인 일요일에 대해, 한해의 죽음인 가을에 대해 썼다. 그렇지만 죽음이나 끝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절대로 비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탈리아의 낙관주의의 한 형태로 표혔했다. - 끝마침이나 죽음 뒤에는 새로운 시작과 탄생이 뒤따른다. 그들은 Inferno의 밤이 지면 Paradiso의 새 태양이 떠오르고, 분해와 퇴보 이후엔 새로움과 부활이 있다고 믿었다. 전쟁으로 인한 파과 속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재건설을 바라보았다. 자연의 순리에 바탕을 둔 이 관점이야말로 Vittoria De Sica와 Federico Fellini 같은 이탈리아 신현실주의자들로부터 전후 영화에 표출되었다.
이런 "황혼" 분위기를 비관적이라고 보는 것은 외국의 다른 관점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같은 이유로, 이탈리아의 현실주의는 낭만과 시에 바탕을 둔다.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의 사실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De Sica의 [자전거 도둑]과 같은 영화를 낙관적, 시적 현실주의라고 보는 것이 제일 정확할 것이다. [자전거 도둑]의 구조는 그 긍정적인 주제를 드러낸다. 사람은 늘 견딘다. 브루노와 그의 아버지는 새 새벽으로 이어지는 황혼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구조가 주말 3일로 구성된 것이 사실적이다. 맑은 금요일에 시작하여 일요일 저녁때 끝난다. 이런 기본적인 현실주의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것이 표면 아래 깔린 시다 : 황혼은 새 날을 낳고, 일요일은 새 주를 만들어낸다.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De Sica의 미적 구조는 깔끔하게 3부로 나뉘어져 있고 이는 Dante의 Cammedia에 의존한 이탈리아 기술자라면 완벽하다고 한다. 사투리 리듬을 허락하고 미래, 진보, 나아가는 낙관주의를 표현한다. 대조의 혼합, 시작과 끝의 합성 등등을 허락한다. "황혼"이 주제이고, "새벽"이 그것과 대조를 이루며, "새 날"이 이들의 합성이다. 그리고 변증법으로 보면 며칠, 몇주, 몇달, 몇 계절, 그리고 몇년으로 이어진다.
순환이 De Sica의 영화에서 큰 움직임을 형성한다. 자전거, 자연의 리듬, 인생의 순환을 보면 알 수 있다. Ricci가 "모든 것은 잘 풀린다, 죽음을 빼고"라고 말하면서 De Sica의 순환 논리를 제시한다. 이 문장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자전거 도둑]의 극한 상황, 즉 처음과 끝을 돌아보아야한다.
영화는 Ricci가 공무 사무소에서 일자리를 찾는 어느 금요일 아침에 시작된다. 그는 자전거가 있다면 일을 할 수 있다. 딱 들어 맞는 공식이다. Ricci는 일자리를 위해 자전거가 필요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자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딱 맞게 되는 것이 아니다. Ricci의 자전거가 도둑맞자, 자전거는 극한 중요성을 가지고, 영화는 잃어버린 재산을 찾기위한 부자의 여행이 된다. 그들은 경찰서, 공무 사무소, 시장, 성당, 주방, 점쟁이네 집, 길거리, 축구장 등과 같은 실제 상황을 돌아다닌다.
De Sica에겐, 이런 현실주의는 단지 출발점이다. 이탈리아 시인들처럼, 이 신현실주의적 작가는 사실을 시의 형태로 옮긴다. 사실은 초현실을 불러내고, 비밀이라는 것이 물질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De Sica는 상징 따위는 필요치 않는다. 그의 카메라로 관찰하고 드러나는 실제의 비밀을 이용한다.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Ricci의 자전거는 그의 모든 욕구와 중요도가 같아진다. 자전거는 유명 상표 "Fides"인데, 이는 "Faith (믿음)"으로 해석된다. 자전거를 되찾으려는 그들의 여정에서, 한 늙은이가 "Circe"라는 토마토 캔을 들고 그들을 방해한다. Ricci의 성은 그 원래 뜻 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부를 뜻한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De Sica의 카메라는 전당포에서 수많은 아마포와 암시장에서의 수많은 자전거를 보여주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여러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합한다.
De Sica의 영화 끝에 가서는 큰 순환은 다 돌게 된다. Ricci는 처음과 같이 직장 없는 상태이다. 자전거를 되찾기 위해 저당잡힌 시트들도 또한 잃게 된다. 결론적으로 가족은 생계수단이 없게 된다. 그래도 가족은 함께있다. 일요일 저녁에 Ricci와 브루노는 함께 걷는다. 가족은 유일한 물질적 부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주기적인 관점으론 퇴보는 부활로 이어진다. De Sica의 카메라를 통하여 무너진 것이 다시 세워짐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햋빛은 소나기에 물러서지만, 소나기도 역시 햋빛에 물러선다. 일요일 밤이 지나면 월요일 아침과 새 주가 시작된다. 한 경험의 마무리는 또 하나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은 잘 풀린다, 죽음을 빼고." 오직 죽음만 생명의 순환을 끊는다.
De Sica는 예언자 Signora Santona를 통해 순환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La Santona는 짧은 경구로 "잎새가 지기 전에 아들은 침대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가을에 아들은 나을 것이다." 그녀는 마리아에게 리키가 직장을 구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리키의 지혜는 그에게 인생을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풀린다고 말해준다. 그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자녀가 둘이 있고 어깨에 성한 머리가 있는 여자가 이런 어리석음, 이런 거짓말에 넘어가다니... 이 마녀들이 사람들의 인생을 조종하는 것이란 말인가... 바보같다." 하지만, 결국에 순전한 자포자기에서, 자전거를 찾기 위해 점쟁이에게 도움을 청한다. 또다시 La Santona는 보편성을 언급한다. "너의 자전거라... 너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주어야하니, 아들아? 내가 말하는 것은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말할 뿐이니라... 들어라... 너는 바로 찾거나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이야... 알겠나?" 어떻게 보면 리키는 일자리를 구한 셈이지만, La Santona의 예언은 그가 틀림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자리에 필요한 자전거를 찾아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직장이 없다. 인생의 순리는 외부에서 간섭받을 수 없다 : "모든 것은 스스로 잘 풀린다."
De Sica 영화의 아버지와 아들 모티프도 또한 주기적으로 발전했다. 처음엔 브루노는 아버지에게 믿음을 가진다. 하지만 리키가 도둑을 잡을 수 있는 열쇠인 사람을 놓치자, 브루노는 아버지의 방법을 비판한다. 리키는 브루노를 때리고, 연결을 일시적으로 끊는다. 그리고선, 물에 빠진 소년이 브루노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고, 아들에게 저녁을 사준다. 카페에서 부자관계가 다시 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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